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 차이가 너무 나오. 내세울 게 리그의 챔피언이란 직함밖에 없는 용병과 공작가의 아가씨라니 말도 안 되는 조합이지.” 그가 한숨 쉬듯 말했다. “나이 차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오. 아마 두 배는 나지 않겠소? 더 날 수도 있고 말이오.”
 -네, 또요?
 “끙,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긴 싫지만 일단 물어는 보겠소. 내 손가락이 몇 개요?”
 -그야 세 개시죠.
 “피부색은?”
 -보랏빛이시고요. 설마 제가 눈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럼 내가 인간이 아니란 것 정도는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알고 있을 거 아니오.”
 -어머, 그게 제가 잭스 님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가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런 것도 신경 쓰고 계셨군요. 좋아요, 계속 다른 이유도 말씀해주시겠어요?
 “…….”

 소나는 재차 질문했다. 그리고 잭스는 결국 그 물음이 채 다섯 번이 되기도 전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분명 거절하는 쪽은 자신일진대 어째 변명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소나는 그의 손을 잡고 빙그레 웃더니 침대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어어 하는 사이에 목줄 끌린 개처럼 따라온 잭스는 엉겁결에 그녀 곁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밑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 감각이 기묘하게 신경 쓰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귓가엔 소나의 목소리가 간질거리듯 맴돌았다.

 -그리고 또 있나요, 잭스 님?
 “…당장 생각나는 건 더 없소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소?”
 -전혀요!

 소나가 방실방실 웃었다. 

 잭스는 그 웃음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소나는 웃고 있는데 그녀가 꽉 누르고 있는 그의 한쪽 손은 그 굵은 손가락이 반쯤 묻힐 때까지 침대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웃긴 주제도 아닌데 웃고, 또 이 괴물 같은 악력을 보여주고 있다라……. 안개 속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또’ 소나를 화나게 했다는 걸, 그것도 무진장 화나게 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혀 충분하지 않아요, 잭스 님. 저, 지금 전혀 잭스 님을 포기하고픈 생각은 요만큼도 들지 않는 걸요. 오히려 놀라고 있어요. 겨우 그런 이유들로 제가 물러설 거라고 생각하신 점에 대해서요. 스스로도 변명이라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말을 하실수록 점점 목소리가 약해지시던데요.
 “…….”

 사실이었다. 하긴 면도날처럼 예리한 소나의 귀 앞에서 뭔가를 숨기긴 힘들었다. 그것도 잭스처럼 이럴 때 둘러대는 말재간이 없을수록 더욱더 말이다. 그래도 그는 최후의 발악인 것처럼 마지막 변명을 했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자신이 없다는 투였다.

 “그래도 신경 쓸 만한 것들이지 않소.”
 -아뇨, 아니에요. 제가 신경 쓰고 싶은 건 잭스 님의 마음이에요. 저번에 말씀드렸죠? 저, 잭스 님이 스스로를 싫어하시는 이유 열 가지를 말한다면 제가 당신의 좋은 점 백 가지를 말씀드리겠다고. 아니 그 이상으로, 천 가지도 말씀드릴 수 있다고 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랍니다.

 소나는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목소리엔 강철 같은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절 배려해서 그런 식으로 둘러 거절해주시는 마음만큼은 감사해요. 하지만 그런 배려심은 절 더 슬프게 만드실 뿐이랍니다. 
 “…화난 거요?”

 잭스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그 질문은 조심스럽건 말건 정말 최악의 질문이었다. 소나는 가만히 눈을 흘겼지만, 이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익숙하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잭스 님, 이것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전 잭스 님을 구하고 싶어요. 그 불꽃에서도, 그리고 과거의 상처에서도요. 그리고 제 과거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그 에스트렐이라는 사람들이 절 노리고 있다면, 피하지 않겠어요. 그들은 분명 제 과거와 연관이 있을 테니까요. 그들이 힘……. 그건 분명, 제 연주와 닮아 있어요.

 소나가 한쪽 손을 슥 뻗자 에트왈이 그녀 앞까지 미끄러지듯 날아왔다. 잭스는 꼭 말 잘 듣는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심란한 기분을 풀려는 듯 의미 없이 몇 번 현을 튕겼다. 단순히 한 손으로 별생각 없이 현을 튕기는 것 같은데도, 잭스의 귀엔 나직하고 아름다운 연주로 들렸다.

 -제가 도와드리고 싶다고 한다면 싫어하실 거죠?
 “그렇소. 너무 위험하니까.” 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들이오. 당장 이번 협곡 습격 사건만 해도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일을 그르쳤으면 지금쯤 전쟁학회는 지도상에서 없어지고 대륙은 전란에 휩쓸렸을 거요.”
 -후후,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럼 그 대신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야 힘닿는 데까지 얼마든 도와드리겠소.”

