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돌덩어리가 서로 마찰하는 소리가 회상으로부터 진을 현실로 돌아오게했다. 지하감옥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였다. 문 틈으로 달빛이 새어들어와 진의 옆모습을 옅게 비추었다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수 있었다. 시야가 적응되고 어두운 복도에서 거대한 문지기와 함께 그 뒤로 은색 정수리를 보인채로 제드가 따라 들어오고있었다. 진은 모로 누운 몸을 천장을 향해 가볍게 틀고는 기지개를 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회상 속의 소년의 마지막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죽음과 동시에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그 모습은 진이 그리고자 했던 완벽한 이상적인 모습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죽음을 택할 줄이야. 진은 그 모습이 지옥에서 도망쳐나온 복수의 화신같다고 생각했다. 광장에서 노래 부르던 소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서 진은 그를 다시 재구성하고 싶을 정도로 애착을 느꼈다. 녹서스에선 정말 죽은 병사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었다는 소문도 떠돌던데... 하지만 언데드가 된 소년의 모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거무스름한 살가죽들을 다시 이어 붙이고 고장난 장난감처럼 삐걱거리며 걷는 모습이라던가. 눈동자는 분명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빛바랜 사진처럼 흐리멍텅한 모습은 진이 원하던게 아니였다.

  진은 조용히 군중속에 스며들어 지켜보았다. 그 소년이 지키고자 했던 가짜 세계와 함께 재가 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쇼가 다 끝나기 전에 그는 미련없이 뒤돌아 떠났다. 그 뒤로 범인을 잡기위해 수색대가 나섰겠지만 그때쯤엔 이미 마을을 유유히 벗어난지 오래였다. 


  입술을 혀로 쓸자 이번엔 달콤함보단 씁슬한 맛이 강해서 손등으로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광기가 전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어느때보다 이성적인 상태가 되었다. 모든 감각이 최상으로 돌아온 진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천장의 격자무늬 사이사이에 작은 구멍에 시선이 멈췄다. 진은 무언가를 발견하곤 감탄사를 내뱉었다. 알고보니 뾰족하고 얇은 가시가 촘촘하게 튀어나와있는 눈속임용 무늬였던 것이다.

"..쓸데없이 섬세하잖아.."


 진은 아직 멀리서 다가오는 병사의 실루엣을 의식하며 답답한 폐속에 신선한 공기를 콧속으로 빨아들였다. 눅눅한 흙과 오래된 곰팡이 냄새, 그을린 촛농등의 냄새가 뒤섞여 후각을 간지럽혔다. 그 중 희미한 장미 향이 어울리지않게

 섞여있었다. 진은 고개를 비스듬이 기울이다가 갑자기 어떤 장면이 눈꺼풀 밑으로 섬광처럼 떠올랐다. 긴 흑발과 쪽빛눈을 가진 앳된 여자아이. 가끔씩 진의 무의식적인 공간에 튀어나오는 인물 중에 하나지만 그 소녀에 대한 기억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 만들어낸 인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봤지만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기억과 감각들은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선명했다.

  진은 그 기억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것인지도 모른 채로 무능력하게 지켜보는 것에 진저리난지 오래지만 고민 끝에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은 방법이란 걸 알게됐다.


 



 그 기억은 그 소녀와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함께 바깥을 훔쳐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바깥도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바닥엔 큰 무늬가 그려져있고 그 가운데 누군가 누워있었다. 그 주변엔 빨간 로브를 입은 무언가가 일정한 톤으로 주문같은 걸 외우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분위기가 으스스해 보였다. 


 붉은 로브를 입은 사람 중 한명이 자신이 있는 쪽을 쳐다보는 것 같으면 다시 안쪽으로 바짝 몸을 끌어당겼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고 땀이 셔츠에 젖어오는 것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좁은 공간이라 더워서 그런건가 싶었지만 추위에 떨듯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당장이라도 터트리고 싶지만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있는 소녀의 존재가 모든 것을 통제하 듯 있었다. 마치 그 소녀에겐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소녀가 굳게 다물고 있던 붉은 입술을 떼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뭐라는진 대강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우린, 원하는 바가 서로 다르니까. 이래야만 해. 

