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기의 전당

 덜컹

 ‘내가 미쳤었나 봐…….’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소나는 거의 수백 번쯤 되뇐 그 말을 또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거의 울기 반 보 직전까지 와있었다. 그야 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무래도 어젯밤은 분위기도 분위기고 홧김에 좀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숨 자고 난 뒤 머리가 식으니까 비로소 그때 일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소나는 그때부터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려야 했다.

 ‘어떡해……. 대체 잭스 님이 날 뭐라고 생각하실까? 버, 버릇없고 음란하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어제는, 어젯밤엔 그냥, 그냥…….’

 일단 지금까진 가만히 눈 감고 자는 척(아니면 명상이라거나. 사실 어떻게 보이든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을 하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용기의 전당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이 마당에 더 눈을 감고 있기도 좀 그랬다. 굳이 감정을 들을 필요도 없이 레오나가 그녀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기세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있었다. 눈을 떠야 하는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잭스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젯밤이 생각나서 낯이 달아올라 폭발하기 직전인데, 얼굴까지 마주 봐 버리면 그 자리에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거야……. 잠옷 차림에, 그것도 침대에서 그,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라.

 그 뒤의 일이 뇌리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자 이미 분홍빛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던 그녀의 머릿속이 점점 더 진하게 물들어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걸 할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지금 생각해보면 놀랄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그땐 잭스가 뛰어들리라 믿고 와인 병을 슬쩍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부름에 훌륭히 응답해줬다. 속이는 쪽이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그 상황 자체가 참을 수 없이 짜릿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르 울리는 기분 좋은 쾌감에, 그녀는 손을 뻗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췄다. 거칠고, 안개 너머로 흐릿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입술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심장은 가슴을 박차고 튀어나올 듯 두근거렸고 머리는 녹아내릴 만큼이나 달아올랐다. 두꺼운 양모 이불에 몸을 밀어 넣는 것만큼이나 기분이 좋았고 이 세상에 그밖에 없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이러면 안 된다는 배덕감과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욕망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가 주는 쾌감은 굉장했다. 지금 그 감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과장 안 보태서 사랑에 대한 즉흥곡을 백 개도 넘게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나는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만지며 하아, 하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잭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안 보려고 애쓰며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물론.

 “어젯밤은 잘 즐기셨습니까?”

 레오나는 그런 눈꼴 시린 태도를 가만히 봐줄 위인이 아니었다.

 -네?!
 “컥.”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욱더 말이다. 

 용수철 튀어 오르듯 발딱 일어서는 소나와, 그에 맞춰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를 부여잡는 잭스. 둘을 보는 레오나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었다. 

 -아뇨, 아뇨아뇨아뇨! 안 그랬어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건전하게 와인 한 잔만 마셨어요! 진짜! 진짜에요, 레오나 님!
 “크흑! 소리 좀 치지 마시오, 미스 부벨르!”
 -입맞춤은! 입맞춤은 할 수도 있죠! 네? 분위기 좋았단 말이에요! 하고 싶었어요! 보통 헤어질 때 하지 않나요? 친구들끼리 하는 건전한 인사에요!
 “…….”

 그게 건전한 인사라면 세상 건전한 인사는 다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테지만, 불행히도 잭스에겐 그 태클을 걸만한 여유가 없었다. 혼란에 빠져 광란의 변명을 늘어놓는 소나의 목소리는 그에게 음파 병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릴 동안 소나의 수화도 뭣도 아닌 지리멸렬한 손짓이 허공을 휙휙 갈랐고, 레오나는 이미 그 태도에서 답을 얻었다는 듯 점점 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그 사나운 표정이 문자 그대로 암사자 같았다.

 -물론 침대로 제가 유혹한 건 잘못한 거긴 해요! 맞아요, 인정할게요! 근데 그건 잭스 님을 믿으니까 그랬던 거고요! 어차피 그렇게 해도 안 넘어, 아니 워낙 고지식하시니까! 솔직히 전 잭스 님 쪽에서 키스, 아니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고 그냥 잭스 님 쪽에서 손이라도 잡아줬으면 해서! 그랬단 말이에요! 진짜 그것뿐이에요! 그 정도면 건전하잖아요!

 이미 아까 나온 얘기에 ‘침대’, ‘유혹’이라는 단어가 첨부됐는데 어떻게 끝을 ‘건전’으로 끝낼 수 있는지는 대단한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서글퍼지는 잭스였다. 어째 변명인데 꼭 빙 둘러 자신에게 말하는 욕처럼 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추시오. 누,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루암. 그저 부러울 따름이로군요.”

