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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리리링

 산들바람이, 점심의 나른한 햇살이 선율을 타고 울려 퍼졌다.

 소나의 연주는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걸 넘어 그것을 ‘느끼게’ 해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비슷한 것으로 말이다. 

 그녀의 손이 에트왈 위에서 부드럽게 춤을 췄다. 아련하면서도 활기찬 그 선율은 그녀의 감정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잭스에 대한 의혹이 깨끗하게 풀려서 매우 기분이 좋았고, 무엇보다 그 아둔하고 오만한 귀족들 앞에서 잭스의 멋진 점을 자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연주는 그녀의 기쁨을 대변하듯, 경쾌하고 유려했다. 

 하지만 마냥 연주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파랑새가 날아오르듯 튕긴 그녀의 두 손은 에트왈의 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욕심대로 연주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르되브르(hors-d’œuvre, 전채 요리) 역할엔 이 정도 길이가 딱 적당했다. 잠시 연주의 여운을 즐기던 자르반이 감탄하듯 손뼉을 쳤다.

 “브라보! 정말 멋진 연주였소, 부벨르 영애. 나른하군. 그리고 산뜻해! 마치 나무 그늘 아래서 느긋하게 한숨 자다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기 그지없구먼. 이거 지금까지 들어왔던 음악들이 죄다 어린애 소꿉장난처럼 느껴질 지경이야.”
 “대단한 연주입니다. 과연 부벨르 영애의 명성은 허언이 아니군요.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긴 기분입니다.”

 자르반에 이어 티아나까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 그 목석같던 가렌마저도 티아나 옆에 앉아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연주십니다. 더 좋은 말로 표현해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군요.”

 가렌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지만 소나는 그에게서 들려오는 감탄의 팡파레를 들을 수 있었다. 딱딱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의외로 감정이 섬세한 사람이었다. 소나는 먼저 자르반에게 인사를 올렸고, 그리고 돌아가며 차례로 가볍게 목례를 했다. 레오나에게 인사할 때도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잭스였다. 마지막에 그를 살짝 흘겨보는 소나의 시선에선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고집불통.
 “…….”

 잭스는 괜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부렸고, 그럴수록 소나의 눈매는 점점 더 가늘어졌다. 소나가 그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작은 연주회 자체가 잭스의 고집 때문에 일어난 거였으니 말이다.

 [남들 앞에서 뭘 먹진 않습니다.]
 [아, 얼굴 보이기 불편하다면 휘장이라도 쳐 드리지. 그 정도쯤이야…….]
 [정 그러시면 따로 담아주십시오. 알아서 먹고 오겠습니다.]
 [하하, 설마 내가 얼굴로 사람 차별이라도 할 줄 아는 건가?]

 전당 뒤편 정원에 이미 식기 세팅까지 다 되어있는데 왕족의 식사 권유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누가 그런 간 큰 짓을 하겠냐마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잭스는 그 ‘극히 소수’에 해당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처음엔 거절했고, 그 다음엔 따로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게 소나와 레오나가 잠깐 손을 씻으러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운지 불과 3분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자마자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작태를 목격한 소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눈치 빠른 레오나가 잭스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척 하며 세게 등을 꼬집었고 소나가 재빨리 에트왈을 불러오며 부드럽게 연주를 했다. 다행히 자르반이 소나의 연주도 있고 하니 그럼 간단하게 와인이나 차라도 한 잔 하자고 방향을 틀었다. 거기까지 가면 잭스도 거절할 수 없는 모양새인 건 당연지사.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리에 주저앉아서 따라주는 술이나 넙죽넙죽 받아 마신 것뿐이었다. 가면 사이로 빨대를 삐죽하니 꼽은 채 술을 잘도 쭉쭉 빨아 마시는 그의 모습은 하여튼 이래저래 볼거리였다. 

 다행히 자르반은 자신의 식사 권유가 무시당한 꼴이 되었어도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주하는 내내 자르반의 감정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소나는 그가 정말 잭스의 행동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선 가슴을 쓸어내려야했다.

 -내가 못 살아, 정말. 왜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사고를 치려고 그러세요? 아까 청문회도 잘 참아주셨으면서…….
 “…….”
 -자르반 왕자님께서 아무렴 정말 호의만으로 식사하자고 하셨겠어요? 뭔가 말씀하실 게 있다는 거잖아요. 애초에 왕족 쪽에서 이렇게 굽히고 들어오는 경우도 드문데, 세상에 그걸 거절하기까지……. 정말 저 기절하는 꼴 보고 싶으셔서 그래요?
 “…….”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부턴 잔소리 시작이라는 듯, 잭스의 귓가엔 소나의 유려한 목소리다 두다다다다 울리기 시작했다. 머리에 직접 울리는 그 방어 무시의 잔소리를 피하긴 불가능했으며, 설령 피할 수 있다 한들 소나의 독기 어린 시선을 받아내야 했을 테니 그것도 무리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오직 잭스에게만 흉흉한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소나의 모습은 정말로 무서웠다. 

 잭스는 대체 자기가 왜 이렇게 타박을 받아야 하나 끙끙거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만의 생각이었다. 적어도 지금 보여주는 소나의 분노가 그에 대한 걱정과 안심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려야 할 텐데……. 여성에 대해 10을 배우면 그중 9할 이상을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잭스에겐 참 막연한 경지라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고 잭스의 무죄는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정작 그 당사자가 다 된 일에 재를 뿌리니 소나 입장에선 참 기도 안 막힌 일이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던 거지만 자르반의 식사 권유는 단순히 밥 한 끼 먹자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뭔가 이야기하는 게 뻔하지 않겠는가. 그 조금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열 살까지 애라도 알 만한 일이었다. 

