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오니아로 가면 뭔가 있지 않겠소?”

 그때 잭스가 툭 하고 끼어들자 베사리아와 소나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소나는 단순히 그가 말해서 고개를 돌린 것뿐인 듯싶었지만 베사리아의 눈빛은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지금 여기서 누가 그걸 모르냐’는 듯 한심하다는 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눈빛에 잭스는 얼른 다시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는 연애에 굼뜬 것이지 눈치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 아까 말대로 근거도 없이 의견만 나누기보단 가서 발로 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마침 나도 가야하고. 혼자보다는 둘이 효율도 좋지 않겠소.”

 확실히 잭스의 의견은 타당했다. 문제의 실마리조차도 없는 현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는 아이오니아뿐이었으니까. 뻔한 얘기긴 했지만 그런 점에서 그의 의견은 분명 옳았다. 옳긴 했는데……. 소나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금세 부루퉁해졌다.

 [제가 말씀드렸을 땐 저희 어머니 핑계 대시면서 찬물 끼얹으셨잖아요.]
 “그…….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뿐이지, 그게…….”
 [흥, 됐어요.]

 잭스가 쩔쩔매며 되도 않는 변명조차도 못하자 소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런 새침한 태도와는 달리 그녀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겉으로는 삐진 척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니 솔직히 그녀는 꽤 기분이 좋았다. 잭스와 아이오니아로 같이 갈 수 있는 합당한, 그리고 정당한 이유가 생겼는데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 촌극 아닌 촌극을 보는 베사리아는 짐짓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잭스를 째려볼 뿐이었다.

 사실 소나에게 있어 가장 큰 난관은 레스타라 부인의 허락이 아니었다. 바로 잭스 그 자신이었다. 문제는 그가 그 사실에 대해 털끝만치의 자각도 없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잭스 자신이 소나가 동행하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면 어머니를 설득하든 뭘 하든 의미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레스타라 부인을 설득한다는 건 소나에게 있어서 그보다는 훨씬 더 할 만한 일이었다. 십수 년간 같이 살아온 가족 아니던가. 설득이 힘들다는 것이지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이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잭스를 쥐고 흔들 무기를 제 손으로 버리는 바보가 아니었다. 은근한 승리감에 젖는 소나를 뒤로 하고 베사리아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아이오니아로 가는 걸로 결정 났네요? 좋아요, 잘됐네요. 소나 양이야 뭐 워낙 리그에 출전하는 경우가 드무니 별 상관없지만, 잭스 당신은……. 요양 중이란 사실은 숨기는 게 좋겠어요. 리그에 당신의 출전 요청이 들어오면 챔피언 더미(dummy, 대역 인형)를 내보내는 걸로 할게요.”
 “견습 소환사들 연습용으로 쓰는 그거 말이오? 그런 걸로 숨겨지겠소?”
 “당연히 소환사들이야 다 알죠.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건 아무런 차이도 없을 거예요. 겉모습은 똑같고, 기술도 리그에서 정한 기술들밖에 사용 못하는 걸로 돼 있으니까요. 게다가 당신은 늘 가면 쓰고 다니잖아요. 가장 난감한 게 표정인데 그것도 간단히 문제 해결이고. 아주 감쪽같을 거예요.”

 베사리아는 걱정 말라는 듯 어깨를 쭉 펴며 말했다. 그러나 뒤이어진 그녀의 말엔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런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잭스, 몸 상태는 좀 어때요?”
 “견딜 만…….”
 “거짓말하지 말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따가운 눈총 세례를 받자 잭스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보단 많이 안 좋소.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기보단 총량이 깎여나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요즘 들어 몸을 움직일 일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좋겠소만…….” 그가 가만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 린 없겠지. 불길한 예감은 항상 기가 막히게 적중하니까.”
 “육체적으론 거의 완치가 된 상태에요. 근육이나 뼈에도 특별히 이상은 없고, 피검사도 이상 없고, 알레르기 반응도 없고, 급격한 노화 반응이나 장기가 이상이 있는 것도 없어요. 화상으로 인한 2차 감염도 없고요.”
 “자세히도 아는군. 언제부터 주치의 노릇도 해준 거요?”
 “당신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요.”
 “…….”

 빈정거리려고 한 말을, 마찬가지로 으스대며 반격하는 베사리아였다. 

