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던 린. 아다만트 린. 레인 린. 바리안 린. 린 왕가의 혈통은 수많은 역경을 이겨냈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더욱 강하고 현명한 모습으로 잿더미 속에서 스톰윈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지만 전에 없던 혼돈과 재앙의 시대가 찾아오며, 스톰윈드의 왕 바리안 린은 전임자들이 하나같이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린 왕가의 왕들은 항상 일찍 생을 마감했으며, 그 죽음은 결코 공평하거나 자비롭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복도로 나선 바리안은 경비병들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기억의 날 행사 때문에 바쁜가? 아니면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는 어두운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 스톰윈드 왕궁의 크고 익숙한 왕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렇게 익숙했던 높다란 벽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더 크고, 더 짙은 그림자에 휩싸인 채 공허하기만 했다. 높다란 천정에 마치 화려한 거미줄처럼 걸린 휘장에는 황금색 사자 얼굴이 수놓아져 있었다. 스톰윈드 왕국의 자부심과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울음 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소란이 일었다. 바닥으로 향한 바리안의 눈에 핏자국이 방 가운데로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곳의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절박하게 다투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에 눈이 익어가자, 무릎을 꿇은 피투성이 남자와 그의 앞에 선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거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 공식홈페이지 아제로스의 지도자들 : 왕가의 피 바로가기




무언가 바리안 린 국왕을 깊은 잠에서 깨웠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으려니, 멀리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언젠가 들어봤던 소리. 그래서 두려움이 물밀듯이 찾아왔다.



바리안은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가, 광낸 떡갈나무로 만든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움직임도 발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성 밖 어딘가에서 군중이 환호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행사가 시작될 때까지 늦잠을 자버렸나?'



다시 이상한 물소리가 들렸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서 메아리치는 물기 어린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바리안은 천천히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봤다. 어둠고 조용했다. 횃불들도 희미하게 깜박이는 것만 같았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바리안은 지금 자기 안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낡은 것, 새로운 것, 어쩌면 오래 전에 잊었던 것이었다. 마치 어린 아이의... 공포 같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비웠다. 그는 늑대 정령 로고쉬였다. 적과 아군 모두의 심장에 두려움을 심어 줬던 검투사였다. 그래도 그는 불안함과 위기감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복도로 나선 바리안은 경비병들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기억의 날 행사 때문에 바쁜가? 아니면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는 어두운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 스톰윈드 왕궁의 크고 익숙한 왕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렇게 익숙했던 높다란 벽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더 크고, 더 짙은 그림자에 휩싸인 채 공허하기만 했다. 높다란 천정에 마치 화려한 거미줄처럼 걸린 휘장에는 황금색 사자 얼굴이 수놓아져 있었다. 스톰윈드 왕국의 자부심과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울음 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소란이 일었다. 바닥으로 향한 바리안의 눈에 핏자국이 방 가운데로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곳의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절박하게 다투는 모습이 보였다. 어둠에 눈이 익어가자, 무릎을 꿇은 피투성이 남자와 그의 앞에 선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거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바리안은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뒤틀린 형체는 그녀의 비틀린 육신과 영혼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바로 반 드레나이, 반 오크인 가로나 하프오큰, 굴단의 뒤틀린 마음이 길러낸 암살자였다.



믿기 힘든 충격에 바리안이 잠시 멈춰서자, 반 오크의 칼날에서 신선한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면도날처럼 뾰족한 칼끝에 도달한 후 떨어졌고, 대리석 바닥에 진홍빛 장미꽃잎 자국을 남기며 번졌다. 그순간, 기억의 홍수가 바리안을 덥쳤다. 눈에 익은 방어구. 왕의 의복. 피투성이 남자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 레인 국왕이었다!



가로나는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지고 눈물에 얼룩진 웃음을 보이며 바리안을 바라보고는, 재빨리 칼을 내리찔렀다. 번쩍이는 칼날이 어둠을 찢고 무릎 꿇은 국왕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안돼!" 바리안은 비명을 지르고, 피가 흥건한 바닥을 지나 아버지를 향해 달렸다. 그가 시들어버린 국왕의 육신을 끌어안는 순간 반 오크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버지." 바리안이 품 안의 국왕을 애처롭게 흔들며 말했다.



고통으로 경련하던 레인 국왕의 입이 벌어지며 따뜻한 피가 흘러나왔다. 악취를 풍기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늙은 국왕은 가까스로 몇 마디 말을 남겼다. "린 가문의 왕은... 항상 이렇게 끝나지... "



이 말만을 남긴 채, 레인의 눈동자는 뒤로 넘어가고 턱이 벌어지며 흉측한 표정만이 남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경련이 거칠게 일었다. 바리안은 어떻게든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품하듯 벌어진 아버지의 입 안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흐려지는 황혼 속에서 반짝이며 꿈틀거렸다.



갑자기 죽은 국왕의 입에서 구더기가 쏟아져나왔다. 셀 수 없이 많은 벌레가 꿈틀거리며 레인 국왕의 잿빛 얼굴을 뒤덮었다. 바리안은 물러나려 했지만 구더기가 그 자신마저 뒤덮어 버렸고, 꾸룩거리는 구더기들은 바리안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사이 그의 육신을 먹어 치웠다.



* * *




바리안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끔찍한 비명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는 스톰윈드 왕궁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높은 창에서는 따스한 햇볕과 함께 군중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의 날 축제는 이미 시작된 후였다.



그의 손에는 빛바랜 은 펜던트가 놓여 있었다. 뚜껑은 열쇠로 단단히 잠긴 채였다. 바리안은 이미 수천 번이나 그랬듯이 본능적으로 펜던트를 열어보려 했지만, 굳게 잠긴 뚜껑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폭발이라도 하듯이 벌컥 열리더니, 스톰윈드 방어군 총사령관이 달려 들어왔다. 마커스 조나단 장군의 얼굴에는 경계하는 빛이 가득했다. "무슨 일입니까, 전하?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리안은 재빨리 펜던트를 치우고 일어섰다. "아무 일 없다, 마커스." 바리안은 방어구를 단정히 정돈하고, 지친 눈을 덮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난 몇 달간 근심과 수면 결핍에 시달리느라 깊게 패인 주름이 느껴졌다. 데스윙이 스톰윈드를 비롯한 아제로스 전체를 습격한 후 뒤따른 여러 비상 사태에 대응하느라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바리안 국왕과 마커스 장군 모두 오늘의 축제를 위해 화려한 정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장군은 큰 키와 매서운 외모 덕분에 바리안 보다는 조금 더 멋져 보였다.



"명예 기념식이 3시간 후에 시작됩니다, 전하. 연설문은 준비되었습니까?" 조나단이 물었다.



"아직 쓰고 있네, 조나단." 바리안은 탁자 위에 놓인 텅 빈 종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총사령관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자, 바리안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왕자는 도착했나?"



조나단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안두인 왕자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전하."



바리안은 창을 통해 궁정 앞뜰을 내다보며 실망감을 감추려 애썼다. 앞뜰은 인파로 가득했다. 국기와 색띠가 공중에 가득 차 펄럭이고, 아이들은 좋아하는 옛 영웅의 모습으로 차려입고 있었으며, 웃음소리 속에 음식과 음료가 넘쳐 흘렀다. 기억의 날은 추도식과 축제를 반반씩 섞어 놓은 행사였지만, 바리안 자신은 지금 어디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다.



바리안이 바라보는 동안 인파는 스톰윈드의 입구, 영웅의 계곡에 줄지어 선 위대한 영웅들의 석상을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명예 기념식 무대가 이들 위대한 지도자들의 그림자 아래 설치되었고, 오늘은 오늘 이 영웅들의 위업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바치는 날이었다.



조나단을 말을 이었다. "준비가 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대주교가 도시 보수 계획과 부상자 치료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곧 가지." 바리안은 손을 저어 그를 물렸다. 조나단은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조용히 문을 닫으며 방에서 물러났다.



바리안은 고개를 흔들어 마음 속을 가득 채운 거미줄을 떨쳐 버리고는, 섬세한 펜던트를 다시 꺼내들어 거울 같은 표면에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춰 봤다. '세상이 변했지만, 난 변할 수 없어.'



바리안은 벽난로 위에 걸린 레인 국왕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지도자, 스톰윈드의 국왕, 얼라이언스의 주춧돌로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시리라.



* * *




대주교 베네딕투스는 가장 좋은 로브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축제의 날을 맞이하여 스톰윈드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작고 꾀죄죄한 남자가 구겨진 서류를 한아름 들고 서 있었다.



바리안이 자신의 방에서 나오자 베네딕투스의 열정적인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바리안 국왕 폐하, 빛의 축복이 함께하시옵소서." 대주교는 계단을 내려오는 바리안을 보며 미소지었다.



"대주교 당신도 그러하길." 바리안은 말했다. "오늘 조물주와 만날 일이라도 있는 듯이 차려입으셨군."



베네딕투스는 이미 여러번 연습한 듯한 엄숙한 몸짓으로 지팡이를 흔들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언제라도 빛을 만나뵐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요."



