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송이의 꽃

 “아민, 일어날 시간입니다.”

 벌써 아침인가.

 레오나의 청아한 목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졸린 눈을 끔뻑이며 침대 옆 자명종을 바라보니 시간은 겨우 여섯 시 반. 잭스가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레오나는 아예 다시 잘 생각 따윈 하지도 말라는 듯 커튼을 확 열어젖히고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때를 놓치는 것만큼 불순한 일도 없습니다. 솔라리의 뜻은…….”

 “피곤이 아직 안 풀렸어.”
 “아민!”

 하지만 잭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런 공방에 이미 익숙해진 듯 그는 이미 이불을 방패삼아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레오나가 잔뜩 골난 목소리를 내며 이불과 한 덩어리가 된 잭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민, 어서 일어나…꺅!”

 레오나가 달려드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이불이 확 펼쳐지더니 그녀를 불쑥 안으로 끌어당겼다. 통나무처럼 굵고 단단한 팔에 안기자 눈에 띌 정도로 얼굴이 붉어지는 레오나였다. 과연 이불 안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레오나는 자기도 모르게 잭스의 팔을 슬며시 쓰다듬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짓궂게 이러지 마세요! 자, 장난치면 안 돼요, 아니, 안 됩니다.”
 “흠, 넌 꼭 당황했을 때만 말을 좀 편하게 하더구나. 평소에도 그러면 좋으련만.”
 “그게 지금 무슨…안 됩니다, 정말!”

 하지만 레오나는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몸으로는 잭스의 품에 꾸욱 밀착하고 있었다. 얇은 잠옷을 통해 서로의 온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결국 저항을 멈춘 레오나는 낮게 한숨을 쉬며, 비장의 수를 꺼내듯 한 마디 툭 던졌다.
 “아민, 오늘 누가 찾아오시는지 잊어버린 건 아니시겠죠? 이렇게 침대 속에서 노닥거리고 있으실 때가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 말이 잭스 안에서 뭔가를 건드린 모양인지 레오나를 옥죄던 두 팔이 조금 느슨해졌다. 기회는 이때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레오나의 입가에 조금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잊어버리신 모양이시군요.”
 “으음.”
 “아아, 이걸 그분이 알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한 번만 봐 다오.”

 결국 잭스가 두 팔을 들고선 이불 밖으로 나왔다. 항복이란 뜻이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풀린 건 아니라 그의 목소리는 조금 골이 나있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십시오, 아민. 벌써 해가 떴습니다.”

 “후, 정말 너는 낮과 밤의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어젯밤엔 정말 곤란할 정도로 안겨오더니만. 해만 뜨면 누구보다도 엄격해지니, 이거야 원.”
 “…그게 곤란하십니까?”
 ‘이런.’

 아무래도 조금 골이 났기로서니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레오나의 목소리에서 조금 슬픈 기색을 느낀 잭스는 서둘러 그녀를 달랬다. 늘 늠름하고 드세어 보이는 레오나였지만, 알고 보면 한없이 정에 굶주린 면이 있어 이렇게 쉽게 무너지곤 했다.

 “곤란하다는 게 아니다.” 잭스가 다시 레오나를 슬쩍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낮에도 조금만 느슨해지면 어떻겠는가, 이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중얼거렸다. “언제까지고 당신 곁에 붙어있고 싶은 걸요.” 
 “…….”

 잭스는 불시의 기습을 받은 병사처럼 움찔 몸을 떨었다. 과연 기습은 엄청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레오나는 오히려 더욱 기대오면서 애틋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아민. 전 당신을 무척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분들의 시간까지 뺏어가며 당신을 차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만큼 다른 분들도 당신을 똑같이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절 소중히 여겨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분들이 슬퍼하시는 걸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께서 그걸로 다른 분들의 핀잔을 듣는다면, 더더욱 말이죠.”
 “이것 참.” 잭스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때마다 네가 정말 내게 과분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구나.”
 “그런 식으로 자신을 깎지 마시라고 전에도 말씀드렸을 터입니다, 아민.”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없습니다. 주의하세요.”

 레오나가 딱 잘라 말하자 잭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났다. 그리고선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했다. 언제 정리한 건지 어젯밤에 뱀 허물처럼 벗어놓은 그의 옷은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가 옷을 다 입자 레오나가 그에게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그의 가면이었다. 그리고 가면을 받느라 두 손이 비는 그 순간, 레오나가 그에 목에 매달려 부드럽게 입술을 겹치더니 속삭였다.

