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네요.

 

 

 

===========================================================================================

 

 

http://cafe.daum.net/suttlebus








몇 년째 가뭄이 계속되어 마을은 황폐했다.

강과 호수가 마른 탓에 해마다 찾아오던 소떼들도 경로를 변경해버렸다.

그래서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굶는 게 일이다.
그들에게 있어 유일한 축복은 세케르다.

세케르는 신비의 돼지다. 실질적으로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 돼지가 언제부터 마을에 있게 된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의 선조의 선조,

그 선조의 선조 때부터 있었을 거라고 짐작만 할뿐이다.

 

 

 

 

장로는 하루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을 세케르의 신전에 모이게 한다.

배급을 하기 위해서다. 세케르는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그 거대한 몸은 언제나 직육면체의 커다란 나무 상자 속에 들어가 있다.

그 상자는 웬만한 오두막과 크기가 흡사했다.

상자에는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에는 돼지의 살이 비죽이 불거져 나와있다.

장로는 그 비어져 나온 살들을 조금씩 잘라내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들은 살들로 고기를 구워 먹거나 국을 끓여 먹는다.

그러면 장로는 다시 그 고기와 국의 일부를 거두어들여 세케르에게 먹인다.

그러면 세케르는 새 살이 돋아나고 그 살은 상자의 구멍 밖으로 다시 밀려나온다.

이렇게 해서 생명은 유지될 수 있었다. 마을은 씨족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세케르는 그들에게 있어 신이었고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하루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해주는 세케르의 거대한 돼지머리에 경건한 인사를 올린다.

그럴 때면 세케르는 피곤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본다.
내 피와 살로 가련한 너희들의 생명을 이어주마.

 

 

 

그해 여름 가장 무덥던 날 마을에 도적 패가 들었다. 도적들은 모두 거구다.

이 미터에 달하는 키에 이 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몸무게를 지녔다.

그들은 굶주려 있었다. 그들은 연약한 아이와 여자들부터 잡아먹기 시작했다.

관절을 모두 뽑아내어 아직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대로 먹어치운다.

그들이 버리는 것은 뼈와 머리카락뿐이다.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들은 커다란 솥에 국을 끓인다.

몇 몇 젊은이들이 창과 칼을 들고 도적 패에 맞서 본다. 도적들은 거대한 망치로 저항자들을 찍어 내린다.

도끼로 살을 발라낸다. 보란 듯이 시체를 나뭇가지에 걸어놓는다.

누구도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마을 회의가 열렸고 그 곳에서 세케르에 대한 얘기가 거론된다.

세케르를 그들에게 줘버립시다.

장로는 이를 반대한다. 세케르는 우리들의 신이다. 신을 배반할 셈인가. 다시 한번 저항세력을 모아야 하네.

그 러나 장로의 의견은 일축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케르를 바치는 게 최선이라고 그들은 결론짓는다.

세케르면 몇 달은 먹고도 남을 것이오.

그 동안 가뭄이 풀리고 소 떼들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지 않겠소.

다음날 그들은 세케르의 신전을 도적 패에게 알려준다.

도적들은 제일 먼저 세케르의 머리를 잘라낸다.

백 번의 도끼질 끝에 세케르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진다. 돼지의 피가 비처럼 신전을 적신다.

그리고 장로는 마을 언덕의 오동나무 가지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떨어져나간 돼지머리만도 도적들의 키보다 훨씬 컸다. 도적들은 돼지의 커다란 눈알을 파내어

선심이라도 쓰듯 마을 사람들에게 던져준다. 거대한 눈알은 굶주린 사람들의 손에 갈가리 찢어발겨진다.

도적들이 돼지머리를 다 먹어치우는데 일주일이 걸린다. 그동안 상자 속의 돼지 몸은 썩어버렸다.

수천만 마리의 구더기가 들끓는다. 도적들은 코를 감싸쥐고 세케르의 신전을 떠난다.

 

 


도적 패는 다시 아이와 여자를 잡아먹기 시작한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고 작 일주일의 생명 연장과 그들의 신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신은 없고 식인귀들만 남았다.