대주교 옆에는 너저분한 차림새의 남자가 품 안에 서류와 도면을 가득 들고서 초조해하고 있었다. 바리안은 얼굴과 옷에 온통 진흙 투성이인 그 남자가 스톰윈드의 건축 담당인 바로스 알렉스턴임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바리안은 자신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고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도시 보수 계획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바로스?"



"예상하셨던 그대로입니다, 전하." 바로스가 서류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딕투스는 팔을 뻗어 건축가의 등을 토닥였다. "이 친구는 정말 너무 겸손하군요, 전하. 바로스가 기적적인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스톰윈드가 대부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일부 구역은 여러모로 더 나아지기도 했더군요."



바리안은 안도감을 느겼다. 참모들에게 낙관적인 태도가 돌아온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지금 가장 급한 일은 무엇이오?"



건축가는 걸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두루마리 하나를 펼쳤다. 그러는 동안 적어도 세 장의 서류가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전하... 네, 여기 있군요." 바로스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고, 그의 더러운 손가락이 지도에 흙투성이 얼룩을 남겼다. "스톰윈드 입구에 있는 두 개의 탑에 대한 파손 정도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젓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 검은 용이 보기보다 훨씬 더 무거운 모양입니다. 아마 엘레멘티움 방어구 때문이겠지요. 지반이 가라앉았고, 탑 기반이 매우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바로스는 말하면서 여러 도면을 휙휙 넘겼다. "여기 왕궁의 동쪽 구획이나 항구 위쪽의 큰 건물 몇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 잔해는..." 손상을 입은 건물들을 모두 털어놓기가 고통스럽기라도 한 듯이, 건축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베네딕투스가 끼어들었다. "물론 옛 병영의 잔해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공원이 있던 곳에 생긴 그 끔찍한 구멍도요. 빛께서 희생자들의 영혼에 축복을 내려주시길."



진흙으로 얼룩진 바로스의 얼굴에 슬픔이 어렸다. "안타깝지만 광범위한 보수 공사가 필요합니다. 아마 비용이 적지 않게 들 것 같습니다."



바리안의 눈이 번득이며 건축가에게로 향했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고통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 건가? 지금 같은 때에? 베네딕투스도 바로스도 그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했다. 바리안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며 뱃속에서 뭉쳐드는 분노를 삭였다.



다음 층에 도착해서 국왕은 왕궁의 피해 현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보려고 잠시 멈춰섰다.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하늘과 그 아래의 도시가 훤히 보였고, 계단은 그 잔해로 덮여 있었다. 바리안이 손상된 부분을 확인하는 동안 바로스는 자신의 서류를 재빨리 살폈다.



"이곳의 피해 복구를 위해 이미 채석장에 석재를 주문했습니다, 전하." 건축가는 고개를 들고 국왕의 짜증이 깊어간다는 사실을 알아봤다. 그는 분위기를 바꿔보려 시도했다. "곧 수리가 완료될 겁니다. 굳이 이렇게 벽을 없애지 않아도 왕궁은 통풍이 잘 되니까요. 그렇죠?"



바리안은 그를 무시했다. 생각에 잠긴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삐죽삐죽 솟은 돌을 어루만졌다. 마치 거대한 주둥이로 탑을 물어뜯은 듯한 흔적이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왕의 장갑이 뭔가 날카로운 것에 걸렸다. 그는 손을 뻗어 파괴된 벽에서 삐져나온 단검 모양의 흑요석 조각을 뽑아냈다. 용의 엘레멘티움 갑옷 조각이었다. 밤의 어둠과 같은 은흑색으로, 약 40센티미터 길이에 면도칼처럼 날카로웠다. 갑옷 조각은 돌 깊숙이 박혀 있었지만, 바리안이 조금 힘을 쓰자 뽑아낼 수 있었다.



그는 그 조각을 들어올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스톰윈드의 성벽을 위협한 것은 이 사악한 생물... 데스윙이 처음이 아니오." 그의 눈길은 건축가의 머리를 꿰뚫을 듯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다시 일어나 꿋꿋이 설 것이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 없소. 그 검은 야수가 열 배로 갚게 만들겠소."



국왕은 거친 구멍을 통해 파괴된 도시를 내려다봤다. 분노 속에서 침묵하며 용의 방어구를 움켜쥐자 판금 장갑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 아래 거대한 스톰윈드 항구에는 수많은 배가 모여 돛대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항구는 온갖 색상, 모양, 크기의 배로 가득했다. 기억의 날에는 인류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순례자들이 스톰윈드를 찾았지만, 이번은 지난 어느 때와도 달랐다.



그가 바라보는 동안 또 한 척의 배가 천천히 항구로 들어와 닻을 내렸다. 거대한 칼도레이 함선으로, 은세공 장식이 반짝이고 풍성한 보라색 돛이 돋보였다. 바리안은 데스윙의 갑옷 조각을 허리띠에 넣어두고 참모들을 향해 돌아섰다. "저들이 올해 여기를 찾은 것은 과거의 영광 때문일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베네딕투스는 국왕의 어깨 너머로 배 무리를 바라봤다. "분명히 많은 이들이 암흑 고룡의 위협에 맞서 피난처를 찾고 있습니다, 폐하. 어떤 이들은 세상에 종말이 다가온 징후라고까지 주장하더군요."



바리안은 코웃음쳤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얘기요, 대주교. 몇몇 황혼의 망치단 이교도들의 정신 나간 헛소리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소. 그 멍청한 얘기를 성당에서 열정적인 설교를 할 때 양념으로 쓸 게 아니라면 말이오." 바리안은 대주교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행동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지요." 베네딕투스는 바리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스톰윈드 백성들에게 희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계획이 필요합니다. 국왕 폐하께서 오늘 명예 기념식에서 연설하실 때는 사람들에게 뭔가 믿음직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실 거라 믿습니다."



바리안은 기억의 날 연설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계가 겪은 깊은 상처를 위로하려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조나단 장군이 나타나 대주교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후 왕을 향해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폐하. 명예 대표단이 왕실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나단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미소지으며 짜증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바리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사무적인 일을 싫어했다. 특히 축제 기간의 화려하고 허세 가득한 행사는 더욱 그랬다. 견딜 수 없이 짜증스러운 사절들과 직무 위임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보다는, 차라리 저 밖에서 전사가 가장 잘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용의 둥지를 공격하거나, 세상을 가득 채운 악마를 쓸어버리는 일. 차라리 그쪽이 훨씬 건강에 도움이 될 듯했다.



바리안은 한숨을 내쉬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좋아, 장군. 해치워버리자고."



* * *




제이나 프라우드무어는 왕실에서 귀족과 정치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사절들로 이루어진 군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톰윈드 왕궁의 대전당은 정말 거대했지만, 덕지덕지 향수를 뿌린 고위 관리들은 말 그대로 숨쉬기도 힘들 만큼 대전당을 가득 채웠다. 거대한 전당을 화려한 색으로 물들인 이런저런 권위자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제이나는 테라모어 섬의 지도자로서 국왕이 연설하는 동안 그 뒤에서 자리를 빛낼 명예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얼라이언스가 그 어느때보다 위험한 전투의 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스톰윈드의 위대한 지도자가 최근 일련의 세계적 위기 상황에 대해 어떤 대책을 세웠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겐 그레이메인도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그녀와 같은 열정을 띄고 군중을 샅샅이 훑었다. 제이나는 왕실 건너편을 바라보며 군중 속에서 안두인의 얼굴을 찾으려 했지만 왕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바리안과 어린 왕자가 지난 번의 의견 충돌 이후 화해를 했는지 궁금했다. 안두인은 아버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국왕의 곁을 떠나 드레나이의 예언자 벨렌에게 향했다. 하지만 바리안의 고집을 잘 아는 제이나는 둘이 화해했을 리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왕자가 자리에 없는 것을 보면 둘 사이의 불화는 여전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레이메인은 그녀 곁에서 초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모인 군중은 이미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스톰윈드의 힘의 중심점과, 섬세하게 제작된 린 왕가의 왕좌, 바로 그 유명한 사자의 왕좌를 먼저 보기 위해 서로 티격태격하는 중이었다.



제이나는 단상을 장식한 거대한 사자들을 바라봤다. 마치 아제로스 전체를 보호하는 듯, 모두 사납게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런 모습이 어린 시절의 바리안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되었을지, 또 그런 압박이 그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했다. '영웅들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테지. 한 사람이 이런 막중한 의무를 짊어질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녀는 이와 꼭 같은 짐 때문에 무너져 내린 남자를 한때 사랑했었다.



제이나는 초조해 하는 군중을 보면서 그 광경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그녀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재능이 없더라도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질 터였다. 그녀는 군중 속에서 불만의 근원이 되고 있는 한 사람에게 주목했다. 얼굴이 음울하고 다소 붉은, 커다란 곰 같이 덩치가 큰 남자와 그를 둘러싼 귀족들, 사절들에게서 불만이 샘솟고 있었다. 배신자 그레골 라스코발 경의 아들인 올더스 라스코발 경은 주위 모든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고, 이는 방 안의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염되고 있었다.



말문이 트일 만큼 술을 거나하게 마신 귀족들이 린 국왕의 이름을 반복해서 입에 올리는 것이 그녀의 귀에 들렸다. 마치 쓴 독이라도 되는 양 바리안의 이름을 내뱉는 자도 있었다.