 잭스는 한시름 놨다는 듯 선선히 대답했다. 어쨌든 뭘 부탁한다 해도 소나가 자기를 따라오겠다고 고집부리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 말이었다. 

 -그럼 제 과거를 찾는 걸 도와주세요, 잭스 님.

 하지만 소나의 그 허를 찌르는 발언에,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소나는 틈을 주지 않았다.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으실 거라 믿어요. 도와주실 거죠?
 “그게 방금 날 도와주겠다고 한 거랑 뭐가 다르다는 거요?”

-다르죠. 잭스 님이 절 도와주시는 거니까요. 계약을 원하신다면 계약서도 쓰고, 보수도 지불해 드릴 수 있어요. 이번엔 협곡에서 자포자기 식으로 말씀드린 거랑은 달라요. 지금 전 제 의지로, 제가 믿을 수 있는 분께 도움을 요청 드리는 거예요.

 소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잭스는 그녀를 바라봤다. 고개만 숙이면 맞닿을 거리에서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협곡에서 이 아가씨와 처음 만났을 때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 연약한, 날개 부러진 새처럼 바르르 떨던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여기 있는 건 자신의 황폐한 내면을 보고도, 심지어 자신에게 죽을 뻔하고도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강인한 아가씨였다.

 “…앞으로 내 두 번 다시 말로 싸움 걸진 않으리다. 정말 못 당하겠군.”
 -어머, 그럼 받아들여 주시는 건가요?

 “그렇소. 받아들이지. 단 뭔가 위험한 일에 고개를 들이미는 것 같다 싶으면 내 즉시 그만두게 할 거요, 알겠소?”

 결정까진 오래 걸려도 일단 한번 결정 나면 시원시원한 게 잭스의 장점이었다. 소나가 화사하게 웃으며 잭스의 팔에 매달렸다.

 -후후, 이 기세로 제 마음에까지 답해주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그런 걸 남자다움이라고 하던가요?
 “지금은 답해 줄 수 없소. 아니 잠깐, 말 좀 들어보시오. 그렇게 보지 말고.” 소나가 다시 웃는 얼굴로 화내려 하자 그는 화들짝 놀라 말을 이었다.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은 채 그대 마음에 답변해주긴 싫소. 대답이 어떻든 나 역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오. 지금은 그럴 수 없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소나는 어서 더 얘기하라는 듯 빤히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 죽을 만큼 부끄러운데 이럴 때 그녀는 정말 용서와 배려심이 둘 다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정리됐을 때, 그때도 그대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그때 내게 말할 기회를 줄 수 있겠소?”
 -세상에, 잭스 님……. 저 오늘 밤에 여자가 들을 수 있는 최악의 말만 골라서 듣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제가 잭스 님을 이해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저 오늘 화병 났을지도 몰라요.
 “그…정도로 최악이었소?”
 -네.

 소나가 감탄을 금치 못한다는 어조로 가볍게 빈정댔다. 이전의 그녀라면 남에게 빈정댄다는 것 자체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때야말로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라는 격언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녀 역시 꼭 여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맹꽁이마냥 답답해지는 그의 단점을 가장 가까이서 겪은 인물 중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눈이 세모꼴이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결국 사랑의 힘은 위대한(?)지라, 그녀의 분노는 결국 한숨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이런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을. 죄가 있다면야 홀딱 마음을 줘 버린 과거의 자신이 문제였다.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서 감사해요. 보류하신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든 거절해주시지 않은 것도 감사하고요. 만약 거절하실 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핑계를 대셨겠죠. 음, 예를 들어 ‘나보다 더 좋은 남자가 있을 거요’ 이런 말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험.”

 잭스는 가슴이 뜨끔했는지 되도 않는 딴청만 피웠다. 사실 그런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소나의 시선이 옆머리에 따갑게 꽂히는 건 덤이었다.

 -진짜 그런 소리는 안 하셨단 점에서 이전보단 많이 나아지셨네요.
 “…….”
 -그랬으면 저 때리려고 했어요.
 소나가 부드럽게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속삭였지만, 잭스는 그 부드러움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한 촉감에 움찔 몸을 떨어야 했다.
 “진짜 아프니까 하지 마시오. 그대 손이 얼마나 매운지 아시오?”
 -그럼 맞을 짓을 안 하시면 돼요, 잭스 님.
 “…….”

