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들이 구심점도 없이 술렁였다. 분위기는 이미 잭스가 무죄라는 쪽으로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사실상 이 청문회가 열린 이유도 단순히 전쟁학회 쪽에 압박이라도 넣어 건더기라도 건져 보려는 바보 같은 이유 때문이었으니, 뭔가 더 내세울 만한 핑계가 있을 리가 없었다. 티아나 대원수는 이 멍청한 놀음에 어울려줄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고, 자르반 왕세자는 청문회고 뭐고 잭스 자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판국이라 사실상 청문회는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도 격식은 지키면서 꼴에 귀족들이라고 어느 정도 체면은 세워줘야 했다. 그게 정치였으니 말이다. 자르반은 서서히 끝낼 작정으로 슬쩍 티아나에게 눈짓을 했다.

 “어쨌든 누가 이 사건의 주모자인지 왈가왈부는 그만하도록 하지. 아직 제대로 정보도 모이지 않았고, 또 티아나 대원수의 말대로 이 청문회의 사안은 그게 아니니까 말이야. 소환사의 협곡에 걸린 마법을 무시하고 거의 모든 챔피언들을 조종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자라……. 거기에 협력해주는 하수인들도 있다니 이거 만만찮겠군. 대원수, 그대는 이 용병이 그런 지식이나 세력을 가졌다고 보는가?”
 “전쟁학회에 자문을 구해서 그의 신원을 조회했습니다.” 티아나가 보고서 몇 장을 팔랑팔랑 넘기며 말했다. “특별한 점은 딱히 없습니다. 굳이 특이한 점 하날 따지자면 챔피언 로열티의 대부분을 기부한다는 점이겠군요.”
 “기부라? 최초 17인의 챔피언 중 하나라 로열티도 상당할 텐데 그걸 대부분 기부한다고? 어디에 말인가?”
 “주로 고아원입니다. 그것 말고도 구호 기금으로도 상당히 기부하고 있고……. 데마시아 쪽의 시설들에도 후원을 하고 있군요.” 티아나의 눈길이 힐끗 잭스 쪽을 향했다. “그것도 익명으로 상당한 액수를 말입니다. 여기…….”
 “엄청나군.” 티아나가 건내 준 보고서를 슬쩍 보던 자르반이 감탄을 넘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퍼주면 남는 거라도 있나?”
 “그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전하.”
 “나도 아네. 아 농담일세, 농담. 그렇게 보지 말게.”
 -어머나…….

 다시 시선이 잭스에게 쏠렸다. 이번에는 레오나와 소나, 심지어 자르반 왕세자에 티아나 대원수까지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경멸의 시선이 아니라 존경과 호의 또는 믿을 수 없다는 황당함의 시선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개중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귀족들도 있었다.

 “사실인가, 잭스?”
 “그…….” 잭스는 불의의 습격이라도 받은 양 허둥거렸다. “맞긴 맞습니다.”

 그는 그 짤막한 한마디를 끝으로 가타부타 말도 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다른 사람들이야 몰라도 소나와 레오나는 그런 잭스의 모습을 잘 알았다. 그는 담백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위험한 일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며, 거칠지만 상냥한 사람. 그를 바라보는 소나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소녀만이 지을 수 있는 눈웃음이었다.

 -잭스 님, 그런 말씀은 한 번도 안 해주셨잖아요?
 “아니, 뭐 얼마나 자랑거리라도 된다고 굳이 얘기하겠소?”
 -하지만 잭스 님, 어떻게 이런 일을 몰래……. 누구보다도 신사 같으세요. 너무 멋져요.
 “아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잭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냥 그렇다 칩시다.”

 잭스는 소나와 속닥거리다 다시금 고개를 푹 수그리며 꿍얼거렸다. 다행히 뒤이어 레오나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들이대듯 말해서 혼잣말 한다는 쓸데없는 누명은 피할 수 있었다.