제이나는 그들의 말 중 일부는 사실임을 알았다. 바리안은 종종 상대하기 힘든 때가 있었고, 그의 강직한 성품은 적과 아군을 대할 때 서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국왕을 잘 알았기에 그의 진심도 알고 있었다.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사람이었다. 그는 오늘날 이해하는 이가 거의 없는 고대의 원칙을 따라 살았다. 지도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행동 지침이었다. 이런 오해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서 국왕을 서서히 멀어지게 했고, 국왕의 적 중에는 이런 성품을 자신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제이나는 언제나 린 국왕의 동맹이자,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빛이여, 바리안의 가까운 조언자나 친구는 커녕 동맹이 되는 일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계시지요?!' 유령 늑대를 상대할 때는 송곳니가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제이나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 자신도 오늘은 바리안 국왕에게 호드에 대한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려 달라는 부탁을 다시 한 번 하려고 찾아온 터였다. 하지만 만취한 사절들에게 둘러싸인 성급한 남작 때문에 그녀의 용건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컸다. 억지로 미소 지으며, 그녀는 레스코발 남작과 그의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기억을 영원히." 축제일의 전통적인 인사와 함께, 제이나는 고개 숙여 모두에게 인사했다.



"기억을 영원히, 제이나 프라우드무어." 남작은 친구들을 흘긋 둘러보고,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여마법사가 자신을 지지하려는 것인지, 위협하려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제이나는 젊은 남작답게 그의 눈이 그녀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은 야수 같았고, 아무리 부유한 모피와 비단을 둘렀다고 해도, 그의 거친 눈매에서는 의복에서 풍기는 우아함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남작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몸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고향 땅이 잿더미가 되고 있는데 이 멀리 바다 건너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제이나는 남작이 생각보다 더 술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불쾌한 빈정거림을 무시했다. "당신과 마찬가지지요. 옛 영웅들에게 존경을 표하려고 왔어요. 오늘날 얼라이언스를 괴롭히는 새로운 위협에 대한 현명한 대책을 찾고 싶기도 했고요."



남작은 다소 불안정한 모습으로 다른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물론이지요. 새로운 위협이 우리 모두에게 피해를 줬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상인과 일반인 모두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마법사님? 누구 탓입니까?"



제이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주의 깊은 침묵 끝에 다시 말했다. "얼라이언스 지도부는 최근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네, 판단에 오류도 있었지만, 많은 교훈을 얻었어요. 위대한 승리를 일궈내기도 했고요."



늙고 커다란 몸집의 귀족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은발의 머리를 좌절스럽다는 듯이 흔들었다. "얼라이언스의 전쟁 때문에 우리 돈과 피가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무모한 모험과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이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많은 이들이 당신과 같은 우려를 표하더군요. 호드를 향해 옳지 않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분들도 계시고요. 물론 저도 요즘 같은 때에는 선한 동맹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적은 끝없이 늘어나고만 있고요."



남작은 투실투실한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고, 그녀는 손이 닿은 곳의 피부가 근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여기 오크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다, 얘들아." 뒤이어 터져나온 웃음 소리에는 퀴퀴한 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남작은 몸을 숙이고 그녀에게 지나치리만큼 다가와서는, 뜨겁고 조롱하는 듯한 숨결을 내뿜었다. "아니면 냄새나는 타우렌이 더 좋으신가?"



제이나는 남작의 품에서 우아하게 빠져나와 그를 향해 동정하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얼라이언스에 더 이상의 균열이 생겨서는 안된다. 아제로스에 최근 드러난 균열은 말 그대로 세상을 깨뜨리고 말았다.



제이나는 억지로 웃었고, 남작도 마주 웃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 돼지 같은 그의 용모가 두드러질 뿐이었다. 그는 제이나에게 윙크했다. "당신과 국왕이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압니다. 국왕 폐하를 설득해 주시죠. 린 국왕이 귀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가능하면 다른 나라와도 우호 관계를 맺게 해 주십시오. 우리랑 거래할 도시가 모두 사라지기 전에, 그 빌어먹을 용을 처리해 달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압니다. 저도 동의하는 부분이 많고요."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세요. 영향력을 발휘하시라고요. 생각 없는 전쟁으로는 이익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국왕의 계획은..."



"계획이 뭐 어떻다는 거요?" 남작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뒤로 돌아서자 문간에 선 린 국왕의 모습이 보였다. 바리안이 왕실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레스코발 남작, 부디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시오. 내 계획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말씀해 보시오." 바리안의 눈길은 번개 화살처럼 남작의 미간에 꽂혔다. 레스코발은 무의식중에 복종하며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전하." 남작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그저 테라모어의 명망 높은 지도자와 활기찬 토론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바리안은 남작에게 다가갔고, 남작의 개인적인 공간을 한껏 침입한 후에야 멈춰섰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국왕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모두가 들을 만큼 분명했다.



"네가 그 더러운 소굴에서 강아지처럼 낑낑대던 시절부터, 나는 스톰윈드의 군대를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바리안의 눈이 반짝이며 방 전체를 훑었다. 자신에게 감히 도전할 자를 찾고 있었다. "난 바다를 건너 차디찬 노스렌드의 빙하와 끔찍한 언더시티의 지하까지 모두를 이끌고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아직도 날 의심하고 있구나."



고위 관리들은 불안한 듯 몸을 움직였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제이나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국왕의 송곳니를 피하기는 다 틀렸네!'



바리안은 모두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래, 오늘 이곳에는 왜들 왔지? 내 시간을 낭비하려고? 이 세계를 보호하려는 내 노력에 대해 보잘것없는 불만을 늘어놓으려고? 너희를 보호하는 내게?!"



침묵.



유령 늑대의 불길이 바리안의 눈 속에서 타올랐다. 한밤에도 두려움 없이 그림자를 물리치는 잿불처럼 뜨거운 빛이었다.



"아니면 너희 눈으로 직접 로고쉬를 보러 왔느냐? 너희 적들과 똑같이 전쟁을 즐기는 자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나?!"



많은 이들이 조심스럽게 왕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바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우리 적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다. 내가 괴물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난 너희에게 필요한 괴물이다! 난 어둠의 심장에 공포를 때려넣을 수 있는 흉포한 괴물이다! 심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용기가 있는 자다!"



바리안은 열변을 끝내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왕실 뒤편에서 안두인의 낯익은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함을 치는 동안 아들이 도착했던 것이다. 어린 왕자의 얼굴에 서린 공포를 보면, 둘의 관계가 안 좋게 마무리되었던 지난 번 이후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음이 분명했다.



안두인의 눈은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바리안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난 아들에게마저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건가?' 그는 얼굴에서 화를 풀어보려 했지만, 분노의 열기 때문에 아직 피부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안두인은 서서히 물러서다가, 뒤로 돌아 왕실을 나가 버렸다. 그 아이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안은 무너진 둑에서처럼 자신의 화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고, 그 빈 자리는 공허가 가득 채웠다. 바리안은 왕좌에 앉아 지친 듯 모두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경악한 채로 천천히 줄지어 돌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미래와 인류의 지도자 모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듯했다. 제이나와 대주교만이 남아 조심스럽게 바리안을 바라봤다. 무의식중에 국왕은 튜닉 주머니로 손을 뻗어, 은 펜던트를 만졌다. 서늘한 금속이 여전히 끓어오르는 그의 피를 식혀주는 듯했다. 바리안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이해하는 이가 없음을 알았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이는 없으리라.



* * *




제이나와 베네딕투스 대주교가 지켜보는 동안, 바리안은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이리저리 활보했다. 그는 손에 쥔 은 펜던트를 이리저리 돌렸고, 환하게 빛나는 사슬은 바리안처럼 노기를 띠고 이리저리 휘돌았다. 곁에 선 제이나와 베네딕투스는 무력했다. 마치 폭풍 속에서 고요한 항구를 찾으려 헤매는 것 같았다.



"왕자님도 언젠가 이해하실 겁니다, 전하." 베네딕투스가 힘겹게 운을 뗐다. "현명한 영혼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대주교는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제이나를 쳐다봤지만,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바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그 녀석을 떠나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안두인이 할 일은 여기서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지, 드레나이랑은 상관이 없어."



"하지만 그 애는 아직 어려요." 제이나가 말했다. "안두인은 아직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는 중이에요.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알아가는 중이라고요."



바리안은 서성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 녀석이 정말 누구냐고? 스톰윈드의 왕위 계승자이자, 이제는 거의 성인이야! 내가 그 나이 때는 검술에 통달하고 전장에서 얼라이언스의 적들과 맞설 준비를 마쳤다고!"



제이나는 그의 분노 앞에서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가치라는 게 얼마나 일찍 살인을 시작했는지로 측정해야만 하는 건가요, 바리안?" 그녀는 그의 분노에 찬 눈길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안두인이 다른 길을 택했다는 사실을 모르시겠어요?"



바리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안두인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했소. 하지만 지배자에게 필요한 강인함이 아직은 그 아이에게 부족한 것은 아닌지 두렵소. 대주교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지금 세상은 위험에 직면해 있지 않소."