소녀의 모습이 빗물에 적신 창문처럼 뿌얘보였다. 고개를 아래로 천천히 가로젓는데 소녀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두 손이 자신의 얼굴을 잡아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불에 타버린 재 냄새와 장미향이 섞인 특이한 향이 풍겨졌다. 눈동자를 맞추자 소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속엔 칼날같은 서늘한 빛이 서렸다.

 분노는 터트리는게 아니야, 집중시켜야지.

 그때였다. 공간사이로 커다란 손이 나타났고, 순식간에 소녀는 바깥으로 무지막지하게 끌려나갔다. 눈 깜짝할 혼자남겨진 공간속에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바깥에선 유리 조각이 부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소리에 바깥을 살펴보니 소녀는 거대한 체구의 존재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주변에 있었던 빨간 로브를 입은 자들과 누워있던 인물은 모두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밖으로 급하게 나오려는데 누군가에게 얼굴을 부딪혔다. 위로 올려보려는 순간 시야가 암흑속으로 잠기며 소녀가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끼기기긱-


 열쇠가 이음새에 들어맞는 소리가 나면서 얇은 철창이 열렸다. 제드는 이중으로 된 감옥의 바깥쪽에 서서 문지기가 열어놓은 네모난 문을 통과했다. 제드는 자신이 충분히 185cm의 장신의 소유자임에도 거구의 문지기옆에 있을때마다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요들족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섬세한 동작으로 소리없이 들어오고 나자 병사가 뒤에서 떠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제드는 어깨너머로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지기가 완전히 감옥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철창 너머로 고문에 시달려 날이 갈수록 야위어지는 진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지만 눈꼽 만큼의 동정심이라도 생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은 항상 누구든 안중에도 없듯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 자체만으로도 제드는 언제나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장미 향이라.." 진은 낱말 맞추기라도 하는 듯 혼자 중얼거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드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진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 하면서, 비 때문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약속한 걸 지키러 왔다. 금빛 악마. " 


 제드의 말에 진이 고개를 돌리자 긴 앞머리가 사선으로 걷히며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진은 짙은 남색 머리카락 때문에 한층 더 창백해 보였다. 깊은 눈꺼풀 아래로 파랗고 빨간 눈동자의 동공이 놀란듯 수축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진은 훈련용 도복이 아닌 붉은 천으로 된 검은 전투 갑옷을 갖춰 입고 온 제드를 확인하곤 다시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제드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한마디 하려고 한걸음 다가가자 진의 몰골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평소처럼 무엇인가 안에서부터 그를 허물어뜨린 것처럼 피폐한 모습이긴 하지만 목의 맥박이 빠르게 치솟고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그 반대라는걸 알수 있었다.

"내가 잊고 사는 것들 중 중요한 한가지가 뭔지 알고있나?"  진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심장박동 소리처럼 일정하게 들렸다.


"인간에 대한 예의?" 제드가 비아냥댔다.


 진은 제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과 함께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는 일이지.  네가 속한 킨코우단의 무리가 공공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야." 진은 한숨을 내쉬 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약속'이란 단어는 쓰지마. " 

"그건 명령인가?" 제드는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진과 말을 섞으면 항상 이런 식이였다.  "아이오니아 중앙자치구 직속 소속인 제드에게 명령을 내릴 자는 이곳엔 아무도 없어." 

"저런." 진이 진심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올려 아치모양을 만들었다.  "이제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네. 그건 과대망상증 직전의 증상 아닌가?" 

" 나와 협상을 시작하던가, 내가 가는 걸 구경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해." 어깨를 으쓱하곤 마저 말했다.  "30초 남았어."


"만약 누군가와 협상을 하고 싶다면 상대한테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지. 킨코우단에선 그런 기본적인 협상술도 안가르치나?" 진이 수갑을 짜증스럽게 흔들었다. "하긴 이렇게 고립된 곳에 사는 걸보니 협상이랑은 담쌓은지 오래겠지."

 제드가 노려보자 노려보면 어쩔거냐는 얼굴로 진이 짧게 말했다. "열쇠를 내놔."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하지?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하나."