몇 몇 사람들은 도적 패를 피해 다니며 구더기가 들끓는 세케르의 몸을 뜯어먹는다.

세케르의 썩은 몸을 먹은 이들은 모두 기이한 병에 걸린다.

온 몸에 붉은 반점과 돌기들이 돋아나고 그 속에서는 구더기가 기어 나온다.

마침내 그들 모두 코와 입과 눈과 귀에서 피를 뿜어내며 죽는다.

마을은 이제 유령의 마을이 되었다. 길거리마다 기이한 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이 썩어가고 쥐와 구더기가 들끓는다. 언제부턴가 도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미쳐버린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배를 파헤쳤던 것이다.

그들의 파헤쳐진 내장을 굶주린 아이들이 집어삼킨다.

그 아이들의 목을 낫으로 잘라 파먹는 어른들이 있다. 그 어른들을 다
시 잡아먹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에서 엄청난 비가 내리던 날 마을은 기이한 비명소리로 가득 찬다.

비가 그치고 핏빛 무지개가 마을을 덮었다. 마을의 모든 생명은 사라진 후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 세케르의 신전이 있던 그 마을에 현대식 양옥이 들어선다.

붉은 벽돌의 으리으리한 이층 양옥이다. 양옥의 주인은 마을에서 가장 큰 공장을 가진 공장장 부부다.
공장은 군수품을 만드는 곳이다. 주로 철제 기구들을 만든다.

그러나 그 공장장 부부는 그것 외에 다른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사람의 장기를 밀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길 언저리를 헤매는 아이들을 양옥의 비밀 지하실로 납치, 배를 가른다.

시체는 태우고 장기는 거대한 냉장고 속에 보관한다.

그렇게 보관된 장기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고가에 판매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인육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다른 마을의 부자들이었고 그래서 보통사람들이라면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일을 해라, 일을. 이 돼지 같은 놈들아! 공장장 부부는 직원들에게 늘 그렇게 소리를 지른다.

직원들은 가난해서 몹시 허약했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루 한 끼 내려지는 돼지비계 감자국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너희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겠느냐. 먹을 것을 제공하는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공장장 부부는 이제 채찍을 휘둘러대며 소리친다. 직원들은 하루 열 다섯 시간을 일한다.

그러나 월급은 몇 달째 밀려 있다. 그래도 그들은 돼지비계 감자국을 먹기 위해 그 공장을 떠날 수 없다.

또 그 공장의 닭장 같은 기숙사를 떠날 수 없다.

 

 


공장장 부부에게는 열여덟 살 난 딸이 한 명 있다. 딸은 무척 귀엽고 예쁜 소녀다.

만화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공주의 모습이다.

공장장 부부에게 있어 딸은 보석 같은 존재다.

적어도 그들이 이제껏 더럽게 모아온 재산의 전부보다 백 배는 더 소중하다.

바깥 세상은 무척 더럽고 비열하단다.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간을 빼먹는 세상이지.

그러니 넌 항상 여기 이 성스러운 집을 벗어나지 말아라. 이곳이 너의 신전이다.

공장장 부부는 늘 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언제나 딸은 한 떨기 수선화처럼 웃으며 네, 라고 대답한다.

 

 

 

딸은 이제 거의 성인으로 성장했지만 동화책이나 만화책만 본다.

그래서 동화책이나 만화책의 내용이 그 소녀의 가치관을 이루고 있는 전부이다.

어느 날 소녀는 무서운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누군가의 등을 본다.

등을 보이고 누워있는 그를 흔들어본다. 그자가 고개를 돌린다. 돼지의 얼굴을 한 사람이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선다. 왜 그러니 아가야, 아빠란다.

돼지의 얼굴을 한 그가 말한다. 아빠라니.
그녀는 땅이 꺼질 듯한 절망감에 휩싸여 주저앉는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온다.

엄마 역시 얼굴은 돼지머리다. 자, 아가야, 식사하렴. 오늘 메뉴는 포크커틀릿이란다.