 “다녀오세요, 솔`아민(Sol`Amin, 사랑하는 이여). 오늘도 태양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아아, 이 어찌나 사랑스러운 여인인가.

 결국 잭스는 사랑스러운 셋째 부인의 마중을 받으며, 방을 나설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



 예전에 혼자 살 때야 손바닥만한 오두막에서 살았다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을 한 이후로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면 아래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잭스의 등 뒤로는 커다란 저택 한 채가 떡하니 있었다. 산 속에 저택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은 풍경이었다. 어쨌든 그건 그의 부인 중 한 명이 결혼 ‘지참금’이라는 명목 하에 지어버린 건물이었다. 

 “…늦었다.”
 저택 뒤쪽에 있는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퉁명스런 목소리가 잭스를 반겼다. 피오라였다. 간편한 가죽 경장 차림에 타오를 듯 붉은 앞머리. 조금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팔짱을 끼고선 잭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은 죄(?)가 있는 잭스로선 그저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미안하군. 늦잠을 잤어.”
 “그래, 나와의 약속은 한낱 늦잠 따위보다도 못하단 건가? 굳이 이런 식으로 알려 줄 필요는 없다. 그대 안에서 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

 잭스의 사과에도 피오라의 화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이번 약속 시간에 늦어서 내는 화가 아니었다. 그 전부터 조금씩 쌓여 온 마음의 상처가 결국 터진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에는 짙은 자괴감과 슬픔이 배어있었다. 그는 피오라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말주변이 없는 그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정말로 미안하오.”
 “그만!”

 피오라의 외침에 잭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로렌트 가문의 강인한 당주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저 울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녀린 여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태롭게 보였다.

 “내가!” 그녀는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대의 다른 여자들에 비해 많이 뒤쳐진다는 것쯤은 안다! 난 애교도 없고, 그대의 기분을 잘 맞춰주지도 못해! 그렇다고 모든 걸 버리고 그대만 바라 볼 용기도 없어! 이렇게 잠깐씩 시간을 내서 그대를 만나러 오는 게 전부란 말이다!”
 “…….”
 “참으려고 했다! 며칠 만에 가지는 그대와의 시간을 이런 식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다! 혹시 그대나 날 귀찮게 여기지는 않을까, 혹시…혹시 나와의 결, 결혼을, 후회…….”
 “절대 그렇지 않소.”

 잭스는 낮게 한숨을 쉬며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등을 두드려주며 속삭였다.

 “그대는 충분히 매력적이오.”
 “거짓말…….”

 피오라는 낮게 울먹였지만 잭스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세간에는 여장부로 소문난 그녀였지만 실상은 굉장히 정에 굶주려있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린 나이의 그녀가 무슨 짓을 해야만 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은 피오라의 트라우마이자 유일무이한 약점이었다. 그 약점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그녀를 슬프게 했다는 건, 뭐라 할 수 없는 그의 잘못이 맞았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 수 있겠소? 내 다 들어드리리다.”
 “…정말 다 들어줄 건가?”
 “그렇게 해서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그렇다면.” 피오라는 기어들어가면서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 쪽에서 먼저 입맞춤을 해 다오.”
 “아니, 그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했지 않은가! 내 앞에서는 그 알량한 철가면 따위도 벗지 못하겠다는 건가?”

 잭스가 망설이자 곧바로 피오라의 질타가 쏟아졌다. 부끄럽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잭스는 한 번 가면을 쓰면 벗는 것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설령 사랑하는 부인과 단 둘이 있을 때만이라고 해도 말이다. 

 “내, 내 쪽에서 한 게 이번 달에 15번, 그대 쪽에서 해준 게 3번이다. 무려 5배나 차이난단 말이다. 불공평하다. 그러니 그, 그만큼, 그러니까 다섯 배 차이만큼 마음을 담아 그대 쪽에서, 해줬으면 한다…….”

 어찌나 부끄러워하는지 말이 토막토막 끊기면서도 피오라는 용케 끝까지 말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강인한 모습 사이로 보이는 연약한 모습이 잭스에겐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본인에게 들켰다간 몇 대 맞는 걸로 끝나진 않겠지만 말이다. 

