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를 둔 덕에 꼬꼬마때부터 게임과 친했다.
하이텔 천리안 시절에 그래픽없이 명령어로 움직이는 머드게임을 즐겨한지라(주라기공원을 특히..) 이어 도스게임, 바람의나라, 포트리스 등등으로 게임실력을 쌓으며 반 남자애들과 피씨방도 자주 갔다.
헌데 중딩에 접어들어서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게임하는 여자애' 타이틀이 왠지 부끄러워져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다녔다.
와우 오리지날 오픈 베타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고2였다.
오빠가 만든 계정으로 들어가서 만든 첫 캐릭은 인간여자도적. 은신이 가능하다는 이유때문이었다.
헌데 만들고 보니 은신을 하려면 레벨이 20인가 되어야 배웠던 것 같다..
생각보다 어려운 플레이에 고전했지만 다들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름인 노스샤이어 수도원에서 나와 골드샤이어로 향할때 풍경이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길을 총총 가다가 복면을 쓴 데피아즈 좀도둑이 나타나 맞아죽고
골드샤이어 여관에 들어갔을 때 나오는 음악이 너무 좋아서 벽난로 옆에 앉아있기도 하고
토끼며 다람쥐가 돌아다니는데 죽여보고 싶으면서도 뭔가 죄책감이 들어 죽여볼까말까 고민하고
행상인이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해서 따라가다가 해골몹이 나타나 맞아죽고
항상 채널엔 사람들이 징세관 하실분이나 공주 잡으실 분을 찾고 있었는데 '뭔진 몰라도 되게 어려운 나랑은 관계 없는 건가보다..'생각했다.
천천히 레벨을 올리며 징세관이 누구인지 알게되고 공주의 충격적인 정체도 알게되었다.

서부몰락지대로 넘어가 다소 휑해진 배경에 실망할 참에
늙은 말 블랑쉬 퀘스트를 하고 받은 가방 (늙은 말 블랑쉬의 사료주머니?)에 감동받기도 하고
다크샤이어로 넘어가서는 마을 분위가가 너무 음산해서 안그래도 무서운데
처음으로 호드를 만났다........플레이하며 처음 마주친 호드의 포스가 생생히 기억난다.
해골마를 타고 있고 레벨도 해골이어서 더 무서웠다.

다크샤이어에서 퀘를 할 때 쯤 와우 오픈베타가 끝나버렸다. 
이후엔 오빠와 엄마의 주민번호를 이용해 신규가입 후 10일 무료이용권을 받은 후 기간이 끝나면 신규가입..반복으로 게임을 즐겼다. 그러니 나는 항상 쪼렙이었다....
허나 이후 무료체험기간과 더불어 또하나의 찬스였던 공개테스트서버가 열릴 때마다 만렙을 생성해 타렌밀농장에서 필드쟁을 했다. 
나는 항상 같은 닉네임을 생성했는데 그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간을 두고 열리는 공개테스트에서 아는 닉네임을 만나면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수능을 치고 대학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와우를 하기 시작했다.
필드에서 호드를 마주친 그 공포가 계기가 되어 나는 호드를 다시보게 되었고
언데드 여캐 도적으로 와우를 다시 시작했다. 
고심해서 외모를 골랐다. 나름 스모키화장한 것 같은 눈알없는 얼굴이 그나마 나았다.
접속하니 아무리 봐도 몹같은 엔피씨들이 나를 환영하고 나에게 퀘스트를 주었다.
헌데 곧 무릎을 삐걱거리며 뛰어가는 송장에게 무엇인지 모를 끌림이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와우를 시작하고 레벨을 올리며 자연스럽게 길드에 가입하게 되었다.
당시 와우에는 여성유저가 더 적었고 보통 얼라이언스를, 또 보통 천직업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언데드 여캐 돚거를 플레이하는 나에게 '뭐지 이여잔?' 하는 각별한 관심이 쏟아졌다.
거기다 공테섭 힐스브래드 필드쟁으로 나도모르게 pvp 실력이 쌓였는지 겁이 없어졌는지
퀘하다 만난 빨간 렙 얼라에게 죽더라도 개기는 모습을 보여주니 길드원들이 나를 무쟈게 칭찬해줬다.

