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스는 그대로 굳었다. 굳어서 그대로 소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손이 스르르 그녀의 허리에서 떨어졌다. 소나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맑은 두 눈동자 속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푸른 안개에 휩싸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연기의 덩어리를. 이목구비도 구별할 수 없는 그 속에서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잭스 님.
 “알아들었소. 다시 말할 필요 없소.”
 -아뇨, 못 알아들으셨어요. 또 제 눈을 피하시잖아요.

 소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머리를 강제로 잡아 시선을 맞췄다. 파란 안개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스러졌다. 피부나 머리카락의 감촉 대신 뭔가 희뿌옇고 뭉실뭉실한 것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그녀에게 전달됐다. 생각해보니 잭스의 머리를 보기는 봤어도 만져 본 적은 처음인 소나였다. 낯선 감촉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그녀의 표정에선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건 잭스였다.

 그는 그제야 자기가 남 앞에서 이 머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요사이 몇 번인가 부득이하게 남들 앞에서 머릴 드러낸 적이 있었다고 하나, 이렇게 대놓고, 그리고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드러내긴 처음이었다.

 …언제부터일까, 그녀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걸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 때가. 

 이유가 어찌 됐든, 어느 상황에서도, 심지어 누군가와 독대를 해야만 할 때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이 저주받은 머리를 소나에겐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단순히 그녀가 이 안개 덩어리 머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은 아닐 터였다. 그는 이성적으로 원인을 찾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건 물을 휘저어 모양을 만들려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짓이었다. 특히나 지금은 더 그랬다.

 -절 봐주세요, 잭스 님.

 소나는 속삭이듯 말하며 천천히 손을 내려 그의 두 손을 상냥하게 잡았다. 그녀의 손길은 비단처럼 나긋나긋했고, 강철로 만든 족쇄처럼 단단했다. 잭스는 반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 아가씨는 이 안개 너머로 그의 표정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입을 비집고 나온 건 그녀의 이름뿐이었다.

 “미스 부벨르.”
 -충동적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소나는 그의 손을 다시 자기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잭스는 살며시 그녀의 뺨을 만졌다. 소나는 그의 손길을 음미하듯 가만히 있었다. 부드러웠다.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어서, 약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흰 목덜미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소나는 여린 두 손을 그의 팔뚝에 올린 채, 그를 그윽하게 올려다봤다.

 -동정심도 아니고, 동경심도 아니에요. 겨우 그것만 있는 값싼 마음이었다면 잭스 님을 구할 수조차 없었을 거예요. 망설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전혀 망설이지 않았어요. 조금도요. 단 한 순간조차도, 심지어 그때 잭스 님과 마주했을 때도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

 흐릿하지만 가슴 아픈 그 기억이 그의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심상세계에서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베사리아와 소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의 죄를 저질렀다는 걸 인지하기엔 충분했다. 

 “난 당신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소, 미스 부벨르.”
 -왜요? 
 “그야 난 그대를…….”
 -죽이려고 했다, 챔피언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무시했다, 그런 말만 빼고 다 하셔도 돼요. 전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아요. 일부러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고 예전 상처를 들추실 필요는 없어요, 잭스 님.

 소나는 그의 커다란 손에 계속 음미하듯 볼을 부비며 속삭였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아스라이 느껴지는 향기와 약간의 취기에 그는 바짝 붙잡고 있는 평정심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 아가씨를 떨쳐 내야 하는데,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모질게 대하면 억지로 떨쳐 낼 수야 있을 터였지만, 머리로는 생각이 나도 감정이 도저히 따라주질 않으니 못할 짓이었다. 

 소나는, 아마 진심을 내고 있을 터였다. 다부지게 말하고 있어도 분명 마음속으론 떨릴 게 분명했다. 주절거리는 변명 따윈 씨알도 안 먹힌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그도 진심을 다해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망설이는 이유를 말이다.

 “소나.”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나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생각해보니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내가 가진 건 얼마 없소. 리그의 챔피언이라는 알량한 이름 하나, 작은 오두막, 그리고 낚싯대에 술이 내 재산의 전부요. 모두 다 언제든 버릴 수 있고, 또 언제든 마련할 수 있지.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오. 난 지금껏 빈말로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길들만 골라서 걸어왔소. 여기서 더 도움을 받으면, 더 가까워지면……. 결국 난 당신을 상처입히고 말 거요.”

