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지 마라.” 스러져 가는 황혼 빛을 등지고 검은 윤곽으로만 보이는 아키발드
그레이메인 국왕이 말했다. “언제나 네 혼자 힘으로 당당히 일어서야 한다. 그게 바로 위대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과 다른 점이란다.”


이제 일곱 살이 된 왕자 겐은 부친을 향해 뻗었던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겐은 막 완성된 요새의
성벽 위, 서늘한 돌바닥에 다리를 꼬고 주저앉아 있었다. 이 성벽은 길니아스의 힘을 만천하에 알리는
인상적인 상징물이었다. 하지만 겐에게는 앞에 선 국왕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아키발드는 자신이 즐겨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다른 왕국들의 손을 빌어 이 도시를 세웠다고
생각하니?”길니아스 시의 산업을 상징하는 탑들이 아래에 흐릿하게 보였다. 그야말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자갈이 깔린 길 위로 큼지막한 기와가 덮인 지붕들이 펼쳐졌다. 상점과 공장이 보이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길니아스는 미래를 바라보는 도시였고, 시민들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도시였다.


“내가 너처럼 어린 왕자였을 때만 해도, 아버님께서는 이런 광경을 꿈도 꾸지 못하셨단다! 하지만 나는 그런 꿈을 꿨고, 온 힘을 다 바쳤다. 이제 우리 모습을 보거라… 스톰윈드의 도움을 받지도, 로데론에 협력을 구걸하지도 않았지만 여기 이런 도시를 만들어 냈잖니. 물론 우린 쿠엘탈라스의 거만한 뾰족 귀 반인간들에게 굽실거리지도 않았지.”


아키발드가 왕관을 물려받기 전의 길니아스에 대한 이야기를 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번영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이제 일어나거라, 얘야. 그리고 다시는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마라. 언젠가 나라 전체가 네 것이 될 테고, 그때는 너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나라는 아빠 거예요. 언제까지나 길니아스의 주인은 아빠라고요.”
아키발드는 미소를 짓고,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란다, 미래의 왕은 바로 너야.
왕자는 커서 왕이 되고, 낮은 저물어 밤이 된단다.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이리 오너라. 바람이 차구나. 가서 식사를 해야지. 오늘 저녁엔 멧돼지 구이가 나올 거다.”


겐은 서둘러 일어났다. 겐이 아는 아제로스 최고의 요리사인 주방장이 토끼엉겅퀴풀을 곁들여 구워낸
육즙 많은 멧돼지 요리는 어린 겐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양념 사과도 나올까요?”
“네가 먹고 싶다면 당연히 나오지. 왕자와 왕은 다 그렇단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성벽을 따라 내려갔다. 어둡게 멍들어가는 하늘에는 저무는 햇살이 비명처럼 번졌다.


나이트 엘프 수송선은 점점 더 거칠어지는 바다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뱃멀미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배가 요동칠 때마다, 천 년쯤 전에 이 인상적인 배를 만들 때 사용한 고대의 나무판자가 삐걱거리며 날카롭고 애처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퀴퀴한 객실에서 겐 그레이메인 국왕은 눈을 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머릿속을 갉아먹으며 그를 괴롭혔다. 이 기억뿐이 아니었다. 요즘 깨어 있을 때면 항상 과거의 기억이
마치 강물처럼 그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와 다른 생각을 모두 수장시켰다. 마치 그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그에게 전하려 하는 것만 같았다. 기억은 그렇게 신비한 일종의 마법과도 같았다. 어쩌면 달라란의 두건 쓴 마법사들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강력한 비전 마법보다 더 낯설고 강한 힘을 가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드러누워야 했다. 최근 있었던 전투 때문에 온몸이 쑤셔왔다. 왕국의 운명이 걸린 전투, 결국 패하고 말았던 전투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겐은 눈을 감았다. 떨쳐버리려 했던 영상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돌바닥에 짤랑거리며 떨어진 포도주잔, 자랑스레 벽에 걸린 길니아스의 깃발, 그리고 이제 죽어버린 그의 아들 리암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그의 품 안에 쓰러진 모습.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레이메인 국왕님. 요즘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지요.”
그는 놀란 듯 눈을 떴다. 한 나이트 엘프가 보랏빛 손을 겐에게 내밀고 있었다. 탈라르 오크탈론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겐은 그 나이트 엘프가 부드럽긴 해도 약한 남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키가 훤칠한 탈라르는 화려한 가죽 갑옷과 비단 로브를 입고 있었다. 로브는 겐이 처음 보는 색상이었다. 파란색 같기도 하고 초록색 같기도 했지만 확실히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밀지 않은 손에 든 커다란 지팡이는 아름다운 깃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겐은 아주 잠깐 자기 앞의 손을 바라봤다.


“비록 늙은 왕이지만 당신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소, 탈라르 오크탈론.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단 말이오.” 밀물처럼 밀려오는 고통을 참아내며 겐은 일어섰다.
탈라르는 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애써 실망하는 표정을 감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쁜 소식이 또 있습니다, 국왕님. 갑판 위로 올라가 주시겠습니까?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횃불이 깜빡거리며 로데론 왕실의 귀빈실을 둘러싼 화강암 벽에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겐과 길니아스를 대표하는 일부 귀족 가문의 대표들은 아제로스의 지도자들을 긴급 소환한 테레나스
국왕의 요청에 따라 로데론을 방문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이들은 오크가 주축이 된 호드 세력이 스톰윈드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접했고, 끔찍한 시기가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여러 국왕과 격식 차린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겐은 숙소로 돌아와 자신의 동포들과 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언쟁이 시작되었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 저주받은 녹색 짐승들이 언제 우리 성문을 두드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레이메인 국왕님. 얼라이언스와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 괴물들이 다른 왕국을 모두 짓밟고 우리 땅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야 합니다.” 크롤리 경은 겐보다 어렸지만 영리한 사람이었다. 정치판의 섬세한 면은 아직 볼 줄 몰랐지만, 전망이 밝은 귀족이었다. 그는 그레이메인 본인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열정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영주들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크롤리 경, 물론 당신이 걱정하는 바도 잘 알고 있소. 정말이오. 하지만 이들… 오크…는 우리 땅과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소. 길니아스의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소. 물론 나도 스톰윈드와 어린 바리안 왕자, 그리고 로서라는 영웅에 대해서는 정말 마음속 깊이 아파하고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내 백성을 같은 운명 속으로 밀어넣어야 한다는 말이오?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명분 때문에 희생해도 괜찮을 만한 길니아스인이 한 명이라도 있단 말이오?” 겐은 완강했다. 오크의 위협은 분명히 낯설고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자신의 부지런한 백성이 직접 짊어져야 하는 문제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오크는 사실 짐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인격을 갖추지 못한 절반의 존재, 괴물이었다.


