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황량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것을 깨닫자,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생각했다. ‘내가 또 다시 죽은 건가?’

 다행히 아직 그녀는 간신히 생과 사의 기로에 버티고 서있었다. 일전 죽음 속에서 그녀를 맞이했던 그 두려운 존재들의 기척은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기억과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날 그냥 끝내다오! 난 충분히 명예롭게 전사할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녀가 외쳤다. 곧이어 차가운 조소가 뒤따랐다. 얼마 뒤 그녀는 자신이 지키기로 서약한 그녀의 고향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앞에서 눈물조차 말라버린 텅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아이의 몸에서 단 한 점의 온기도 남지 않을 때까지 생기를 빨아낸 뒤, 말라 비틀어진 육신에서 영혼을 끄집어내었다. 그녀는 그 영혼을 그녀의 새로운 주군에게 바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폐허가 된 로데론의 성벽 앞에 서있었다. 그녀는 자신처럼 버림 받은 망자들의 군대를 이끌고 얼음왕관으로 진격했다. 비록 그녀가 원하던 형태는 아니었지만 복수는 이루어졌고, 그녀는 자신의 비루한 새 삶을 끝장 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얼음왕관 위에서 말라 붙은 고대신의 피 위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 앞에는 오직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티키 가면을 쓴 난쟁이 트롤이 모습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죽음이 두려운가. 실바나스.”

 그녀는 말없이 흐느꼈다. 그녀는 오직 이 끝나지 않을 어둠과 절망, 공포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때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그 늙은 볼진이 왜 너를 대족장으로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겠지. 그렇지 않은가?”

 그녀의 앞에 폐허가 된 오그리마의 모습이 펼쳐졌다. 이윽고 그 모습은 불타버린 로데론의 모습으로, 이내 무너진 옛 실버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말라 비틀어진 나타노스의 주검이 그녀 옆에 드러누워 눈알이 뽑혀 나간 두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실패한 미래였다. 그녀는 오그리마를, 로데론을 지키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고향인 실버문을 지키는데 실패했듯이.

 울음을 멈추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알기 때문이야. 내가 더 이상 도망칠 수도, 배반할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이를 갈았다. 이제 호드 외에 그녀를 받아주고, 보호할 이들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길니아스의 인간들이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그 날 이후, 포세이큰의 힘만으로 그녀 자신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호드가 살아야 그녀 또한 살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을 이용한 간교한 늙은 트롤을 저주했다. 그는 그녀가 그녀 자신을, 호드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군단과 같은 비열한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그녀의 그런 점이 더더욱 필요했다.

 “나는 네가 죽음 너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네가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를 볼진에게 귀띔해줬다. 나도 그 때 그 곳에서 너를 지켜 보았으니까.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의 영혼을 데려가기 전, 그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지. 그는 그 선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잘 알았던 것 같군.”

 실바나스가 울부짖었다. 난쟁이 트롤이 기분 나쁘게 키득거렸다.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이 이야기는 볼진과 나, 그리고 너, 우리 셋만의 비밀로 해두지. 넌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거야. 볼진과 약속해었거든. 그와 우리의 대화를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기로.”

 난쟁이 트롤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때, 실바나스. 아직도 죽음이 두려운가? 영원히 끊어낼 수 없는 증오와 투쟁의 사슬에 묶인 생의 굴레와... 영원한 죽음의 공허, 둘 다 너에게는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고통일 뿐이지. 결국 너는 어떤 형태로든 네 저주 받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 그럴바엔 차라리 순리에 따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네가 원한다면 지금 여기서 네 영혼을 취하겠다. 선택해라. 실바나스.”

 그 순간 어둠 한 켠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실버문의 망령이지. 실바나스.’

 어딘가 익숙한 그 목소리는 단호한 울림이 되어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이제 호드의 망령이 되시오.’

 그녀가 입을 열어 난쟁이 트롤에게, 그 목소리에게 답하려던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이 억센 손아귀에 움켜 잡혀 끌어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자신이 조각배 위에 뉘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방에 포격과 고함이 휘몰아쳤고, 부서진 배의 잔해들이 바다 위를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물에 젖은 전투복이 어째서인지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를 내려보던 오크 죽음의 기사가 말을 걸었다.

 “괜찮소, 대족장?”

 “그대가 나를 구한건가?”

 옆에서 다른 오크 여전사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시야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가 당신을 발견했고, 제가 당신을 건져 냈어요.”

 “물 속에서 숨 쉴 필요가 없는 자를 대족장으로 둔다는 게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군.” 죽음의 기사가 무심해 내뱉은 말에 실바나스는 거의 실소를 흘릴뻔 했다.

 그들은 혼란한 해전의 한가운데를 가까스로 질주해 반파된 윈드러너 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를 윈드러너 호로 인도한 뒤, 죽음의 기사는 먼저 출격한 나타노스의 얼라이언스 비행 포격선 잠입 임무를 지원키 위해 뼈만 남은 언데드 와이번의 등에 올랐다. 딸 또한 어머니와 같이 가기 원했지만, 죽음의 기사는 자신의 딸에게 그들의 새 대족장을 보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녀가 다시 물에 빠지거든 다시 건져줘야 할 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

 죽음의 기사가 원한 대로 그녀의 딸은 그녀의 임무를 충실해 수행했다. 비록 죽음의 기사가 그 과정에서 딸의 죽음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미 대부분의 함선은 파괴되고, 윈드러너 호도 더 이상 새어 들어오는 물길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선내 곳곳에 주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적어도 육지에 가까운 지점까지 항해할 동안 시간을 벌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머리 위에서 얼라이언스의 비행 포격선이 폭발했고 생존의 희망도 커졌지만, 여전히 적 병력의 수가 너무 많았다. 머지 않아 다른 호드 함선들을 접수한 얼라이언스 잔존 병력이 그녀의 숨통을 노리고 윈드러너 호로 몰려들 것이 뻔했다. 나타노스가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그녀와 동승한 이들 중 이런 일에 관해 그 다음으로 그녀가 신뢰하는 이를 찾아 대책을 논했다. 수석 연금술사 라이던이 약간의 궁리 끝에 만족할 만한 대책을 내놓았고, 그녀는 이를 즉각 실행에 옮겼다.