엄마는 식칼로 자신의 돼지머리를 상당부분 잘라낸다. 그것을 기름에 튀겨서 삼등분 한다.

자 따끈따끈할 때 먹어야지. 이거 맛있겠는걸.

돼지머리를 한 아빠는 아내의 얼굴로 만든 포크커틀릿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잘려나간 돼지머리를 한 엄마도 자신의 얼굴로 만든 포크커틀릿을 맛나게 먹는다.

딸은 비명을 지르며 지하실로 달려간다. 지하실에는 배가 갈라진 아이들이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이들이 하나 둘씩 눈을 뜬다. 살인마. 이 살인마. 아이들이 합창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깬다.

소녀는 한숨을 쉬며 침대 옆을 확인한다. 돼지머리를 한 아버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왜 그러니 아가야, 아빠란다. 소녀는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비명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침대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소녀는 달려가 벽의 스위치를 올린다. 침대를 중심으로 노란빛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제야 소녀는 안도한다. 구석의 어둠들이 빛의 공간 밖으로 밀려나 있음을.

 

 

 


우리 막내 녀석이 며칠째 보이질 않습니다. 늙은 직원이 찾아와 말한다.

뻔한 거 아냐! 어느 뒷골목에서 칼질이나 하고 있겠지.

그런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며 무슨 돈을 벌겠다는 거야! 공장장이 채찍을 휘두른다.
늙은 직원은 어깨를 감싸쥐며 쓰러진다. 하지만 그 애는 이제 겨우 일곱 살입니다.

그게 어떻다는 거지! 일곱 살이면 누군가를 찌르거나 누군가에게 찔릴 만큼 큰 거잖아!

내일까지 납품해야할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 딴 일로 여기서 하루종일 노닥거릴 셈이 냐,

이 영감탱이야! 공장장은 다시 채찍을 휘두른다. 늙은 직원은 절뚝거리며 일터로 간다.
직원들의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 거리에서 아동 실종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직원들은 알고 있다. 그 실종이 단순 실종이 아니라는 것을.

쉬쉬해도 이 거리에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이 공장의 소유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알고 있어도 누구하나 그것에 대해 나서서 말하지는 못한다.

그랬다가는 돼지비계 감자국을 더 이상 먹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여보, 이제 전 그만 일하러 가야겠어요. 공장장의 부인이 시계를 보며 일어선다.

맞아, 지금 시간이 작업하기 좋은 시간이지. 굶주린 아이들은 쥐를 잡아먹는다.

쥐의 눈알에 젓가락을 관통시켜 불에 굽는다. 그 모습 을 다섯 명의 아이들이 침을 삼키며 지켜본다.

누린내가 지독하다. 얘들아, 그런 건 버리렴. 빨간 원피스를 입은 예쁜 아줌마가 차에서 내린다.

너희들 이거 먹을래. 그녀가 나누어주는 것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알사탕이다.

아이들은 알사탕을 두세 개씩 입에 넣는다. 차에 타렴.
우리 집에 맛있는 빵이 있어. 실컷 먹게 해주마. 다섯 명의 아이들은 차에 서로 오르려고 싸운다.

차는 붉은 벽돌 양옥을 향해 달린다. 수면제가 발린 사탕을 먹은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다.

잠든 아이들은 양옥의 비밀 지하실로 옮겨진다. 아직 살아있는 그들의 배가 차례차례 갈린다.

내장이 부위별로 파헤쳐진다. 대형 냉장고에는 신선한 내장들로 가득하다.

냉장고를 하나 더 사야겠어. 빨간 원피스의 예쁜 아줌마는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린다.

그 흥얼거림에 마지막 남은 아이가 눈을 뜬다.

옆을 둘러보니 친구들이 모두 반듯하게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두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예쁜 아줌마가 피묻은 칼을 들고 다가온다.

아이는 얼른 눈을 감는다. 자신의 허름한 러닝셔츠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거대한 식칼이 가슴 깊이 푹 들어온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뜬다. 아줌마, 뭐 하시는 거예요.

예쁜 아줌마는 웃으며 말한다. 네 간 빼내는 중이야.

