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자 술이 한 순배씩 돌자 기묘하게 날이 서있던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대로 퍼마신 건 아니고, 그냥 입술만 축일 심산으로 와인 반 잔씩만 홀짝이고 있는 정도였다. 도중에 잭스가 와인 맛이 좋다며 은근슬쩍 맥주잔에 따르려다가 그 맥주잔으로 한 대 맞을 뻔한 것만 제외한다면, 잠깐의 휴식 시간은 꽤 평온하게 지나간 편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베사리아였다.

 “우선, 잭스 당신의 참전은 우연이 아니었어요.”

 이젠 먼 예전처럼 느껴지는 일이었지만, 잭스는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난 가렌의 대타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요. 경기 시작하기 겨우 30분 전쯤인가 해서 자르반 왕자에게 직접 연락이 왔었죠. 급한 일이 생겨서 가렌을 못 내보내겠다고요. 그땐 또 이것들이 무슨 물밑 견제를 하고 있나 짜증이 나서 그냥 넘어갔었는데, 어제 들어보니까 진짜 급한 일이긴 했더라고요. 반란이 일어났었대요.”
 “반란?”
 [반란요?!]

 시큰둥한 잭스의 태도와는 달리 소나는 또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다행히 이번엔 잭스도 예상을 해서 그런지 바닥에 자빠지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그래도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예상했다고 해서 들리는 목소리가 안 들릴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또 고귀하신 데마시아 귀족 나리들께서 정의랍시고 여럿 힘들게 했나 보군.”
 [잭스 님!]
 “틀린 말도 아니잖소. 귀족들이 서민들 쥐어짜는 거야 뭐 흔한 일이지.”

 그 신랄한 말투에 소나가 경고하듯 노려봤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렸다.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데마시아는 질서와 정의를 숭상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었다. 작은 어둠은 금방 지워졌지만, 큰 어둠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심에는 늘 부패한 귀족이나 권력자들이 썩은 과실에 몰려드는 날파리 떼처럼 엉겨 붙어있었다.
 소나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그녀 자신부터가 귀족들의 그런 어두운 내면을 듣기 싫어 사교계에 학을 뗀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소나는 잭스에게 그런 말을 듣긴 싫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자신도 그 ‘귀족’ 중에 하나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소나가 주눅이 들자 베사리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딱딱거렸다. 왜 이렇게 배려심이 없냐는 투였다.

 “소나 양 앞에서 그렇게 신랄하게 말할 건 없잖아요. 모든 귀족들이 다 그러는 것도 아닌데. 부벨르 가문은 자선 사업으로도 유명하다고요.”
 “험, 악의는 없었소.”
 “어련하시겠어요.” 

 베사리아가 째려보며 이죽거리자 잭스가 애써 말머리를 돌렸다.

 “그놈의 반란은 어디서 일어났던 거요?”
 “드레스덴에서요.”
 “그럼 애도의 성문에서 겨우 반나절 떨어진 곳이잖소. 그거 심각한 문제긴 했었군.”

 데마시아 쪽으로 뻗던 녹서스의 진군은 ‘애도의 성문’에서 막힌 채 멈춘 상태였다. 그때쯤 리그의 중재가 있었던 것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 근처에 ‘철벽성문’이라 불리는 드레스덴 요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줄기로 뻗어 나가는 호른 호수 바로 아래에 위치한 드레스덴은 문자 그대로 천혜의 요새이자 데마시아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였다. 
 거기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면 분명 큰일이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잭스의 목소리엔 별로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베사리아가 조급해하지 않는데 그가 조급해할 이유가 없었다. 이래저래 말은 많아도 둘은 서로를 믿는 사이였다.

 “뭐, 심각한 문제였으니까 가렌이 급히 투입됐던 거겠죠? 자르반은 급보를 받자마자 일단 뒤도 안 돌아보고 불굴의 선봉대 먼저 투입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신 말대로 거긴 녹서스 턱밑이고, 그걸 제외하더라도 드레스덴은 수상과 육상 교통, 곡창지대 등등 가치가 엄청나니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되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보니까 되게 싱겁게 끝났대요.”
 “반란이 말이오?”
 “아뇨, 애초에 반란이 안 일어났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일어났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와인 한 잔에 취했소?”
 “아 좀! 안 취했어요!” 베사리아가 눈을 사납게 치뜨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니까! 가렌이 거기에 도착하니까 반란을 일으킬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었대요. 농성용 장비부터 무기, 식량에 격문까지 완벽하게요! 그런데 가렌이 도착하니까 얌전히 성문 열어주면서 하는 말이, ‘저희도 저희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잘못이 없습니다.’였다고 하더라고요.”
 “…….”