 그는 최대한 소나를 배려하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과거는 깊고 어두웠다. 마음가짐 하나 바꿔서 하하호호 웃으며 넘길 수 있다면 진작에 몇십 번이라도 그리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기엔 너무 여렸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여렸다. 그 여린 마음엔 스스로가 냈던 상처들이 깊이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에게서 느릿하고 잔잔한 음색이 들려왔다. 평소엔 잔물결 치듯 잔잔하기만 한 그의 내면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나는 그의 말에 묻어나고 있는 깊은 진심에, 그리고 그 상처투성이 내면에 공감하고 또 슬퍼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의 손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정말 누군가에게 도움받는 걸 두려워하시네요. 베사리아 님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부정하진 않겠소.”

 잭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소나도 그녀의 광기를 마주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 숨길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소나는 베사리아에게서 들었던 망가진 선율을 다시금 떠올렸다. 겉보기엔 화창한 초원과도 같지만, 그 밑엔 끔찍한 이물들이 질척거리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감정의 소리라곤 생각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그녀의 내면은 부서지고 뒤틀려있었다.

 -제가 베사리아 님처럼 될까 봐 두려우시군요.
 “그렇소. 에스트렐이 그대를 노리고 있소. 그리고 그놈들은 날 증오하고 있지. 그런 내가 당신 곁에 있어봤자 당신에게 나쁜 영향만 끼칠 거요.”
 -네, 그리고요? 어디 시원하게 다 말씀해보세요.

 소나가 잔잔하게 노래하듯 말하자 잭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화를 내거나 삐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외려 담담하게 나오니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담아뒀던 말들을 죄 쏟아내기 시작했다. 몇 대 맞을 각오를 한 건 덤이었다.

 “내 저주가 위험하다는 건 그대도 알 거요. 어쨌든 그대가 정말 죽을 뻔하기도 했으니까. 그대 덕에 목숨을 구한 건 그때도 지금도 감사하고 있소. 앞으로도 그럴 거요. 하지만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소. 난 그대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 싫소.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가 아무리 마법 따위에 무지렁이라 해도 그의 속에 있는 이 ‘푸른 불꽃’이 제 살을 깎아먹는 것 정도란 건 알고 있었다. 아마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루고 말이다. 아마 수명이겠지, 그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았다. 단순히 피로가 쌓여서 그렇다기보단 아예 힘의 총량이 뭉텅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에스트렐이라는 과거의 적들이 그를, 전쟁학회를, 나아가 이 대륙을 노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제 목숨 하나 바쳐서 대륙을 구하겠다는 그런 시시껄렁한 영웅놀이 따위에 취한 인물이 아니었다. 단지 제가 발을 담근 과거의 일은 제가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양심상의 책임감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때까진 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린 아가씨를 그 문제에 엮고 싶진 않았다. 그가 겪고 있는 일은 너무 위험했다. 그건 의지나 신뢰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이, 사랑하는 이가 생긴다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란 걸 그는 알았다. 그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사양이었다.
 그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대라면 더욱 더 말이다.

 -네, 잭스 님. 또요?

 하지만 소나에겐 그 대답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계속 대답을 요구했다. 상냥하게, 참을성 있게 문을 두드리듯이.

 “신분 차이가 너무 나오. 내세울게 리그의 챔피언이란 직함밖에 없는 용병과 공작가의 아가씨라니 말도 안 되는 조합이지.” 그가 한숨 쉬듯 말했다. “나이 차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오. 아마 두 배는 나지 않겠소? 더 날 수도 있고 말이오.”
 -네, 또요?
 “종족도 다르고, 또…그래, 난 가진 것도 별로 없소.”
 -그건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안한 걸로 칠게요. 그리고요?
 “…….”

 소나의 질문은 계속됐고, 잭스는 결국 그 물음이 채 다섯 번이 되기도 전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분명 거절하는 쪽은 자신일진대 어째 변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소나는 그의 손을 잡고 빙그레 웃더니 침대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어어 하는 사이에 목줄 끌린 개처럼 따라온 잭스는 엉겁결에 그녀 곁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밑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 감각이 기묘하게 신경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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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턴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지나면 그냥 쓴 데까지라도 올리려고 합니다..

중간에 끊으니 좀 거시기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