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스는 이 글을 읽고 매우 큰 충격에 빠졌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게 아니라, 너무 잘 이해가 되버린게 문제였다.

'그동안 썩은 아귀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니...'

 그것도 모르면서 자신은 그동안의 만행을 저질러오고도 떳떳하게 다닐 수 있었다. 모르기 때문에 가능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전에 드는 생각은 많을 것이다.

'내가 이런 상태였다니...'

 그동안 자기가 행동했던 당당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매그너스 던더스와 말자하에게 보였던 이유모를 패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 질문의 해답을 마침내 찾아냈다.

 보는 내내 경악을 금치못해 입을 쩍 벌리고 본 엘리스였다. 기억을 봉인당했다라... 그녀 머리속에 있는 기억중 일부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기억을 찾기 위해 어딘가를 돌아다니는게 아니라 봉인을 풀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녀야 한다는 뜻. 그러나 그 계획은 당연하게도, 세우지 못했다.

 

 엘리스는 자신의 머리가 지끈거리는걸 느꼈지만 아직 한 명의 소환사가 쓴 글이 남아있어서 그냥 무시해버리려 했다. 그런데 되지 않는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썩은 아귀의 정신 기생도 없는 지금 자기의지대로 손을 못움직이는건 무슨 상황일까.

'이 느낌이다.'

 왜 그녀가 전쟁 학회에 서둘러 오려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좋지 않은 내용이, 사실이 그녀를 맞이하고있어서다. 엘리스의 감은 알고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가슴과 머리의 부조화는 결단력있는 행동을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엘리스는 스스로가 봐도 '답답한' 행동을 하고있었다.

 최대한 마음을 추스르고 손을 움직여서 스크린을 만졌지만 코로나크의 말을 떠올릴수록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그녀의 내면이 거칠게 요동치는듯했다.

거미교.

썩은 아귀.

정신 기생.

정신 제어.

코로나크.

그리고 기억.

 이 모든것이 엘리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 이 고통의 원인을 알아도 좋은건 없지만 알지 못했던 엘리스에게는 그것만이라도 알고싶어했다. 그러나 식자우환에 불과한 요소들이었다.

 자신의 생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신의 주체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허탈함과 허망함은 분노로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엘리스는 소리를 지르면서까지 이 마음을 떨쳐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르면 소환사가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서 이곳으로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때문에 그리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단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시 미쳐 날뛰고 싶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바닥에 얼굴을 맞댄채로 엘리스는 소리없이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얼굴을 맞댄 상태로 조용히 입을 벌렸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많은 것을 내포했다. 이 공간이 감시받고있는것도, 소환사들이 자신을 쫓아오고있는것도 잠시 잊고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시간은 전쟁 학회의 도서관 클래스 S 자료실이나 룬테라 대륙을 구분하지 않고 흘러간다. 그러나 시계를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시간이 흘러간다고 느낄 수 없는 곳이 있다. 쿠몽쿠 정글? 그림자 군도? 시계가 없는 곳? 그런 답변을 원했다면 청자가 정해져있지 않은 물음을 할 이유는 없다. 그 장소는 클래스 S 자료실 단 한 곳밖에 없을 것이다.

 엘리스는 다음 책장을 넘길 자신을 잃은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멍을 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지. 지금껏 소환사들이 이곳에 들어오지 않은것도 이상하지만, 의욕이... 나지않아.'

 발자국소리가 과장되게 들려와서 쫓기듯 이곳으로 들어온것도 점점 오랜 과거가 되어간다. 그리고 지금껏, 엘리스의 좌절이외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여기는 밀폐된 공간이지. 이곳에 있는것도 제한적이야. 그러니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소환사들에게 잡히는거겠지. 내가 그림자 군도를 떠나서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하는거지?'

 그녀 자신도 이 여정을 멈추처서는 안된다는걸 알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더 자신의 태도가 답답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무기력해져가는 그녀가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 것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물음이었다.

"...내가 여기를 빠져나갈때 이곳의 정보를 온전히 보유하고 나갈 수 있을까?"

 세계를 재창조한 존재들이 차등적으로 배분해놓은 자료실이다. 기억 하나 지우거나 조작하는건 매우 쉬운 일이다. 엘리스에게 가장 나쁜 해석으로 말하자면, 소리없이 지른 괴성의 원인과 지금껏 낭비한 시간의 원인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갑자기 엘리스의 눈에 힘이 들어왔다.

'그들이 나에게 내려질 처벌은 뻔하다. 여기에서 본 정보들을 모두 없애버리면 돼. 그걸 막을 방법은 없어...'