 “정말 멋지십니다, 루암. 약자를 위한 보이지 않는 헌신. 그야말로 칼레스 비블리아(Caeles Biblia, 하늘의 경전이라는 뜻으로 솔라리의 중요 경전 중 하나. 솔라리의 정신을 상징한다)의 가르침 꼭 그대로입니다. 역시 루암이십니다. 제가 당신의 미리암(Myriam, 제자라는 뜻의 솔라리 고어)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너까지 또 왜 그러느냐?”

 더 떨어질 나락도 없다는 듯 잭스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음울했다. 레오나는 솔라리 고어까지 써가며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솔라리의 신성한 말을 외부로 유출시키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규칙 따윈 코 푼 휴지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두 소녀의 진심 어린 감탄은 그에게 거의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따위’로 취급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잭스는 이 낯 뜨거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찌나 그 생각이 간절했던지 그냥 눈 딱 감고 내가 그냥 범인이오, 이러고 잡혀가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하, 하하하하! 이거 참, 매 해 연말마다 데마시아의 모든 구호 단체에 익명으로 막대한 기부금이 들어오긴 했었지. 대체 어느 가문에서 보낸 건지 찾느라 골치가 아팠는데 찾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군. 설마 그 누가 이곳과 관련도 없는 꾀죄죄한 용병이 주인공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꾀죄죄하다뇻!
 “뚫린 입이라고…….”
 “…….”

 레오나가 어찌나 사납게 뇌까렸는지 잭스는 뒤통수가 섬뜩할 지경이었다. 작게 말했지만 그가 들을 정도면 소나 역시 듣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소나 역시 뭐라 말리긴커녕 레오나에 뒤지지 않을 만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단지 레오나만큼 거친 면이 없는 성격인지라 표현이 좀 더 부드러울 뿐이라는 게 차이점의 전부였다. 자르반을 향해 뿜어내는 적의는 레오나에 비해 더했으면 더했지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참으로 기분이 묘한 잭스였다. 그를 가장 많이 놀리고 장난치는 두 당사자가 남이 뭐라 한마디 했다고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꼴이라니. 뭔가 뻔뻔하다는 말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를테면 내 장난감을 내가 가지고 노는 건 상관없는데 남이 가지고 노는 건 용납 못한다, 라는 느낌이었다.

 “…….”

 일단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선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해봤자 마음만 심란해질 게 뻔했다. 그런 그의 속을 득득 긁기라도 하듯 자르반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내가 아무래도 자리를 잘못 연 것 같군. 청문회가 아니라 서임식이라도 열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 정도 덕목이면 기사 서임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티아나 대원수?”
 “기사를 상징하는 다섯 덕목, 즉 지혜와 관용, 연민, 용기와 명예 중 연민의 자격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소 두 자격 이상은 갖춰야 합니다.”
 “뭐 토너먼트라도 개최하면 되겠지. 그건 나중에 대화를 나눠보세나, 잭스. 좀 진지하게 말이야. 의외로 재밌는 수확을 건진 날이로군, 하하!”

 자르반이 크게 웃으니 귀족들도 떨떠름하게 웃거나 따라 웃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청문회는 물 건너 간 상태였다. 애초에 청문회라는 게 흠을 들춰내기 위한 자린데 어째 파면 팔수록 미덕만 소시지 뽑혀 나오듯 줄줄이 뽑혀 나오니 그들로서도 김이 빠질 터였다. 그런 자르반의 기분을 더욱 띄워주려는지 소나가 재빨리 레오나에게 뭔가를 수화로 전했다. 이윽고 레오나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만약 전하께서 토너먼트를 개최하신다면 부벨르 가문에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레오나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그리고 만일 일이 그렇게 된다면 저희 솔라리는 미리 참가 의사를 밝히고 싶습니다. 데마시아의 정신은 분명 솔라리의 전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겁니다.”

 소나의 화사한 분위기와 레오나의 늠름한 분위기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판국에 자기가 원하는 말만 딱딱 해주니 자르반의 미소가 더더욱 유쾌해지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하! 물론이오. 내 아주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소.”
 “거침없는 결단이 참으로 호쾌한 분이시군요.”

 레오나는 방금 전에 ‘뚫린 입’ 운운하며 사납게 뇌까렸다는 게 거짓말처럼 보일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하고 있었다. 잭스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걸 넘어 어이가 탈출할 지경이었다.