“국왕님, 지금 말씀하신 대로 다른 왕국들은 모두 열성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트롤베인과 페레놀드,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까지 참전하는 마당에, 우리가 그들과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의 이웃이나 친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크롤리가 말을 이었다. 겐은 그가 왜 인기가 좋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크롤리의 말에는 열정이 넘쳤다. 정치적인 고려 따위는 없었다. 동료들을 걱정하는 한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지만, 겐은 그래도 그를 존중했다. 크롤리는 자신의 연민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그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백성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젊었고, 귀족의 지위에 오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아버님은 우리 백성이 로데론, 스트롬가드, 알터랙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으셨소. 크롤리 경, 세상에는 강한 나라도 있지만 약한 나라도 있소. 그게 세상의 이치요. 우리 길니아스는 강하고, 길니아스인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동포의 평안을 바라야 하오.” 이제 겐이 모두를 사로잡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최전방에서 날아올 첫 번째 소식을, 아들을 잃은 어머니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상상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테레나스와 로서의 요청에 희생될 목숨 값을 실제로 매기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뒤편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왕님,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이웃 왕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또 앞으로 교역을 하고 관세를 받는 데 문제가 없도록 소규모 부대만 파병하면 어떨까 합니다. 길니아스의 병사들이 소규모라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미 국경 지역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상설 민병대가 있으니, 이들을 써먹어 보시지요.”


그의 이름은 고드프리였다. 겐은 그의 충고를 귀담아들었지만, 그의 야망에 대해서는 항상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고드프리의 제안은 크롤리처럼 연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영리한 정치적 행보였고, 바로 이런 수완 덕분에 고드프리는 오늘날의 악명과 저 상설 민병대의 사령관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일리는 있었다. 교역과 관세를 통해 길니아스는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이런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분명히 일리 있는 방안입니다, 국왕님.” 겐이 가장 신뢰하는 친구 중 하나인 애쉬버리 남작도 덧붙였다. 겐은 애쉬버리와 함께 자랐다. 남작의 아버지인 애쉬버리 1세는 아키발드를 도와 길니아스를 세웠고, 아키발드는 겐에게 항상 애쉬버리 가의 충성심을 신뢰하라고 가르쳤다. “그 제안을 고려해 보겠소.”


겐과 탈라르는 서둘러 나선 계단을 걸어 갑판에 올라섰다. 모두에게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상황에서도 겐은 엘프 선박의 화려한 모습에 놀랐다. 세밀한 부품까지 장인의 솜씨로 멋지게 장식되어 있었다. 여러 층으로 나뉜 거대한 선체는 길니아스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길니아스 분들은 고집스럽군요, 그레이메인 국왕님.” 지난 며칠 동안 탈라르는 크게 실망한 상태였다.


“우리 모두가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이라오, 드루이드여.”
“네, 정말 그렇더군요.” “항상 예의 바르게 말을 하는구려, 탈라르. 그래도 내심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히 말해주면 좋겠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나를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소. 부디 솔직히 말해주기 바라오.”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우리는… 아니, 아제로스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국왕님.
우리가 정말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이 위기를 끝까지 헤쳐나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국왕님께서는 동부 왕국 대륙의 다른 모든 왕국으로부터 길니아스를 격리한 지도자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도움을 구하는 요청을 거부한 국왕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드루이드고, 우리는 세상 만물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자연의 모습입니다. 생태계지요. 제가 보기에 국왕님의 선택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당신과 당신 동포들에게는 큰 빚을 졌소, 탈라르. 어쩌면 우리가 서로 너무 다를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편을 가르지는 않았으면 하오.” 탈라르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대드루이드 스톰레이지 님께서는 국왕님과 길니아스 백성이 얼라이언스의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고 믿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의 지혜를 믿습니다.”


“얼라이언스의 자산이라고?” 겐은 깜짝 놀랐다. “우린 당신들에게 큰 빚을 졌소. 그건 사실이오… 하지만 당신네 고귀한 얼라이언스의 일원이 될지 그러지 않을지, 또 정말 중요한 자산이 될지는 어떤 확답도 해줄 수 없소.” “안타까운 말씀이군요. 하지만 그건 모두 정치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은 살아남아 오늘을 넘기는 거지요.”


바깥의 햇살은 이미 스러지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지만, 모두 컴컴한 수평선에
먹혀 버렸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겐의 코를 채웠고, 멀리서 끔찍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의 보랏빛 엘프들이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폭풍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겐의 백성도 보였다. 분홍빛 피부의 사람들, 그리고 늑대인간들. 늑대 형상의 남녀 여럿은 구원자의 요청에 따르려 하지 않고 있었다.


“국왕님, 보시다시피 저들은 명령을 무시하고 폭풍을 대비하려는 저희 작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갑판원을 제외하고 전원 아래 선실로 내려가라는 제 명령도 거부했습니다.” 뱃머리 부근에는 두 명의 아름다운 여성 파수꾼이 아딧줄을 붙잡은 늑대인간을 떼어내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듯했다. 밀쳐진 데 화가 난 늑대인간은 세 번째 나이트 엘프 선원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저희의 원래 임무가 남은 백성을 모두 다르나서스로 모셔가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본래는 늑대인간을 돕는 거였지요. 인원이 너무 부족합니다. 저길 보세요. 단순한 국지성 돌풍과 소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최악의 장애물과 맞닥뜨린 걸지도 모릅니다.” 탈라르가 말을 이었다.


“좋소, 탈라르.” 바다 위에는 다른 나이트 엘프 선박 여러 척이 이 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엘룬의 광휘호에 겐의 가족, 즉 아내 미아와 딸 테스가 타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자신의 생각에서조차 아들의 자리가 빠져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평생 견뎌내야 했던 어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이 느껴졌다. 왕국을 잃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었다.


“정찰대가 돌아온다!” 망대 위의 망꾼이 음울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폭풍으로 어두컴컴해진 전방에서 검은 얼룩 세 개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서히 커지면서 이들은 얼룩이 아니라 세 마리 거대한 폭풍까마귀로 변했고, 모두 맹렬한 속도로 탈라르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폭풍까마귀들은 다급한 듯 크고 거슬리는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고, 겐의 귀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곧 거대한 까마귀들은 변신했다. 몸의 형태를 바꾸는 이런 모습이 겐에게는 아직 낯설었다. 길니아스의 농민 중에도 드루이드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겐이 이런 모습을 실제로 본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새의 형체는 꿈틀거리며 비틀리다가, 결국 본연의 형체, 즉 칼도레이 드루이드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두 명은 남성이었고 한 명은 여성이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모든 선박에서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여성 드루이드가 말했다. “저… 저런 폭풍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거인의 세 배는 될 듯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옵니다… 부서진 배의 잔해가 온 바다에 떠 있습니다.” 남성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완연한 공포를 숨길 수는 없었다.


“제가 걱정했던 일이 벌어졌군요.” 탈라르가 말했다. “어서 가서 다른 선장들에게도 경고의 말을 전해 주십시오. 홀로 떨어진 배는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즉시 서로 엮어 함대를 구성해야 한다고 전하십시오!”
드루이드들은 망설임 없이 폭풍까마귀 형태로 다시 변신하여 다른 선박들로 날아갔다. 겐은 멀지 않은 앞쪽에서 바다가 요동치고 검은 비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항해 경험이 많지 않은 그가 보기에도 지금 상황은 심각해 보였다.


“저 저주받은 검은용이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는군요.” 탈라르가 말했다. 길니아스를 가까스로 탈출한 이후로 겐은 탈라르가 이렇게 격해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대격변 이후… 세계가 아직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폭풍이 바다를 찢어내고 있어요.”