"세계가 종말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주교는 조심스러운 손짓과 함께 말을 골랐다. "하지만 어떤 마지막이 기다리든지, 빛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 다른 길을 보여주지요."



"설교는 필요 없소, 베네딕투스! 실제 세계는 당신의 교회처럼 자비심이 넘치지 않소. 왕이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베네딕투스는 바리안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 기억의 날에는 폐하께서 많은 책임을 짊어지신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것..."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잃어버리신 것에 대해서 말이지요."



국왕은 뒤죽박죽인 생각과 걱정에 파묻혀 은 펜던트를 찾았다. "안두인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아니, 그 아이가 어떤 측면에서라도 아직 약하다면, 결국에는..." 바리안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버렸다.



제이나가 침울한 분위기를 바꿔보려 끼어들었다. "안두인은 이 세상에 다른 힘을 줄 거예요, 바리안. 그 아이는 이유가 있어 사제의 길을 택했어요. 그 아이는 치유사고, 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바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소, 제이나. 안두인은... 한 번도 나와 같은 적이 없었어." 한숨을 내쉬며 바리안은 다시 왕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베네딕투스가 말했다. "앞서 말씀하셨듯이, 폐하, 때가 변했고 우리도 그에 맞춰 변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로서와 같은 심장을 지닌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은 끝나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를 갈망하는 것 같습니다."



바리안은 그를 바라봤다. 그의 마음은 너무도 많은 것들의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최근에는 아제로스의 토대가 그 중심까지 흔들렸고, 아제로스는 조각나 파괴고, 그 일부가 영원히 사라지기까지 했다. 이제 한때 굳건했던 바리안의 믿음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베네딕투스와 제이나가 자리를 뜨려고 일어났을 때, 대주교는 바리안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씀드리니 생각나는군요, 폐하. 오늘 기억의 날을 맞이하여 폐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사실은, 폐하와 왕자 저하 두 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바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나 혼자서 당신의 자비로운 선물을 받아야 할 것 같소, 대주교. 보아하니 내 아들은 내게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베네딕투스는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빛은 가장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빛나는 법이니까요. 잠시 후에 저를 찾아오시겠습니까? 틀림없이 많은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바리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되겠소, 대주교? 알다시피, 오늘 꽤나 바쁜 날이라서 말이오."



대주교는 국왕에게 몸을 숙이고 귓속말로 장소를 알려줬다. 이야기를 들은 바리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지만, 잠시 후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나와 대주교가 자리를 떠날 때, 바리안은 베네딕투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대주교, 한 가지만 말씀해주시오. 안두인이 좋은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



대주교는 몸을 돌리고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폐하. 작금의 위기에서 살아남으시기만 한다면요. 요즘처럼 위험한 시기에는, 불순한 존재라면 모두 불에 타 사라지고 가장 강한 강철만이 남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린 가의 국왕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쳤습니다, 전하." 그는 고개숙여 인사하고 제이나와 함께 왕실을 나섰다. 남은 것은 한 국가를 이끄는 자가 짊어져야 하는 고독한 짐에 짓눌린 바리안 국왕 뿐이었다.



* * *




바리안이 스톰윈드 묘지에 들어설 때, 태양은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며 높다란 성당 첨탑과 침묵하는 비석 위로 따스한 적갈색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바리안은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묘비들을 스쳐 지나며 슬픔이 자신을 덥쳐오는 것을 느꼈다. 예전 기억의 날에 그렇게도 많이 지났던 길이었다. 갓 피어난 라일락의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 코를 자극하자, 지금은 세상을 떠난 부인 티핀의 아름다운 체취, 즐거운 웃음, 부드러운 미소가 기억 속에 떠올랐다.



그는 부인의 무덤을 지키는 사자 석상에 다가갔다. 오래 전에 잊었던 기억들이 그의 마음속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자, 그는 점차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기념비의 황동 명판이 황금빛 햇빛 속에 반짝였다. 바리안은 비문의 마지막 줄을 읽었다. '당신이 떠나고 점점 차가워지는 이 세상'. 쓰디쓴 진실이 가슴 속을 파도처럼 채워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과 안두인 둘만이 내게 따뜻함을 주었소, 티핀.'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바리안은 돌아섰고, 베네딕투스와 자신의 아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왕자를 만나서 기쁜 마음은 안두인의 깜짝 놀란 표정과 대주교를 흘겨보는 눈초리를 보자 금새 사그라들었다.



안두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니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혹시 이 햇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왕자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활과 화살을 다른 손으로 옮겨 들며 대주교에게 따졌다. "대주교님, 따라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를 만나게 될 거라는 얘기는 쏙 빼놓으셨군요."



베네딕투스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왕자님, 세상을 치유하려면 몇 가지 비밀이 필요할 때도 있답니다."



바리안은 갑자기 아버지로서의 의무감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들에게 멍청한 짓은 당장 그만두고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안두인에게 스톰윈드에서 머물면서 왕자로서, 또 스톰윈드의 후계자로서 직무를 다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날에는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서로 화만 내며 대화가 끊기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거칠게 대하면 대할수록 안두인은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래, 이게 기억의 날 선물인 거요, 대주교?" 국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려 애썼다. "깜짝 선물이 가족 간의 화합인 모양이지?" 무의식적으로 그의 눈길이 티핀의 무덤으로 향했다.



대주교는 둘을 만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한편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물도 있습니다. 오래 전, 티핀 왕비님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제게 맡기신 임무를 기억하십니까?"



바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무 오래 전 일이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바리안도 너무 많이 변했다. 티핀이 지금의 그를 사랑하기는 할까?



베네딕투스는 손을 뻗어 바리안에게 반짝이는 은 열쇠를 건네줬다. 바리안은 손에 든 물건의 묵직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안두인은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봤다. "엄마의 펜던트 열쇠군요."



바리안은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찾아냈군! 대체 어떻게?"



"네, 전하. 분부하신 대로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이 죄송하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이야말로 이 기억을 두 분께 전해드리기에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왕자의 머리를 토닥였다.



바리안은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고맙소, 베네딕투스. 당신은 좋은 사람이오. 당신이 없었으면 내가 뭘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기도 싫군."



대주교는 고개를 숙였다. "자, 이제 두 분이 시간을 보내실 수 있게 가보겠습니다." 그는 돌아서며 다시 한 번 손을 흔들었다. "평화가 두 분과 함께 하길." 그 말과 함께 그는 나무가 우거진 숲 길을 따라 사라졌다.



바리안은 가만히 서서 손에 쥔 은 열쇠를 자꾸만 이리저리 돌리며, 대주교의 묘한 작별 인사에 대해 생각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안두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껏 아들에게 하고 싶었던 여러 거친 말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제 단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다. 안두인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왕자는 생각에 잠겨 어머니의 묘비를 바라봤다. 바리안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얼굴을 보니 반갑구나, 아들아.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자란 듯이 보인다. 지난 번에는..." 바리안은 잠시 말을 끊었다. "드레나이 음식이 입에 맞니?"



"벨렌 선생님께서 제가 온 방향으로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안두인이 어머니의 묘를 바라보며 답했다. "선생님은 항상 '우리는 모두 매일 온 방향으로 자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세요."



바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고 가치 있는 충고로구나. 특히 국왕... 아니, 미래의 국왕에게 말이야."



바리안은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짙은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세계가 죽어가고 있나요, 아버지?"



바리안은 그 질문의 순수한 강렬함 때문에 흠칫 놀랐다. 안두인이 어린 아이였던 시절의 순수하지만 심오했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안두인은 질문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에도 아이의 깊은 지혜는 명확히 드러났다.



바리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구나. 하지만 세계는 마치 계절처럼 순환하고 있어. 모든 것에는 그만의 때가 있고, 원을 이룬 고리처럼 모든 것은 오고 가야만 한단다."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바리안은 검을 뽑았다. "위대한 무기와 마찬가지란다, 얘야. 가끔씩 날을 갈아 새롭게 태어나야,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벨렌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죽음과 부활은 별들이 모여 만들어낸 고리 하나의 일부라고요. 그리고 벨렌 님과 드레나이는 긴 시간의 흐름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다면 국왕과 왕국은 탄생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진실과 명예, 의무는 영원하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구나."



"사랑도요." 아버지를 흘끗 바라보며 안두인이 말했다.



왕은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랑도."



안두인은 말을 이었다. "전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 오래 남는 것 같아요."



갑자기 바리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는 은 펜던트를 손에 들고,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말을 꺼내 놓았다. "지금까지 네 어머니의 펜던트를 보관한 것은, 왕으로서 내 의무를 항상 기억하기 위해서였단다.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 그리고 지도자는 좋든 나쁘든 선택을 해야 하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거기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거든."



그는 펜던트를 내밀었다.



"네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니, 괜찮다면 이제 네가 이걸 갖고 있어주면 좋겠구나.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안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안은 천천히 티핀의 펜던트를 아들의 목에 걸어 주었다. 왕자는 손에 펜던트를 들고, 앞서 바리안이 여러 해 동안 했던 것과 똑같이 펜던트 표면의 조각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바리안은 아들에게 은 열쇠를 건네줬고, 시간은 둘과 함께 잠시 걸음을 멈췄다. 묘지의 산들바람까지도 경건하게 숨을 참는 것 같았다. 일종의 횃불, 어떤 소속감, 그리고 언젠가 아들을 도와줄 성장과 성인의 강력한 상징물을 전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네 것이란다. 준비가 되면 언제든 열어보렴."