 “우선 가서 소라카부터 만나요. 저번처럼 그 바보 같은 명상인지 뭔지 기다려준다고 상태 악화시키지 말고요. 도움 줬으면, 도움 준 만큼 그쪽한테도 받아요. 그래야 서로 마음이 편한 법이라고요.”

 베사리아가 검지로 잭스를 거의 찌를 듯 가리키며 딱딱거렸다. 그런데 빚이라니? 소나는 처음 듣는 얘기가 나오자 약간 당황했다. 베사리아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소나 양, 잭스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거, 떠들고 다닐 주제도 아닌데…….”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요. 아이오니아와의 관계에 대해 잭스한테 들은 적 없죠?”
 [네.]

 소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들은 얘기는 소라카에게 예전에 신세를 진 적이 있고 다시 신세 지러 가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소나를 바라보는 베사리아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들려오는 감정 역시 이런저런 감정들이 미묘하고 옅게 섞여들 있는지라 소나는 그녀가 어떤 기분인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베사리아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간단히만 설명해줄게요. 자세한 건 나중에 잭스한테 들어요.”
 “…베사리아.”
 “내가 말할까요, 아니면 나중에 아이오니아 도착해서 소나 양 당황할 때 쩔쩔매면서 설명할래요? 진짜 간략히만 말할 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가시 돋친 한마디로 잭스의 입을 꾹 다물게 한 베사리아는 다시 소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녹서스가 아이오니아 침공했을 때 알죠?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도요.”

 [녹서스가 아이오니아를 침공해서 몇 개 주(州)를 정복했고, 그 뒤에 플레시디엄 대평원에서 나보리 결사대가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 전쟁학회에서 중재했다고 알고 있어요. 아, 그때를 기념해서 리그에 아이템을 추가했다고도요.]
 “정확해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발표했고, 대륙 각지의 역사서들에도 그렇게 기록됐죠.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몇 배는 복잡했어요. 애초에 녹서스의 침공 자체가 학회의 허점을 교묘히 노린 술책이기도 했고요. 전쟁 초기부터, 아니 아예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가 개입할 수 있었다면 피해는 훨씬 적었을 거예요.”

 베사리아는 그러면서 푹 한숨을 쉬었다. 녹서스의 그 ‘장난질’ 이후로 두 번 다시 꼼수를 부릴 수 없게 관련 안건들을 모조리 처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전쟁학회는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았었다. 애쉬람은 홀연히 실종됐었고 헤이완 렐리바쉬를 비롯한 학회 내 파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에게 으르렁댈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다가 녹서스가 전쟁까지 터뜨렸으니, 그때만 회상하면 베사리아는 없던 편두통도 다시 생길 지경이었다.

 “지금이야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 리그의 개최를 선포할 수 있지만, 그땐 양쪽의 동의가 있어야 리그를 개최할 수 있었어요. 근데 설마 녹서스 측에서 아이오니아 수뇌부들을 매수했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전쟁은 일어났지, 아이오니아는 리그에 가입 안 하겠다고 하지, 사람들은 죽어 나가지, 전쟁학회는 왜 가만히 있냐고 바깥에선 뭐라 그러고 안쪽에선 대처 제대로 못 한다고 나를 씹고 뜯지……. 후우, 그 자식들 다 죽였어야 했는데.”
 […….]

 마지막에 얼마나 살의가 뚝뚝 흐르던지 소나는 이 따뜻한 집무실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베사리아는 잭스를 흘깃 봤다.

 “결국 그 상황에서 우리가 쓸 카드는 잭스뿐이었다 이 말이에요. 전쟁 경험도 풍부하고…….”
 “혹시나 문제가 되더라도 바로 잘라낼 수 있었지.”
 “…진짜 인정하긴 싫은데, 그땐 그렇게도 생각했었어요.” 베사리아는 하기 싫은 소리 겨우겨우 짜내듯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때 잭스가 아이오니아 저항군들에게 협력해서 여러 전쟁에 참여도 했고, 우리도 잭스 통해서 이런저런 간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어요. 정말 간접적으로밖에 도와줄 수가 없었다는 게 유감이긴 했지만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플레시디엄 전투까지 전쟁을 끌고 갈 수 있었고, 아이오니아가 극적인 승리까지 따낼 수 있었던 거죠.”
 [그 뒤는 말씀하신 것처럼 학회가 중재했다는 거군요?]
 “맞아요. 그 전투가 결정타가 돼서 우리가 합당하게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줬으니까요. 그 이후는 다 아는 얘기에요. ‘아이오니아 장화’라는 아이템 추가해서 승리 기념하고, 아이오니아 출신 챔피언들 영입하고……. 후후, 솔직히 말하면 그 장화 말이죠. 녹서스 쪽 어디 엿 좀 먹어보라고 만든 것도 있었어요. 성능도 좋게 만들었으니까 안 쓸 수는 없겠고, 챔피언들이 자기 의지로 아이템을 선택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배알이 좀 뒤틀렸겠죠.”
 [하하…….]