 

 

 

한밤중 소녀는 눈을 뜬다. 새벽 한 시. 갈증을 느낀 소녀는 머리맡의 주전자를 든다.

주전자가 비어 있다. 소녀는 거실로 나간다. 이렇게 밤중에 거실로 나가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주방에서 물을 찾는다. 어디에 물이 있는지 소녀는 잘 모른다. 등뒤에서 두런두런 얘기 소리가 들린다.

거실 바닥 아래에서 나는 소리다. 소녀는 꿈의 기억을 떠올린다. 지하로 통하는 통로.

꿈의 감각을 더듬어 소녀는 그곳으로 간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의 문이 보인다.
그 문은 언뜻 보기에는 벽처럼 꾸며져 있다. 이 방은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된단다.

언젠가 엄마는 소녀에게 그렇게 타이른 적이 있다. 푸른 수염의 전 부인들이 걸려 있는 것일까.

소녀는 오래 전 읽은 적이 있는 동화, 푸른 수염을 기억한다.

소녀는 그 방을 향해 다가간다. 늘 진짜 벽처럼 닫혀있던 그 방이 무슨 일인지 열려 있다.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온다. 소리가 들린다. 엄마의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 그리고 모르는 자의 낯선 목소리다.

이 정도면 싸게 거래되는 거예요. 하지만 지난번보다 두 배나 올랐잖아.

이것 봐, 당신을 만족시킬물건을 구하기가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이건 주방에서 토스트를 만드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맞아요. 요즘은 워낙 수요가 많아져 이 정도 액수로는 어림도 없다고요.

그나마 단골이라서 이렇게 해 드리는 거라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자, 돈은 여기 있어. 어서 물건을 줘.

부드러운 생간을 빨리 먹고 싶다고. 자, 얼른 가지고 꺼져. 저쪽 구석 뒷문으로 사라져!

 

 

 

소녀는 문에 귀를 기대고 한참을 서 있다. 다리가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두런두런 얘기하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아귀 같은 놈.

누구 앞에서 흥정을 하려고! 아빠의 투덜대는 목소리다. 다음부터는 세 배 가격으로 팔아버리지.

그렇게 올렸다간 아예 발길이 끊길 지도 몰라요. 웃기지 말라고

그래. 칼자루 쥔 사람 마음대로 돌아가는 게 이 세상 이치야. 우린 이 세계의 지배자라고.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는 이제 문 바로 너머에서 들려온다. 그제야 소녀의 다리가 움직인다.
지하실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소녀 방의 문이 닫힌다. 소녀는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조금 전 자신이 엿들은 이야기의 내용은 소녀가 모르는 것이다.

그런 내용은 동화책에도 만화책에도 없었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밀린 월급을 계산해 주십시오. 직원 대표가 공장장 부부의 현관문을 두드린다.

그는 피투성이다. 담을 뛰어넘어 들어왔나 보군. 공장장이 혀를 찬다.

담 위에는 철조망과 유리가루가 가득히 박혀있다.

직원들 사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직원 대표는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린다.

이만저만 미친 게 아니로군. 공장장은 허리의 채찍을 천천히 꺼내든다.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더러운 몰골로 찾아와. 공장장이 분개하며 채찍을 휘두른다.

직원 대표의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흐른다. 밥을 먹다 말고 소녀가 나와 본다.

피에 번들거리는 얼굴이 보인다. 소녀의 입이 벌어진다. 얘야, 어서 들어가서 밥 먹어.

어른들 일을 훔쳐보면 못써. 엄마가 소녀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간다. 누구예요, 피 흘리는 아저씨는.

우리 덕분에 먹고사는 사람들이란다. 그런데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저렇게 떼를 쓰고 있단다.

더 주면 되잖아요. 아가야, 그건 안 될 말이란다. 저런 사람들한테는 그런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단다.
왜냐하면 입장이 바뀌면 똑같이 할 사람들이거든. 아니 어쩌면 더 할지도 모르지.

그러니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그냥 짓밟아주면 돼. 소녀는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직원 대표는 공장장의 손에 이끌려 뒷마당으로 간다.