“파괴자 데스윙은 괴물이오. 그건 틀림없소… 하지만 그 괴수가 이렇게 거대한 대격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기에는… 그놈 하나 때문에 여진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믿으십시오, 겐 그레이메인. 제가 말씀드렸듯, 지금은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시기입니다. 이번 위기를 살아서 넘긴다고 해도, 길니아스의 걱정은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자, 백성들을 선실로 내려보내가십시오. 선원들은 세밀한 작업을 해야 하니 방해해선 안 됩니다. 다른 선박에 탄 길니아스인들에게도 모두 우리 말을 따르라는 명령을 전해 주십시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탈라르는 손을 흔들며 함교의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도와주겠소, 탈라르. 백성들도 능력이 있소.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기도 하니 기꺼이 돕고 싶을 거요.”
“말다툼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도 길니아스인들이 대해의 바닥에 가라앉아 나가의 먹이가 되는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 이번 사태에, 우리 배에서, 길니아스는 우리에게 협력해야 합니다.”


배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선원들의 위로 비가 세상을 뒤덮듯 쏟아져 내렸다. 바다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겐은 지금 자신과 백성들이 논쟁을 펼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운명을 모두 칼도레이 사람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울부짖는 바람과 함께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솟아올라 선체에 부닥쳤다. 배가 크게 기울어지며 갑판 위의 인간, 나이트 엘프, 늑대인간 모두가 비틀거렸다. 겐도 발이 미끄러졌고, 돛줄 한 가닥을 단단히 붙잡고 나서야 겨우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 폭풍, 이번 해일은 정찰대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빠르고 강력했다.


이제는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쏟아져 내리는 비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백성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이트 엘프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애써 몸을 앞으로 내밀고, 겐은 백성들에게 소리쳐 명령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얼음 덩어리처럼 두꺼운 안경 너머로 고드프리가 그를 쏘아봤다. 지금 겐이 한 말은 정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작전실이라는 공간에 어울릴 법한 이야기였다.


“내 말 다 들었지 않소, 고드프리.” “길니아스를 온통 둘러싸는 장벽을 세우자고 하셨습니까?
국경을 폐쇄하고 나머지 얼라이언스 전체와 교역을 끝내자고요? 그건 조금 지나친 결정이 아닐까요?”
“당신과 크롤리 경의 말은 이미 한 번 들었소만, 그게 지금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 보시오! 길니아스 사람들이 죽었소. 그 초록색 악당들에게 찢겨 버렸지. 그리고 이제 얼라이언스는… 당신들 둘이 우리에게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했던 그 잘난 얼라이언스는 점점 더 많은 걸 요구하고 있소. 그들은 계속해서
가져가지만, 그래서 우리가 받는 건 뭐요? 당신들이 확신하던 그 잘난 혜택은 도대체 어디 있소? 이제는 그 요새… 네더가드를 짓는 데 쓸 돈까지 요구하고 있소. 대체 그 먼 곳에 있는 전초기지가 길니아스,
그리고 우리 백성들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겐은 말대답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고드프리는 오랜 떡갈나무 탁자 위에 놓인 해진 지도를 바라봤다. 그는 이 문제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때가 아님을 깨닫고 포도주잔을 들어 올렸다. 겐은 결단력 있는 왕이었다. 바로 그의 부친처럼.
고드프리는 포도주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쿨 티라스 산 적포도주였다. 혀를 굴려 술을 음미하며 그는 이게 그 섬나라의 포도주를 맛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쁜 생각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우린 얼라이언스의 손을 잡았소. 그들을 도와주고 우리가 받은 게 뭔지 생각해 보시오. 얼라이언스가
우리 덕을 보는 동안 정작 길니아스는 가난해졌소… 오크… 그 피에 굶주리고 야만스러운 괴물들도 나타났고. 당신도 놈들을 봤을 거요. 그리고 놈들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도… 이제 테레나스는 우리에게 돈을 더 내놓으라더군. 우리 피도 더 내놓으라 할지도 모르겠군. 난 절대 안 된다고 답하겠소!” 겐은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흔들림 없이 말했다.


“이 장벽은 귀족의 영토를 지나가야 할 겁니다. 그 점도 고려하셔야죠. 일반 국경을 둘러싸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장벽이 약해질 겁니다.” “물론 그 점도 알고 있소! 영토를 잃는 귀족뿐 아니라 그 영지 안의 농부와 시민들까지, 누구나 보상을 받게 될 거요.”


고드프리는 포도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머릿속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느라 요동치고 있었고, 두 눈은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는 의자에 기대 앉았다. “이 지도를 보니 말리 경의 영토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만 국왕님, 지형을 자세히 보니… 여기 산이 있습니다. 이를 이용하면 아주 거대한 방벽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양 측면에 산을 두면 아주 튼튼한 천연 방벽이 될 겁니다.”


“그 말이 맞소.” “네, 하지만 그러려면 크롤리 경의 땅이 일부 고립되어야 합니다. 장작나무 마을과 호박색 농장이 고립되겠군요.” “그 생각도 이미 해봤소. 합당한 생각이지만… 크롤리의 권세가 대단하오. 심지어 당신과 대등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소, 고드프리. 이 일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소.”


“네…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이게 일리가 있는 방안임을 그도 알게 될 겁니다. 길니아스를 위한 최선의 안입니다. 누가 봐도 그렇습니다. 이러면 절대 뚫리지 않을 방벽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고드프리는 이렇게 주장하고는 포도주를 꿀꺽 삼키며 겐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그렇겠지, 고드프리. 그리고 그러면 당신의 영토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될 거요.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완충지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 바로 당신의 영토가 장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될 테지.” “국왕님, 모두 우연한 결과입니다. 길니아스를 위한 일일 뿐이고요. 제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그만 하시오, 고드프리. 당신 말이 맞소. 나도 알고 있소… 당신의 동기가 무엇이건 상관없소, 오랜 친구여.”


“국왕님, 저는…”
“저 산들을 잇는 장벽을 쌓고 북문의 영토가 완충지 역할을 하도록 하면 길니아스를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소. 당신 의견에 동의하오. 크롤리 경… 다리우스도 이 일을 받아들여야 할 거요.”
고드프리는 잔을 비우고 서둘러 한 잔을 더 따랐다. 앞으로 몇 년간 포도주와 에일 맥주를 아껴 마셔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법항 근처 열대 지방에 사는 자들이 말하는 “시디신 레몬을 달콤한 레몬주스로" 바꾸어 놓은 날이 아닌가. 그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당장 귀족원 회담을 소집해야 합니다.” 고드프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게 옳은 길입니다, 국왕님.”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겐은 깜빡거리는 촛불 빛에 취한 듯 보였다. 불꽃 안에 그가 꿈꾸는 미래라도 있는 것처럼 갈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생각해 보시오… 외부의 훼방이 없다면 우리 미래가 얼마나 밝아질지… 한번 생각해 보시오.”


