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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벌레 소리만 얕게 들려오는 밤은, 좀 쌀쌀했다. 그래도 잭스는 목욕 가운을 좀 더 여미며 경치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정원의 풍경은 확실히 장관이었다.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사이로 꽃들이 눈송이처럼 피어 반짝이고 있었다. 꼭 정원에 보석 가루를 뿌려 놓은 것만 같았다. 저쪽으로 저택 본관이 보였다. 본관만 해도 무지막지한데 별관도 이렇게 크다니, 잭스는 정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면서…….


 솨아아-


 복도 저편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샤워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정말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일단, 전개가 왜 이렇게 됐냐면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


 “…미스 부벨르.”


 잭스는 소나가 여기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분명 레오나나 다른 여사제들과 밤새 노는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건 소나가 그와 부인의 이야기를 대체 얼마나 들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잭스의 그런 걱정을 눈치 챈 듯, 소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걱정 마세요. 엿듣지는 않았어요. 그냥 여기서 잭스 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에요.]

 “…….”


 그러면서 소나는 옆에 있던 에트왈의 현을 부드럽게 누르듯 꾹 튕겼다. 분명 그보다 더 살짝 튕겼을 때도 경쾌한 소리를 내던 현은, 신기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니, 마치 소리를 흡수라도 하는 양 잠시 주변의 소리가 물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멍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하면 주변에서 아무리 큰 소리가 나도 전혀 들리지 않는답니다.]


 아마 그 말은 의심의 먹구름이 끼면서도, 그래도 그녀를 믿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리라. 잭스는 투구 밑에서 엷게 쓴웃음을 지었다.


 “고맙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그 감사에 말에 소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아끌고선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에트왈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뒤를 둥실둥실 따라왔다.


 [어머니가 아주 심기가 불편하셨죠?]

 “그…렇지는 않았소.”

 [후후, 그럴 리가 없어요. 저, 어머니가 포도주 저장고에서 나오는 걸 보고 여기에 온 걸요. 그거 아세요? 어머니는 술을 별로 안 좋아하세요. 술도 약하시고요.]

 “그런 것 치곤 잘만 드셨소만.”

 [화가 난 정도에 따라 드시는 양이 달라지거든요. 제가 예전에 피아노 레슨이 싫다고 잔뜩 고집 부렸을 땐 포도주를 반 병이나 드신 적도 있어요.] 


 잭스는 입맛이 어지간히도 썼다. 이번에도 분명 그 정돈 마신 것 같던데…….


 “미안하오.”

 [괜찮아요. 어머니가 속이 상했단 건, 잭스 님이 분명 어머니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는 거니까요.]


 그건 맞긴 했다. 하지만 소나도 그리 말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은지 그의 어깨에 머리를 톡 기댔다.


 […저, 정말 못난 딸이네요. 어머니가 속상하신 것보다, 잭스 님이 절 위해 변호해주셨단 게 더 기뻐요. 제가 이러는 걸 알면 어머니도 분명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고 한탄하시겠죠?]

 “그럴 리는 없소. 부인께서 화를 냈던 이유도 그대를 위해서였으니까. 그런 분이 빈말로라도 그런 말을 하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소.”

 [고지식한 점이 어머니와 딱 맞으시네요.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으실지도요. 다음 번에도 연회 자리를 주선해 드릴까요?]

 “제발, 농담이라도 무서우니 그러지 마시오.” 잭스가 사색이 되어 말했다. “아주 단단히 연을 끊을 작정으로 화를 내셨는데 다시 또 눈앞에 나타났다간 땅에 파묻힐지도 모르오.”

 […….]


 잭스의 단점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이나 돌려 말하기에 재주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정말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주제에 말이다. 거기에 여심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또 다른 단점까지 완벽하게 시너지 효과를 내어, 별생각 없이 했던 한 마디가 상황을 배배 꼴 수 있는 단초가 됐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소나는 오늘 어머니와 잭스를 만나게 하는 거에 아주 큰 기대는 하지 않아도 내심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었다. 어쨌든 자신이 맘에 든 사람이고, 분명 자기가 맘에 들면 어머니도 맘에 들어해줄 거라는 약간 철없는 생각의 발로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머니께 소위 말하는 ‘퇴짜 맞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그 말로 확신이 섰다. 그녀는 내심 기대했던 상황의 반의 반절도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굳이 잭스에게만 아니라, 둘러싼 모든 상황에…아니 하여튼 그냥 잭스가 나빴다. 그런데 잭스는 눈치 없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


 “부인께는 그대를 리그에 계속 남겨달라고 부탁드렸소. 그 편이 훨씬 더 안전할 테니 말이오.”

 [그럼 또 마치 모든 책임이 자기 것인 양 말씀하셨겠군요, 그렇죠?]


 약간의 비꼼을 담아, 소나가 샐쭉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잭스가 대답 대신 큼큼 헛기침만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배운 게 있어서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랬으면 아마 이번에는 허벅지를 꼬집는 걸로만 끝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잭스의 다음 말은, 차라리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요’라는 말이 몇 십 배는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그대를 데마시아 왕궁 쪽으로 보내신다는구려.”

 [네?]

 “아마 자르반 왕세자와의 혼담을 진행하실 모양이…커헉!”

 [네?]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다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말투였다. 소나의 발걸음이 얼어붙었고 덩달아 잭스도 멈춰야 했다. 각자 이유는 달랐다. 소나는 문자 그대로 뒤통수를 쇳덩이로 후려 맞은 듯한 기분 때문에, 그리고 잭스는 자기 팔꿈치를 으스러뜨릴 듯한 소나의 무시무시한 악력 때문에였다. 그의 한쪽 팔에 올려져 있던 소나의 여린 손가락이 괴물같은 악력의 바이스로 변화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꽈아악, 하는 고무 튜브 짓이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미, 미스 부벨르, 팔 좀…….”


 이런 쪽으로만 학습이 용한 잭스는 놀랍게도 소나의 악력을 통해 그녀의 기분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정말 쓸데없고도 경이로운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재능의 1할이라도 여심을 신경 쓰는 눈치에 할당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어쨌든 소나의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장난 아니게 아팠고, 그 말은 그녀가 이번만큼은 그에 대한 배려심이고 나발이고 순수하게 화를 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할 얘기가 있어요.]


 소나는 그 말과 함께 본관 객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휙 돌리더니 정반대의 방향으로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잭스의 의사는? 고려할 리가 없었다. 잭스는 목줄 잡힌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별관에 왔고…….

 그렇게 해서, 지금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실로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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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하게 나가기로 했습니다.

실은 야스각이 뜨는 전개도 생각했지만

저만 감상하겠습니다. 핳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