 그놈의 맞을 짓이 대체 뭐냐, 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잭스는 겨우 참아냈다. 어쨌든 맞을 짓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전 기다릴 거예요. 물론 손 놓고 가만히 있진 않을 거고요. 전 당신의 상처를 낫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 메마른 풍경을 바꿔드리고 싶어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그리고 잭스 님도 그렇게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전 믿고 있어요.
 “이거 그렇게까지 기대를 한다면 부응해주지 않을 수도 없겠구려.”

 잭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실소를 지으며 말했고, 소나는 그의 가벼운 투덜거림에도 미소로 대답했다.

 -네, 힘껏 부응해주세요, 잭스 님. 제 마음을 가져간 책임을 지셔야죠.
 “그대 어머니께 퇴짜 맞은 게 바로 조금 전인데도 말이오?”
 -잭스 님이 진정으로 절 생각해주신다면, 그 정도 난관쯤은 돌파할 수 있으시겠죠?

 한마디로 자길 생각한다면 자기 어머니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굴복시켜라, 이 말이었다. 그 당찬 도발에 잭스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용서가 없군.”
 -후후,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그리고 잭스 님? 용서가 없는 김에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까 자르반 왕세자님과의 혼담 얘기 꺼내신 거, 사과해주세요. 저 그거 사과받고 싶어요.
 “아니, 나는 그저 당신 어머니 말을 전한 것뿐이지 않소.” 잭스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건 오로지 그대의 안전 때문에 말한 것뿐이란 말이오.”
 -그건 감사하지만, 그 말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셨단 거에 저 너무 충격이었거든요. 진짜에요. 아까 씻다가 울 뻔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 좋아하는 분께 그런 말 들어서 난생처음으로 자존심이란 걸 상해봤어요.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본지 소나는 그의 팔꿈치를 슬쩍 꼬집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긴 이 아름다운 아가씨를 이렇게 취급하는 사람은 세상천지를 뒤져 봐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거의 없을 터였다. 안타깝게도 잭스는 그 ‘한 손가락’에 들어갔지만 말이다.

 -자르반 왕자님은 확실히 좋은 분이긴 해요.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고,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시고, 무엇보다 이 데마시아의 이미지와 딱 맞는 강인한 지도자의 자질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그게 제가 그분을 사랑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이란 게 사랑할 이유가 되진 않으니까요. 제 사랑은 제가 정해요. 지금 이 마음은 잭스 님이 가지고 계시고요. 그러니 저를 소중히 여겨 주신다면, 나중에 어떤 대답을 하시더라도 지금 제 마음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소. 내 사과하리다.”
 -좋아요.

 소나는 방실방실 웃으며 잭스의 목에 두 손을 둘렀다. 순간 깜짝 놀라 몸을 빼는 잭스였지만, 그러다 잘못하면 그대로 침대에 쓰러질 판이라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여야 했다. 얘기를 나눌 때는 차라리 나았는데, 말도 잠깐 멈춘 판에 소나가 대놓고 몸을 기대오니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제발 좀 떨어져 주시오, 소나. 대체 왜 이렇게 겁도 없이 나한테 기대오는 거요? 내가, 젠장, 이런 말까진 하기 싫은데 솔직히 앞뒤 안 보고 덮칠 수도 있지 않소.”
 -어머, 잭스 님이 그 정도의 적극성만 가지고 계셨다면 제가 이 고생을 하고 있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

 다시 할 말이 없어지는 잭스였다. 요는, 결국 그가 나쁘단 것이었다. 그가 속으로 말을 삼키며 툴툴거리자 소나가 더욱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안겨 왔다.

 -그리고 잭스 님이 진짜로 앞뒤 안 보고 하실 때면 솔직히 당황하긴 해도 기쁠 것 같아요. 잭스 님 성격상 각오도 없이 그러실 것 같진 않거든요. 혹시 지금 제 각오가 궁금하세요?

 그러면서 소나는 그의 귓가에 후우, 부드럽게 숨을 불어넣었다. 처음엔 장난 반쯤인 기분이었는데 점점 더 열기가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스스로도 이렇게 적극적이기까지 한 자신에게 놀랄 정도였다. 그 놀람이 더해, 열기가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그만!” 잭스가 기겁을 하며 소나를 떼어냈다. “내가 진짜로 졌소. 사과하리다. 이, 일단 좀 떨어지셔야겠소.”
 -어머, 정말 예상대로의 반응이 나오니 너무 재밌다니까요. 다른 분들이 잭스 님을 놀리는 마음을 이제 좀 알 거 같아요. 너무 귀여우세요, 잭스 님. 사랑스러울 정도로요.
 “안 좋은 것만 골라 배우는구려. 그러다 이 녀석에게 걷어차이기라도 한다면 어쩔 거요?”