공장장은 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직원 대표의 얼굴을 담근다.

너 같은 놈은 뜨거운 맛을 제대로 봐야해! 공장장은 직원 대표의 얼굴을 충분히 익힌 후 꺼내 올린다.

직원 대표는 이미 죽어있다. 홍시처럼 흐물흐물해진 직원 대표의 얼굴을 발로 밟아서 짓뭉개버린다.

 

 

 

 
마을 여기 저기서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연일 계속되는 무더운 날씨 탓이다.

미물은 죽어가고 그 시체는 부패한다. 소녀는 붉은 벽돌 양옥의 이 층, 인형의 집에서 놀고 있었다.

지붕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소녀는 인형 하나를 가슴에 품고 복도로 나온다.

이 층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다락방은 컴컴하다.

그곳의 창은 오전의 해를 등지고 있어 무덤 속 같다. 창에 드리워진 커튼을 밀어젖힌다.

갈색의 지붕이 눈에 들어 온다. 지붕 너머로 마을의 모습이 펼쳐진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공장이 보인다. 엄마 아빠가 일하고 있을 공장.

그 공장은 마을에서 제일 높다. 그 공장의 제일 위층에 아빠와 엄마의 사무실이 있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마을을 낮게 덮고 있다.

그래서 태양의 볕은 지상으로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열기만 한층 증폭된다.

연기의 바다 위로 초라한 집들의 굴뚝이 삐죽 삐죽 솟아 있다. 묘지 같아. 소녀는 탄식한다.

다시 소리가 들린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인형을 떨어뜨린다.

소리는 측면에서 들리는 듯하다가도 돌아보면 머리 위에서 들리고 그래서 고개를 들어보면 바로 등뒤에서 들린다.

소녀는 귀를 곤두세운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낮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이 층 복도를 걷는 소리다. 자박자박. 틀림없이 누군가 집안에 들어와 있다.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도깨비야. 그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무시무시한 도깨비를 떠올린다.

문을 조금 열어본다. 발자국 소리는 아래층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도둑일지도 몰라.

소녀는 아침의 일을 기억한다. 먹을 것을 주는 데도 더 달라고 찾아와 떼를 쓰는 도둑.

식량을 훔치려는 것일까. 소녀는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가 본다.

이 층을 지나 일 층으로 가는 계단 중턱에서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아래를 살핀다.

시커먼 무언가가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게 보인다. 심장이 멎을 것 같다.

 

 

 

 

현기증을 느끼며 소녀는 계단에 주저앉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히히거리는 웃음소리 같은 게 간헐적으로 들린다.

동네 꼬마 아이들이 몰래 들어온 것일까. 소녀는 다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꼬마 아이들이라면 괜찮아. 밥을 주면 되니까. 어차피 밥솥에 밥은 가득하니까.

그러나 소녀가 계단을 내려왔을 때 거실은 지금 막 죽은 사람처럼 고요하다.

웃음소리도 발자국 소리도 그쳐있다. 소녀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밥솥의 밥은 그대로다. 미세한 바람이 불어 소녀의 목덜미를 간질인다.

뒤를 돌아보니 거실 건너편에 천천히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미세한 바람에 아주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그것은 지하로 통하는 문이다.

어째서 문이 열려 있을까.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낯선 남자가 했던 말.

부드러운 생간을 빨리 먹고 싶다고. 소녀는 지하로 통하는 문을 열어본다.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 방. 푸른 수염의 전 부인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을 지 모른단 말야.

마 음속의 목소리가 그렇게 외쳤지만 소녀는 걸음을 아래로 내딛는다.

깊고 오래된 우물 속처럼 어둠고 긴 계단이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머리 위에는 어둠이 쌓인다.

 

 

 

 

아, 엄마 아빠가 알면 혼날텐데. 십 년 전 그날처럼. 소녀는 그날의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소녀의 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소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에는 하릴없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개미를 죽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몹시 굶주린 얼굴이었다.

애들아 우리집에 맛있는 음식이 무척 많아. 오늘이 내 생일이거든. 같이 먹으러 안 갈래.