 소나는 애써 웃으며 베사리아에게 겨우 장단을 맞춰 줬다. 그러면서 베사리아가 정말 가차없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소나의 생각대로 베사리아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거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겐 아낌없이(물론 차등은 좀 있었다) 퍼줬지만, 적대하는 사람들에겐 눈물 쏙 빠질 정도로 용서가 없었다. 한마디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소나와 적이 될 리가 없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이 다 좋게 끝나진 않았어요. 그때 잭스가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푸른 불꽃’을 사용했었거든요. 나 참, 아직도 그 일에 대해서 안 말해준다니까요! 그러면서 괜찮은 척하다가 골로 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걸 마침 명상 끝나고 나왔던 소라카가 겨우겨우 살려주고……. 나 그거 들었을 때 정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옛날엔 더 심하셨나 보네요…….]
 “지금보다 더 심했죠! 자기 일에 대해선 곧 죽어도 괜찮다는 말밖에 안 하는 사람이었어요. 소나 양도 명심해요. 잭스의 괜찮다는 말만큼 신뢰도 떨어지는 말은 없다는 거요. 만약 괜찮다는 말 들으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둬야 해요. 알겠죠?”
 [네, 명심할게요.]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꼭 레스타라 부인과 겹치는지라 소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나를 보며 베사리아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아요. 나머지 얘긴 잭스한테 들으세요.” 그러면서 베사리아는 잭스를 찌릿 노려봤다. “들었죠? 나 나중에 소나 양한테 물어볼 거니까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요.”
 “쓸데없는 말 하기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중에 설명하리다.”

 잭스는 궁시렁거렸지만 일단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어나 찻잔이며 접시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가기 전에 설거지는 끝낼 심산인 모양이었다. 몇 시간에 걸친 대화 때문에 그는 매우 지쳐 있었다. 대화만 했는데 왜 이리저리 치인 듯 얼얼한 느낌이 드는진 미지수지만 말이다.

 “뭐 해요?”

 하지만 베사리아는 그런 잭스를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왜 그러냐는 듯 물었다. 그건 소나도 마찬가지였다. 잭스는 뭔가 자기 혼자만 멍청해진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혹시 다과라도 가져오시려고 그러시는 건가요, 잭스 님?]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었소?”
 “그랬으면 내가 할 말 다했으니 가라고 했겠죠?”
 “…….”

 이럴 땐 이상하리만치 정상적인 소리만 하는 베사리아였다. 바빠 죽겠다고 징징거릴 땐 언제고 지금은 일이고 뭐고 다 까먹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땡땡이칠 좋은 핑곗거리 찾았으니 아주 뽕을 뽑겠다는 것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다음에 하면 안 되겠소?”
 “안돼요. 중요한 얘기에요.”
 “…….”

 마치 지금까진 중요한 얘기가 아니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베사리아는 말로 그의 어깨를 눌렀다. 하지만 그는 엉거주춤한 채로 앉지 않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그는 정말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뒤이어 말하는 베사리아의 한마디는 그를 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에스트렐 일족에 대한 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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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전에 올렸던 건 맘에 안 들어서 밀고 고쳐서 다시 올립니다.

 1. 이거 쓸 땐 롤 세계관 개편 전이었는데 ㅋㅋ...구 설정과 신 설정은 제가 적당한 선에서 섞겠습니다.

 2. 이렐리아 캐릭터성을 뭘로 할지 진짜 고민 많이 됐는데 결정했습니다. 주요 키워드는 '신뢰'와 '속죄'가 되겠군요.

 3. 굳이 말하자면 베사리아는 '후회와 자책', 레오나는 '존경과 헌선', 소나는 '순수와 사랑'이 되겠군요. 

 4. 에스트렐 일족은 어디에도 없는 오리지널 설정입니다. 설정 짤 당시엔 세계관 어디에도 연관되지 않도록 만들긴 했습니다. 근데 지금 보니 잘 한 거 같네요.

 5. 덧글과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