 잭스는 그들 앞에 둥둥 떠 있는 에트왈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그러다가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끼며 슬며시 손가락을 거뒀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상황에서 ‘에트왈’이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소나가 아니라 자기부터 걷어차일 게 뻔했다. 아니 이 지경까지 왔으면 걷어차이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에트왈이 에트왈(악기)를 들고 후려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더 무서운 점은 그게 농담이나 헛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진 않을 거예요, 잭스 님. 

 하지만 소나는 고개를 젓고선 슬픈 표정으로 에트왈을 쓰다듬었다. 에트왈은 그저 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 있는 건 아브릴뿐이거든요. 역시 에트왈이 없으니 안 되네요. 아브릴을 연주할 순 있어도 실체화시킬 수가 없어요.
 “없다니? 없을 수도 있소?”

 그의 의문은 당연했다. 하긴 에트왈은 소나의 마음속 존재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없어졌다는 게 이상하게 들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네, 저랑 좀 다퉜거든요. 잭스 님을 구하는 문제 때문에요.
 “아, 이해했소. 에트왈은 날 구하지 말자고 했겠군. 그래, 그게 에트왈로서는 올바른 판단이었겠지.”
 -잭스 님…….

 소나가 그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그에게 핀잔을 줬지만 이번엔 잭스도 물러서지 않았다. 구해준 거에 대해 감사한 건 감사한 거고, 위험한 건 위험한 거였다.

 “위험했던 건 사실이지 않소. 내가 에트왈이라도 그랬을 거요. 에트왈이 그대를 누구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건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소?”
 -으……. 그렇긴 하지만 너무 제 걱정만 하니까 화가 났단 말이에요. 좋아요, 맞아요. 인정할게요. 화내고 제가 심한 말 한 건 사과해야겠죠. 그런데 어떻게 다시 불러낼 방법을 모르겠어요. 아브릴은 대화가 안 되니 어쩔 수 없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아, 맞아! 잭스 님, 분명 아이오니아로 가신다고 하셨죠?
 “그, 그렇소. 근데 왜?”

 소나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자 또 정조(?)의 위기를 느낀 잭스가 슬며시 몸을 뒤로 뺐다.

 -저도 같이 가요. 거기에 제가 어릴 때 자랐던 고아원이 있으니까, 분명 거기서 에트왈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소나는 방법을 찾았다는 듯 손뼉을 짝짝 치며 기뻐했다. 그 기쁨엔 잭스와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역시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잊고 있었다.

 “그런데 부인께서 거기 가는 걸 허락해주실지가 의문이구려.”
 -…….

 잭스가 찬물 끼얹는 데엔 도가 튼 위인이고,

 “게다가 나랑 간다고 하면 더 안 된다고 하실 텐데 말이오.”

 눈치 없기론 그보다 한술 더 뜬다는 걸 말이다.

 -후후.

 소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에트왈을 톡톡 두드리며 으스스하게 웃었다.

 -저어어엉말 잭스 님은 변하질 않으시네요.
 “…또 내가 뭐 잘못했소?”
 -네. 이제부터 곰곰이 생각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혼자서요. 

 기분이 다시 상했는지 소나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일어나더니 와인과 잔까지 챙겨 테라스로 나갔다. 아마 에트왈을 이용해 그대로 자기 방까지 날아갈 생각인 것 같았다. 솔직히 와인은 한 잔만 더 마시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잭스는 굳이 그 소망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불에 기름을 끼얹을 정도로 그는 우둔하지 않았다. 아, 그 불을 피운 장본인이 자신이란 걸 모를 정도로는 우둔했다.

 -잭스 님, 잠시만 이리로 와 주세요.

 간 줄 알았는데, 소나가 아직 테라스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으니 더욱 예뻤다. 문자 그대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입가엔 분노인지 체념인지 모를 미소가 걸려 있어서 그녀에게로 가는 잭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왜 그러시오?”
 -잠시만 이것 좀 들고 있…어머!
 “허억!”

 쿵!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죄수 같던 그의 발걸음이 화살처럼 쏘아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소나가 와인 병을 그에게 내밀다가 그만 놓쳐버린 것이었다. 채 1초도 안 되는 그 찰나의 순간, 와인은 바닥에 닿기 직전 문자 그대로 몸을 날린 잭스 덕에 박살나는 꼴만은 면할 수 있었다.

 “미, 미스 부벨르! 아니 소나! 이,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정말 심장 떨어지게 좀 하지 마시…읍!”