 하지만,

"하지만,"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여기까지 힘들게 와서 얻어낸 정보를 남의 손에의해 잊혀지는건 싫어.'

 엘리스가 소환사들이 자신에게 가할 행동이 예측되자마자 그녀에게서 없는 힘이 생겨났다. 처벌이 또다른 각성제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르블랑의 말이 맞아. 내 '여정'은, 지금껏, 앞으로도 고난의 연속. 어차피 이런 것들이 날 기다리고있겠지. 그래도 싫어. 아무것도 모른채 속아살아가는건 싫어.'

 엘리스는 포기하고싶었다. 그러나 머리는 정반대의 문장을 만들어서 그녀를 이끌려고했다. 엘리스는 머리가 이끄는대로 따르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장 후에 닥칠 소환사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해도.

"그래. 방법은 있을거야. 소환사에의해 정보를 잃지 않을 방법이란것이."

 그녀가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는 의미에서 꺼낸 말을 하자, 그녀의 몸은 자신이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모니터 앞에 손을 올린채로 일어서있었다

 

챔피언 관리자의 코멘트 : 메들러

 

* 읽기 전에 이는 소환사들의 주관적인 평가로 이루어졌음을 명심하시고, 지속적인 수정을 요한다는 문서임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다른 소환사들이 말하는 위화감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서술은 지나친 중복을 일으킬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시점에서 느낀 것들을 적으려 한다...

 

 그래도 이 말은 적고싶다. 미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 이 챔피언의 아름다움은 서술해야만 할 것 같다. 수많은 남자 소환사들이 인정한 색녀(...) 심지어 저 몸매와 아름다움은 타 여성 챔피언중에서 보기 드문 케이스다. 미용에 꽤나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어느 부위를 만져도 부드러운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아아아... 왜 거미교 신도들이 끝내 잡아먹혀도 수치상으로는 줄어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사람, 변태 아냐?"
 아주 짧은, 또한 적은 문장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스는 왜 자신이 1시간 넘게 좌절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성별의 구분은 서술을 모호하게 쓴 덕분에 코멘트로만 봐서는 서술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르겠지만 은밀하게 적어놓은 비유는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

"왜 내 아름다움에 대해서 변태적으로 써놓은거야?"

 ...그냥 서술의 문제에 초점을 둔 듯 하다.

"그래도... 누군가가 내 아름다움을 인정한다는거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호호홋."
 자신을 추켜세우는 주체가 소환사이다. 이 분의 말에 따르면 자기는 여러 챔피언과는 다른 미인이라는 것이 그리도 좋았다. 거미 '여왕'은 자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편이라... 어찌보면 당연한게, 그림자 군도 소속의 챔피언치고 잘생기거나 예쁘장한 챔피언이 자신을 빼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메들러는 이 점을 잘 부각해서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남다른 특징이 자기에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는걸 되새기기 전까지는.

 

 이 챔피언에 대한 리그의 심판, 그리고 스킬등재가 끝난 직후부터 관리자인 나와 코로나크는 챔피언에 대한 관리자의 코멘트, 즉 이 문서를 작성하도록 권고받았다. 나는 별일없이 이 여자가 보여준 행동에 대한 묘사를 적으려 했지만 문서 자체가 없어진 바람에 꽤나 시간이 미루어졌다.

 더군다나 코로나크 역시 문서를 찾는데 협력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엘리스가 챔피언으로 등재된 이후부터 공식적인 소환사의 업무도 하지 않고 자료탐색에만 열중했다. 나 역시 공식적인 소환사의 업무가 있었기에 마냥 이것에만 목매이지는 않았지만 평소답지 않은 태도가 이상해서 녀석이 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려왔다.

 일주일간의 자속을 마치고 문을 연 코로나크는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놀랐다.

"대체 뭘 그렇게 찾아본거야?"
 코로나크는 대답을 피하고 내 옆으로 지나가려 했...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걸리는 사실이라면 그거밖에 없지. 엘리스인가?"
 ...지만 나는 팔을 잡은다음에 뻔한 질문으로 녀석의 반응을 기대했다. 코로나크는 쓴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챔피언을 잘 뽑았군. '거미 여왕'이라는 칭호도 오직 그녀만 가질 수 있는 칭호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직업상 신도들에게 여왕이라 추대받는데, 뭐."
 코로나크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나는 녀석이 내 손을 뿌리치고 떠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동료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대화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엘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더 꺼내보기로 했다.