안두인은 잠시 생각한 후, 열쇠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는 자기 나름의 때에 과거와 마주할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그 펜던트를 좋아했단다, 안두인." 바리안은 말했다. "또 아름다움과 스톰윈드의 사람들을 사랑했지... 하지만 가장 사랑했던 것은 바로 너였단다."



안두인의 눈에 어린 물기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바리안은 그윽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조금... 눈이 멀었었나 보구나. 지금의 네 모습을 보지 못했어."



그 말과 함께 소년의 눈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항상 하고 싶었던 말과 함께였다. "제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요. 저도 위대한 왕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는 눈물이 약한 모습의 상징이기라도 한 듯, 화난 손길로 눈물을 훔쳤다.



바리안은 아들을 한 팔로 감싸 안았다. "아니다, 안두인. 넌 나보다 더 큰 용기가 있지 않니. 네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는 용기 말이야. 마그니 삼촌이 뭐라고 하셨었는지 기억하니? '강인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둘은 그 말의 마지막 부분을 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안두인은 따스한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바리안은 말을 이었다. "난 폭풍에 맞설 때도 뻣뻣하고 융통성 없게 버티기만 한단다. 하지만 넌 바람을 느끼고, 구부려 네 것으로 만들어. 그래서 부러지지 않는 거란다."



바리안은 티핀의 묘비를 향해 돌아섰다. "네 어머니도 그런 성품을 지니고 계셨어. 온화한 설득의 달인이었지.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이 세계를 움직였단다."



왕자는 어머니의 안식처를 바라보며, 새롭게 흘러 넘치는 눈물을 참아내려 애썼다. 바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스톰윈드의 국왕이 아닌 한 명의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말을 계속했다.



"그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안두인. 난 그렇게... 강하지 않았었어." 둘은 그렇게 서로 피보다 더 진한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의 묘를 바라보며,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이윽고 안두인이 말했다. "제가 아기였을 때 돌아가셨지만, 아직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넌 린 가문에서 가장 위대한 국왕이 될 수 있는 거란다."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바리안이 말했다. 그는 이 순간이 영원까지 계속되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고개를 들고 그는 주위를 살폈다. "그래, 얘기해 보렴. 매복한 적들이 어느 쪽에서 달려들 것 같니?"



안두인은 눈물을 훔쳤다. "꽤 오랫동안 우릴 지켜보고 있었어요. 누구일 것 같으세요?"



바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암살자겠지. 축제일에 정신이 팔린 틈을 노린 것 같구나. 스톰윈드의 지도자들이 대중과 함께하는, 암살을 시도하기에 좋은 기회지.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이니?"



안두인은 티나지 않게 주위를 둘러봤다. "출구를 차단하려고 동쪽에서 공격해 올 거예요. 교활한 속임수 없이 직접적으로 공격하겠지요. 서쪽 벽을 등지고 서면 아마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리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놀랍구나. 내가 가르쳐 줬던 지루한 전술학에 네가 정말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제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어요, 아버지."



바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두인은 싱긋 웃었다. 둘 사이에는 말로 표현 못할, 말이 필요 없는 어떤 느낌이 오갔다.



머리 위에서 굉음과 함께 폭죽이 폭발하며 침묵을 깨뜨렸다. 영웅의 계곡에서 솟아오른 마법 화살이 하늘 높은 곳에서 폭발하며 여러 색깔과 모양을 흩뿌렸다. 기억의 날을 마무리하는 행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불꽃놀이는 다른 무언가의 시작 신호이기도 했다. 사방에서 위험한 모습의 적들이 은신처를 벗어나 몸을 드러냈다. 각각 흉측한 무기를 들고, 살인을 결심한 암살자다운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리안은 아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순간을 거의 즐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설장에 조금 늦을 것 같구나."



습격자들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바리안이 세어 보니 10명이었다. '문제 없어.' 바리안이 잠시 생각했지만, 안두인이 가리키는 뒤쪽을 바라보니, 마지막 한 명이 나무 뒤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매우 강한 마술사였다. 그의 어두운 보랏빛 로브는 방어 마법으로 빛났고, 불타는 룬이 그의 비틀린 지팡이 주위로 회전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바리안이 칼을 뽑으며 말했다. 안두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활을 꺼내 화살을 걸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마술사는 소환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면서 지팡이를 휘둘러 환한 빛의 원을 허공에 그렸다.



머리 위 하늘에서 또 한 번의 불꽃놀이가 펼쳐졌고, 습격자들이 갑자기 국왕과 왕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딫히며 불꽃이 피어나고 피가 흩뿌리는 가운데, 머리 위에서 울린 폭죽의 굉음은 암살자들이 내지른 날카로운 전투의 함성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내뱉은 함성은 스톰윈드 호수 너머까지 자랑스럽게 울려 퍼졌다. "얼라이언스를 위하여!"



* * *




영웅의 계곡에 놓인 다리에 줄지어 선 거대한 석상들을 다양한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법사가 만들어 낸 불꽃놀이의 폭음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전체와 그 아래의 해자에까지 울려퍼지자,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재봉사, 대장장이, 요리사, 상인, 병사들이 모두 서로 어깨를 맞대고, 다리를 지나 황금골로 향하는 길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모든 곳에 줄지어 서 있었다. 황홀한 광경에 취해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선 명예 대표단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축제를 즐길 수 없었다. 다음 순서는 바리안 린 국왕의 연설이었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제이나와 마티아스 쇼가 서로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동안, 야전사령관 아프라샤비는 단상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은 린 국왕을 소개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맡은 참이었지만, 불꽃놀이가 끝나가는 순간까지도 스톰윈드의 국왕은 보이지 않았다. 축제는 이미 본 궤도를 크게 벗어나 있었고, 아프라샤비는 계획이 이렇게 어긋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야전사령관은 뒤로 돌아 으르렁거렸다. "젠장! 대체 어디 계신 거요?" 무대 위의 모두가 어깨를 으쓱했고, 아프라샤비는 청중들에게 웃음을 던진 후, 대표단과 다른 지도자들과 머리를 맛댔다. 대표단 자체가 모든 가능성과 위기 상황을 두고 설전을 벌이느라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일부 귀족들은 국왕이 있건 없건 식을 계속 하기를 원했다. 다른 이들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지도자를 기다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언제나 전술가의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조너선 장군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야전사령관, 지연 작전을 시작하시오. 군중을 교란시키고 속임수를 좀 쓰시라는 말이오. 늘 그랬듯 현상을 유지하면서 국왕을 찾아봅시다." 제이나와 마티아스도 이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야전사령관은 이 새로운 전략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군, 난 군대 사령관이지 서커스 광대가 아니오." 그는 모두를 노려봤지만, 절망한 표정의 얼굴들이 애처로운 눈길로 그에게 임무를 맡아달라고 애걸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단 말이오!" 야전사령관이 주장했다.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시오. 주의를 돌려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답했다.



청중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프라샤비 야전사령관도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당나귀를 탄 노움처럼 어릿광대가 된 꼴이라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는 변덕스러운 인파를 향해 돌아섰다.



스톰윈드의 총사령관은 갑옷을 화려하게 수놓은 번쩍이는 메달보다 더 빛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청중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증기기관 공성 무기의 흥미로운 역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 * *




바리안 린은 질풍의 정령처럼 움직였다. 온 방향으로 뛰고 회전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한 순간 왼쪽으로 돌진하며 적을 뒤로 물리기 위해 검을 크게 휘두르는가 하면, 곧이어 다른 쪽에서 안두인을 압박해 들어가는 무리를 가로막고 야만적인 검 샬라메인으로 치명상을 안겼다.



둘은 돌벽을 등지고 적을 물리치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마술사를 직접 공격할 수 없었다. 뒤쪽에 선 마술사는 분명히 스톰윈드로 무언가를 소환하려 했고, 그 자가 불러내는 차원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형체를 갖춰가고 있었다.



바리안은 날아오는 도끼를 막아낸 후 강력한 역습으로 암살자의 무기와 그 무기를 든 팔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 기회를 틈타 앞으로 달려나갔지만, 매번 소환사를 향해 다가가려 할 때마다 암살자들은 안두인에게 다가서며 바리안의 발을 묶었다. 차원문을 통해 뭔가를 소환하기 전까지 모두 바리안을 데리고 시간을 끄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차원문을 통해 나타날지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들을 흘긋 쳐다본 바리안은 자부심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왕자는 용감하게 자리를 지키며 공격자들에게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여러 암살자의 몸에 깃털 달린 화살이 박혀 있었지만, 쓰러진 건 세 명뿐이었다. 어둠의 마법이 힘을 발휘하는 듯했다.



안두인은 날아오는 단검을 재빨리 피하고 바리안 곁으로 다가왔다. "보호 마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조심하세요!"



바리안은 아들을 향해 돌아섰다. "가까이 오거라. 저 마술사가 시전을 마치기 전에 붙잡아야 해!"



