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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적이자, 과거의 잔재, 이번 사건의 원흉. 그리고 전쟁학회의 깊디깊은 어둠.

 에스트렐.

 그 이름을 듣는 잭스는 탄식하듯 짧게 숨을 내뱉었다. 숨이 턱 막히는 건 소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예전에 일어난 것만 같은 협곡에서의 그 일은, 고작 길어봤자 몇 개월 남짓 전의 일일 뿐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섬뜩하게 했다. 목숨이 위험했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꼴을 당했을지도 몰랐던 그때의 일은 결코 그녀에게서 멀어져 있지 않았다. 끝난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잭스의 소맷자락을 꼭 잡았다. 마치, 그게 자신의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베사리아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요. 좋은 소식이니까. 꽤 신뢰도 높은 소식통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었거든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 누구한테서 들은 거요?”
 “자르반 왕세자요.”

 베사리아가 으스대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슬쩍 반신반의하던 잭스는 흥미로운 이름이 나오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구미가 동한 듯했다.

 “호오, 언제?”
 “어젯밤에요. 운이 좋았어요. 막 자려던 참이었던 거 같았거든요.”
 “하하, 말은 잘 하는구려. 자고 있었으면 물벼락이라도 끼얹어서 깨웠을 거면서 무슨.”
 “흥, 내가 애쉬람 그 작잔 줄 알아요? 그런 거친 수는 안 쓴다고요.” 하더니, 베사리아는 턱을 괴고선 눈알을 또록또록 굴렸다. “근데 나쁘진 않네요. 다음에 써먹어 봐야겠다.”
 [잠깐만요.]

 무슨 나들이 나온 아가씨들이 평온하게 수다 떠는 것 같은 그 모습 속에서, 소나는 겨우겨우 이성의 한 가닥 실을 부여잡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미간을 꾹 누른 채 잠시 뭘 찾는 사람처럼 손을 휘저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소나의 사고방식은 잭스와 베사리아의 대화를 따라가기엔 좀, 솔직히 많이 여린 편이었다.

 [잠깐만, 아니, 잠깐만요. 베사리아 님?]
 “왜요?”

 왜요라니? 정말 뭐 때문에 불렀는지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안타깝게도 정말로 그런 건지 그 천연덕스러운 물음엔 미안하단 감정 따윈 티끌만큼도 들려오지 않았다. 순간 소나는 자기가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자기 상식이 잘못됐다거나. 그녀는 대체 어디서 태클을 걸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힐 지경이었다.

 [자르반 왕자님을 만나셨다고요?]

 그게 그녀의 입에서, 아니 정확히는 수정구에 간신히 떠오른 말이었다. 

 솔직히 다른 여성이 밤에 만났다는 둥 저런 말을 했다면 자르반 왕자와 그렇고 그런…뭐 하여간 비밀의 관계다 해도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될 텐데, 하필 말하는 당사자가 베사리아인 게 문제였다. 비밀의 사이는 당연히 아닐 거고, 친구 사이는 더더욱 아닌 거 같고, 결국 고르고 골라 현실적인 선택지는 매우 한정되는데 소나는 차마 그걸 제 입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네. 방금 말했잖아요?”
 [어젯밤이라면서요.]
 “그쵸?”
 [어떻게요?]
 “음……. 순간이동이긴 한데, 데마시아 왕궁은 페트리사이트(Petricite, 강력한 항마력을 지닌 재료로 알려져 있다) 설계 때문에 조금 복잡하게 주문을 짜야 하거든요. 소나 양에겐 조금 힘들 수도…….”
 [제가 지금 방법 물어본 건 줄 알아요?!]
 “컥.”

 수정구에 커다랗게 글자가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잭스가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선 엄청 크게 들렸을 테니까. 그래 봤자 베사리아에겐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니 먼 나라 얘기에 불과했다. 지금 그녀 머릿속에선 맨드레이크의 ‘특제’ 엘릭서 때문에 있는 소리 다 질렀던 그때 일이 재생되고 있었다. 자연히 ‘아, 이런 느낌이었구나’하는 표정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소나의 목소리를 조금 더 높이는 원인이 됐지만 말이다.

