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와인에게 질투심을 느낀 건 처음이에요.


 머릿속에 잔뜩 볼멘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아차 하는 잭스였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는지 소나는 그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는 게 흡사 레스타라 부인과 정말 똑같아서, 아니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평소에 나긋나긋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이었다.


 “정말 멋진 술이오. 이런 귀한 걸 구경시켜 줘서 고맙소, 미스 부벨르.”


 -그거 말고도 하실 말씀이 또 있으실 거예요, 잭스 님. 진짜로요.


 소나가 팔짱까지 끼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잭스는 정말 없던 주변머리까지 끌어 모아 열심히 머릴 굴려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입을 비집고 나온 건 형편없는 의문형 문장이었다.


 “…이런 귀한 술을 마실 기회를 줘서 고맙소?”


 -한 번만 더 술 얘기 꺼내시면, 저 그거 따서 세면대에 부어버릴 거예요.


 잭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답이 아닌 건 둘째 치고 소나의 기세로 보니 농담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었다. 술도 술이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구석이 없었다. 기실 말 돌리기는 그가 가장 못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요령 없이 우직했고, 그것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는 결국 술병에서조차 시선을 떼고 소나를 바라봤다. 소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달빛이, 엷은 베일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얇은 잠옷 차림의 그녀는 고혹적이면서, 동시에 청초했다. 그 모습은 꼭 은실로 짠 정교한 세공품 같아서,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함까지 들 정도였다. 허나 잭스는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가만히 다가왔다. 옅은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올곧은 눈빛이, 부드러움 속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강인한 정신이 잭스는 무엇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척 아름답소, 미스 부벨르.”


 -얼마나요?


 “그걸 꼭 말해야겠소?”


 -네, 꼭 듣고 싶어요.


 잭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소나도 분명 느끼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은으로 짠 세공품처럼, 만지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로 아름답소.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대가…날 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월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오.”


 낯 뜨거운 말이지만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소나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후훗, 이런 분위기만 아니었어도 저 부끄러워서 바닥을 뒹굴었을 거예요.


 “지금 내가 그러고 싶소만.”


 -괜찮아요. 이런 분위기니까 기분이 너무 좋은 걸요? 다른 분들께 우월감을 느끼시는 건 저도 좋지만 다른 건 정정해야 할 거 같아요. 절 바라보시는 걸 사치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소나는 잠시 말을 끊으며 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뺨에 갖다 대었다. 


 -만지는 게 죄스럽다는 것도요. 손만 뻗으시면 돼요, 잭스 님. 어려울 것 없어요.


 툭 떨치면 내칠 수 있는 연약한 손길을, 그는 떨쳐 낼 수 없었다. 잭스는 손끝으로 비단결 같은 그녀의 피부를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거칠 게 뻔한, 자신의 굳은살 박힌 손 따위로 그녀를 만져도 되는지 잠시 의문을 품었다. 그는 손을 떼려고 했지만, 뗄 수 없었다. 소나의 미소가 그것을 막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손길을 음미라도 하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잭스 님의 손은 커서 기분이 좋네요.


 “…볼품없는 손이라오.”


 -정말, 또 그러신다. 아까 제가 드린 말씀 또 잊어버리셨죠?


 그렇게 말은 하지만 소나는 그다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용서해드릴게요. 오늘은 고생도 많이 하셨고, 제가 원하는 대답도 해주셨으니까요.


 소나는 춤추듯 테이블로 가더니 잠시 뒤 와인 두 잔을 들고 한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퇴원 축하드려요, 잭스 님. 오늘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고맙소, 미스 부벨르.”


 둘은 기분 좋게 잔을 부딪치고선 와인을 조금 마셨다. 달콤하고 풍부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섬세하면서도 강한 맛이, 비단결처럼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잭스는 물론이고 술을 잘 모르는 소나마저도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맛이었다.


 -…맛있네요.


 “그렇구려.”


 -후후, 잭스 님 덕분에 이런 술도 마셔 보네요.


 “이게 왜 내 덕분이오? 그대가 가져온 건데.”


 -잭스 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가져올 일도 없었을 거예요. 와인 셀러에 고이 모셔놨다가 어디 자선 행사 할 때나 내놨겠죠. 