 당황한 건 소나뿐만이 아니었다. 잭스도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자기한테만 들린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레오나의 눈꼬리는 점점 더 치켜 올라갔고, 결국 잭스와 소나가 겨우 진정했을 땐 그녀에게서 살기와도 같은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좀 진정 되셨습니까, 두 분?”
 “험.”
 [진짜 별일 없었어요.]
 “어련하시겠습니까.”

 뒤늦게 수화로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는 소나였지만, 그 가여울 정도로 애틋한 시도는 레오나의 코웃음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좀 더 주변의 눈을 신경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나 양. 레스타라 부인께서 이 자리에 동석하지 않으셨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랬다면 여긴 마차가 아니라 심문실이 됐을 겁니다. 정말 놀랄 정도로 속내를 못 숨기시는군요.”
 [레, 레오나 님이 눈치가 빠르신 거예요. 어머니나 다른 하녀 분들은 보통 눈치 못 채신다고요.]

 레오나는 이런 상황에서 말같잖은 농담이나 한다고 핀잔을 놓으려다 소나의 진지한 눈빛에 뭐라 더 말하지도 못하고 할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래도 소나는 자기가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변의 눈을 신경 쓰기 이전의 문제였군요.” 그리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거 소나 양만 고생하시는 줄 알았는데, 루암도 어지간히 고생하시겠군요.”

 레오나는 한탄하듯 중얼거리더니 이번엔 잭스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루암, 싸움 쪽으로는 그렇게 뛰어나신 분이 어떻게 연애 쪽으로는 이리도 숙맥이십니까? 이럴 땐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리드를 해야 하는 법입니다.”
 “허 참, 얘기도 안 들어보고 뭘 그리 지레짐작을 하는 게냐?”
 “제발 지레짐작이라도 해서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오, 네가 독심술을 연마했을 줄이야. 솔라리 병법서에 그런 것도 적혀 있나 보구나.”

 “독심술이고 뭐고 뻔하지 않습니까? 루암께서 소나 양을 찾아가셨을 리는 없고, 보나마나 소나 양이 반강제로 단둘만의 시간을 가지셨겠죠. 와인 한 병 정도 들고요. 맞나요? 표정 보니 맞겠군요. 술로 들어갔겠다 어젯밤 날씨도 좋았으니 분위기 타서 이런 짓 저런 짓도 한번 기운차게 해보려 했을 거고, 실패했겠죠. 하지만 마지막에 소나 양의 기분은 풀어졌을 겁니다. 어쨌든 루암은 워낙에 진지하셔서 놀리는 재미도 쏠쏠하신 분이니 말입니다.”

 “…….”
 [와.]

 잭스는 비꼬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레오나는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폭풍처럼 대꾸했다. 잭스는 견제용 잽을 날리다가 훅 들어오는 어퍼컷 맞은 기분이었고, 소나는 당황을 넘어 감탄의 눈빛으로 레오나를 보고 있었다. 그 존경의 눈빛을 받으며 레오나는 흡혈귀 심장에 말뚝 박듯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여성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어영부영 애매한 태도만 보이시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아,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설마 저보다 술에 더 관심이 있으실 줄은 몰랐어요.]
 “…….”

 분명 소나도 추궁당하는 쪽이었을 텐데, 레오나의 추리 후에 뭔가 심정이 바뀌었는지 열심히 수화로 뭔갈 얘기하기 시작했다. 수화를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뭔가 묘하게 화가 난 소나의 표정과, 소나의 수화를 보며 서서히 찌그러져 가는 레오나의 표정을 보니 정황상 어젯밤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하는 게 분명할 터였다. 자초지종을 다 들은, 아니 다 본 레오나는 가만히 그를 봤다. 흡사 인간 쓰레기를 내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놀라우십니다, 루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전 정말 제 예상이 틀렸길 바라고 또 바랐는데 말입니다. ” 레오나가 거의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말투로 비꼬았다. “정말 보기 싫은 행동과 듣기 싫은 말만 쏙쏙 골라 하셨군요. 어떻게 보면 그것도 재능일 것 같습니다. 그런 재능이 과연 필요한가는 의문이지만.”

 그 신랄한 말투에 잭스는 목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정황상 또 한소리 들을 게 뻔했다. 한데 흐름은 그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화살은, 놀랍게도 소나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루암의 손을 들어드릴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소나 양이 잘못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