 일단 자르반은 지금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 매우 흡족한 모양인지 유쾌한 감정을 힘차게 뿜어내고 있었다. 소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결정한 게 정답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자르반이 이미 티아나 대원수와 작정하고 잭스를 무죄로 만들 생각을 하고 나왔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자신부터 리그의 챔피언으로 있는데 전쟁학회와 각을 세울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을 터였다.

 “나는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네만, 기왕지사 다들 이렇게 모인 거 좀 더 얘기를 들어도 나쁠 건 없겠지. 라우자르프 백작! 발언권을 주겠네. 귀족들을 대표해서 어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물어보게나.”
 “네, 넷! 전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귀족들 뒤쪽에서 누군가 빈말로도 점잖다곤 할 수 없는 걸음걸이로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살집이 꽤 있고 순박하게 생겨서 귀족이라기보단 시장의 정육점 주인이나 농부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건 여타 다른 귀족들도 똑같이 느끼는 바인지 그가 나오자마자 낮게 혀를 차거나 비웃는 소리가 났다. 본인들은 작게 냈다고 하나 소나의 귀를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소나는 그에 대해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교활한 충성심을 들을 수 있었다. 교활하다는 말과 충성심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는 어수룩한 태도로 무장한 자르반의 심복이었다. 자르반은 아예 잭스를 무죄방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를 이용해 귀찮은 귀족 무리들을 단단히 찍어 누를 모양이었다. 그 역시 잭스를 이용한다는 점이 살짝 기분 나쁘긴 했지만, 소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잭스에게 나쁠 건 없었으니 말이다.

 “저, 레오나 님. 라우자르프 백작입니다. 부족하지만 외교부의 3등 서기관을 맡고 있습니다.”
 “솔라리의 레오나입니다.”

 레오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라우자르프 백작의 모습은 더욱 더 초라하게만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비굴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겠지만, 레오나는 상대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은 일종의 전장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절대 전장에서 방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승기가 뚜렷해도 말이다.

 “그, 아까 잭스 님의 신분을 보증한다 하셨는데 혹시 그분의 목에 걸린 게…….”
 “알아봐 주시니 다행이군요. 맞습니다. 솔라리의 디에스 콘세뇰을 상징하는 장신구입니다. 원래는 팔찌와 허리띠까지 착용해야 하지만, 루암 잭스께선 청빈을 추구하는 분이신지라 그것마저도 거부하셨습니다.”

 가면 속에서 잭스의 입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듯 쩍 벌어졌다. 레오나는 그런 잭스의 태도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듯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천연덕스럽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허억! 그럼 지도자이신 대신관님 바로 아래의…….” 
 “맞습니다. 하지만 루암 잭스께서 가지신 직위는 명예직이라 실질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하신다면야 얘기가 달라지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서열상으론 장로님들 중에서 가장 끝자리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레오나는 담담하면서도 은근히 과시하는 투로 말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상식적으로 최고 지도자 다음 가는 직책을 가졌다는데 아 예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갈 얼간이는 없을 터였다. 아무리 그게 명예직이라 해도 말이다. 

 거기에 ‘본인이 원하면’ 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레오나의 태도는 주변에 있던 귀족들에게 이 잭스란 용병을 무죄로 치는 건 물론이고 외부적으로도 만만한 먹잇감으로 봐선 안 되겠다는 인식을 박아주고 있었다. 솔라리에 대해 많이 알려진 건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명예를 목숨만큼이나 중시한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었다. 명예를 위해 전쟁까지 불사하는 세력이 뒤를 봐주는 상대에게 없는 죄를 덮어씌운다? 차라리 악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훨씬 더 안전할 터였다.