안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이면 보호 주문을 쓸 수 있어요!" 그는 두 손을 들어올리고, 기도와 함께 신의 권능, "보호막"을 외쳤다. 그 소리는 천둥처럼 하늘에 울려 퍼졌다.



신성한 힘의 방패가 자신을 둘러싸자 바리안은 목 뒤가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아들을 향해 늑대같은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하필 그 순간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불운한 도적 두 명과 맞섰다. "어디 이것도 막아낼 수 있나 보자!" 바리안은 소리쳤다. 앞으로 돌진한 바리안은 영웅의 도약으로 공중으로 날아올라,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샬라메인의 불타는 구슬이 흐릿한 빛의 반원을 남기며, 칼날은 깜짝 놀란 암살자를 둘로 갈랐다. 생명을 잃은 몸뚱아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지만, 사체가 땅에 닿기도 전에 로고쉬는 다음 희생자를 향해 움직였고, 그의 검 아래 나머지 한 명의 암살자도 그렇게 빨리 제물이 되었다. 안두인은 지원 사격을 하며 국왕의 측면에서 공격하는 적을 막아냈다.



스톰윈드의 왕관을 쓴 두 사람이 하나가 된 듯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고 화살을 발사하며, 이제는 다급해진 마술사를 향해 적을 뚫고 다가갔다. 국왕과 왕자는 완벽한 파티였다. 바리안은 끝없는 폭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안두인은 적의 급소에 연속해서 화살을 꽂았다.



어둠의 마술사는 그제야 성공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음을 깨달았고, 주문 시전 속도를 한층 높였다. 번쩍이는 마법장을 향해 뱀처럼 꿈틀거리며 달려드는 보라색 기운이 크게 증가했다. 그 순간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무언가의 형체가 흐릿하게 회전하는 차원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여기저기 다 찾아봤지만, 왕궁에 안 계십니다." 조너선 장군이 말했다. 애타게 국왕을 찾아다닌 증거인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제이나는 마티아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전하답지 않군요. 달리 어디로 가셨을까요? 그리고 왕자님은 어디 계시죠?"



그 말을 듣자, 장군의 얼굴에 경계하는 빛이 더욱 짙어졌다. "국왕 폐하와 왕자님이 모두 안 계시단 말입니까? 끔찍한 일이군요!"



쇼는 고개를 저었다. "수색 범위를 넓히시오, 장군. 나도 SI:7을 동원하겠소."



"항구를 찾아볼게요." 제이나는 말을 마치자 마자 눈부시게 흰 빛을 번쩍이며 사라졌다.



조너선은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를 떠났다.



"아 참, 장군." 쇼는 조너선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두 눈에 깊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경보를 발령할 준비를 하시오. 뭔가 사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소."



* * *




국왕은 광포한 늑대가 되어 앞길을 가로막는 적을 하나씩, 때로는 두셋씩 쓰러뜨렸다. 피의 욕망으로 두 눈에 광기가 서린 채, 그는 서서히 길을 뚫고 마술사에게 향했다. 한바탕 격전이 지나간 후, 마술사와 바리안 사이에는 단 세 명의 암살자들만이 서 있었다.



안두인은 숙련된 솜씨로 부드럽고 능숙하게 화살을 시위에 걸고 발사했다. 날아간 화살은 남은 암살자 중 하나에 완벽하게 적중하여 깊이 박혔다. 도적은 그자리에서 쓰러졌다. 안두인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방어 주문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적 마법사는 동료를 보호하는 데 신경 쓰지 않고, 온 힘을 기울여 차원문에 마나를 쏟아붓고 있었다. 남은 두 명의 암살자는 경악한 눈빛으로 마술사를 쳐다봤고, 바리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는 적들에게 접근하여 동시에 두 명의 도적과 칼을 맞댔고, 분노에 찬 공격으로 둘 모두를 뒤로 멀리 밀쳐냈다. 그의 기습 돌격은 두 도적을 당황하게 했고, 그렇게 단 한 순간 그들의 방어가 무너졌다. 바리안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한 순간 뿐이었다.



혼돈의 소용돌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듯한 포효와 함께, 바리안은 검을 휘두르는 하나의 소용돌이가 되어, 동시에 두 암살자의 방어구를 부수고 머리를 잘라냈다. 둘의 경악한 표정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바리안은 잠시 멈춰 숨을 몰아쉬며, 이제 몇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마술사와 마주했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너무 늦었다! 파멸이 여기..."



마술사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바리안은 다시 돌진했다. 안두인이 그의 어깨 너머에서 치명적인 화살을 쏘아붙이는 와중에, 바리안은 칼을 뽑아들었다. 놀랍게도 마술사는 방어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오직 차원문 소환을 끝마치는 데만 열중한 채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화살은 그의 목을 꿰뚫었고, 뒤이어 바리안의 칼날은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 마술사는 죽어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승리감에 취해 웃음짓고 있었다. 주문 시전이 완료된 차원문은 이제 강렬한 파동을 내뿜었고, 검고 거대한 생물의 윤곽이 그 차원문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다!



"안두인, 물러나!" 바리안은 소리쳤다.



강렬하게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거대한 형체가 차원문을 나서 스톰윈드에 들어섰다. 충격을 받은 안두인이 헉 하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 바리안은 방어 태세를 취했다. 둘 앞에는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커다란 용기병이 나타났다. 거대한 반인반용 괴물은 황혼의 망치단 이교도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보라색 방어구로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무장한 상태였고, 그 두꺼운 판금 방어구는 보호 주문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용기병은 거대한 도끼 두 개를 등에서 풀어내어 양손에 들고는 도전의 함성을 내질렀다. 주위의 나무들까지도 전율하고, 안두인의 등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바리안은 괴물과 자신의 아들 사이로 이동하며, 어깨 너머로 왕자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뒤에 있거라, 안두인. 알겠니? 물러나 있어. 이 생물... 아니, 이건... 좀 다르구나."



왕자가 미처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용기병은 분노로 가득찬 고함을 지르며 소년을 향해 돌격했다.



* * *




"놈리건 증기 크랭크의 등장,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놀라운 톱니 막대 연결고리, 압력 보조 공성 엔진이 등장하자 바위 50개 무게의 발사체를 얼음왕관의 차가운 꼭대기까지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야전사령관은 지루한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가며, 이제는 국왕이 도착했겠지 하는 희망에 찬 눈길로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아프라샤비 야전사령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군중들도 자신만큼 이 사실에 감명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스톰윈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감명을 완전한 침묵으로 표현했다. 저 멀리 뒤쪽에서 장신구 떨어지는 소리까지 모두에게 들릴 지경이었다. 야전사령관은 뒤로 돌아서며 이제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스톰윈드의 귀족들은 이성을 잃었다. 그 중 하나가 불쑥 소리쳤다. "누가 어떻게 좀 해 보시지. 끔찍하구만! 대체 국왕은 어디 있는 거야?!"



대표단이 모두 한꺼번에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동안 귓속말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이제야 의견 일치를 본 참이었다. 그들은 베네딕투스를 향해 돌아섰다. "대주교님께서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연설해야 한다고 합의를 했습니다."



베네딕투스는 손을 저어 제안을 물리쳤다. "아니, 안 되오. 과찬의 말씀이시지만 이건 제 자리가 아닙니다. 국왕 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이제 군중은 우 소리를 내며 야유하고 있었다. 아프라샤비 야전사령관은 단상에서 내려와 넌더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흥... 난 승리할 줄은 알아도 사람을 설득하는 데는 재능이 없어!"



점차 청중들 사이에서 우려하는 기색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청중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면서, 걱정에 찬 불만 소리가 단상에까지 들려왔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대주교님. 제발 어떻게 해 보세요." 귀족 한 명이 애원했다. "제발요! 사람들은 대주교님을 사랑하잖아요."



베네딕투스는 대표단을 바라보고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이 좋은 날을 기념하여 몇 마디 하겠습니다."



베네딕투스 대주교가 단상에 서자 군중은 만족한 듯한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주교의 훈훈한 존재감이 공허한 영웅의 계곡을 가득 채웠고, 소란은 차분히 잦아든 채 모두가 정신적 지도자의 말을 기다렸다. 대주교는 그 순간을 만끽하려 잠시 기다린 후, 두 손을 들었다.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대주교는 입을 열었다.



* * *




용기병의 거대한 도끼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바리안의 상처투성이 몸 여기저기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나왔다. 그 거대한 생물은 쿵쿵거리며 앞으로 다가와 도끼를 다시 한 번 휘둘렀고, 뼈를 부러뜨릴 듯한 일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바리안은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기회를 틈타 능숙하게 달려들어 괴물의 복부 갑옷을 길게 베었지만, 검은 환한 불꽃을 튀기며 미끄러질 뿐이었다. 용기병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걸걸한 소리로 웃었고, 이제 지쳐버린 국왕 주위를 빙빙 돌며 그를 놀렸다.