 순간 잭스는 이해가 안 가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소나도 마찬가지였다. 반란을 일으킬 준비까지 다 해놓고 막으러 오니까 우리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고 발뺌을 한다니, 3류 연극에서도 안 나올 전개였다.

 “그 뒤엔 어떻게 됐는지 아시오?”
 “흐지부지하다가 그대로 끝. 가렌도 처음엔 혹시 속임수 아닌가 해서 엄청 의심했는데, 드레스덴 영주가 스스로 쇠고랑 차고 나오면서 모든 게 자기 잘못이니까 아랫사람들만큼은 살려달라고 사정을 해서 결국 믿어줬다나 뭐라나?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일단 반란 일으킨 것 자체는 맞으니까 감옥에 가둬놓고 계속 취조도 하고 심문도 했다는데 그것도 시원찮았던 모양이에요. 하긴 계속해서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 목만으로 끝내 달라, 이 말만 반복해서 하는데 무슨 영양가가 있겠어요? 게다가 당신 청문회 열리기 며칠 전엔 드레스덴 쪽 지방 귀족들이랑 시민들의 탄원서까지 날아와서, 결국 어제 제가 찾아갔을 땐 이미 석방하고 불문에 부치는 걸로 얘기가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드레스덴 영주님이라면 이르간테 후작님이세요. 선정을 베풀기로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죠. 그분이라면 영지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아, 소나 양은 그 사람 알고 있었어요? 난 귀족들은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보이던데. 구별이 안 간다니까, 호호.”
 “예전엔 학회 서고가 머리에 들어있니 어쩌니 하던 건 다 뻥이었소?”
 “뻥 아닌데요? 쓸데없는 데에 기억력 허비하기 싫을 뿐이에요.”
 “허허, 소환사들이란.”
 “왜요, 또 뭐요?”

 또 베사리아와 잭스가 아기들처럼 아웅다웅 으르렁거리자 그 모습에 소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물고 물리는 게 꼭 아기 사자들이 으르렁대는 것만 같았다.

 [싸우지들 마세요. 저 같은 아가씨들에겐 다른 가문에 대해 익히는 건 기본 소양이거든요. 특히나 전 나중에 가문을 물려받아야 하니 더 엄하게 교육받았어요. 후후, 그때가 그립네요. 어쨌든 드레스덴 후작님은 예전에 사교계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어요. 제가 느끼기엔 분명 올곧은 분이셨답니다.]

 소나는 이르간테 후작의 말쑥한 차림새를 상상하며 말을 이었다. 만난 건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소나는 그 노귀족의 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간결하고 강철 같은, 그리고 부드러운 소리. 음흉함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문자 그대로 청렴결백한 인물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반란을 일으키셨다니……. 전 도저히 상상도 못하겠어요.]

 그랬기에, 소나는 베사리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
 “……!”

 그렇다, 상식적으로.

 소나와 잭스는 동시에 베사리아를 바라봤다. 아마 잭스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설마 거기서부터 에스트렐 놈들의 훼방이 있었다는 거요?”
 “맞아요.”

 베사리아는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잭스는 기가 차다는 듯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약이지 않소? 가렌을 그 리그에 참가 못 하도록 수를 쓴 거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그게 왜 나와 연관이 된단 말이오? 가렌 대타로 나올 수 있는 챔피언이 나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실상 잭스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가렌은 탑(Top, 협곡 상부) 라인을 가는 ‘전사’ 역할군의 챔피언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니까. 굳이 그 말고도 전사 역할군이 있는 챔피언들은 차고 넘첬다. 슈리마의 나서스나 레넥톤도 있었고, 데마시아의 신 짜오나 프렐요드의 트런들도 있었을 테고……. 아무튼 차고 넘치는 게 전사였다. 

 하지만 베사리아의 미간은 팍하고 찌그러졌다. 그의 대답이 단단히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경기 시작 30분 전에 갑자기 빠졌다고. 그리고 그때 경기는 데마시아와 녹서스 알력이 걸려 있는 문제라 대부분의 챔피언들은 죄다 이런저런 이유 대면서 거절한 상황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30분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대타 구해요? 전 학회와 제 체면 구기면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단 말이에요,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그러니까 그때 부를 사람은 당신 하나밖에 없었어요. 당신이…아냐, 됐어요.”