 [어떻게 왕궁이 침입해서 왕자 전하를 함부로 만날 수 있어요?!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그거 처형감이에요! 가문 하나가 멸망해도 할 말 없다고요!]
 “하지만 급했는 걸요? 자르반 왕자도 이해해주는 눈치였어요.”
 [이해를 해주길 바라신 건 아니고요?!]
 “어머, 소나 양. 저 이래봬도 전쟁학회에 단 세 명, 아니 이제 단 두 명뿐인 ‘형평성의 대의회’의 상임의원이라고요. 제가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왕족과 비빌 정도는 돼요.”
 […….]

 베사리아가 다시 어깨를 으쓱이자 잭스는 철딱서니 없는 조카 보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소나는 울상을 지었고 말이다. 베사리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쨌든 이 대륙에서 가장 힘 있는 집단의 실질적인 톱 아니던가. 그녀 말마따나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만약 베사리아가 정치판이나 권력 따위에 손을 대면 당장에 대륙 판도가 바뀔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지위의 높낮이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예의를 말하는 거였다. 아무리 지위가 높다고 해도 남의 집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지는 않지 않던가. 솔직히 소나는 데마시아에 압도적인 충성심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으로서 교육받으며 적어도 왕가에 대한 경외감 정도는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자국 지도자에게 물벼락 운운하는데 아무런 느낌 안 든다면 그거야말로 더 이상한 일이었다.

 “걱정 마요, 소나 양!” 베사리아가 걱정 말라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가서 와인도 한 잔 얻어먹고 잘 얘기하다 왔어요. 역시 자르반 왕자는 말이 통해서 좋다니까요.”
 [으으, 잭스 님!]

 베사리아와 얘기가 안 통하자 그녀는 거의 마지막 구명줄 잡는 마음으로 잭스를 불렀다. 어떻게 좀 해 보세요, 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참고로 그 잭스는 연이은 비명 소리에 바닥에 엎어졌다 겨우 일어나는 중이었다.

 “보시오, 거 몰래 들어가 놓고 거기서 제일 들키면 안 되는 사람에게 들키니까 소나가 겁먹은 거 아니오. 애쉬람처럼 기억이라도 조작하든가 할 것이지…….”
 “아니 왜 자꾸 애쉬람 그 치랑 비교해요? 그 인간이 각국 기밀문서 빼올 때마다 잘하는 짓이라고 투덜거린 게 누군데!”
 “적어도 애쉬람은 들킨 적 따윈 한 번도 없잖소.”
 “어머, 기가 막혀서 증말.”
 […….]

 어머나 어떡해. 그걸 외치고 싶은 사람은 다름아닌 소나였다. 믿었던 잭스마저 배신을 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했다. 없던 현기증까지 날 정도였다.

 “걱정 마요, 자르반 그 인간도 소나 양이 우리랑 친하게 지내는 거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당신도 그냥 레오나 양 따라서 부벨르 저택에 묵은 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아, 알겠어요. 알았다고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나중에 이쪽에서 요청하지 않는 이상 헤집고 다니지 말라고 확실히 말해둘 테니까. 그랬는데도 소나 양에게 화살을 돌린다면…….” 베사리아가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속할게요, 소나 양. 그땐 물벼락 따윈 유치원 재롱잔치로 보일 정도의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 만약 못 지켜주면 보복은 확실히 해주겠다는 상당히 멋진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베사리아의 표정도 큰언니처럼 의젓했고 말이다. 하지만 소나는 시선을 내리깔며 겨우겨우 짜내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는 반 이상 포기한 상태였다. 머리도 점점 더 아파오고 있었다.

 […와인 한 잔만 주세요.]

 결국 이 날은, 그녀 인생 처음으로 술을 찾은 기념비적인 날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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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지 빨기 전에! 달달한 일상 한번 쭉 들이켜주고!

2. 기똥찬 마무리가 생각났는데 벌써부터 두근두근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