소녀는 아이들을 모두 자신의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삼 층 케이크에 별과 방울을 장식하고 있던 엄마는 소녀가 데리고 온 아이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엄마는 눈을 몹시 크게 떴다. 무서운 얼굴이었다. 이어서 아빠가 현관으로 들어서며 문을 잠갔다.

이런 더러운 아이들을 데리고 오다니. 엄마는 신경이 예민한 도베르만처럼 으르렁거렸다.

소녀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방안에 갇혔다.

방안에 갇히기 직전 소녀는 자신이 데리고 온 아이들이 아빠의 손에 이끌려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가시나무 회초리를 구해와서 소녀를 때렸다. 소녀의 하얀 드레스가 붉게 물들 때까지.

엄마는 그것을 정화라고 말했다.

저녁 무렵 엄마는 소녀를 깨끗이 씻겨주었다.

상처에 물이 닿자 회초리에 맞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왔다.

 

 

 

 

지하실로 들어간 아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소녀는 그것에 대해 아빠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넌 이 다음에 커서 좀더 고귀한 지배자가 되는 거야.

아빠는 아이들의 행방 대신 그런 말을 해주었다. 그후 소녀는 일체의 외출이 금지되었다.

가시나무 회초리에 맞은 상처는 그후 천 일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소녀는 손바닥으로 어깨와 가슴을 쓸어 만져 본다.

그때의 기억이 가시처럼 온몸에 박혀 소름을 돋게 한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소녀는 어둠뿐인 공간을 응시한다. 소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다.

소녀의 눈앞에 꿈의 기억들이 영상으로 번쩍번쩍 나타난다.

돼지의 얼굴을 한 엄마와 아빠. 거꾸로 매달린 아이들의 시체. 시체들이 하나 둘씩 눈을 뜬다.

소녀를 노려본다. 소녀는 눈을 감고 바르르 떤다.

 

 

 

 

한참 후 소녀가 눈을 떴을 때 덧칠된 어둠 위로 야광 을 발하는 세 개의 형체가 보인다.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하나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그들은 형제인 것 같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녀를 가만히 쳐다본다.

초췌하고 허기져 보이는 그들의 얼굴에 서서히 공포와 절망감이 드리워진다.

이윽고 여자아이의 하얀 옷이 붉게 물들어간다. 남자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피로 물드는 그네들의 몸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처참한 광경에 소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자 꺼억꺼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소녀의 고막을 두드린다.

소녀는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아이들의 비명소리는 더욱 커져간다.

마침내 비명소리는 거대한 합장소리가 되어 그것이 정말로 비명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화내는 소리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주위가 고요해지고 소녀는 눈을 뜬다.

어둠은 여전하다. 소녀는 자신의 침실이 무척 그립다.

그래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사부작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녀는 뱅글뱅글 돌며 사방을 주시한다.

어둠은 거대한 늪처럼 소녀를 둘러싸고 있고 늪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불쑥 올라오고 있다.

현기증이 난다. 소녀는 바닥에 쓰러진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니.

소녀는 울먹인다. 밥이 필요하면 주방에서 가져가. 다른 맛있는 것들도 얼마든지 다 가져가.

그러나 어둠은 소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둠은 되살아나는 좀비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어둠을 잉태하며 조롱하듯 소녀의 주위를 뱅뱅 맴돈다.

소녀는 주먹을 꼭 쥔다. 이 따위 것들! 소녀의 입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아닌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는 것들! 소녀는 이를 악물고 소리친다. 모두 짓밟아버릴 거야!

그 순간 쾅- 소리를 내며 지하실의 모든 문이 닫힌다.

 

 

 


큰일났습니다. 비서가 달려온다.

사무실의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앉아 티타임을 갖고 있던 공장장 부부는 화들짝 놀란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야. 직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폭동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공장장은 비서의 멱살을 움켜쥔다. 그러나 비서는 이미 겁에 질려 있다.

지금 여기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공장을 불태우고 회사의 금고를 훔치겠답니다.