배들은 거친 파도와 싸우며 힘겹게 한데 모여 조직적인 대형을 이뤘다. 나이트 엘프 선원들은 배의 좌현과 우현에 각각 모여 서로 옆 배의 선원들에게 밧줄을 던졌다. 단순한 생각이었다. 여러 배를 서로 단단히 묶어 거대한 함대를 구축하면 배가 각자 떨어져 있을 때보다 잔혹한 폭풍을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후방의 선박들은 돛대가 심각하게 파손되었습니다, 선장님!” 갑판원 한 명이 소리쳤다. 탈라르는 함교의 뒤편으로 달려가 내다봤다. “이보시오, 탈라르… 엘룬의 광휘호는 어디에 있소? 후방에 있지 않았소?” 비에 젖은 계단을 지나 함교에 급히 올라서며 겐이 물었다.


탈라르는 머뭇거렸다. “그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그 배의 행방을 알 수가 없군요.” 탈라르는 긴 보랏빛 손가락을 뻗어 우측을 가리켰다. 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 어둡게 내리쏟아지는 비 사이로 배 두 척의 윤곽선이 어렴풋이 보였다. 한 척은 크게 손상되어, 다른 한 척의 배에 끌려 오고 있었다.


“나이트 엘프! 망원경을 주시오. 당장!”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겐은 선원에게서 망원경을 빼앗았다.
망원경을 통해서 후방의 선박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우려하던 바가 맞았다. 크게 손상되어 돛대가 부러지고 찢어진 돛이 뱃머리에 펼쳐진 배 한 척을 엘룬의 광휘호가 끌고 있었다.


“전 선원, 충격에 대비하라!” 망대 위의 파수병이 절규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경고였다. 배가 크게 기울어지며 겐의 발밑 선체가 사라졌다. 그를 포함한 주변 모두는 허공에 내동댕이쳐졌다. 망원경은 그의 손에서 떠나가 쨍강거리며 갑판을 따라 내려갔다. 갑판은 이제 위로 치솟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서늘한 바닷물이 덮쳐왔다. 나무에 부딪힌 머리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고, 거꾸로 미끄러져 내린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고통을 타고 과거의 영상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돌바닥에 짤랑거리며 떨어지던 포도주잔, 그리고 리암의 얼굴.


쾅! 공중으로 떠올랐던 배가 다시 바다에 떨어졌고, 겐의 귀에는 엄청난 충격음이 울렸다. 와지끈 소리를 듣고 겐이 고개를 들어 보니, 충격의 여파로 반으로 쪼개진 뒷돛대가 갑판에 충돌하는 모습이 보였다. 배에 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바삐 움직이는 선원들의 신경질적인 고함이 들려 왔다.


“이번 파도는 25미터는 됐을 겁니다. 이렇게 재앙 같은 파도는 배가 견뎌낼 수 없습니다, 선장님!” 쓰러진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갑판원이 소리쳤다. 겐도 일어서며 중심을 잡아보려 했다. 그의 귀는 여전히 먹먹하게 울리는 소리로 윙윙거렸다. 이제 파도는 수평선에 있는 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로 엘룬의 광휘호와 파손된 다른 배였다.


“미아! 테스!” 손쓸 겨를도 없이 거센 해일이 궁지에 몰린 배에 충돌했다. 겐에게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두 척의 수송선이 서로 충돌하며 톱날에 튀어오르는 나무 조각들처럼 나무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바다가 거대한 입을 열고 배의 잔해를 모두 삼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파손이 심했던 배는 바다에 아예 먹혀버렸고, 엘룬의 광휘호 역시 심하게 부서져 바다 위를 떠돌았다.


“빛이여!” 겐이 내뱉었다. 힘없는 기도처럼 작은 속삭임이었다.
부서졌던 배는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고, 엘룬의 광휘호만이 홀로 남아 바다의 거친 손아귀에
붙잡혀 가라앉기 시작했다. “구조선을 내보내라. 어서 저들을 구해야 한다!!!” 광란에 빠진 배 위에서 탈라르가 소리쳤다. “하지만 폭풍이 계속 다가오고 있습니다, 탈라르! 곧 다음 해일이 몰려올 겁니다!” 한 선원이 소리쳤다. 윙윙거리는 겐의 귓속에서도 같은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놈들이 계속 다가오고 있습니다, 국왕님! 곧 다음 무리가 몰려올 겁니다! 도무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경비대장은 공포를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발 밑의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겐, 10대 시절의 리암, 경비대장, 그리고 아루갈이라는 이름의 악명 높은 왕립 대마법사가 그레이메인 성벽 위로 높게 솟아오른 망루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발아래에는 어기적거리는 언데드 무리가 바다를 이루었고, 거미 같은 생물이 수도 없이 모여
성벽으로 달려들었으며, 부패한 시체의 피부를 꿰매 붙여 만든 흉물스럽고 거대한 괴수가 모여들었다. 이 사악한 강령술의 근원은 불분명했지만, 놈들이 어디서 몰려나오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로데론이었다. 불과 몇 주 전 길니아스에 도움을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던 바로 그 로데론이었다.


“빛이여! 저들을 보시오. 정말 너무… 너무 많지 않소.” 겐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움직이는 해골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그들의 신음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울려 퍼졌다. 언데드 무리는 단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쫓아 움직였다. 그 목표는 바로 이 성벽을 뚫는 것이었다.


성벽 외부의 길니아스 병사들은 쇄도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해 불화살을 쏘아댔지만 헛된 몸부림이었다. 화살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되어 날았고, 압도적인 수로 몰려드는 적을 맞추고는 스러졌다. 하지만 한 언데드에 불이 붙어 쓰러져도 곧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국왕님. 벌써 며칠째 똑같은 상황입니다. 제… 제 생각에는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여기 이 거대한 성벽이라 해도 끝없이 밀려드는 저들의 손에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경비대장은 당황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는 사람이 봐서는 안 될 끔찍한 광경,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공포를 두 눈에 새겨왔다.


“진정하라! 너는 길니아스인이다. 길니아스의 자긍심은 어디로 간 것이냐? 이 성벽은 당연히 버텨낼 거다. 물론 우리도 이번 사태를 견뎌낼 것이다.” 겐의 말투는 단호했다.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도력을 보여줘야 할 때였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야만 했다. 길니아스의 고동치는 심장이 되어야 했다.
그는 성벽 외부를 바라보며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병사들이 후퇴하여 성벽으로 밀려드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 위기가 닥쳐왔을 때 자신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다. 분명히 해결책이 있을 터였다.


“아버님, 제… 제 말을 들으셨어야 합니다.”
겐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아들, 리암이 지금 이 상황에서, 겐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념을 불어넣어 주려고 애쓰고 있는 앞에서 자신의 판단에 또다시 의문을 제기하다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조용히 해라.” 겐의 두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겐은 자기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대마법사를 바라봤다. 아루갈은 언제나 조금 신비로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그는 그다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는 듯했다. 그 대신 아래에서 우글거리는 살아 있는 시체들에게 흥미를 느껴 두 눈으로 해부라도 하듯 차분하고 정돈된 눈빛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비전 마법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겐은 그들 중에서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상급 마법사여…”
“예, 국왕님.” 아루갈이 차가운 숨을 내뱉듯 말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발아래의 참상을 핥고 있었다.
“전에 의논한 대로… 하시오. 어서!” 아루갈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입가에는 새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능글맞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국왕님.”