안두인은 괴물을 향해 마지막 화살을 발사했지만, 놀에게 달려드는 하루살이 같았다. 바리안은 야수에 맞서 움직이며, 그 생물이 아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게 주의를 끌었고, 놈의 공격은 폭우처럼 계속해서 국왕에게 쏟아져 내렸다. 안두인은 괴물의 막강한 힘을 가까스로 막아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고통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갑자기 용기병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바리안은 날아오는 도끼를 겨우 쳐냈지만, 그 생물의 가시 돋힌 꼬리가 국왕의 가슴에 정통으로 꽂혔고, 그는 땅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거칠게 날아간 바리안은 몇 바퀴를 굴러 겨우 멈췄지만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안두인은 충격에 빠져 꿈쩍도 않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모두 깨어날 수 없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안두인은 소리쳤다. 하지만 바리안은 먼지와 피에 덮인 채,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안두인은 국왕을 향해 움직이다가,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마치 돌진하는 황소처럼 용기병이 무자비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이 휘두른 거대한 도끼는 이미 왕자의 코를 벨 듯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안두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 마치 폭풍 속 깃털처럼 활을 내뻗었다. 용기병의 도끼가 소년의 무기와 충돌하자, 활은 산산이 조각나고 왕자는 땅에 던져졌다.



정신을 차린 안두인은 자신이 땅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충격 때문에 팔과 가슴에 감각이 없었다. 그는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까스로 옆으로 구르자, 조금 전까지 안두인의 몸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도끼가 내리꽂혔다. 그 일격에 먼지와 돌들이 폭발하듯 솟아올랐고, 안두인은 눈을 감아야 했다.



무너지듯 쓰러진 왕자는 숨을 헐떡였고,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두인은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 용기병의 거대한 형체를 바라봤다. 스톰윈드의 왕자답게, 또 아버지라면 보여줬을 당당한 모습으로 두려운 기색 없이 자랑스럽게 맞서려 했다. 그 생물의 차갑고 푸른 두 눈을 들여다보며, 안두인은 이상하게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인반용의 전사는 도끼를 높이 쳐들고 웃었다. 피의 욕망이 가득한 야수의 비틀린 송곳니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안두인은 짧게 기도했다. 곧 끝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도끼 소리는 야만스러운 웃음 소리 같았다...



갑자기 푸른색과 황금색 방어구가 나타나 안두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힘겹게 절뚝거리면서도 피투성이 바리안이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내뻗은 검으로 섬광과 불꽃을 튀기며, 국왕은 용기병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를 내며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히고, 용기병의 도끼와 바리안의 검이 모두 각자의 손을 떠났다. 하지만 용기병의 두 번째 도끼가 그 뒤를 쫓아왔다.



바리안은 타는 듯한 칼날이 자신의 갑옷을 쪼개고, 계속해서 갈비뼈까지 꿰뚫고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강렬한 충격은 국왕을 지면에 때려눕혔지만, 그의 눈은 아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 안두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들이 다치지 않았음을 확인한 바리안의 눈이 부드럽게 흐려졌다. 하지만 먼지가 잦아들자, 안두인의 눈은 경악을 가득 품고 한껏 커졌다.



용기병의 도끼가 가슴 깊이 박힌 바리안은 땅에 쓰러져 꿈틀댔다. 안두인은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시간 동안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바리안은 아들의 눈 깊은 곳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뜻을 전하려 했다. '린 가의 국왕들은 언제나 이렇게 끝나지...'



용기병은 바리안의 앞에 우뚝 서서, 부상 당한 국왕이 거친 기침과 함께 안두인에게 눈으로 마지막 부탁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도망쳐..." 바리안은 서늘하고 은은한 암흑이 자신을 서서히 감싸오는 것을 느끼며 속삭였다. '이 값을 치르는 것은 내가 마지막이길...' 그 생물은 국왕을 조롱하듯 내려다보며, 도끼를 바리안의 가슴에서 뽑아냈다. 이상하게 무딘 감각이었다.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었다. 바리안은 지금까지 살아온 길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알았다. 그 생물은 젖은 칼날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저무는 햇살 아래에서 톱니 모양의 피투성이 칼날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평화로운 곳이군. 티핀...'



바리안은 세상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며 다가오는 용기병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국왕은 의식을 되찾으려 애쓰다가, 이내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팔을 높게 쳐든 왕자는 기도문을 외쳐 아버지를 보호하며 괴물의 접근을 막았다. 안두인은 일어서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폈다. 회오리치는 신성한 금빛 힘에 둘러싸인 왕자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고, 괴물은 뒷걸음쳤다. 안두인은 강하고 당당했다. 국왕의 모습이었다!



안두인이 신의 권능을 담아 "방벽"을 외치자 왕과 왕자 주위의 묘지가 흐릿해지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진 용기병은 왕자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지만, 그 강력한 무기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천상을 울릴법한 종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왔다. 바리안은 안두인의 굳건한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용기병은 주위를 돌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고, 안두인의 유일한 무기는 믿음뿐이었다! 바리안은 자신의 검을 향해 팔을 뻗었으나, 검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는 고통스런 헐떡임을 내뱉으며 다시 쓰러졌다. 숨쉬는 것조차 힘들었고, 움직이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용기병은 마지막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안두인은 용감하고 의연하게, 마치 바위처럼 당당하게 일어섰다. 바리안은 타는듯한 통중을 무릅쓰고 몸을 굴려 일어서려 했다. 그도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허리띠에 넣어 둔 검은용의 묵직한 방어구 조각을 떠올렸다. 어렵게 허리띠를 더듬은 끝에, 국왕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파편을 꺼낼 수 있었다.



용기병이 돌진했고, 신성한 빛의 오라에 둘러싸인 소년은 당당히 맞섰다. 그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하늘로 펼치고 마법 무효화 주문을 외웠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대지의 힘이 요동치며 묘석을 흔들고 호수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이윽고 하늘에서 한줄기 불꽃이 폭발하듯 쏟아져 내리며 돌진하는 용기병에 적중했다.



지옥불에 눈이 먼 야수는 고통과 분노로 절규하며 평온한 안두인을 향해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용기병은 결국 쓰러졌고, 그의 방어구는 암흑 마법의 보호가 사라지며 흐릿한 회색으로 빛이 바랬다.



그 최후의 순간, 바리안은 마지막 힘을 끌어내어 달려들며, 데스윙의 날카로운 방어구 조각을 들어올렸다.



엄청난 중량의 용기병이 바리안 위로 쓰러졌다. 바리안은 마치 어마어마한 눈사태에 휩쓸린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 덕분에 검처럼 날카로운 파편은 괴물의 갑옷과 가슴을 꿰뚫었다. 바리안은 머리 속 어디에선가 반은 전투의 함성, 반은 고통에 가까운 비명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바리안은 자신과 그 괴물 중 누가 그 소리를 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바리안은 저 멀리서 안두인의 존재를 느꼈다. 그는 자신을 안고 있는 아들을 보기 위해 눈을 떴다. 아이의 눈물이 점점 고여가는 국왕의 피에 뒤섞이고 있었다.



제이나와 조나단이 경비병들과 함께 공동묘지로 달려왔다. 장군은 눈살을 찌푸리며 병사들에게 암살자의 몸을 수색하라 지시했고 제이나는 왕과 왕자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바리안의 끔찍한 부상을 살펴보고는, 안두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바리안은 전에 없던 따스함과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안두인을 바라봤다. "네 말이 맞았구나..." 그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사랑만큼 영원한 건 없어." 안두인은 아버지의 눈에서 피와 흙을 닦아냈지만 바리안은 그의 손길을 느낄 수 없었다. 몸이 너무나도 차가웠고, 온 세상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태양은 이제 지평선에서 핏빛으로 빛나며 공동묘지 전체에 붉은 기운을 드리웠다. 왕은 눈을 감고 빛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스톰윈드 근위병들이 죽어가는 국왕 곁으로 몰려들었다. 바리안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며, 그 횟수도 줄어들었다.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 안두인이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바리안은 다시 눈을 뜨고 애써 웃음지었다. "아니다. 나야말로 미안하구나... 한결 같았던 네 모습을... 더 일찍 알아보지 못해서... 네가 내 아들인 게...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바리안은 피투성이 손을 뻗어 소년의 얼룩진 볼을 만졌다. "안두인, 슬퍼하지 마라. 이게 내 운명이란다... 네 운명도 이렇게 되서는 안 된다."



그 말과 함께 바리안의 팔과 몸이 축 늘어졌다. 안두인은 얼어붙은 듯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온몸에 감각이 없었고, 마치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나단은 손을 뻗어 젊은 왕자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일어서십시오, 안두인 왕자님. 안전한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왕위 계승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를 받으셔야 합니다."



안두인은 미동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군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믿지 못할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서 여길 떠나요." 제이나가 안두인에게 손을 뻗으며 간청하듯 말했다. 하지만 왕자는 그 둘을 밀쳐내며, 돌연한 격노에 휩싸여 눈물을 닦았다.



"아니야! 이렇게 끝날 순 없어!" 그는 국왕을 붙잡고 흔들었다. "들리세요, 아버지?! 린 가문의 왕자가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예요! 이건 우리 운명이 아니라고요!" 안두인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고, 그 안타까운 마음에 답하듯 구름이 갈라졌다.