그렇게 와우에 중독되었고..나는 내 단짝친구이자 당시 재수생에게 와우 영업을 시작하고 만다.
그녀는 흑마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졌고 나는 '흑마는 악마를 소환해서 펫처럼 부릴수 있다'와 '(당시)사기캐' 라는 떡밥을 뿌렸다.
그녀는 수능을 친 후 언데드 여캐 흑마를 만들었고, 나는 같이 키울 부캐를 만들게 되는데
나는 오크 여캐 냥꾼을 택한다. 그것도 펫은 당시 핫했던 가시구릉 멧돼지...
어느새 호드의 매력에 젖어든 나는 비주얼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그녀는 나의 충격적인 캐릭터 선택을 두고두고 지적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나야 어차피 뒷통수만 보고 플레이를 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녀는....;;
적에게 돌진하는 멧돼지와 우람한 팔로 활을 쏘는 오크여캐가 내편이라면 그래도 든든하지 않았을까 한다.

냥꾼과 흑마가 같이 다니니 필드에선 거의 무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기공을 배워 고블린 점퍼케이블로 플레이어를 부활시킬 확률이 있었기 때문에
흑마인 그녀는 나에게 영석을 걸고 다녔다.
상대진영에게 발려서 둘 다 누워있으면 으레 흑마가 영석으로 일어나겠거니 하고 그녀가 주시대상이 되었지만
냥꾼인 내가 벌떡 일어나 활을 쏘면 상대는 당황해서 반격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와우 폐인이 되어갔다.

헌데 그녀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나는 쪼렙 키우기와 전문기술 올리는 등 소소한 것에 재미를 느끼는 스타일이고
그녀는 만렙이 되어 인던과 레이드를 돌며 아이템을 맞추는 것에 더 재미를 느꼈다.

내가 만렙을 찍고 재미가 시들해졌던 건 템렙에 따라 상대진영과의 필드쟁에 우세가 갈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쪼렙끼리 붙어서 대등하게 치고받고 싸우는 게 나에겐 더 재미있었다.
헌데 어느새 계정귀속템이란게 생겼다. 쪼렙이 쪼렙같지가 않아졌다.
그렇게 내가 와우에 시들해졌을 즈음 그녀는 파밍에 한참 열을 올렸다.

내가 알바와 학점때문에 와우를 쉴때 그녀는 내가 오르지 못한 경지에까지 도달해있었다.
어쩌다 같이 피씨방에 가면 나를 살펴보기하며 제발 인던좀 가라고 했다.
나중에는 성기사 만렙을 들고와선 다짜고짜 인던으로 납치해 능숙한 솜씨로 탱을 해줬다.
와우에 뜸해지니 내가 선택한 오크여캐냥꾼의 실체가 그제서야 명확히 보이기도 했다.
수많은 쪼렙 캐들을 살펴볼 때마다 갑자기 똭 오크여캐와 멧돼지가....흠칫한다. 그녀에게 미안해진다.

그녀가 모든 파밍을 마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오프라인 생활관리에 실패해 강제 와우 휴식기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업적제도라는 게 생겼다.
그야말로 나를 위한 시스템이었고 나는 와우에 복귀하며 업적덕후가 되었다.
업적때문에 인던과 레이드에 갔다.
그녀도 나처럼 업적에 관심을 보여 같이 플레이를 잠깐 했지만 
여성유저로써의 스트레스와 지나친 와우 중독을 끊어보겠다고 다짐하며 매몰차게 접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퇴사하고 해외로 나와있는 지금까지
와우 4주년 5주년...9주년 차곡차곡 위업이 쌓인 라이트 유저다. 
새로 생기는 모든 편리함이 사기처럼 보이는 꼬부랑 할매 마인드로 소소하게 업적을 진행한다.
아무도 없는 길드에 혼자서 부캐 키울때를 대비한 잡템을 정리한다.


배틀넷에 접속할떄마다 '그녀-접속종료 2년' 이라는 문구가 항상 마음아프다.....
와우에서 만나고 2년 넘게 장거리로 사귄 구남친조차 보기 힘들다.
여전히 '게임하는 여자' 타이틀이 부끄러워 남친 몰래 짬내서 와우한다.
얼마전엔 할로윈 이벤트때문에 정액제를 끊었는데 서버 시차 계산을 못해서 
노움 왕사탕 분노 업적 하나만 미완성으로 남겨두고.....성자 칭호를 못달아서 속상했다...

십년 더 서비스 할 계획이라는 블자의 발표가 반갑다. 
수많은 와우 유저중에 나처럼 혼자 이렇게 소소하고 꾸준히 즐기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텐데
우리는 너무 수줍어서 서로 존재를 모르고 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