 -다음부턴 잭스 님의 사교성은 그냥 다섯 살 어린애 정도라고 생각할게요.
 “…….”

 소나는 그렇게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찬바람이 쌩 부는 것처럼 말했고, 또 괜히 고집 한 번 부렸다가 된통 잔소리만 듣게 된 잭스의 얼굴은 먹던 수프에서 파리라도 나온 양 찌그러지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건 표정 관리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게 가면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어차피 가면 없어도 푸른 안개 때문에 보일 턱이 없었지만. 잭스의 기분을 눈치 챌 수 있는 유이한 사람인 레오나만 깨소금이라도 콕 집어먹은 양 꼴좋다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결국 잭스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번에 술 털어 넣고 한숨 푹 쉬는 정도밖에 없었다. 그나마 술맛이 좋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나저나 이 시드르(Cidre, 사과주) 정말 대단하군. 이게 그 솔라리의 황금 사과로 만들었다는 술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주로 제례용으로 쓰이기에 밖으로 나가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만. 입에 맞으시면 다행히 몇 통 정도는 가져왔으니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자르반에 감탄에 레오나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도 선선히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 뇌물로 쓰려고 가져온 물건이었지만 이제 필요가 없어졌으니 미련 가질 것도 없었다. 잭스의 어이없는 고집으로 좀 기가 막히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기분 같아선 커다란 잔에 꽉꽉 술을 채워 넣어서 단번에 원샷할 정도로 말이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자제하며 마시고 있긴 했지만 그 기분을 어떻게 감출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은근히 독한 이 술은 무슨 샴페인 마시듯 시원스럽게 마시고 있었다. 여장부다운 기질에 티아나나 자르반의 눈이 반짝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 잘 마시는군. 그래, 이런 귀한 걸 그냥 받을 수야 있나. 거 뭐 필요한 거라도 없소? 이거 나도 왕가에만 제공되는 와인이라고 자랑하려고 가져왔는데 부끄러울 지경이로군.”
 “괘념치 마십시오. 충분히 훌륭한 와인입니다. 오히려 저희 쪽엔 이런 와인이 더 귀합니다.”
 “하하! 그럼 나도 이거 몇 통 선물로 드리겠소. 승리의 미주는 달콤한 법이지. 이제 와서 밝히는 거지만 처음부터 잭스 경, 아 잭스 경이라 불러도 되겠지?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말이야.”
 “뜻대로 하십시오.”

 잭스가 맘대로 하라는 듯 힘없이 말했다. 소나의 잔소리에 두들겨 맞을 대로 맞은 그의 입장에선 자르반이 자신을 잭스라 부르건 개똥이라 부르건 아무 감흥도 없을 지경이었다.

 “험, 다시 얘기로 돌아가자면 난 처음부터 잭스 경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소. 하지만 청문회는 개최해야 했지. 어쨌든 그 빌어먹을 놈팡이들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승인까지 받아낸 거였으니 말이야.”

 자르반이 좀 험악하게 투덜거려도 티아나나 가렌이 별다른 제지도 하지 않는 걸 보아 그들 역시 자르반과 비슷한 심정임을 알 수 있었다. 레오나가 그의 말을 받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무죄로 해주실 생각이셨다니 다행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잭스 경은 전쟁학회 역사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번 일의 범인으로 지목하는 짓거리 자체가 웃기는 일이오. 자국의 챔피언들이 다친 건 물론이고 외교 문제도 발생할 지경인데 그놈들은 제 잇속들만 챙기려 하니, 후우……. 아,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지. 어쨌든 그 귀족 놈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끝났으니 이쪽의 완벽한 승리였어. 잭스 경을 옹호해줘서 정말 고마웠소, 레오나 사제. 솔라리의 권위를 아주 잘 이용하더군.”
 “집단의 권위는 구성원을 보호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으니 말입니다.” 레오나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여기 부벨르 영애 덕분입니다. 영애와, 그 가문의 힘이 없었더라면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레오나가 소나에게 무한한 신뢰가 담긴 시선을 보내며 추켜 세워줬다. 소나는 얼굴을 붉혔지만 주위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옛날에 뒤로 빼서 남들 감정을 들으며 눈치나 살피던 그녀가 아니었다. 요 몇 달,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바로 잭스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였고, 고개를 들며 잭스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좀 전의 서릿발 풀풀 날리던 눈길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나의 눈빛엔 안도와 애정이 봄날의 햇빛처럼 서려 있었다. 이윽고 잭스의 머리에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손……. 한번만 잡아주시겠어요?
 “…….”

 잭스는 망설이다 테이블 밑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어 소나의 손을 잡아줬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을 한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은 건 비단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산들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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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1. 이제서야 말하지만 소나는 잭스를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과 같이 등장시키기에 참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2. 하나의 장면에서 혼자만 말을 못하니 오로지 묘사로만 소나의 모습을 그려내야 하는데 잭스와는 대화를 해야 한다? 뭐 이런 복잡한 조건이 다 있을까요.

3. 지금껏 쓰면서 느낀점은 쓰다보니 되네...입니다.

4. 문체가 가만 보면 호불호가 좀 갈리는 거 같더군요. 3인칭 관찰자 시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작가 평가도 들어가고 제한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도 가고 왔다갔다...실은 쓸 때 저도 막연히 어떤 느낌으로 해야겠다~까지만 정하고 그냥 쓰는 거라, 무슨 시점이다 콕 집어 말하기가 어렵네요.

5. 뭐 언제나 그렇듯, 취향 맞으시면 재밌게 봐주심 됩니다. 피드백도 받아요.

6. 멈추지 말고 꾸준히 연재할걸...이란 생각도 들지만 후회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일단 열심히 써야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네요.

7. 그럼 이만 총총. 다음 화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