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어제 베히모스 파티 모집 중

얼마 남지 않은 랏딜 자리에 1641레벨의 누군가가 신청을 넣었다

반고정 공대장님께서 "에엑 무기도 23강이고 딱렙인데 저게 왜 와?"라 하셨지만 그의 초월과 직업 마크, 각인, 그리고 비는 자리의 파티에 워로드가 있음을 확인한 나는 "받으시죠"를 외쳤다

수라 햄이셨기 때문이다

공대장님께선 "아니 아무리 저게 쎄다고 해도 저 스펙도 받아간다고요?"라며 우물쭈물 하셨지만 그럼에도 나는 "괜찮습니다 저건 그래도 돼요"라며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수라햄을 영입했다

기쁨도 잠시 뼈에 아로새겨진 공포가 밀려왔다

1631레벨 권왕의 파천 낙화 2각에 내부 카멘이 뒤지던 것과 내가 서폿으로 겪어 본 20레벨은 간단히 씹어먹던 우리 파티 수라 햄의 퍼포먼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통의 오버렙 딜러에게서도 느껴지지 않는 불길한 기분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스윽 훑는듯한 소름돋는 느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내가 자초한 수라 햄인데 어쩌겠는가, 칠수 있는 데까지 쳐 보자라 생각하며 마음을 비우고 레이드에 입장했다

파티의 질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도화가가 해우물을 베히모스 중앙에 깔며 타대 파티인데도 백포지션만을 고집하다 과전류 빔을 맞곤 혼자 죽어나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중나크를 잡으러 가야 하는데 중앙에서 딜딸에 매몰된 나머지 마리우를 20초동안 방치한 도화가와 그의 지인 2명으로 인해 리트가 났을 때에는 솔직히 기뻤다

6천만대는 나와야 할 헤드 약점 공격이 2천만이 나왔었기 때문에 리트 말고는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1관문이 재개되었고, 그럼에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도화가의 버프 수준에 조금의 짜증을 느끼고 있었을 때 헤드 약점이 노출되는 짤패턴이 나왔다

'저걸 매번 풀타로 치지 않으면 타 딜러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나는 다시금 헤드를 치려 이동하다 이내 경악하게 되었다

어지간한 공팟 딜러들의 경우 약점이 노출되더라도 공략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워로드의 1각 안에서 호신투기를 틀고 수라결을 때려대고 있는 수라 햄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서포터 수준에 짜증을 내다가 수라 햄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는 에이 어쩌다 겹쳐서 그랬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그의 딜각은 완벽에 가까웠다

운이 좋은 건지 수라 햄의 완급 조절이 개 쩌는건지 헤드 약점이 등장할 때마다 풀타를 박진 못해도 꾸준히 수라결을 박아대는 모습에 나는 그의 수라결이 중간에 멈춰버렸으면, 베히모스가 갑자기 기절을 걸어버렸으면 하는 간절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2천만과 4천만, 5천만을 널뛰기하는 대미지와 수라 햄의 퍼포먼스를 본 내가 불안에 떨며 '조금 더 잘 쳐야 하는데'란 생각을 하기도 잠시, 베히모스가 평소의 공팟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죽었다


'잔혹한 혈투사'


그 문구만을 고고히 띄운 채 수라 햄은 MVP창에 서 있었다
20레벨을 거뜬히 뛰어넘는 위력, 내가 보기만 했던 상황을 내가 직접 당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나는 이내 날개를 부술 때 아드를 쓰지 않고 아덴을 아끼겠다는 나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라 회오리는 각자 파티에서 정해 주세요~"라는 공대장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제가 함"을 외친 나는 이렇게까지도 했는데 수라 햄을 꺾지 못 한다면...이라는 초조함과 억울함, 분함이 약간씩 섞인 감정을 느꼈다

도화가의 갈망과 베히모스 중심에 깔리는 해우물을 최대한 밟으며 약점이 노출될 때마다 최대한의 공격을 퍼붓던 나는 그런 내 옆에서 워로드를 끼고 유사한 포지셔닝을 하는 수라 햄을 보며 경쟁심을 불태웠다

약점 공격에 최대한 집중한 탓일까, 아니면 1관과는 달리 딜러들이 약점 공격에 어느 정도 참여한 탓일까 매번 양쪽 날개가 아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아덴을 조금 소모하면 충분히 깨질 만한 체력이었다

그런데 수라 햄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르르 몰려가서 하나 깨고 넘어가는 택틱을 채용했음에도 수라 햄은 홀로 고고히 공대원들과는 다른 날개에 풀딜을 박았다

같이 디코를 하며 플레이하던 공대장님께서 "아 저기 가면 버프 제대로 안 들어가는데 왜 계속 저기가~~"하며 약간의 투정을 부리셨지만 이내 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천상과 용맹은 반대 편 사거리에서도 박힌다
낙인과 암수도 베히모스 전체 적용이기에 딱히 상관 없다
음진 안 밟아도 어짜피 저쪽은 금방 깨지기에 상관 없다

마지막으로, 공대원들과 함께 날개 공략 시 수라결을 제대로 박지 못 한다

그의 행동은 딜타임에 버프를 버리는 행동이 아닌, 철저한 계산 하에 치뤄진 행동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의식하지 못 했던 사실이 더 있었는데, 머리 뚜껑이 따지면 떼바시를 외치던 소서와 달리 수라 햄은 자신의 수라결을 날개 타이밍에도 꾸준히 박고 계셨다

불안함을 넘어 약간의 경외심마저 들게 된 나는 이내 그와의 경쟁을 그만 두고 평시처럼 날개에도 풀딜을 박았다

실마엘 무력에 성공하고 베히모스가 무력화가 되었을 때 내 파티의 도화가는 이미 죽어 버프를 주지 못 했고 헤드에 1천 중후반의 대미지가 박히고 있을 때 또 졌구나란 생각을 했다


'잔혹한 혈투사'


또다시 고고한 수라 햄의 MVP창을 보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수라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다른 딜러들이 제아무리 노력해 봤자 수라 햄도 노력한다면 그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봐봐요 수라 끼면 그냥 공대가 행복하다니까?"라 말하자 "에이 블래님 제대로 안 치신거 아니에요? 다음번에 저랑 같은 파티로 가셔요 서폿 별로였다면서"라 답하신 공대장님의 말씀을 뒤로 나는 내 캐릭터의 스펙을 딸깍일 뿐이었다






출처) 로아온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