 진은 복부에 힘을 줘서 상체를 한번에 일으켰다. "여기서 자격을 운운하다니.. 그럼 넌 스스로 누군가 섬길 만큼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딱딱한 돌바닥에 누워있었던 어깨와 목을 스트레칭하니 개운함이 느껴졌다.  "적어도 나같은 거장을 부리기엔 부족하지 많이."


 제드는 두손을 모아 손가락 마디마디를 부러트리며 말했다. "내일 당장이 네 사형식인데...시체로 나가도 상관없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진은 눈을 위로 굴렸다. "사형식이 중요할까, 내분을 종전시키는게 중요할까. 킨코우단 전체가 휘청일 만한 일이 생긴다면...?"

 제드는 날카롭게 현재 상황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물음에 혀를 내둘렀다.

"내분이라고...?" 제드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나에겐 아무리 사소한 소재라도 신선한 작품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어. 마치 작은 핏자국이 네 전투복에 묻은 것을 보고도 앞으로 일을 예측한 것 처럼 말이야. 사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부분이지."

"그렇다면 잘못 짚었군. 이건 훈련할 때 우연히 생긴 핏자국이니까." 

 진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하는 제드를 보다가 결박된 손을 들어 미간을 지긋이 눌렀다. 제드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스스로가 굉장히 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것이 확실했다.  "눈 먼 수도승 이야기가 떠오르네."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지?" 제드는 붉은 눈동자를 불쾌하다는 듯 찡그렸다.

"그 수도승이 그랬지. 외부 침입자를 쓰러트린 다음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어떻게 혼자 다수를 상대했냐 물었지. 그러자 그가 이런 대답을 했어. 적의 심장박동 소리만으로 그들을 파악한다고... 정말 어설픈 대답이지.자신의 눈만 가리면 모든 것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거야."


 제드는 입을 일자로 다문채로 눈을 지긋이 감았다. "녹서스 침공때 큰 공을 세운 분을 그런식으로 모욕하다니...제정신인건가."

'그게 더 중요한거냐..' 진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고 하는데, 얼음물을 끼얹는 듯한 소름돋는 살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제드를 보니 마치 두명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흔들고 다시 보니 검은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제드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네게, 자비를... 베푸려는 거다. 아이오니아의 명성과 수호를 위해 헌신할 기회를.. " 

제드는 울그락 불그락 해진 얼굴을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진정시키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카다 진." 

"내 본명을 알아내다니..." 진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만 알고있는 자신의 본명을 제드가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오래 전에 활동했던 유령극단까지 다녀간 거겠지.


 "쓸모없는 짓을 했군." 누군가가 자신의 과거행적을 캤다는 것은 역시 거슬리는 일이였다.

"임무를 수행할 때 네가 저지른 무수한 학살을 보고 의문이 들었지. 왜 킨코우단 외에 너를 추적하는 이가 없을까하고...아이오니아엔 킨코우단 외에 비밀결사대가 여럿 존재하는데, 왜 한번도 널 체포했던 사례가 없던건지..." 제드는 그렇게 말하며 미간에 세로로된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꽤 오래 신경 쓴 문제였던 모양이였다.


"쓸데없는 의문이군. 나 말고도 그런 짓을 하는 놈은 이 세상에 넘쳐. 금지된 무기를 수입해서 이용하는 놈들이나, 자신과 반대의 세력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지. 그것에 비하면 난 고상한 편이야. " 진은 감탄하는 눈길로 수많은 작품을 일궈낸 자신의 두 손을 쥐었다 펴며 훑었다.    


"말돌리지마. 그게 끝이 아니니까."  제드가 팔짱을 끼자 이두박근이 두드러져 보였다. 진이 보기에 마치 범죄자를 심문하는 형사처럼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중요한건 수장이 왜 너를 산채로 잡아오라고 명령했느냐야. 그동안 킨코우 단원을 건드린 자는 즉시 처형이였으니까."


"그럼 내 눈앞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놈은 뭐지? 환영인가?" 진이 비꼬았다.


 제드는 진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리고 너를 쫒고 있던 현상금 사냥꾼의 존재에 대한거야."

