아직 리그력 25년의 해가 지나기전까지, 엘리스는 자운시의 시민들에게 마녀사냥의 대상으로 완전히 찍힌채 살아갔다. 마녀사냥의 의미가 아닌, 진짜 단어그대로의 마녀사냥이기에, 설령 거미교와 전혀 관계없는 자운시민조차도 그녀를 목격하면 지나가다가 때리거나 총격을 가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엘리스는 이 공격들을 모두 맞아주고 다니면서 자신을 혹사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끼는 죄질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마오카이의 희생으로 얻은 목숨마저 버리고싶진 않았기에.


 다만 머리나 목, 심장같이 맞으면 바로 빈사 혹은 즉사에 빠질법한 공격은 목숨을 걸고 도망쳤고, 잠은 언제나 인근이 드문 구석진 거리에서 잤다. 자고있을 때 맞아죽는걸 극도로 무서워하기에 내린 결정이지만, 정작 자고 일어나보니 다른 곳에서 눈이 떠져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전날보다 몇 배로 몸이 쑤셨고, 무언가에 적셔진 채 더러워져있었다. 오랜 구타와 충격에 너덜너덜해진 챔피언 복장이 어느 순간에는 아예 없어진 채 나체로 깨어나는 해괴망측한 일도 더러 있었다. 마력활용을 숙달한 그녀는 마력만으로 자신의 챔피언 복장을 재생성했지만, 그런 일을 당하는 것 자체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엘리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값을 치루고싶어했으나, 죽음을 피하려는 지극히 당연한 생존욕구를 따르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편해질까, 루시안..."
 새끼거미들의 식사가 엘리스에게도 영양분과 포만감을 채워줬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이렇게 자신을 혹사시키면서도 살 수 있음에도 그녀는 더이상 이런 활동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만 부풀어가기만했다.



 따뜻한 공간에 푹신푹신한 물체를 몸에 두른채 깨어난 엘리스는 방의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이 깨기만을 기다리듯 앉아있는 카사딘에서 동작을 그쳤다.

"정신이 드나."
"여긴 어디야?"
"필트오버의 호텔이다. 그동안 지내온 네 취향을 고려해서 골랐는데, 어떤가."

"...친절하네."

 잠결에 깬 엘리스의 눈은 카사딘을 똑바로 쳐다보지못했다. 낯선 공간에 카사딘하고 둘이서 있기에는 너무나도 떨렸다. 한동안 자운에서 홀로 생활했기에 밑도끝도없이 느꼈던 고독함에 사로잡히기 직전에 나타난 상대는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였다. 이제는 숨길 수도 없다.

 카사딘은 그런 엘리스의 변화를 신경쓰고있는지 마주침을 피하려는 그녀의 움직임조차도 놓치지않고 보았다. 투구 속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고정된 몸만큼은 그의 의지가 가득차있는지 힘이 들어가있다.

"저녁, 먹지그러나? 음식은 방 밖에 있는데."

 새끼거미의 포식덕분에 인간으로서의 식생활을 하지않아도 되지만, 엘리스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몇 개월을 같이 지내봤지만, 이렇게 얘기를 가져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대가 먼저 이런 시간을 갖자고 말을 걸었으니, 좋은 기회라.
 


 엘리스의 눈앞에 펼쳐진 저녁식탁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양을 자랑했다. 닭고기, 샌드위치, 핫도그, 피자, 샐러드, 수프, 그리고 쌀밥... 가장자리에는 위태롭게 놓여있는 양주와 유리잔도 나름의 위엄을 뽐냈다.

"제아무리 죄질이 나쁜 마녀라고해도, 크리스마스 연휴엔 봐줘도 되겠지. 옛날에도 크리스마스땐 전쟁도 멈추고 적군들과 같이 즐거운 날을 보냈다고 하잖나?"

"그럼 아직도 날 적으로 보고있단 소리네?"
 엘리스의 말을 들은 카사딘은 한 뜸을 들인 채 투구를 자기 얼굴마냥 긁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아니지. 너는 날 어떻게 보고있는건가?"
 엘리스는 '피식'하면서 한쪽 입가를 위로 씰룩거렸다. 카사딘의 물음에 답하진 않았지만, 카사딘은 그런 태도마저도 만족한듯이 어깨를 으쓱이고선 의자에 앉았다. 여기가 어느 공간인지는 몰라도, 방안에서 둘만이 식사를하기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사가지고온 카사딘의 모습을 상상하니, 고맙기도하고, 동시에... 사랑스럽기도했다.



 둘은 지난 3개월동안 아이오니아에서 같이 머물렀던 일들에 대한 추억들을 희화시킨 채 담화를 나누었다. 카사딘은 어쩔 수 없이 엘리스가 힘들어했던 지난날에 대해 얘기를 하는 처지라 조심하기도 했지만 정작 자신의 말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를보고 안심했다.