뭐야, 이런 은혜도 모르는 것들! 공장장은 비서의 목을 조른다. 비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여보 이제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 미친놈들을 상대 할 수는 없잖아.

빨리 중요한 것들만 챙겨서 달아나자고. 하지만 그건 어떡하죠. 그거라니.
그거. 공장장 부부는 말없이 서로의 눈동자만 쳐다본다. 그걸 그냥 두고 갈 순 없잖아요.

그렇지. 공장장은 미간을 찌푸린다. 하지만, 괜찮을 거야.

그 문은 이중으로 닫혀있어 어지간해선 부저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불을 지른다잖아요.

제기랄,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잖아. 공장장은 부드득 이를 간다.

그는 채찍과 권총을 가지고 복도로 나간다.

 

 

 

 

저 아래 층 어딘 가에서 폭도들의 아우성이 들려온다. 부서지고 깨지고 불타는 소리도 들린다.

공장장은 서둘러 건물의 제일 위층, 비밀의 방으로 달려간다.

그 방은 공장장 부부 외에 누구도 들어 갈 수 없는 방이다. 그는 열쇠로 이중문을 연다.

문이 열리자 넓은 방이 나타난다. 바닥에는 엄청난 양의 지폐가 버려진 휴지처럼 쌓여 있다.

공장장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안쪽으로 들어간다.

방의 제일 안쪽,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황금돼지 조각상이 있다.

돼지는 온화한 표정으로 공장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걸 만드느라 십 수년이 걸렸는데.

공장장은 탄식하듯 내뱉는다.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틀림없이 아내의 비명소리리라. 공장장은 황금돼지 앞에 꿇어앉아 기도를 한다.

등뒤에서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여기다! 놈은 이곳에 숨어 있다. 폭도들이 방으로 들어온다.

성난 숨소리, 사나운 욕설이 터져 나온다. 공장장이 뒤를 돌아본다.

폭도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보인다.

그들의 손에 칼과 망치와 방망이, 그리고 잘려나간 아내의 목이 있다.

 

 

 

 

맙소사, 저 어마어마한 돼지를 봐. 폭도들이
황금돼지 조각상을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저 돼지는 우리들의 피와 내장으로 만들어진 거야.

폭도들은 칼과 방망이를 휘두르며 소리친다.

저 돼지를 죽여라! 공장장은 미처 권총을 쓸 겨를도 없이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내장이 파헤쳐진다.

이어서 거대한 황금돼지 조각상이 산산조각 난다. 폭도들은 조각난 돼지의 눈과 귀와 발을 주워들며 만족해한다.

그리고 더 큰 조각을 차지하기 위한 칼부림이 벌어진다.

반쪽으로 깨어진 온화한 얼굴의 돼지는 서로의 배에 칼을 꽂으며 황금위로 쓰러지는 폭도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붉은 이 층 양옥은 유령의 집이 되었다.

유령이 나온대.

아무도 없는데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이히히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린대.

가끔씩 벽을 벅벅 긁는 소리도 들리고 무언가를 씹어먹는 소리도 들린대.

 

 

 

 

그래서 아무도 그 집을 사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두기에는 아까운 집인데.

어느 날 젊은 실업가 한 명이 그 집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 남자를 말렸지만 그는 유령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 머무른 첫 날 밤 남자는 유령보다 더 무서운 것을 보았다.
제일 처음 그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옥상의 다락방에서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발견했다.

그는 인형을 주워들고 다락방의 창문을 열어보았다.

창 밖으로 핏빛 저녁 노을에 물드는 마을의 전경이 펼쳐졌다.

그 한 가운데에 시커멓게 불탄 건물의 모습도 보였다.

이 이 층 양옥의 주인이 운영했던 군수품 생산 공장.

한 달 전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직원들은 공장장 부부를 끔찍하게 살해하고 건물을 불태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직원들 대부분이 그 건물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시체들을 조사해보니 그들은 불에 타서 죽기 전에

이미 칼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서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몇몇 살아남은 직원들은 정신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밤 아홉 시 경, 남자는 거실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오래된 공포소설이었다.