 진은 방금 또 다시 제드에게서 불투명한 검은 형체가 나타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드는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아는지 궁금했다. 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만히 있어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떠보는 짓은 이제 그만하지?" 진은 제드가 이런 점을 눈치채지 않게 자연스럽게 무릎을 탈탈 털며 말했다. 

진은 말을 이었다.

"침공 이후로 나를 귀찮게하던 잔챙이들은 코빼기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야." 창살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서자 제드의 거만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살의 그림자가 진의 허연얼굴에 세로로 된 검은 선을 그었다. 

"이건 떠보는것 따위가 아니야." 제드는 주먹에 힘을 실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진의 멱살을 쥐어서 미친듯이 흔들고 싶은 강한 충동과 싸우는 중이였다.  "일종의 확인이지.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하는지."

 그 순간 진의 입가의 움직임이 제드의 눈에 스쳤다. 방금 그 움직임은 미소일까?

"확인이라..." 진은 나른한 눈빛으로 말을 곱씹었다.

"네 말과 달리 현상금 사냥꾼들은 여전히 존재해." 제드는 진이 자신이 던진 미끼를 덥썩 물길 바라며 말했다. "단지 누군가에게 잡아 먹혔을 뿐."

"잡아먹혔다라..? 표현이..투박하군." 차분한 말과는 다르게 진의 눈동자는 마치 춤을 추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에게 그렇게 충성스러운 애완동물이 있었다면 이미 알고 있었을텐데."


"방금은 거짓말이군." 제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넌 절대 모를 수가 없어.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양이 네 쇄골에 새겨진 것과 비슷했으니까."

​​

 정적이 흐르고 둘 사이에 보이지 않은 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것처럼 신경전이 오갔다.

"아이오니아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지만 아는게 하나도 없는 것 같군.제드."  진이 먼저 입을 땠다. 그런 문양 하나쯤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수호신을 위해 태어나자마자 하나쯤은 갖게 돼. " 진은 철창살 중간에 팔을 살짝 걸치며 말했다. "아참, 넌 고아라고 했었나. " 

"...이렇게 대놓고 말을 돌리는 걸 보니 너답지 않군. " 제드는 그동안의 무술 훈련으로 상대방의 약점이 노출 될 때면 여유로움을 가장하는 것을 여러번 봐왔다. 심지어 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순간 더욱 더 확신이 생겼다.  "그 문양의 의미가 신앙에 관련이 없다는 것 쯤은 너도 알고, 나도 알아. 설마 허세와 멋을 부리기 위해 그런 무시무시한 문양을 몸에 새겼다는 소릴 하고 싶은건가? 자운에서 유행하는 화공 펑크족처럼?"  

 진은 제드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자신의 영역에 침범당한 사나운 맹수 처럼 험악한 인상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 다시 원래의 페이스로 돌아왔다. 진은 선을 넘은 자를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을 없애는 것이라는 것을 수백번도 넘게 새겨 들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건 네가 만난 현상금 사냥꾼을 잡아먹은 자들에게서 알 수 있을것 같은데. 혹시 그들도 이곳 지하 감옥에 감금했나? 직접 물어보고 싶군. " 진은 마치 제드가 모르는 것들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 

"그건..." 제드는 말을 하다말고 안좋은 기억을 떠올린 사람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제드는 그 괴상하게 생긴 것들을 추적해서 잡은 뒤에 심문하려는 찰나에 끔찍한 독기를 내뿜으며 스스로 소멸됐던 것을 떠올렸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지만 두번, 세번, 그리고 열번째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걸린 어떤 주술이 특정한 상황에선 스스로 소멸되게끔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드는 살면서 그런 끔직한 주술은 본 적이 없었다. 살고 싶은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던 그들의 매마른 표정은 제드는 다신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드는 문양의 생김새를 떠올릴려 할수록 싸늘한 기운이 자신의 주변을 감싸도는 것을 느꼈다. 그 문양을 다시 쥐어짜내서 기억해내려 했다. 나선형 무늬로 얽혀있고 가운데엔 무언가가 길게 감겨있는 모양새였다. 생명, 바람, 달과 같은 추상적인 것들도 그려져 있었지만 희미하게 지워져 있어서 자세히 보진 못했다. 