 잭스는 가면을 벗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역시나라고 할까, 그의 머리 전체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잭스는 아직도 이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꺼렸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게다가 그의 입술을 기다리며 발끝을 들고 있는 피오라를 모른 척 하는 건 남편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상냥하게 그녀와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입술은 촉촉했고, 매끄러웠다. 입맞춤은 점점 더 열정적으로 변해, 어느새 피오라는 두 팔을 잭스에게 두르고 매달린 형태였다. 옷 위로 탄탄하고 매력적인 그녀의 몸이 느껴지자 잭스도 뭔가 마음속에서 불끈 솟아올라, 피오라의 어깨를 두른 팔에 한층 더 힘을 줬다. 빈 공터에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여기까지.”

 뭔가 머리가 달아오르기 직전, 피오라가 잭스를 가만히 밀어내며 속삭였다. 오히려 아쉬워한 쪽은 잭스였다. 더 원했던 모양인지 그대로 팔을 뻗은 채 굳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양새가 상당히 웃긴 터라 피오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후후, 여기서 그대의 얼굴이 보였다면 분명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피오라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는구나.”
 “…이 얼굴이 무섭지 않소?”
 “전혀. 뭐가 무섭단 말인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그런 건 만져보는 걸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피오라는 그러면서 그의 얼굴을 가만가만 매만졌다. 잭스는 그녀의 손길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일말의 불안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대가 인간이 아니어도, 정체 모를 저주에 걸려 있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대의 외모를 보고 평생을 약속한 게 아니야. 나 피오라 로렌트의 모든 것을 걸고 말하건대, 그대의 얼굴이 설령 코그모 같은 괴물 같다고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코그모는 좀…내가 그 정도로 못생겼을 것 같지는 않네만.”
 “그럼 그대의 저주가 풀리는 날에 나는 또 한 번 반할 준비를 해야겠군. 솔직히 나는 코그모 이하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이런.”

 가벼운 농담에 피식 웃으며, 잭스는 피오라와 이마를 맞댔다. 피오라는 다시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그의 가면을 들어 씌워줬다. 그리고선 개운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길을 잡아 끌었다.

 “가자. 그대가 만들어 준 아침이 먹고 싶다.”
 “또 말인가? 이거 귀족 숙녀분의 입맛에 산 속 음식이 맞을지 모르겠군.”
 “또 그렇게 놀리기나 하고.” 피오라가 장난스럽게 잭스의 가슴팍을 쿡 찌르며 말했다. “이 세상 어떤 만찬도 그대가 직접 만든 음식만 못하다. 내게는 말이지. 그리고…요리하는 그대의 뒷모습은, 뭐랄까 참으로 매력적이다.”
 “…….”

 피오라의 또다른 매력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공격을,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에서 해온다는 점이었다. 잭스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은근히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군, 피오라. 나는 왜 내가 요리하고 있을 때 뒤에서 뚫어져라 바라보나 했지.”
 “엑, 알았단 말이냐?”

 잭스는 두른 팔을 통해 피오라의 몸이 굳는 걸 알았다. 가면 속에서 그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모름지기 약점을 잡았을 땐 당연히 더욱 괴롭혀줘야 예의 아니겠는가.

 “그야 그렇게 강렬한 시선인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요리하는 뒷모습이라…큭큭. 재밌는 걸 알았어. 어쩐지 처음 정을 나눈 장소도 저택의…….”
 “꺅! 아니다! 제발 말하지 마!”
 “다음엔 왜, 앞치마라도 걸쳐드릴까? 알몸으로 말이야.”
 “못됐어! 그대에게 반했다는 거 다 취소다! 조금 틈을 보이면 놀리기나 하고!”
 “하하.”

 잭스는 피오라의 귀여운 주먹질을 받아가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순서가 조금 어긋나긴 했지만, 그렇게 피오라와 아침을 함께하게 된 잭스였다. 하지만 잭스는 몰랐다, 이 사실이 훗날 부인들 사이로 새어나가 정말 험한 꼴(?)을 당한다는 사실을.

 하긴 설마 그 누가 알몸에 앞치마를 걸치는 상상 따윌 하겠는가 말이다.  























IF루트입니다.
2편도 있습니다.
내가 무슨 약을 빤거지 근데 좋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