*****

 역병인도자 브라카쉬는 그녀 앞에 선 딸의 모습을 보며 리치왕의 저주 받은 손아귀에 영혼이 붙들리던 때와 같은 한기가 그녀의 영혼을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말해,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한 때 그녀의 딸이었던 것의 머리통이 올려진 누더기 골렘이었다. 등에는 거대 박쥐의 날개가, 발에는 바다 생물의 물갈퀴가 붙어 있었고, 늑대 인간들의 팔이 달려 있어 그 손톱은 그것이 쓰러뜨린 적들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와 함께 명예롭게 전사한 전우들과, 그녀의 몸을 유린한 돼지 같은 얼라이언스 놈들의 뼈와 살점이 누더기 골렘의 몸뚱아리에 어지럽게 한데 얽혀 있었다.

 그녀는 리치왕의 수하로 있던 시절 전사들의 생명과 명예를 무수히 더럽힌 바 있었지만, 이런 모독적인 행위를 보는 것은 가히 처음이었다. 브라카쉬는 말없이 초점을 잃은 딸의 눈을 응시했다. 어릴적부터 허약해 다른 오크들의 놀림 거리가 되었음에도 이를 악물고 노력해 마침내 시험의 골짜기에서 당당한 전사로서 성인식을 완료했던 딸의 모습이 겹쳐 보이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녀는 독과 역병에 물든 자신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막고라를 신청하겠소. 대족장.”

 실바나스가 코웃음쳤다. “내가 오크들의 관습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물론 실바나스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오크들을 격분케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녀도 살아생전에는 명예니 뭐니 하는 것에 휘둘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죽음에서 부활하면서 다른 언데드와 마찬가지로 악의와 집착을 제외한 필멸자의 감정 대부분을 잃고 그에 얽매이지 않게 된 지금, 그런 것들은 그저 아직도 그런 ‘사소한’ 것들에 속박된 아군들의 비위를 맞춰줄 때나 신경 써야 할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선 그런 여유를 부릴 여유는 없었다.

 오직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한번 죽음을 경험하고 깨어난 브라카쉬가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점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브라카쉬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유 의지를 갖게 된 언데드들은 기본적으로 살아생전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들의 미련이 응집된 망령 같은 존재들이었고, 이는 그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에는 아서스에 대한 복수심이, 이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를 이끌었다. 비록 명예를 추구케하는 빛나는 감정들은 스러졌을지 몰라도, 그에 대한 집착만큼은 껍데기처럼 남아 이 오크를 지배해 온 것이 틀림 없었다.

 “당신이 오크들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소.”

 그 대답만큼은 실바나스도 납득했다. 그녀는 재빨리 활을 꺼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무익한 분쟁에 긴 시간을 소모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 과거 자신의 고향을 지키는데 실패했다지.”

 실바나스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비틀었다.

 “이제 알겠소. 당신에게도 나처럼 썩어빠진 육신을 지탱케하는 뭔가가 있겠지. 내가 생각건대, 그건 아직도 당신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실버문 엘프들의 비명일 거요. 호드의 대족장이 된 지금, 당신은 실버문의 순찰대 사령관으로서 저질렀던 실패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당신은 호드를 지키고 싶어하지만, 호드가 무엇인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소.”

 브라카쉬의 목소리에서 되살아난 망자 특유의 울림이 전해졌다.

 “당신에게 호드는 그저 멸망한 실버문의 그림자에 불과해.”

 죽음의 기사의 역병 도끼가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

 전화에 휩싸인 로데론 한복판에서, 대군주 사울팽이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게 승리를 취하는 당신의 방식이오? 명예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가짜 승리가?”

 실바나스는 어떤 식으로든 이 고집불통인 늙은 오크를 달래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오크의 말에서 어떤 익숙한 울림이 느껴지자, 순간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고 명예 외에는 뼈와 가죽 밖에 남지 않은 노장에게 이죽거렸다.

 “그대는 부하들이 명예롭게 죽는다면 그들의 목숨 따위 신경 안 쓸지도 모르지만, 내게 호드는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오. 이에 반대하는 자는 호드의 편에 설 자격이 없소.”

 그녀는 스스로에게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안에서 꿈틀거리는 악의를 제어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전사다운 죽음을 맞이하시오. 사울팽 대군주. 내겐 의미 없는 것이니. 어쩌면 날 다시 한 번 섬기도록 시체를 일으켜 줄 수도 있고 말이오.”

 그녀가 독살스럽게 덧붙였다.

 “아니면 그대의 아들을 다시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늙은 오크의 눈 속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보았다. 순간 이전에 그녀가 스스로 처형한 어느 죽음의 기사의 말이 뇌리에 울렸다.

 ‘당신은 호드를 지키고 싶어하지만, 호드가 무엇인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소.’

 간신히 자신을 추스린 뒤, 그녀는 생각했다. 그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자신이 무정했느냐고? 아니, 그녀는 싸움꾼이었다. 전사의 심장을 지녔을 뿐이다. 그녀가 희생시킨 이들은 화살통 속의 화살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모두 소모해야 해.’

 그녀는 차가워졌다. 아니, 그녀는 그대로였다. 죽었음에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