 낮게 웅성거리던 주변이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눈치 하나로 살아온 귀족들 아니던가. 지금 이 순간 말 한 마디라도 삐끗했다간 당초 목적이었던 전쟁학회 쪽으로 압력을 넣는 건 물론이요, 의도치 않았던 솔라리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좋게좋게 흘러온 분위기가 단박에 엎어질 가능성이 생긴다는 걸 모를 정도로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이 라우자르프 백작을 보는 시선도 방금 전과는 꽤 많이 변해 있었다. 제발 실수해서 망신이나 당하라는 무시에서 제발 말실수만큼은 하지 말라는 간절한 애원으로 말이다. 여기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잘 왔는데 만에 하나라도 자칫 레오나의, 아니 솔라리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뭔가 틀어지기라도 했다간 농담 않고 자르반이 그들 전부를 깡그리 지하 감옥에 처넣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의 감정 변화를 시시각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소나는 등골을 찌르르 울리는 우월감과 함께 머릿속에서 축가를 폭죽처럼 팡팡 터트리고 있었다. 좀 다르긴 하지만 레오나의 기분도 소나와 비슷했다. 참고로 잭스는 이제 될 대로 되라며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하, 하지만 제가 알기론 분명 잭스 님이 솔라리 출신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혹 제가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것인지…….”
 “확실히 루암 잭스께선 솔라리 출신은 아니십니다만, 지속적으로 솔라리와 교류를 가져오셨고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 그 청빈한 성격 탓에 일절 보답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나마 식사 대접 같은 인사치레 정도만 받으실 뿐이셨죠. 그마저도 조금 격식이라도 차리려 하면 거부하셨습니다. 정말 어떻게든 뭐라도 대접해드리려고 했던 걸 생각하면, 후후.” 레오나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리운 추억입니다.”
 “…….”

 분명 체념했다 생각했는데 아마 바닥 밑엔 또 다른 바닥이 있는 모양이었다.

 잭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레오나의 입에선 술술 옛날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딘가 슬쩍 왜곡돼서 말이다. 청빈? 무슨 사자가 풀 뜯어 먹는 소리도 아니고 그는 자신이 청빈이라는 단어와 과연 연관이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 때 아닌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져봐야만 했다. 레오나가 말하는 ‘격식 차린 자리’는 열에 달하는 여사제들이 식사 시중을 드는 건데 먹다 체할 것도 아니고 남들 앞에서 가면도 안 벗는 마당에 그런 걸 그가 받아드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와서 사제들과 대련해주고 나면 배고파 죽겠는데 어느 천년에 만찬 열릴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그는 입이 비싼 편이 아니었다. 그냥 먹을 만하면 충분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회에 참석하신 건 저번이 처음이시겠네요? 기뻐요, 잭스 님. 제가…어머나, 제가 잭스 님의 처음을 가져간 거네요.
 “………….”

 그래서 그런 것뿐인데, 레오나는 거기에 그가 알지도 못하는 금칠을 치덕치덕 해대고 있었다. 소나는 소나대로 방실방실 웃으며 위험 발언 비슷한 걸 서슴없이 하고 있었고 말이다.

 “후후, 루암께선 강한 힘을 가지셨으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을 땐 절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힘을 쓰시는 그러한 태도는 그야말로 솔라리 전사들의 모범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번은 이웬딜과 아웬딜이라는 장난꾸러기들이 고원 늑대 떼에게 둘러싸인 적이 있었는데…….”
 “호, 혹시 그 레냐 가문의 아리땁기로 유명한 쌍둥이 영애들 말씀이십니까? 그분들을 설마 여기 계신 잭스 님이 구하신 겁니까?”
 “예쁜 만큼 왈가닥에 말괄량이들이죠. 그런데 그 애들을 아십니까?”