 그리고 바닥에 엎어진 잭스를 기다리는 건, 소나의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

 얕은 풀벌레 소리말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키 차이 때문에 늘 소나가 올려다보는 사이였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소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꼴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는 와인을 든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나의 입맞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음…….

 어느새, 소나의 가녀린 두 팔은 그의 목에 휘감겨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를 감싼 푸른 안개 너머로 미약하게 그의 입술이 느껴지고 있었다. 좀 거칠고 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갑작스럽고 대담한 행동이긴 했지만 이제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작은 새가 모이를 찾듯, 그녀의 입맞춤은 짧고,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 그의 입술을 두드렸다.

 짜릿한 감정이 등골을 타고 마약처럼 번졌다. 입맞춤을 반복할 때마다 그 짜릿함은 더 커져만 가서, 하면 할수록 뇌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데 머리는 점점 더 몽롱해져만 갔다. 그의 입술 말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분명 거칠기만 한 그의 입술이지만, 가만히 입술을 겹칠 때마다 머릿속에서 연분홍빛 행복감이 아스라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아…….

 입맞춤 사이에 잠깐 내뱉는 숨결엔 와인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뜨겁고 농밀했다.

 이 분위기가 아쉬워서, 그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작별인사 겸 건네려고 했던 짧은 키스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소나는 입을 맞출 때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벌어진 틈을 느낄 수 있었다. 뇌가, 등골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행복감 속에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 미지의 틈새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충동을 견디고 있었다. 소녀로서의 부끄러움이, 그리고 이성의 한 조각이 그 충동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잭스가 강하게 허리라도 감싸 안아 준다면, 아, 그때는……. 단지 상상만인데,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 안타까운 듯 찌르르 울리는 소나였다. 

 그녀는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그가 몸을 움찔 떨었다. 심장이 떨려서, 아, 이제 정말 이대로만, 그저…….

 쨍그랑!

 유리잔이 박살나는 소리에 그녀는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잘만 떠 있던 에트왈이 테이블을 툭 건드린 모양인지, 유리잔이 시원스럽게 박살 나 있었다. 에트왈이 그녀를 뚱하니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녀도 멍한 눈길로 에트왈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눈빛에 점차 이성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꺅!
 “컥.”

 -실수였어요! 아니 장난이었어요! 죄송해요, 그냥 잭스 님께 입 맞추고 싶었어요!

 “아, 알겠으니까 소리 좀…….”
 -아, 아니 입 맞추고 싶다는 의미가 그게 아니라 그냥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였어요! 굿나잇 키스요! 와인은 안 해주실까봐 일부러 떨어뜨렸던 거였어요! 죄송해요! 
 “…….”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소나의 목소리는 잭스에겐 음파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목소리라도 좀 줄여줘야 하는데 패닉에 빠진 소나에게 그런 말이 먹힐 리 없었다.

 -재, 잭스 님을 믿으니까 그랬던 거예요! 저 절대 남한테 이런 적 없어요! 아시죠? 아실 거죠, 잭스 님! 

 소나가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소리치자 잭스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하긴 뭐라 해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을 터였다. 소나만큼이나 그 역시 평정심이 와장창 무너진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럼 전 가볼 테니까! 일찍 일어나셔야 하니까 어서 주무세요! 주무실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아이오니아는 제가 어머니 꼭 설득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남은 와인은 다음에 꼭 같이 마셔요!
 “드, 들어가시오. 미스 부벨르.”

 그가 뭐라 인사했을 땐 소나는 폭풍처럼 자기 할 말만 한 뒤 에트왈을 연주하며 둥실둥실 날아가고 있었다. 휘청휘청 떠가는 게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지만 일단 어찌어찌 자기 방 발코니에 도착하자 그대로 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보아하니 침대로 뛰어들어 이불이며 베개를 마구 걷어찰 게 뻔했다.

 한참 만에야 잭스도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멍하니 주저앉았다. 여기 남은 거라곤 와인과 소나의 옅은 향기, 그리고 방금 전 불에 지진 낙인처럼 머릿속에서 떠나고 있지 않은 입맞춤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후우우…….”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좀 전에 유리잔이 안 떨어졌으면 정말 소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뒤로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속에 아직 에트왈의 잔재가 남아있는지는 어찌 되든 좋았다. 일단 넘어갔으니 된 거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의 자제심을 탓하고 또 탓하며, 그러면서도 자꾸 방금의 상황을 되새기며 끙끙거렸다.

 “…찬물로 좀 씻어야겠군.”

 결국 그는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열기를 식혀야 했다. 몸의 열기도 그렇고…특정 부위의 열기도 그렇고.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소나와 똑같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오늘 잠은 다 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