그리고 아루갈은 겐과 리암, 경비대장을 끔찍한 소음이 들려오는 성벽에 남겨두고 사라져 버렸다.
갑옷에 부딪히는 철제 무기의 날카로운 소리, 점차 높아지는 언데드의 신음, 죽어가는 길니아스 병사의 비명. 잠시 겐은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했다. 그는 아루갈이 소환한 늑대인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위험한 짐승이었고, 수가 많아지면 골칫거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어쩌면 괴물은 괴물로만 무찌를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함대는 폭풍에 정면으로 맞섰다. 거대한 해일이 배 위로 쏟아져 내렸지만, 단단한 목재와 강철 못으로 결합한 선박들은 하나가 되어 버텨냈다. 한 배가 손상되면 즉시 다른 배의 선원들까지 함께 모여 피해를 복구했다. 하지만 이 함대는 엘룬의 광휘호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미아와 테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엘룬의 광휘호, 아니, 그 배의 잔해는 여전히 멀리서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부글거리는 파도와 맹렬히 쏟아지는 비에 새하얀 거품이 이는 바다 위로 네 척의 구명선이 내려졌다. 거품으로 뒤덮인 바다는 칠흑 같은 구름에 덮인 하늘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나이트 엘프의 날카로운 글레이브를 등에 맨 파수병 몇 명이 줄사다리를 타고 구명선으로 내려갔다. 겐은 배의 우현까지 탈라르를 쫓아갔다.


“탈라르… 나도 당신과 함께 가야겠소.” 그는 애원했다.
“그레이메인 국왕님, 제 임무는 그대와 그대의 백성들을 다르나서스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하늘을 쪼개는 천둥과 배를 때리는 바람 소리 때문에 탈라르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국왕님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이번 원정단의 지도자인 제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여기 목숨을 거는 건 제 병사들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왕비님과 공주님을 모셔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은 내 전부요, 탈라르. 나는 반드시…”
“국왕님께서는 여기 남아 계셔야 합니다!” 탈라르는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구명선으로 뛰어내렸다. 구명선은 그 즉시 엘룬의 광휘호, 그리고 바다 위에 뜬 보라색과 분홍색 점이 되어 팔을 흔들고 있는 조난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겐은 일렁이는 파도 위를 흔들거리며 떠가는 구명선을 바라봤다. 안 돼. 그는 멍하니 기다릴 수 없었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가족이 아니던가. 그들의 믿음에 보답해야 했다. 지금까지도, 이 세상이 조각난 지금까지도, 그 많은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자신을 미아와 테스는 믿고 지지해 줬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크게 울부짖었다. 몸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몸은 커지고 털이 순식간에 자라났으며 얼굴은 털북숭이 늑대 주둥이로 변했다.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허리를 뒤로 크게 꺾고 양팔을 하늘을 향해 내뻗은 채, 그는 변신을 마쳤다. 그는 늑대인간이었다. 오래전 아루갈에게 소환하게 했던 늑대인간, 포세이큰과 함께 결국 자신의 고향을 파괴했던 바로 그 늑대인간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는 더 빠르고 강했다. 자신을 고뇌에 빠지게 한 저주였지만 분명 장점은 있었다.


그는 배의 우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젖은 갑판이 미끈거렸지만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오직 하나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야수의 본능이 그의 핏줄을 타고 흘렀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배의 난간에 도착해서는 도약했다!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자마자 탈라르는 고개를 돌렸다. 빗속을 뚫고 그의 위를 지나 구명선 안으로 떨어진 거대한 형체는 바로 그레이메인이었다. 그레이메인은 두 발로 안전하게 착지하여 탈라르와 눈을 맞췄다. 그의 좌우에 늘어선 파수병들은 본능적으로 글레이브를 꺼내 들고 그를 공격하려 했다.


“내 가족이 걸려 있을 때는 나도 행동해야 하오.” 겐의 음성은 이제 야수같이 무시무시했다.
탈라르는 손짓을 하여 파수병들이 공격 태세를 풀게 했다. “고집스러운 양반 같으니라고.” 하지만 잠시 후, 탈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명선은 가라앉는 배를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엘룬의 광휘호는 신음하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선체는 조각나고 깨어져 뱃머리는 이제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여기요! 도와주세요!”
“빛이여! 제발 구해주세요!” “드루이드 형제여! 도와주시오!”
양팔을 마구 흔들며, 두 다리를 미친 듯이 저으며 길니아스인과 칼도레이인은 요동치는 바다 위로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구명선에 탄 파수병들은 생존자들의 팔을 붙잡아 바다에서 건져냈다. 탈라르와 겐이 탄 구명선은 부서진 수송선을 향해 달렸다. 하늘로 치솟은 뱃머리 위에도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비명은 비, 채찍처럼 달려드는 바람,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배가 만들어내는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생존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겐은 그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해에 빠졌거나, 대해의 영원한 뱃속에 숨은 바다 동물들이 차지하고 말았을 것이다.


“미아! 테스!” 겐은 소리쳤다. 늑대인간 모습일 때는 그의 시력도 더 좋았고, 빗속을 뚫고 바라본 뱃머리에는 가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 식구들은 아직 배 안에 있을 거요! 분명히 그럴 거요!”
“배를 향해 전진하라. 배에 밧줄을 연결해. 지금 당장!”


구조선 위의 파수꾼들은 글레이브에 튼튼한 밧줄을 단단히 묶어 높이 던져 올렸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그 무기들은 뱃머리에 깊이 박혔고, 밧줄이 풀려 내려와 강인한 여성 전사들의 손에 들어왔다.
“배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소. 아직 살아 있다면 배 안에 있을 것이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겐은 구명선에서 뛰어올라 선체에서 돌출된 대못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는 유리가 깨진 현창 중 하나로
기어들었다.


“그레이메인! 멈추세요. 생존자들은 언제나 뱃머리나 배꼬리로 모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하지만 겐은 이미 현창의 나무 창틀을 뜯어내고 가라앉는 배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어리석군… 결국 익사하고 말 거다. 그렇게 혼자 나서고 싶으면 그러라지.” 혼잣말을 마친 탈라르는 거대한 폭풍까마귀로 변신하여 회색 하늘 높이 날아올라 뱃머리의 생존자들을 향했다.


배 안에는 온통 불길이 넘실댔다. 짙은 회색 연기가 피어올라 구름을 이루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열기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고, 숨쉬기도 고역이었다. 모든 것이 기울어져 있었다. 복도 역시 뒤틀리고, 부서진 나무판과 그을린 가구가 가득 널려 있었다. 위쪽, 선실 바깥에서 생존자들의 절망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미아?”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그는 야수의 형상을 하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선실에서 달려 나온 그는 측면 복도를 따라 불길과 무너져 내리는 배의 잔해를 뚫고 달렸다. “테스?!” 중력이 그를 잡아끌었다. 위로 가는 길은 한 걸은 한 걸음이 고역이었다. 기울어진 복도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한때 긍지 높은 칼도레이의 파수대의 전사들이었다. 일부는 나무 잔해에 찔려 있었고, 나머지는 미처 알아차릴 새도 없이 질식하여 죽은 것 같았다. 모두의 눈에는 충격이 가득했다. 그들은 이렇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거꾸로 뒤집힌 벽을 타고 걷고 있었다.
바닥이 그의 왼편에 있었다. 연기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불에 탄 살 냄새가 콧구멍을 파고들었다.