 벨렌 백작이 슬쩍 끼어들자 레오나가 짐짓 놀랐다는 투로 말했다. 그걸 바라보는 잭스는 아주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알다마다요! 그 유명한 모그론 통행로를 개척해서 대륙 교통망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곳 아닙니까! 설마 그분들이 솔라리 출신이셨다니! 전 지금까지 솔라리에는 사제 분들만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대부분 사제들인 건 맞습니다만 아마 생각하시는 것보단 꽤 다양한 분파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그 장난꾸러기 애들이 늑대 떼에게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절체절명이었죠. 그런데 루암께선 늑대들을 죽이자는 주변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달려 나가시더니, 그 아이들의 품에서 새끼 늑대 두 마리를 꺼내서 어미에게 주시더군요. 그랬더니 늑대들은 선선히 물러났습니다.”
 “선선히? 그 사납기로 유명한 타곤의 고원 늑대들이 말입니까?”
 “싸워 이길 수 없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겠죠. 동물은 그런 것들에 민감하니 말입니다. 늑대 떼는 얌전히 돌아갔고, 저희는 쓸데없는 피를 안 묻혀도 됐고, 늑대를 기르려고 했던 쌍둥이들은 사이좋게 머리에 알밤 한 대씩 받고 끝났습니다. 
 후후, 루암께서 그렇게 화를 낸 적도 거의 없으셨을 겁니다. 듣는 제가 몸이 떨릴 지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루암께서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뛰쳐나가셨을 땐 정말 무시무시했습니다. 과장 않고 늑대 몇 마리는 단박에 때려눕힐 모습이셨죠. 맨손으로 그 정도 위압감을 뿜어낼 분은 루암 정도밖에 없었을 겁니다.”

 설명투로 건조하던 레오나의 목소리는 잭스의 얘기로 들어서자 서서히 자랑하는 투로 바뀌고 있었다.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눈에 생기가 도는 것처럼 반짝여서, 마치 ‘우리 스승님 대단하지?’라고 자랑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모습에 천진난만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이 변화를 눈치 챌 정도인데 소나가 모를 리 없었다. 소나는 잭스에 대한 일화를 얘기하면 할수록 작은북이 경쾌하게 울리는 듯한 레오나의 감정 덕에 손바닥 안쪽을 꼬집으며 웃음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옆에서 팔자에도 없는 자기 찬양을 듣게 된 잭스만 죽을 맛이었다. 레오나는 정말 악의 없이 그의 얼굴에 금칠에 덧칠까지 꼼꼼하게 하고 있었고 주변의 시선은 서서히 그에게 고정되고 있었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엔…….”
 “험, 이제 그만하거라.”

 잭스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레오나가 별별 얘기를 다 꺼낼 기세였으니 말이다. 때때로 보여주는 이런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면은 그를 상당히 피곤하게 했다.

 “죄송합니다, 루암. 하지만 아직 루암께서 콘세뇰 직위를 받으신 경위를 반도 설명 못 드렸습니다.” 
 “아니 그건 네가 좀 전에 억지로…….”
 “제가 억지로 쥐어드리지 않았으면 아예 그 목걸이도 안 하고 들어오실 작정이셨잖습니까.” 

 레오나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잭스는 이렇게 풍부한 표정의 레오나를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과연 여자는 내숭이 무기라더니. 레오나는 지금 걱정 가득한 제자의 연기를 일류 배우급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말을 완벽히 이용하면서까지 말이다.

 “부탁이니 이럴 때만이라도 저희의 성의를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루암.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당신은 솔라리의 소중한 일원이십니다.”
 “…….”

 비겁하게 레오나는 연기 속에 진심을 담고 있었다. 이 경우 ‘비겁하다’는 손 쓸 방도가 없다는 뜻으로 상대방에겐 최고의 찬사에 속했다. 잭스가 아무 말도 없자 레오나는 한 걸음 나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존경하는 자르반 전하, 그리고 친히 모여주신 여러 귀족 분들. 아직 루암의 고귀한 업적 중 편린에 지나지 않는 일화밖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전달 드리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믿습니다. 그 누구보다 약자를 위해 헌신하시고 자신을 낮추시는 분께서 어찌 다른 챔피언들을 습격했다는, 소환사의 협곡을 점거해서 대륙의 평화를 위협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셔야 합니까? 분명 제겐 여러분들에게 내보일 만한 물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암께서 이번 사건의 범인이 아니란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간곡히 바라건대 부디 선처해주십시오. 저희 솔라리도 이번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레오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마무리 일격을 찔러 넣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루암의 결백을 입증할 유일한 방법이라면, 기꺼이 그리할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온 솔라리가, 반드시!”