 제드는 어느순간 또 한번 진에게 페이스를 말린 기분이 들어서 더이상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상대는 절대로 말로 해선 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제드는 철장 너머로 손을 빠르게 뻗어 거칠게 진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

 ​진은 그대로 끌려가 가슴이 철창에 강하게 부딪혔다. 만약 미리 근육을 긴장시키지 않았다면 장기가 손상될 만한 위력이였다. 갈비뼈 몇개가 박살난 것 같은 고통이 온몸에 전해졌지만 진은 신음한번 흘리지 않고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의 도전적인 눈동자 였다.

"도대체 그런 근자감은 어디서 오는거지." 제드는 목에 핏대가 설정도로 거친음성을 토해냈다. "이곳에서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래...네 말도 어느 정돈 맞지. 적어도 이 공간은 내편이거든." 진은 감정없이 말하며 천장에 눈짓을 했다.  


 제드가 진의 시선을 따라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진의 말이 끝나기 뱀의 혓바닥을 날름 거리듯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천장틈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제드는 순간적으로 진의 옷깃을 빠르게 놓았다.


 긴 칼날은 바닥에 닿기 직전까지 내려왔다가 천천히 커튼이 걷히듯 부드럽게 다시 올라갔다. 칼날은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보이지않는 천장의 틈으로 들어갔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제드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제드는 자신의 두 팔에 눈을 떼고 있지 않았다.


"범죄자가 득실대는 마법공학의 특수 감옥의 기술은 모든 대륙을 통털어서 따라올 곳이 없지." 진은 쥐어잡힌 멱살부분을 매만지며 말했다. 


"왜 갇혀있지 않는 사람이 해를 입어야 하는...거지?" 제드는 충격이 가시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놀랄일인가. 개발자인 하이머딩거박사가 만든 수많은 발명품들 중 하나일뿐인데. "


"뭐라고..?" 제드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오래전에 죽었어.. 수 백년전에.."


"겉으론 그렇지, 매번 모습을 바꾸고 사니까. " 진은 제드가 여전히 벙찐 표정을 짓고있는 것을 보고 덧붙였다. "내가 그를 마지막에 봤을 때 이런 말을 남겼어. '언젠가 이 철장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그때까지 부디 이 철창이 어느쪽을 가두는지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젠장.." 제드는 진이 뭐라고 하든 더이상 제정신으로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살벌하게 내려온 칼날때문에 식은땀이 온몸에 베여있어서 축축해졌다. 조금이라도 늦게뺐다면 손목에 생긴 가느다란 상처로 끝나진 않았을 터였다.


"아까처럼 한번 더 내 멱살을 쥐고 흔들어봐.  위대한 발명가의 진리에 조금이라도 닿고 싶지않아?" 

"그 입 닥쳐. 너도 포함해서 이곳을 모조리 도려내 버리기전에 "


"학습능력이 부족한 건 치명적인 단점이야." 진은 제드가 무서운 살기를 풍기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 감옥이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미리 알았더라도, 넌 나한테 털끝하나 손 댈 수 없을거야. 왜냐면 ..."

 진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단어 하나하나를 힘주며 말했다.

"넌 겁쟁이니까."

 순간 제드의 붉은 눈에서 불꽃이 튀듯 일렁거렸다. 움직이자 잔상이 길게 남았다. 바닥에 흩어져있는 작은 모래알들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검은 연기가 제드의 주변으로 모이고 바로 옆에도 똑같이 생긴 어두운 형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까 제드가 두명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그 환영이였다.

 

  형체가 갖추어 지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존재는 크게 휘저으며 제드를 통과해 입을 쫙 벌린 짐승처럼 창살까지 통과해 진에게 돌진했다. 진은 창살까지 통과한 분신을 무방비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파동에 밀려 멀리 나가 떨어졌다 . 바닥에 쌓인 먼지가 공중에 뜨면서 뿌옇게 시야가 가려졌다.