 소나는 잔을 두 손을 쥔 채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술이 약한 탓도 있었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잭스와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게 지금 그녀에게 있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둘은 말없이 기댄 채 조금 더 와인을 즐겼다. 잭스의 머릿속엔 소나의 잔잔한 콧노래 소리가 울려 펴지고 있었다. 그 흥얼거림이 달빛과 옅은 바람 소리에 섞여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까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던 잭스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소나도 마찬가지였는지 잔잔한 흥얼거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콧노래를 들려드리긴 처음이에요.


 “하하, 나도 머릿속에서 다른 사람 목소릴 들어보긴 처음이오.”


 -그럼 잭스 님은 제 처음을 가져가신 거네요.


 “……………….”


 와인을 머금고 있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는 잭스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나의 말은 너무 오해의 소지가 많았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도발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는 그건 아니길 빌었다. 그는 이런 쪽으론 정말 면역이 없었다.


 “미스 부벨르,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은 좋지 않을 것 같소.”


 -무슨 말이요?


 “…처음을 가져갔다든가, 그런 말 말이오.”


 -사실이지 않나요, 잭스 님?


 “아니, 사실이긴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 않소.”


 -무슨 오해의 소지요?


 소나는 취해 있었지만 제정신을 못 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잭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가 어떤 건지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한창 피어날 때의 아가씨였고, 기본적인 성 지식은 있었다. 그게 어머니나 다른 하녀들로부터 배운 거로든, 아니면 그녀가 마주했던 음험한 사람들의 감정으로 배운 거로든 말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알고서 놀리는 거였다. 그야 적당히 받아넘길 줄 모르고 매사에 진지하니 놀리는 재미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 점이 그의 매력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가 놀리는 것도 모른 채 잭스는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할까 쩔쩔매고 있었다.


 “나도 남자라오, 미스 부벨르. 당신 같은 묘령의 아가씨와 이렇게 있는 건…솔직히 좀 힘드오. 여러 의미로 말이오.”


 -이렇게 절 껴안으시고요? 설득력 없는 변명을 하시네요.


 “이런! 미, 미안하오.”


 그제야 잭스는 그가 저도 모르게 소나의 허리에 손을 댄 채 귀족들 춤추는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보이지도 않는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분위기가 너무 편해도 정도가 있었다. 그는 서둘러 손을 떼려고 했…….


 탁!


 는데, 그의 손은 무슨 매에게 낚아채지는 사냥감처럼 무시무시한 힘에 이끌려 다시 그녀의 허리로 둘러졌다. 어찌나 날쌨는지, 잭스는 소나의 허리에 다시 손을 얹고서야 그의 손을 낚아챈 범인의 정체가 그녀의 손이란 걸 깨달을 정도였다.


 -춤출 때 남성 쪽에서 먼저 떨어지는 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 줄 아세요?


 “…….”


 소나가 으스스하게 말했다. 물론 잭스가 그런 걸 알 턱이 없었다. 솔직히 그는 이 정도면 소나가 타고난 무술가가 아닌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떨어지려 하시면 저 정말 화낼 거예요.


 “…오늘 화낼 거리가 많구려, 미스 부벨르.”


 -네, 제 마음도 몰라주시는 어느 분 때문에 그래요.


 “…….”


 잭스는 또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나는 그 이상 그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는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그래도 절 여자로 봐 주시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저 씻다가 울 뻔한 거 아세요, 잭스 님? 아까 너무 충격이었단 말이에요. 이분은 날 어린애로밖에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 해서.


 “어린애라니.” 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처음 봤을 땐 좀 오해했을지 몰라도 그대를 어린애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소.”


 -그런 분이 제가 다른 남성분께 가야 한다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네요.


 “…….”


 그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윤리관이, 연륜이 그리고 레스타라 부인의 증오어린 분노가 쐐기가 되어 그의 감정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그의 욕망 따윈 해일 앞의 촛불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미스 부벨르, 난…….”


 하지만,


 -전 잭스 님을 사랑해요.


 소나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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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길어질 거 같아 일단 한 번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