 그녀의 말은 개전 전의 장군의 연설처럼 고귀한 위엄이 넘쳐흘렀다. 그 티아나마저도 레오나를 이채 띤 눈빛으로 바라볼 지경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주변에서 낮게 탄성이 튀어나오자 이미 뻘겋던 그의 얼굴은 가면이 달아오를 정도로 뻘게지고 있었다. 어째 잭스는 분명 자기 결백을 밝히는 장소인데 자기 결백을 밝히는 것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 물어볼 것이 있는가, 백작?”
 “어, 없습니다! 저희는 용병, 아아니 잭스 경은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아님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저희고 뭐고 라우자르프 백작 혼자 원맨쇼를 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를 제지하는 귀족은 없었다. 말릴 분위기도 아니었거니와 티아나 대원수가 그들 하나하나를 서슬 퍼런 눈빛으로 쏘아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목의 소중함을 안다면 침묵해야 할 때는 해야 했다. 잠시 전당 안을 둘러본 자르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소나가 지금껏 들어봤던 중 가장 유쾌하고 신나는 감정을 뿜어내며 힘차게 선언했다.

 “나, 자르반 4세는 이 청문회에서 전쟁학회의 용병 잭스의 무죄를 선언하노라! 또한 이후에 있을 토너먼트에선 명예로운 기사 작위를 받을 때까지, 부벨르 가문의 문장으로 출전하는 것 역시 허락하겠노라!”
 “폐회하겠습니다.”

 신나게 외치는 자르반과 깔끔하게 해산을 명령하는 티아나의 모습은 참 대조적이었다. 일단 끝났다. 잭스에겐 그게 중요했다. 그에게 가장 급한 일은 빨리 여기를 떠서 어디 술집에 처박혀 코가 삐뚤어지게(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독한 술을 퍼 넣는 것뿐이었다. 그는 약 맞은 바퀴벌레처럼 흩어지는 귀족들을 따라 나가려고 하다…….

 “이봐, 잭스! 청문회도 끝났고 하니 내 점심이라도 한 끼 대접하겠네. 부벨르 영애와 레오나 사제도 어떠십니까?”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잭스 님, 어서 오세요!
 “…….”

 덜미가 잡혔다. 그는 벼락 맞은 사슴처럼 슬쩍 등 돌린 상태에서 멈춰 있다가 레오나와 소나에게 양쪽 팔이 잡혀 질질 끌려가야 했다. 대체 왜 다들 자기의 의사는 좁쌀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잭스는 팔자에도 없는 자존감마저 낮아질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왕자 놈 같으니라고…….”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끌려가는 도중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정도밖에 없었다.

 정말 완벽한(?)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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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량이 많지만 이 청문회 편을 빨리 끝내고 다음 있을 장면으로 넘어가고 싶어서 다 썼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 모두 땡큐입니다 흑흑..

2. 다음에 나올 장면 때문에 이 청문회 편을 썼습니다. 진짜로!

3. 챕터2가 드디어 막바지에 다다르는 군요. 어흐흑 감격입니다 정말루 ㅜㅜ

4. 맨날 후기에 이거 꼭 써야지 하고 까먹는 건데, 레오나가 쓰는 솔라리 고어는 네이버 라틴어 사전에서 대충 있어보이는 단어 쓰까묵어서 만들고 있습니다. 소나는 프랑스어 위주로!

5. 그래서 이전에 나왔던 비아튜오즈(거장)이란 단어는 꺼라위키에 비르투오소라 적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 사전 발음에 맞춰 비아튜오즈라고 적었습니다. 역시 프랑스어는 어감이 참 좋아요. 매끄럽게 혀 굴리는 느낌이에요.

6. 계속해서 봐주시는 분들 너무 고맙습니다. 요즘 대세나 유행과는 그야말로 개미 눈알만큼도 관련이 없는 마이웨이적인 글입니다만...재밌어해주시는 여러분들 덕에 열심히 쓸 수 있는 거 같아요.

7. 아직 이야기 한참 남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세요!

8. 쓰다보니 뭔가 완결편 느낌이 아는데 아직 갈 길이 구만리입니다 허허...

9.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