 진은 주저앉은 상태로 기침을 해댔다. 앞이 안보여도 자신 앞에 위험한 힘을 내뿜는 어떤 존재가 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어서려고 다리를 움직이자 바닥에 떨어진 전등 조각이 발치에 치였다. 그제서야 반대편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횃불 외에 의지할 빛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창살너머로 제드가 서있는 모습이 역광이되어 어두운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고있음은 왠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걸 두려워할 필요 없어." 제드의 목소리와 함께 또 다른 낮은 저음이 낮게 울려 퍼졌다. 제드가 한쪽 무릎을 굽히자 분신도 똑같이 움직였다 . "네가 두려워해야 하는건 나니까."  

 진은 순식간에 일어난 이 상황을 침착하게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검은 분신 속에서 불안정한 형태로 일렁이는 검은 물질과 함께 촘촘하게 박혀 있는 눈동자들을 보는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그 안엔 눈뜨고 볼수없이 흉측한 것들, 시야를 가려주는 어둠이 고마울 정도로 흉물스러운 것들이 들어 있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진을 뒤흔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계획한 일과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였다.  누군가 자신의 계획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있다는 더러운 기분을 느꼈다.


"표정이 볼 만하군."

 제드는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는 진을 보고있자니 마음속에 쾌감과 함께 승리감이 퍼졌다. 진은 대꾸할 생각과 의지조차 없어보이는 고장난 인형같았다.

 완전히 바뀐 기세를 타서 아예 승기를 잡기위해 허리춤에 차고있던 단도를 빼내었다. 분신도 칼을 똑같이 구현해내어 모습 그대로 진의 목가까이 들이댔다.

 칼끝이 진의 쇄골을 따라 얕게 긋자 붉은 선혈이 그려졌다. 미적지근한 피가 천천히 고여서 흘러내렸다. 그 바로 옆에 현상금 사냥꾼들을 잡아먹었던 생명체에게서 봤던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진은 그것을 눈치채고 분신을 향해 다급히 눈을 부라렸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문양에 대해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어." 제드는 칼 끝을 다시 움직여 그 문양을 빗겨내려가  상처를 냈다.  " 너도 결국 이 표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제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단어 들을 낮고 빠른음으로 읆조리기 시작했다. 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는데 오래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피의 맹세를 하기위한 주문이였다. 마법의 힘이 깃든 서약으로,일단 맺게되면 지배자의 첫번째 명령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원래는 3가지이지만 제드가 외우고 있는 주문은 초보도 할 수있는 하급 마법에 속했다. 하지만 아무리 하급 주문이라도 어길 경우 몸에 새겨진 증표가 타오르고 지옥보다 더한 고통과 함께 미쳐버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제드의 분신이 다른 손으론 진의 옷 깃을 거칠게 잡고 쇄골에 주문을 그려가며 집중하고 있는 동안 진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신이 정한 몇가지 계획 중 가장 가능성 있고 실험 해 볼만한 것을 선택했다. 도박이긴해도 아직 불안정한 힘의 상태의 승산은 있어보였다. 어떠한 힘이 깃든 물체나 비급들은 진에게 다루기 더욱 유리했다.     

 진은 일단 정하면 망설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는 편이였다. 진은 춤을 추듯 움직이는 칼손잡이 끝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곤 그대로 감싸쥐었다. 제드와 분신이 주춤하는 순간 꽉 쥔 상태로 자신의 심장쪽에 가져갔다. 


"뭐하는거지? "


 진은 그런 제드의 질문을 무시하며 저항하는 힘보다 더욱 자신의 힘을 실어 가까이 가져왔다. 얇은 천이 찢겨지고 그 사이로 날카로운 칼날이 여린 살결을 가르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핏줄기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제드는 어찌해야할 줄 모를 정도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타서 진이 재빠른 동작으로 다시 분신의 손목을 더욱 휘어잡았다. 제드는 분신의 손목이지만 자신의 손목까지 비틀어지는 것이 동시에 느꼈다. 칼끝이 정확히 진의 왼쪽 가슴에 그대로 파고들었다. 제드는 자신의 눈으론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변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의지와 다르게 귀로 '안돼' 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