길니아스 시가 불타고 있었다. 연기가 골목을 따라 미끄러지듯 번졌고, 포성이 하늘 가득 울렸다.
겐은 성벽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홍색 노을을 바라보던 바로 그 성벽이었다. 그때는 앞으로 자신의 것이 될 위대한 도시와 왕국을 경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도시가 위험에 처해 있었다. 크롤리가 북문 반란군이라 이름 붙인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지나 공격해 들어왔다. 겐이 보기에 그들은 폭력 분자였고, 그들의 배신을 수습해야 했다.
크롤리는 그레이메인 성벽 문제를 선선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레이메인에게 거역하고 3차 대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에서 얼라이언스를 돕기 위해 여군주 제이나 프라우드무어에게 “길니아스 여단"을 파병하기도 했다.


겐은 이 건방진 귀족을 이성적으로 대해주려고 애썼다. 그는 이 방벽이 길니아스의 발전을 위한 길임을 분명히 했다. 비록 자신의 아들도 다른 의견을 갖고 있긴 했지만 얼라이언스를 돕는 일이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크롤리는 그 안의 진실을 보지 못했다. 크롤리는 길니아스의 미래를 위해 최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겐의 “압제"를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내전이 온 나라를 사로잡고 있었다. 수도는 같은 길니아스인의 공격을 받아 불타고 있었다. 아키발드 그레이메인의 꿈이 스러져 갔다.


겐은 급히 몸을 틀어, 원래 평평했어야 할 복도를 따라 올라갔다. 도움을 구하는 외침 소리를 향해 서둘렀다. 위쪽으로 무너져 내린 선체의 잔해가 출입구를 막은 가운데 보라색 팔이 뻗어 나와 있었다. 그 손은 자신을 가둔 잔해를 애타게 더듬으며 빠져나올 길을 찾고 있었다. 뱃머리 쪽 선실을 지키던 선원들의 손이 틀림없었다.


겐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른팔로 몸을 지지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그는 왼손을 뻗어 그물로 덮인 나무 문틀을 붙잡아 잔해를 부쉈다. 육중한 잔해의 굽은 나무 틈새로 남성 나이트 엘프의 얼굴이 희망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엘룬의 빛이여! 대체 어디서 오신 분이신가요?” 외침이 들렸다.
“구해주러 왔소.” 그는 잔해를 강하게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온 힘을 다해 밀어주시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당신들을 꺼낼 수 있소!”
“그대 말을 따르겠습니다, 늑대인간이여.”


겐은 정신을 집중했다. 뒤죽박죽 섞인 마음에서 기억을 내쫓으려 애썼다. 떨어지는 포도주잔. 돌바닥에 쏟아진 포도주, 피처럼 선명한 그 색… 안 돼. 지금 그런 데 정신이 팔려선 안 된다. 여기서 그렇게 약해질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잔해 더미를 전력으로 끌어당겼고, 나이트 엘프들도 함께 밀어냈다.
와지끈! 잔해가 무너져 내렸다. 겐은 문틀에 몸을 던졌다. 한 나이트 엘프 선원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찰나, 간신히 손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풀려났다!


“고맙습니다. 막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참이었습니다.”
“절대로 불확실한 일을 그냥 받아들이지 마시오, 나이트 엘프. 나를 따라오시오.”
재빨리 몇 명의 선원이 그를 따라 복도를 내려왔다. 진한 연기가 아래에서부터 휘돌아 올라오고 있었다.
“내 아내과 딸은 어디 있소?”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얼굴에 피를 흘리는 선원이 물었다.
“그대가… 그레이메인 국왕님이신가요?” 다른 나이트 엘프가 물었다.
그레이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선실은 이 아래에 있었습니다만, 저흰 두 분을 뵙지 못했습니다. 파수꾼들이 두 분을 뱃머리로 모셔오라는 임무를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요?”
“그 뒤로는 아무도 그들을 보거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두 분은 우현의 선실에 계셨습니다.”
겐의 머릿속에 그가 이 배에 처음 올라탔을 때 봤던 흩어진 파수꾼의 시체들이 떠올랐다. 곧 또 다른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길니아스의 용골 항구에서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파수꾼들의 모습이었다. 그 파수병들은 포세이큰 죽음경비병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밴시 여왕을 따르는 그 언데드 괴물들은 배신자 늑대인간 무리와 처음부터 연합하여 겐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다.


겐과 선원들은 무너져 내리는 복도를 따라 서둘러 달렸다. 배가 점점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가슴이 철렁하도록 흔들리며 급속도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산을 타듯 아래로 기어 내려가며, 그들은 수많은 파수꾼의 시체를 지나쳤다.


“아래로 내려가 왼편으로 가시오. 창 밖에 구조선이 기다리고 있을 거요. 어서 가시오!” 겐은 연기가
자욱한 복도 너머에 있는 그가 들어왔던 선실을 가리켰다. “부인의 선실은 아래층의 배꼬리 부근에 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원이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겐은 몸을 지탱하던 손을 놓고 연기 자욱한 복도를 지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배를 관통하여 떨어져 내린다니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래에서 복도를 따라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미아의 목소리였다. 겐은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문틀을 붙잡으며 낙하를 멈췄다.


“내가 가오, 여보!” 겐은 물에 젖은 복도를 따라 내달렸다. 현창으로 흰 물살이 들이쳤다. 연기와 재가 눈앞을 메워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보!” 미아가 소리쳤다. 앞쪽이었다. 계속 나아가야 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절대 놓치지 않겠소!” 기억은 점점 더 빠르게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조각난 영상이 떠올랐다. 품에 안긴 리암의 상처 입은 모습, 작전실 바닥을 굴러 내려가던 포도주잔, 그리고 흩뿌려진 포도주. 그는 마음속으로 저항했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기억이 사라진 순간, 그는 닫힌 문을 부수며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어여쁜 딸 테스가 그를 꽉 붙잡았다. 딸아이 뒤에는 미아가 쓰러져 있었다. 미아의 다리는 옆으로 꺾여 보라색으로 부어 있었다. 다리가 부러졌음이 틀림없었다. “어머니가… 다리가… 부러지셨어요! 어머니를 이렇게 두고 갈 수가 없었어요… 파도가 덮쳐 왔을 때, 옷장이 어머니 쪽으로 쓰러지면서…”


“가세요. 두 사람 다. 어서 가세요, 여보… 아직 시간이 있어요. 날 그냥 내버려 둬요!” 미아는 고통을
참으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당신을 버리지 않겠소. 절대로!” 겐은 미아의 옆으로 달려가 그녀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미아의 고통스러운 외마디 비명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의 다리는 축 늘어졌다.


“쉬… 조금만 참아요, 여보. 내가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겠소. 꽉 붙잡아야 하오.” 참을 수 없는 고통에도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미소 지었다. 얼굴 전체가 밝아지며 코를 찡그리는 환한 웃음, 아데릭의 왕립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사랑에 빠뜨렸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웃음은 여전히 빛났다. “내 등에 업히거라, 테스. 서둘러야 한다!”