  카사딘은 식사를 할때만큼은 투구에 연결된 산소호흡기를 뗀 채 투구속 공간으로 음식을 집어넣으면서 식사를 했는데, 해로윙 때 파괴된 산소호흡기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졌던 것은 자연호흡상태에서 격한 행동을 계속했기에 초래된 결과라고 한다 평소에도 식사시간만큼은 산소호흡기를 떼고있어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도 그녀를 믿고 편에 서준 리신과 카르마가 아이오니아 내에서 사회적 지위가 실추되었다는 소식도 전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히게도 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너밖에 없는거야?"
 자신을 도와줌으로 인해 여러 챔피언의 희생이 일어났다. 사실상 여정은 끝난 셈이고,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주거나 옆에 있어줄 챔피언은 카사딘밖에 없었다.


'나는!!! 네가!!! 싫지 않아!!! ... 나는 네가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너는 충분히 잘해왔어. 리신의 수련도, 심지어 내 독설에 의한 피드백도 받아들였어! 조금은 네가 이뤄온 것들에 자부심을 느껴도 괜찮잖아!'

 당시 썩은 아귀의 조종에의해 몸 속 어딘가에 갇힌 채 상황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엘리스는, 썩은 아귀마저도 그의 말에 진심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동안 거칠게 대해왔던 사람이, 마오카이나 리신만큼 자신을 좋게 생각하고있었으며, 몸을 바쳐서까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원했다. 마음이 담긴 말을 들은 엘리스는 더이상 썩은 아귀의 조종이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썩은 아귀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변환할 정도의 힘을 발휘했다. 자신이 싫어했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감정변화가, 전에 없던 강력한 힘을 내뿜었다. 과연 그레고리의 말대로 감정은 중요했고, 하나의 강력한 동기였다.

 이 이후로 그녀는 카사딘을 전과같이 생각할 수 없었다. 남자이면서 치마를 입고있음에도, 생기가 죽어버린듯한 푸른색 피부를 지녔음에도, 투구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그 자체로도 가슴이 떨려왔다.



 카사딘또한 엘리스를 이성으로 생각하고있었다.

 사실 그가 엘리스를 마음에 들어했던 순간은 훨씬 오래전이었는데, 그 시기는 바로 그녀의 나체를 실수로 보게된 때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매에 눈이 돌아갔지만, 카사딘의 얼굴은 투구에 가려졌기에 엘리스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엘리스의 색기는 자신이 절재해왔던 성욕을 최대치까지 끌어들였으며, 충동적으로 카사딘은 그녀의 지난 날의 행적을 잊고 진심으로 껴안고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여자로 봐달라는 엘리스의 발언이 거꾸로 지난 날의 그녀가 저지른 살인행위를 강하게 떠올리면서 자신은 나체상태의 엘리스를 보고서도 분개할 수 있었고, 그녀에게 일갈할 수 있었다. 그 말 한마디가 엘리스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음에도, 카사딘은 순간 그녀의 미모에 혹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반응을 숨겨준 사실에 고마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진지하게 생각했고, 막막한 현실에 처할지라도 꿈을 꾸는듯한 비전이 마음에 들었고, 자신을 생각해주는듯한 태도는 이미 그림자 군도에서부터 꾸준히 지켜봐왔다.

'이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마주해도 될까. 이 여자를.'

 두 사람간의 관계는 이미 동료나 아군을 넘어섰고, 친구의 정보다는 훨씬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는 단계였다.



"하아암... 시간도 많이 지났고, 이제 자야겠어."
"여기서 또 하룻밤의 신세를 지겠다는건가?"
"그래 카사딘. 네 신세를 좀 져야겠는데? 내가 온몸에 힘이 하나도없어서 그런데 나 좀 아까 그 방에 옮겨줄래?"
"네 발로 가라 엘리스. ...두 손 두 발로 기어가든가 아니면 네 어깨와 허리 뒤에 있는 4개의 거미다리로도 갈 수있는지 시험해보든가."
"제~발~"
 ...귀찮다는건지 관심을 요구하는건지 알 수 없는 엘리스의 아양을 본 카사딘은 '안되겠어. 더이상 저 모습을 보다가는 넘어가겠군.' 하는 심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엘리스는 새벽에 안겼던 그 자세로 옮기기에는 부끄럽다면서, 업어줘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으며, '안아주면서 데려달라고 말할줄 알았는데'하면서 내심 아쉬워하던 카사딘이 엘리스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크윽!"
 그의 몸이 거미줄에 꽁꽁 묵인 채 바닥에 엎어졌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힘이 하나도없다던 엘리스는 두 손으로 카사딘의 몸뚱아리를 든 채 자신이 누워있던 방의 침대위로 휙 던져놓은채 거미 형태로 모습을 바꿔서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뭐하는거야 엘리스. 이 거미줄은 대체...!"
"...탐나는군 이 남자!"
 거미 모양의 엘리스는 자신의 독이빨을 그의 안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카사딘이 쓰고있던 투구의 안쪽에 독이빨이 불쑥 튀어나왔고, 이리저리  비틀어대는 굵은 이빨때문에 투구는 완전히 산산조각나고말았다. 어두운 방안이지만, 카사딘은 투구를 쓰지 않은 민낯상태였다.

