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스는 하고자 하는 것은 뭐든지 하고야 마는 성격이어서 쉽게 포기할 생각은 아니었다. 설령 해결 방법이 상식에 어긋나거나 무모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성격은 그가 목표에 끈질기게 매달려서 여러 발명품들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필트오버의 발전과 이익을 가져왔고 모두가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는 필트오버의 보물과 같은 영웅이었다. 제이스가 안하무인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개 전폭적인 지원과 양보를 받을 수 있던 건 아무도 필트오버의 영웅과 싸우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운에 틀어박혀 공부에만 매진하던 빅토르에겐 제이스란 낯선 인물일 뿐이었다. 

빅토르가 보기에 제이스라는 자는 무례하기 짝이 없을 뿐더러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학에서 다양한 괴짜들을 만나보긴 했지만 이렇게 오만방자한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남이 사용중인 장비를 멋대로 가져다 쓰겠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그 장비를 사용하는 건 급한 일은 아니었기에 양보할 수도 있는 문제였으나 전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그 장비를 사용할 계획이었고, 이 계획을 변경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제이스의 언행에 기분이 얹짢아서는 아니었다. 

"좋아.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제이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가 상황을 살피니 이미 실험실 안에 가동 중인 장비는 여러 개에 달했다. 

"어디 얼마나 잘난 계획이 있기에 이렇게 일을 벌려둔 거지?"

제이스는 예전에 담당 개발자의 설계도를 본 적이 있었고, 말하지는 않았지만--말해봤자 이해하지도 못할테니--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몇 문제는 아주 복잡해서 제이스만큼 능력이 있지 않으면 발견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이 자운 녀석이 뭘 어떻게 고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실험실 상황은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는 실험으로 가득했다. '이 바보 같은 짓을 멈춰야겠군.' 제이스가 생각했다. 

"네 설계에 문제점이 없는 게 확실한 거냐?"

제이스가 의혹을 담아 물었다. 

"오류는 발견되지 않았어."

빅토르가 대답했다. 하지만 제이스는 믿을 수 없었다. 만약 설계 상의 중대한 문제점을 발견한다면 지금 하는 일은 전부 무효로 되돌려야 할 테고, 그럼 초원심기계도 쓸 일이 없겠지? 벽에 붙어 있는 설계도로 다가간 제이스는 턱을 매만지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뜯어보다가 이내 신음을 흘렸다. 

"으음. 이건..."

제이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복잡하다는 걸 깨달았다. 빅토르는 그가 자신의 설계도를 살피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좀 변경을 가했어. 기존의 설계에는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조금이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든 수준인데? 게다가..."

상당히 정교하고 섬세한 구조야, 하고 제이스가 생각했다. 금방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완성도였다. 그는 항상 새로운 형태의 파격적인 작품들을 설계해 내곤 했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보이는 구조를 짜 본 적은 없었다. 복잡한 구조임에도 모든 것이 군더더기 없이 만들어져 있으면서 그 조합은 가히 안정적인 형태였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감탄하던 제이스는 정신 차리고 다시 설계도를 찬찬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결함을 찾아내야 했다. 

'어딘가 분명 실수가 있을거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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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록,

빅토르는 한 모금 마신 자신의 컵을 작업 테이블 한 쪽에 내려 놓았다. 그는 휴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점심 무렵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연구개발에만 매진했기 때문에 잠깐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그보단 사실 제이스를 관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제이스가 설계도를 분석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수 시간이 지났다. 이따금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기도 하더니 다시 고개를 젓곤 했다. 

땅콩버터의 달콤한 향이 서서히 퍼져나가며 한참 집중하고 있던 제이스의 코를 간지럽혔다. 

"으윽. 뭘 마시는 거냐." 

제이스가 인상을 쓰며 향을 걷어내려는듯 한 손을 휘휘 저었다. 

"피넛버터밀크. 너 괜찮은 거야?" 
"냄새만 맡아도 달아서 머리가 아파."

제이스는 머리를 감싸쥐고 한숨을 뱉었다. 

"그 단내가 내 옷에 묻을까봐 걱정이 되는데. 후, 그보다... 너 생각보다 잘 아는군. 이전 설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했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변경해서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했어. 인정하지."

마치 선심을 쓰는 듯한 말투였지만 제이스의 마지막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을 빅토르는 간파했다. 

"내 설계는 물론 틀림이 없지. 아무튼 고마워."
"물론 좀 스타일이 구식이긴 하지만..."

제이스는 말을 잇다가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멈추었다. 

"바로 그거야! 네 설계의 문제점!"

"뭐?"

"네 고전적인 설계 때문에 넌 이 장비가 최고의 효율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을 간과했어! 바로 그게 오류다."

"그런 게 있다고? 이 장비는 분명 최대 효율로 짜여져 있을텐데."

"전혀 모른다니 역시 나에겐 한참 못미치는군. 이 제이스님이 아니라면 평생 몰랐겠지! 자, 말해 줄테니 잘 들어보라고."

제이스는 칭찬할 때는 언제였냐는 듯이 우쭐해진 얼굴로 승리감에 차 있었다. 신나 보이는 제이스를 보고 빅토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쪼잔한 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제이스를 쳐다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제이스가 뭘 발견한 건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체 뭘 제안하려는 건데?"
"흐음! 말하자면 이 부분, 그러니까 여기 F6 말이야. 이걸 나선형으로 바꾸는 거야."
"그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작 공법이 훨씬 어려워질텐데?"
"한계란 돌파하는 거다. 필트오버식 최신 가공법을 사용하면 가능해. 이제 득이 실보다 많다는 걸 알 수 있겠지?"
"그럼 여길 이렇게 바꾸고, 이 부분을 맞춰 변형하면... 과연. 분명히 더 좋은 효율을 낼 수 있겠어."
"어떠냐?"

제이스의 제안은 분명 매력적이다. 모든 마법기계공학자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큰 틀에서 필트오버와 자운의 양식은 좀 달랐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의 업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훨씬 더 파격적인 발상을 보여주곤 했다. 바로 그 점을 빅토르는 높이 사고 있었다. 

"굉장해! 역시 네 발상은 대단하군. 내가 읽었던 네 모든 논문들만큼이나 인상적이야."
"그걸 모두 읽었다고? 농담이겠지?"

제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그걸 전부 이해했단 말이냐?"

"그래." 

명료한 답변이 돌아왔다.

"제이스. 넌 정말 굉장한 녀석이야. 단지 좀... 밥맛이지만."

빅토르의 말에 제이스는 입맛을 다셨다. 

"뭐, 여기 녀석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자신은 그저 사실을 말한 것 밖에 없다고 제이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던 무슨 상관이겠어?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는 녀석들의 쓰레기 토론은 들을 필요도 없다. 어쨌거나 제이스는 천재 공학자이고 그가 하는 말은 항상 옳으니까. 

"자, 그럼 이제 넌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세히 구현해 봐. 난 여기 장비를 좀 쓸 테니."

그 말에 빅토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거라면 마음대로 해. 난 이미 다 끝냈으니까."
"으음?"
"몰랐나? 네가 거기 서 있는 동안 난 실험 경과 측정과 기록까지 전부 끝냈어.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네 덕분에 새 아이디어도 얻었네. 고맙다."

빅토르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