테스는 그의 건장한 몸에 업혀 팔을 둘렀다. 최근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정신을 집중하여 겐은 연기 속으로 달렸다. 온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모두 미아를 보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갑판은 그야말로 홍수가 난 듯했고, 뱃머리로 이어지는 복도는 물에 잠겨 있었다. 그는 한쪽 팔로 몸을 당겨 위로 올라갔고, 테스는 그를 도와 모친을 붙잡았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겐은 가족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 서둘러요! 물이 차오르고 있어요!”


겐은 내려다보지 않았다. 딸아이의 다급한 목소리 만으로도 곧 물이 덮쳐올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려다본다고 해도 도움이 될 일은 없었다. 통로를 돌아서서 파수꾼들의 시체를 지나 일행은 겐이 처음 들어왔던 선실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겐이 미처 걸음을 내딛기 전에, 그의 몸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내와 딸의 비명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지만, 엘룬의 광휘호가 더 깊이 가라앉으며 내지른 굉음에 묻혀 먹먹하게만 들렸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겐은 출구를 향해 달렸다.
현창 밖으로 구조선들이 한데 모여서 마지막 생존자들을 구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살 때문에 구조선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고, 탈라르는 생존자들을 구해내며 절묘하게 배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겐은 앞서 자신이 구해낸 생존자들이 모두 살아남아 구조선에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탈라르! 왕비가 다쳤소. 어서 왕비와 공주를 도와주시오!” 겐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를
뚫고 전해졌다. “두 분을 떨어뜨리세요. 제가 받겠습니다! 우리가 치유할 수 있어요!” 탈라르도 마주 소리쳤다.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겐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두 명의 여인이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였다. 이제 나라도 없고 아들도 없었다. 이 두 사람이 자신의 전부였다. “여보, 떨어질 때 많이 아플 거요. 고통을 멈춰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소. 마음 단단히 먹으시오.”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고통도 참아낼 수 있어요, 여보. 사랑해요… 언제까지라도. 이제 절 놓아 줘요.”
겐은 미소를 지으며 왕비를 현창 밖으로 떨어뜨렸다. 그녀는 바다에 떨어졌다. “테스, 너도 이제 가야 한단다. 엄마를 도와주렴!”


테스는 마지못해 미소 지었다.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며, 그녀는 현창 밖으로 나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두 여인은 곧 수면으로 떠올라 헐떡거리며 팔을 흔들었다. 탈라르의 구조선이 곧 그들 곁으로 왔고, 파수꾼들이 손을 뻗어 둘을 건져 올렸다. 안도와 함께 자신이 해낸 일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겐은 현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쉬익! 탈라르는 아래쪽에서 자신들을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진공의 힘을 느꼈다. 구조선은 흔들거리며 서로 부딪혔다. 바닷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잡아당기는 듯, 엘룬의 광휘호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겐은 배 안으로 떨어졌고, 선실을 지나 물이 찬 복도까지 순식간에 돌아갔다. 그를 빨아들이는 힘은 침몰한 배의 중심부로 이어지고 있었다.


“겐!” 미아가 소리쳤다. 배는 사라진 뒤였다. 남은 거라곤 마치 거대한 과녁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둥글게 퍼져 나가는 차가운 물결뿐이었다. 바닷물이 폐를 가득 채워, 겐는 남아 있던 공기를 기침과 함께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물밑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며 위쪽으로 올라가려고 두 팔을 마구 저었다. 그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친 듯 뛰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터져 나올 듯했다.
그는 자신의 생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겐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고드프리와 애쉬버리, 그리고 몇몇 다른 귀족들이 숲 속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곧 발각되리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숲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야수, 늑대인간 중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수년 전 아루갈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상기시키는 끔찍한 증거이자 이 야수들을 이용하여 스컬지와 맞서 싸우려 했던 겐의 계획이 얼마나 끔찍한 실수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괴물들이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그 이빨을 돌렸을 때의 절망감을 다시 맛보게 해주는 증거였다. 이 늑대인간은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나팔총이 가슴팍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시체에서는 김이 피어올랐고, 웅덩이처럼 고인 피가 굳고 있었다.


이건 시민들에게 절대 알려서는 안 될 지도층만의 비밀이었다. 매달 보름달이 뜨면 겐, 고드프리, 애쉬버리, 말리와 소수의 다른 사람들은 온몸에 무장을 갖추고 검은숲으로 떠나서 백성의 대부분은 옛이야기 속에서만 나오는 생물이라고, 그레이메인 성벽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과장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믿고 있는 야수를 찾아 떠났다. 귀족들은 늑대인간을 운동 삼아, 또 복수를 위해 사냥했다. 해충 박멸과 다름없었다.


그는 따스하고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손으로 잡았다. 피부가 욱신거리고 쓰라렸다. 끈적한 진홍빛 피가 묻어 나왔다. 그는 늑대인간에게 물려버렸다. 이 늑대인간이 매복하고 겐을 덮쳤고, 미처 총을 발사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어깨를 물어뜯었다. 공포가 겐을 덮쳤다. 구역질이 났다. 자신이 증오하던 괴물 중 하나가 된단 말인가? 고드프리나 애쉬버리, 말리가 늑대인간에게 물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 아마 마땅히 자기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들 입장이라면 자신이 직접 할 그 일을 말이다. 그를 쏘아 죽일 것이다. 저주가 더 번져서는 안 된다. 그는 허둥지둥 어깨에서 피를 닦아내고 옷깃을 세웠다.


“국왕님, 괜찮으십니까?” 수풀 너머에서 말리가 소리쳤다.
더듬거리며 겐은 가방 한 귀퉁이를 뜯어내서 상의 어깨 밑에 집어넣었다. 외투의 옷깃은 잡아 뜯듯 더
높이 세우고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애써 참았다.


“그레이메인 국왕님, 어디에 계십니까?” 고드프리가 숲 속에서 그를 불렀다. 겐은 옷깃을 있는 대로 세웠다. 상처가 타는 듯 아팠고, 그는 고통 때문에 헐떡였다. “여기… 여기 있소. 괴물을 잡았소!” 겐은 마주 소리치며, 그들이 속아 주기를 바랐다. 그는 천천히 시체에서 물러나며 짧고 불안한 숨을 내뱉었다. 땅을 더듬거리며 젖은 풀에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늑대인간의 혀는 분홍색 리본처럼 주둥이 한쪽으로 늘어져 있었고, 생기를 잃고 게슴츠레해진 눈은 겐을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아빠!” 테스가 비명을 질렀다. 배는 바다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함대로 돌아가라. 어서! 내가 국왕님을 따라가겠다. 가라!” 탈라르는 내뱉듯이 명령을 내리고 구명선의 뱃머리에 섰다. “제발… 제발 남편을 구해주세요.” 미아가 애타게 사정했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왕비님.” 그 말을 남기고 탈라르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면 아래에서 그는 피부가 매끈한 바다표범으로 변신했다. 지난 천 년에 걸쳐 완벽하게 가다듬은 변신술이었다. 그를 뱃사람으로 살게 해준 변신술이었다. 바닷속 깊이 엘룬의 광휘호가 미끄러지듯 가라앉으며 어둠에 삼켜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겐은 필사적으로 헤엄치며 발을 저었다. 참을 수 없는 압박이 폐를 조여왔다. 의식이 달콤한 해방을 갈구하며 점점 흐려졌다. 가슴 속의 불타는 듯한 통증이나 귓속의 압력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의 머릿속은 요동치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명멸하는 영상이 무의식의 끝자락에서 춤추듯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영상이 가져오는 고통만이 그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었다.