 '아뿔싸'하는 심정으로 눈을 꽉 감은 카사딘. 그러나 일순간 그의 피부 한곳에 부드러운 감촉이 포개지듯 접했다. 그 부위는 입술... 그리고 그 입술과 포개진 것은 다른 사람의 입술이었다.

"에... 에ㄹ...리스?"


 자신의 투구를 박살내는 기행을벌여놓고 그녀가 벌인 돌발행위는 진한 입맞춤이었다. 처음에는 이 상황을 피하려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고치에 빙빙 묶인 채 고정된 자신의 몸뚱아리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선뜻 용기내서 시도한 입맞춤의 영광을 오래동안 느끼고싶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부동자세로 엘리스와의 키스를 가능한한 길게 유지했다.

 엘리스는 거미 형태로 변해서 카사딘의 투구를 부서뜨리고 그의 맨 얼굴을 드러낸 뒤에 입을 맞췄다. 울퉁불퉁한 피부의 촉감이 신경쓰였지만 그녀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얼굴'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눈을 감은 채 정적인 순간을 길게 유지했다. 그의 몸 위에 엎드린 상태로, 입술만을 포갠 채.

"카사딘."
 엘리스는 키스를 끝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 너밖에 없어. 내 곁에 있어줘..."
 엘리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던 카사딘은 소리없지만 크게 놀란채 어떤 생각을 했다.

'마오카이는 죽었고, 리신과 카르마는 아이오니아에 직접 찾아갈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자운에서 자신을 자해하듯 박해당하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느껴왔던 '고독'을 해결하려는걸까...'

 물론 이렇게 말하는 카사딘 본인도 적지않게 고독함을 맛본 남자다. 공허의 힘을 강제적으로 받아들이고, 말자하에의해 딸이 공허세계로 보내진 이후 가정은 완전히 파탄되었고, 끝내는 아내와 이혼한채 독신의 몸으로 살아가고있었다. 그 이후로 사랑이란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그가 의외의 여자에게서 그 감정을 품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느끼는 고독감을 메꾸려고한다. 바로 코 앞의 상대와 함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카사딘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엘리스의 거미줄을 끊어버리고 그녀의 등을 으스러지도록 확 껴안았다. 당황하면서도 내심 이런 반응을 원했는지, 엘리스가 낸 비명엔 신음소리도 섞여있었다.

"이 심장박동이 느껴지나, 엘리스?"
 카사딘은 아직 실루엣밖에 보이지않는 엘리스의 얼굴을 직시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는 몸을 밀착시켜 미친듯이 뛰고있는 심작박동을 전하려했으나 엘리스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나도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네가 고독함은, 나도 느낄 수 있고."
 카사딘의 말을 들은 엘리스의 입은 조금씩 벌어졌다.

"네가 생각했던 것 또한 나와 똑같다. 그러니, 안심해라 엘리스. 나는 네 편이니까. 너의 옆이 아닌, 너의 앞에,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이니까."

 엘리스의 얼굴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감격에 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 뒤, 곧이어 카사딘과 떨어져있던 엘리스의 온몸이 그의 몸위에 달라붙으면서 그를 힘껏 껴안았다. 다시 접한 입맞춤은 방금 전보다도 훨씬 더 대담했고 강렬했다.



 엘리스와 카사딘은 서로의 몸을 힘껏 껴안으면서 키스를 계속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었으며, 이런 순간만을 기다려온듯 하나로 뭉친 두 몸뚱아리는 쉴새없이 좌우로 뒹굴었다.

'... 느껴진다.'

'...느껴져.'

 엘리스와 카사딘은 서로의 감각을 느꼈다. 서로의 가슴에서 격한 떨림이, 그리고 고양된 심작박동이. 그러나 그 박동은 지금 둘 사이의 관계만큼 크고 생동감있게 전해지지않았다. 엘리스의 손이 카사딘의 어깨에 달린 갑옷과 허리에 두른 치마에 올라갔다. 카사딘은 엘리스의 허리 뒤쪽에 맞물려있는 복장에 손을 올렸다.

 도시의 불빛만이 창문을 통해서 스며들어오는 이 방에서 잠시 몸과 무언가가 비벼지듯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이 둘은 서로의 심작박동을 더욱 크게 느끼고싶었기에, 두 심장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려 하는것이다. 그렇게 둘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복장이 만들어낸 미세한 두께마저도 없앤 0이라는 수치를 기록한 순간, 본격적인 애무가 시작되었다.

곡선으로 이뤄진 여자의 몸매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살결을 누르고 어루만지면서. 날카로우면서 갸름한 윤곽만을 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곁에 남아있길 원하는 사람의 든든한 실물을 놓지 않은 채. 어떤 영화에서 남녀가 행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당시 느끼지 못했던 뜨거운 마음을 표출하면서. 혼란스럽지만 하나의 감각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잃지 않은 채로.

 그날 밤, 두 사람이 있는 방에선 짧은 간격의 숨소리만이 반복되었다.

<계속>


<글쓴이의 말>


문제가 될 시에는 과감히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