왕자가 눈을 감고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현장의 다른 이들은 놀라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차분하던 왕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점점 커져 아름답고 힘 있는 노래가 되었다. 노랫말과 함께 안두인의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점점 더 밝아졌고, 이윽고 저무는 해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밝게 빛나며 온 공동묘지를 그림자 하나 없는 한낮처럼 밝혔다.



노래가 절정에 다다르자, 젊은 사제는 눈을 뜨고 목소리를 하늘로 실어 보내서 우주의 중심에 있는 신성한 힘의 원천을 불러냈다.



순간 안두인의 손가락 끝에서 수천 개의 태양보다도 밝은 광선이 뿜어져 나와 국왕의 몸을 꿰뚫고 모든 것을 눈부신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바리안의 온몸이 순수한 빛과 함께 요동치자 경비병들은 깜짝 놀라 뒷걸음치며 눈을 가렸다. 모두의 중심에는 아버지를 부둥켜 안은 안두인이 있었고, 무한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소용돌이가 둘 사이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 순간,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힘의 소용돌이와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으로 왕자는 움직이지 않는 왕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용히, 마치 평화로운 음악과도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 * *




베네딕투스는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커다란 환호로 답했다. 스톰윈드의 사람들은 언젠가 이런 날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리라. 대주교를 통해, 그리고 이런 엄청난 사건들을 통해 세상이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그는 자신의 말에 푹 빠진 군중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내가 그대들 앞에 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끔찍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세상의 토대가 조각났다. 아제로스는 지금도 신성한 불길에 정화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험의 날들을 새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가혹한 시련으로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대중은 이유도 모른 채 환호했고 베네딕투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미소지으며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군중은 다시 한번 환호했다. 이전보다도 훨씬 큰 환호성이었다. 베네딕투스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때 다시 한 번 더 큰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대주교는 군중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먼지를 뒤집어쓴 피투성이의 바리안 국왕과 안두인 왕자가 서로를 부축한 채, 절뚝거리며 단상 위로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지독한 모습을 알아본 군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리안은 모두를 안심시키듯 손을 들어올렸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베네딕투스는 할 말을 잊은 채 스톰윈드의 국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웠다. 바리안은 절뚝거렸지만 안두인의 부축을 받으며 당당하게 연단으로 이동했다. 바리안은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고, 안두인은 제이나와 명예 대표단에게로 돌아갔다.



불현듯 바리안은 기억의 날 연설을 준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왕은 잠시 침묵하며, 아픔을 무릅쓰고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주위의 거대한 석상을 가리켰다.



"내 말을 들어라, 스톰윈드의 백성들이여! 그대들의 왕이 아직 뛰는 심장을 안고 여기 모두의 앞에 섰다. 비극을 딛고 일어선 스톰윈드를 재건하는 동안 그대들이 보여준 열정에, 이 심장 박동 소리는 나날이 더 커지리라. 여전히 이곳에 서서 모두를 지켜보는 이 석상들처럼, 스톰윈드도 영원까지 세상을 지켜내리라!"



마치 지평선 너머에서 아침을 밝히는 빛이 번져 온 것처럼, 군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환호성으로 위대한 인간 도시의 관문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빛나는 삶과 영광스런 업적으로 우리의 앞길을 밝혀준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오늘, 기억의 날에 여기 모였다."



군중은 열렬한 박수갈채로 그에 답했다.



"빛의 수호자 우서!"



환호는 격렬한 포효로 자라났다.



"안두인 로서!"



엄청난 갈채가 길게 이어졌고, 바리안은 침착하게 환호성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백성과 도시에 대한 자긍심으로 압도되었지만, 목소리는 조금 어두워졌다.



"우리는 또다시 거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왕은 부서진 탑을 가르켰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는 사악한 세력이 남긴 상처를 품고 있다." 바리안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인류는 그리 쉽게 겁먹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의 틈바구니 속에서 굴복하지 않고 견뎌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포의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



모여든 군중이 거칠게 날뛰며 환호했다! 왕의 뒤쪽에서 무대 위의 대표단도 하나가 되어 박수갈채를 보냈다. 모두의 서로 다른 생각과 불만 따위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군중이 계속해서 환호하자 바리안은 깊은 감정의 파도를 잠재우려 노력하면서 흘끗 제이나와 안두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좀 더 부드럽고 아버지 같았다. 스톰윈드의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오늘 우리는 좋은 것 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기억해야 한다. 역경과 실패를 겪어야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짐은 그동안... 허수아비였다. 적들을 쫓아 지하 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을 헤매고 있었지. 난 그대들의 안전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다. 그대들의 삶이 내겐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백성들이 왕을 섬겨야 하는 게 아니다. 왕이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군중은 다시 환호했고, 장미꽃이 사방에서 단상으로 날아들며 왕을 축복했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국왕을 아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바리안은 크게 감동했다.



"내가 늘 최고의 지도자였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로서도 그랬고... 남편으로서도 그랬다." 아픈 기억을 떠올린 바리안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들을 향해 끄덕였다.



"한 현인이 말했다. '우리는 매일, 모든 방향으로 자라야 한다'고. 아직도 내 뼛속 깊은 곳에는 성장할 곳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내 뒤로, 새 희망을 안고 화려하게 빛나는 새싹처럼 이 재난을 딛고 일어서려는 우리 도시가 보인다."



건축가들과 석공들이 가장 큰 환호로 답했다. 바리안은 손을 들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 오늘은 과거를 축복하는 날이다. 하지만 눈은 우리가 함께 벼려낼 밝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식들의 자식들을 위해!"



그 말을 뒤따라 울려 퍼진 우렁찬 함성에는 사랑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 바리안이 군중을 훑어보자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젊은이의 얼굴이 보였다. 스스로 모험을 이끌어 나가고, 결국 자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이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약속을 이루기 위한 운명을 타고 났다. 그래, 모두들 분명히 각자의 시험과 역경을 견뎌야 하고, 또 몇몇은 세상의 끝이 머지 않았다고 확신할 것이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모두 위대하다! 그리고 모두들 각자 나름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군중이 환호하자 왕은 명예 대표단을 흘끗 바라봤다. 제이나는 웃고 있었고 안두인은 그 누구보다도 크게 환호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은 펜던트가 그의 목에서 춤추고 있었다. 젊은이의 얼굴에는 자긍심이 엿보였고, 또 하나, 사랑이 넘치고 있었다.



바리안은 이제 세상을 지키기 위해 혼자 발버둥치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린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안두인에게도 흐르고 있었다. 바리안은 멀고도 먼 세월의 강 너머에 있는 조상님들이 전해오는 따스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 감정이 그에게 국왕이 될 힘을 주었고, 언젠가 안두인에게도 자신의 운명을 따를 힘을 줄 것이다. 바리안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심장에 오랫동안 맺혀있던 허전함을 확신으로 가득 채운 채, 군중을 향해 돌아섰다.



"과거에 우리는 힘과 무력에 의지하여 길을 만들었다. 보호할 수 있는 건 보호하고, 파괴해야하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괴했지.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되살린다면, 아제로스의 지도자가 전사가 아닌 치유사가 될 날이 찾아올 것이다! 파괴된 것을 고치는 사람들. 그 때가 되어야만 우리는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영원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사방의 군중이 모두 동의하듯 고함을 쳤다. 심지어 라스코발 남작과 그의 앞잡이들도 왕이 전한 미래의 모습에 힘과 자긍심을 느끼고 일어서서 환호했다. 바리안 린은 두 손을 들어 마지막으로 군중을 침묵시켰다. 그리고 다시 계곡의 거대한 석상을 가리켰다.



"위를 보아라! 고대의 영웅들이 당당히 서 있다. 우리는 바로 오늘까지 그들을 기리고 기억한다. 이제 옆을 보아라! 그대 곁에, 이 군중 속에, 내일의 영웅들이 서 있다! 그대... 그리고 그대... 그리고 그대 모두!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것이다. 모두가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대 중 몇몇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업적을 남기고 바로 이날 존경받는 위대한 영웅이 되리라!"



군중 속에 있던 젊은 세대들의 목소리가 함성에 뒤섞였다. 그들의 순수한 눈은 앞으로 다가올 위대한 모험에 대한 믿음과 흥분으로 반짝였다. 심지어 거친 야전사령관인 아프라샤비조차 눈에 벌레가 들어간 척하며 눈을 비볐다.



"자, 스톰윈드의 백성이여! 우리 모두 오늘 하나가 되자. 빛을 수호하고 보호하자는 다짐을 새로이 하자. 우리가 함께라면 이 어둡고 낮선 폭풍우에 당당히 맞설 수 있으리라. 인류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늘 그럴 것이다!"



군중은 마지막을 위해 아껴왔던 가장 큰 환호성을 토해 냈다. "바리안 국왕이시여, 영원하소서!" 노랫소리가 당당하고 힘차게 하늘을 뚫고 퍼져나갔다. 환호성은 끝이 없었고, 엘윈 숲 깊은 곳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붉은마루 산맥의 봉우리까지 들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바리안은 백성들의 따스함을 느끼며, 수년만에 처음으로 진짜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스톰윈드의 국왕임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도 아니고, 물론 마지막도 아닐 테지만, 자신이 인간이란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