그는 늑대인간이 길니아스 시를 공격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의 앞에 처음 나타나 앞으로 닥쳐올 위험에 대해 경고하던 신비로운 나이트 엘프 여사제의 검은 윤곽이 떠올랐다.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포세이큰과 싸울 것을 촉구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크게 감동 받은 표정으로 젊은 왕자의 뒤에 결집한 백성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자기가 길러 낸 젊은 지도자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약해지고 있었다. 문틀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살이 자신을 바다 밑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네 발로 서거라, 얘야. 네 두 발로 일어설 용기와 투지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단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알아요, 아버지. 나도 알아요.” 아버지의 목소리는 마치 연금술사가 만든 붉은색 물약처럼
겐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줬다. 마음을 비운 채 떨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는 힘껏 앞으로 나아갔다.
“네겐 생각지도 못한 힘이 숨어 있단다!” 그는 현창에 거의 다다랐다. 창 밖으로 다가오는 생물의 모습이 보였다. 바다표범 한 마리가 물살에 몸을 비틀며 다가왔다.


겐은 그를 끌어내리는 심연의 힘에 맞서 싸웠다. 물살과 같은 힘으로 그를 나락으로 잡아끄는 어두운
기억과도 맞서 싸우며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현창 안으로 뻗어 들어온 보라색 손이 보였다. 탈라르였다. 그는 배 안으로 몸을 끌어당기는 물살에 맞서 다른 손으로 창틀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겐은 빛나는 나이트 엘프의 눈을 들여다본 후, 다시 그가 뻗은 손을 내려다봤다. 탈라르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왔다니. 잘 알지도 못하고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구출하려고 목숨을 걸었다니.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겐은 앞으로 몸을 던지며 한 손을 내밀어 탈라르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편지는 탁자 위에 펴진 채 놓여 있었다. 리암은 자기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편지를 손으로 내려쳤다.
그는 아직 십 대였지만,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겁에 질리고 화가 나 있었으며,
아버지의 의견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이제 나가보거라, 리암. 이 문제에 대한 네 생각은 잘 들었다.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는 게 달갑지
않구나.” 겐은 포도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역병이 여기까지 번지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때는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 리암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레이메인 성벽이 위대한 우리 왕국을 격리시켜 주지 않느냐.” 겐이 따지듯 대꾸했다.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리암과의 대화 때문에 골치가 지끈거렸다. “아버님의 성벽을 이 생물들이 넘어오기라도 한다면요? 어쩌실 겁니까, 아버지?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우리가 무슨 수를 쓸 수 있다면요?”


겐은 벌떡 일어나 아직 포도주가 가득 찬 잔을 돌바닥에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어떻게 아비의 결정을 의심할 수 있느냐? 당장 나가라! ”포도주잔은 챙그랑 소리와 함께 굴러가며 마치 새로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같은 자국을 남겼다. 리암은 깜짝 놀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서히 말을 이었다.


“안 됩니다, 국왕님. 제 말을 다 들어주시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들으실 때까지요. 한 번만 들어주세요. 사람들이 애원하고 있습니다. 로데론은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쳐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관세 따위를 요구하는 게 아니…”


“약하기 때문에 요구하는 거다! 저 밖에 나가고 싶으냐? 이 괴물들과 직접 맞서고 싶으냐? 그게 네가 원하는 거냐? 안 된다. 내 아들이나 어떤 길니아스의 아들도 위태로운 상황에 목숨을 걸지 않게 하겠다.
내 아버지라면 절대 그러시지 않았을 테니, 그분의 아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할아버지 말씀만 하시는군요. 항상… 마치 아버님께서 이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할아버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왕좌만 덥힐 집사인 것처럼요.”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다른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버님의 아들은 아버님과는 다른 선택을 하겠습니다.”
“내가 네 나이였을 때, 나는 그저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기만을 바랐다. 그게 왕자의 의무야.”
“저는 언젠가 위대한 왕이 되는 게 왕자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리암은 돌아섰다. 그는 이 논쟁이 의미 없는 일임을 잘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와 같은 행동을 할 터였다.


“내 눈앞에서 꺼져라! 가, 멀리 가버려!… 성벽이 우릴 보호할 것이다, 어리석은 왕자야.” 겐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성벽은 견뎌낼 것이다. 길니아스는 언제나 위대한 왕국으로 남을 것이다… 언제나!”
그의 말은 텅 빈 방에 울려 퍼졌다.


겐의 눈이 떨렸다. 눈을 뜨자 찌르는 듯한 태양빛에 눈이 머는 것만 같았다. 그는 황급히 눈을 가렸다.
살아 있었다. 비가 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빗물도 느껴지지 않았다. 포근한 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친근한 목소리가 밝게 말했다. “탈라르.” 겐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소.” “꿈을 꾸셨나 봅니다, 국왕님. 소리 내어 잠꼬대를 하시더군요.”
“꿈에서 내 아들을 봤소. 내 아들은 훌륭한 왕이 되었을거요. 고집스러운 나보다는 훨씬 나은 왕이…”


“겐… 그레이메인 국왕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는…”
“아, 아니오, 탈라르. 슬퍼서 그러는 게 아니오. 사실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박힌 돌덩이처럼
아플 때도 있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은 아들이 위안이 되고 있소…”


“이해가 안 가는군요.” “리암은 언제나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걸 이해했소. 시대가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져야 한다는 거요. 내 아들이 나보다 더 현명했다는 점이 아버지로서 자랑스럽소.”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른 방법이 있음을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길니아스 사람들은 모두 완고합니다. 국왕님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선원들이 오늘 살아남지 못했을 테지요. 국왕님을 텔드랏실까지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그렇지. 텔드랏실… 놀랄 만큼 멋진 곳이라는 소문을 들었소.”
“이리 오십시오. 부인과 따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비님의 다리도 모두 치료해 드렸습니다.”
탈라르는 겐을 갑판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겐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비록 늙은 왕이지만 당신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소, 탈라르 오크탈론.
그걸 잊어버렸다고는 하지 않겠지.”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탈라르는 쾌활하게 웃었다.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지요, 친구여.” 탈라르는 계속해서 키득거렸다.
그가 웃거나 미소 짓는 모습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겐은 햇빛이 잔잔한 바다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팠다.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정신만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했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곧 잊고 싶은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것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배들은 이제 서로 밧줄을 풀고 있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지금, 배들은 각자 환한 돛을 펴고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로 달려나갔다.


“대드루이드 스톰레이지라는 양반이 우리 백성이 얼라이언스의 중요한 자산이 될 거라고 말했다고 했던 것 같소만.” “그렇게 말했었지요.”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소… 아마 맞을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