 말하다가 어쩌다 보니 나왔다는 투라 베사리아는 황급히 입을 멈췄지만,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잭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더 그의 눈매를 찌푸리게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뭘 말이오?”
 “아니 됐다니까요. 그냥 넘어가요.”
 “허어,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하든가 하시오. 또 뭘 꼬투리 잡으려고…….”
 “당신이 내 유일한 선택지였다고요! 됐어요?!” 꼬투리란 말에 짜증이 솟구쳤는지 베사리아가 빽 소리쳤다. “투덜대긴 해도 부탁하면 일단 해주니까! 당신이랑은 괜히 복잡한 정치 관계도 생각할 거 없으니까! 내가 제일 신뢰하니까! 그래서 부른 거였다고요!”
 “…….”

 소리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속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었다. 잭스는 별생각도 없이 말한 거에 과민 반응이 튀어나오자 외려 난감한지 쩔쩔매고 있었다. 소나는 베사리아의 기세에 압도당해서 수정구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고 말이다.

 “그때 내가 당신 안 불렀어도 당신이 협곡에서 죽을 뻔하진 않았을 거라고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아요? 겨우 마음 추스르려니까 또 찔러대기나 하고! 못됐어, 정말! 진짜 당신이란 인간 못돼 처먹은 인간이야! 꼬투리? 꼬투리라고?! 내가 정말 그때 어떤 기분인 줄도 몰랐으면서!”

 베사리아가 거의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자 폭풍 같은 분노에 잭스는 그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지금 화를 낼 맥락인가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닌데, 그냥 덮어놓고 무조건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잭스는 거기에 또 한마디를 변명이랍시고 덧붙이고야 말았다.

 “그게, 난 그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나도 충분히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라고요! 왜 자꾸 태클을 걸고 난리에요, 짜증나게! 당신 부를 만한 이유 충분했다고요! 알겠어요?!”
 “아, 알겠소.”
 “진짜 말하는데 한 번만 더 토 달면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릴 거예요! 작전 회의고 뭐고 다 필요 없이!”
 “알겠소. 알겠으니까…….”
 “또 뭐요!”
 “…그, 가구들은 좀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내가 잘못했소.”
 “가구?”

 이 남자가 헛것이라도 보는 건가, 베사리아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잭스를 거쳐 소나 쪽을 바라봤다. 소나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다리를 꼭 오므리고 있었다. 그녀가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고 있는 수정구엔 한마디가 떠오르고 있었다.

 [뒤에……. 가구들부터 내려놓으셔야 할 거 같아요.]

 소나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베사리아는, 잭스를 거의 덮치기 직전의 책장이며 책상이 묵직하게 허공에 떠있는 걸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

 “…어머나.”

 그제야 사태가 파악된 베사리아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이며 책장과 책상을 내려놨다.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잭스 때문이 아니라 소나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 소나에게 자기가 기품 있는 숙녀로 비춰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환상은 애저녁에 지워버린 지 오래인 소나였다. 베사리아 혼자 신나게 착각하고 있는 꼴이었다.

 “호호, 제가 좀 흥분했나 봐요. 나도 참, 가끔 이렇게 마법이 먼저 나온다니까요. 미안해요, 소나 양.”
 [괜찮아요…….]

 소나는 멍한 표정으로 베사리아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가면 사이로 옅게 새어나오는 잭스의 한숨 소릴 들으면서 말이다. 못 볼꼴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건 소나 그 자신이었다. 잭스는 알까? 아니, 알 리가 없었다. 어쩌면 평생 모를 수도 있었다.

 소나 눈엔 잭스나 베사리아나 그 수준이 그 수준으로 보일 뿐이었다.








-------------------

1. 잭스랑 베사리아는 따로 떨어져 있으면 멀쩡한데, 붙어 있으면 인간의 밑바닥까지 유치해질 수 있는 듀오인 거 같아요.

2. 드레스덴 위치는 룬테라 지도에서 애도의 성문 위쪽으로 올라오면 강 세 줄기로 뻗어나가는 호수 있는데, 그 바로 아래라는 설정입니다. 실제 있는 곳 아닙니다. 지어냈어요.

3. 드레스덴은 독일 도시 이름인데 어감이 묘하게 좋아서 써봤습니다.

4. 철벽성문은...제 닉 중 하나입니다....

5. 원래는 오리지널 캐릭터의 이명인데, 오리지널 소설 줄기 짠다고 한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네요. 묵혀만 두고 있습니다.

6. 예전엔 아 이 장면은 빨리 스킵해야지 이런 것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냥 쓰고 싶은 장면 맘껏 길게 쓰고 있습니다. 

7. 그럼 다음화로 뵙겠습니다. 질문은 댓글 달아주시면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