그는 책을 읽다 거실에서 잠이 들었고 새벽 한 시에 깨어났다.

그는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엘 갔다. 화장실 창문 너머로 밤나무가 밤바람에 흔들거렸다.

화장실을 나올 때 그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그는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직이 들리는 그 소리가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남자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짐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벽 너머에서 벽을 긁고 있는 소리였다.

유령인가! 남자는 유령의 존재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창고 로 달려가 커다란 망치를 구해왔다.

그것으로 소리가 들리는 벽을 힘껏 내리쳤다. 이윽고 벽이 허물어졌다. 회중전등으로 벽 너머를 비쳐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남자는 조심스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안으로 내려갈수록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뭔가가 재빠르게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남자가 소리쳤다. 전등을 이리저리 비쳐보았다.

그러나 회중전등 하나가 겹겹이 싸인 어둠을 모조리 읽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다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왼쪽 측면에서 오른쪽 측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몸을 돌리며 회중전등을 비추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목재 기구들이 보였고 그 너머에는 누군가가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누구야. 남자는 소리치며 회중전등을 비쳤다.

그러자 그것은 들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어둠의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놓치지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무언가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회중전등의 불이 꺼졌다. 남자는 손바닥으로 전등을 탁탁 쳤다.

다른 손바닥으로 바닥을 만져보았다. 미끈한 액체가 묻어 났다.

그때 후욱 하고 뜨거운 입김이 전해졌다. 남자는 코를 감싸쥐며 정면을 응시했다.

바로 코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회중전등을 탁탁 쳤다. 갑자기 불이 들어왔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불빛에 하얀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얀 얼굴은 웃고 있었다.
피묻은 붉은 입술은 웃으면서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붉으죽죽한 무언가를.

문이 열리지 않았어요. 하얀 얼굴이 말했다. 배가 고파서 냉장고의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먹었어요.

하얀 얼굴은 자신의 등뒤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남자는 입을 벌리고 경악했다.

 

 

 

시간이 흘러 마을은 도시화되어 갔다.

예전에 군수품 공장이 있던 곳에 삼십 층 높이의 빌딩이 들어선다.

빌딩의 주인은 사십대 후반의 여자다.

그녀는 오래 전 젊은 실업가와 결혼을 했고 그 실업가는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회장님, 이번 인원 감축 안은 아무래도 재고해보시는 게.

비서의 말에 여회장은 소리를 지른다.

잘라버려. 조금이라도 불만을 가지는 놈들은 다 잘라버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쫓겨난 이들은 거리로 나앉게 됩니다.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그녀는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조각상을 비서에게 집어던진다.

그런 불손한 녀석들의 사정까지 일일이 다 봐준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겠어.

어차피 입장이 바뀌면 똑같이 할 녀석들이야. 아니, 더 할 녀석들이지.

여회장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비서는 이마의 피를 손으로 닦으며 조각상을 원래 자리에 올려놓는다.

회사의 로고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돼지다.

돼지의 얼굴에 비서가 흘린 피가 묻어 있다.

 

 

 

비서가 나가자 여회장은 외출 준비를 한다.

그녀는 손수 운전해서 야산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 앞에 차를 세운다.

그 건물은 그녀가 비밀리에 병행 운영하는 또 다른 사업체다.

건물안은 불법 의료기구들로 가득하다.

오늘은 모두 세 건의 수술이 있었습니다.

피묻은 가운의 의사가 그녀에게 공손히 보고한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에는 방이 여러 개 있다.

여회장은 열린 방문 틈으로 안을 흘낏 본다.

얼음이 가득 쌓인 욕조에 어린 소년 한 명이 누워있다.

소년은 배가 갈라져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다. 소년은 슬픈 눈동자로 여회장을 바라본다.

여회장은 소년을 향해 온화하게 웃어준다.

여회장은 안쪽으로 더 들어가 작고 아담한 방안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그녀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 접시에 담는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며 접시 위에 올려진 차가운 간을 와인과 함께 푸딩처럼 먹는다.

여왕처럼 우아하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