"엘리스를 생각하니 말이야. 의외로 그녀같은 종류의 챔피언이 늦게 등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소리인건지..."
"잘 생각해봐 코로나크. 데마시아, 녹서스의 장군과 왕, 심지어는 출신 불명의 탐험가나 마법사들도 챔피언으로 들여온 경우가 있는데 왜 그녀같은 거미 인간이 106번째나 되서야 챔피언이 된거지?"
"모든 개체는 집단의 영향을 받는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나 지배층은 다른 나라를 경계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력도 과감히 행해낸다. 그러나 그 고위층이라는 사람들의 광기를 제어할 방법이 없지는 않지. 고위층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집단을 만드는 거야. 명목적으로는 룬테라 대륙의 평화유지로, 실질적으로는 절대적인 지위를 얻어내는게 현실이지 않나. 실제로 우리들은 2가지의 의미로 챔피언이라는 직업을 만들었지."

 맞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말을 끊을 것 같아서 부동자세로 코로나크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현 세상에서는 거미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녀가 챔피언이 되지 않았다는, 아니 못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자가 아니었다는 의미겠지."

 

 코로나크가 정의한 '강자'와 '집단'에 대해 감탄하다가 문득 대화의 초점을 생각한 결과 나는 현 대화에서 다소 엉뚱한 흐름을 발견했다. 엘리스가 진정한 강자가 되었다는 뜻은 알겠다만 그것이 106번째 챔피언으로 등극한 이유에 대한 답변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느걸.

 코로나크 역시 자기의 말에 엉뚱한 내용을 담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말을 정정해보였다.

"미안하군 메들러. 내가 일주일동안 방구석에 박혀있어서 생각한 것들을 순서없이 얘기한 것 같군. 지금도 챔피언이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치르지. 각자의 개성을 살리면서 말이야. 하지만 각각이 가진 개성이나 컨셉같은걸 잘 부여하지 못하면 떨어지는건 너도 알고 있지?"
 알다마다. 나는 알고있다고 대답했다. 사실 챔피언의 전투력 테스트는 챔피언 시험 과정중 가장 처음으로 접하는 거였다. 그 경지까지 가는 것도 힘들지만 챔피언이라는 자격을 갖췄다는 녀석들은 그런걸로 쉽게 탈락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관건은 자기를 어떻게 부각시켜야하는가, 그뿐이다.

"다른 챔피언들도 마찬가지지만. 동, 식물에 대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기존 대상에 대한 특징과 비교되기 때문에 등재과정이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지. 그래서 본래 육식 식물이었던 자이라같이 특정 분야에 대한 뚜렷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한, 생태계와 직결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통과조건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우리도 식물이나 거미에 대한 지식을 알고는 있지만 그걸 토대로한 스킬구상에서는 똑같이 힘들어하잖아?"
"그렇지. 세상을 바꾼 우리들의 마법이나, 인류의 재구성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갖춘 기술력으로만 치면 우리는 사람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정작 챔피언은 그러기가 힘들잖아. 우디르와 자이라같은 녀석을 우리도 만들고싶었다고."

 동시에 나는 거미와 관련된 능력으로 시험을 치르려 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엘리스 이전에도 거미 인간을 컨셉으로 잡은 사람들이 꽤 있었나?"
"없지는 않았지만 꽤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게, 단 한 명의 지원자밖에 없었거든."

"한 명?"

"그게... 엘리스와 비슷한 여자 거미 인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외형이 우르곳과 유사하다는 것이 맹점으로 작용돼서 챔피언으로 등극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지. 그 후로 윗분의 소환사들께서는 거미와 관련된 챔피언을 한동안 뽑게 하지 못하게 하셨어."

 그럼 엘리스 이전에 거미와 관련된 챔피언에 도전한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단 말인가? 그보다 엘리스는 어떻게 그런 분야에서 당당하게 최초의 거미인간으로 챔피언이 되었단 말이지? 그래도 난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그 자리까지 올라온거겠지. 그 부분에서 '거미 여왕'이라는 칭호는 잘 어울린단 말이야."
 손에 쥐어진 힘을 풀고 앞을 보면서 걷기 시작한 순간 그 녀석은 말했다.

"그래. '여왕'이라... 너는 어떤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거냐?"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었지만 녀석이 만족할법한 답변은 꺼내지 못했다. 재능이 있거나 뛰어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를 부르는게 여왕아닌가?

 나는 그 순간 코로나크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왕보다 더 강한 권력자를 뜻하는 지위는 많아. 정말로 엘리스가 거미교의 중심이라면, 왜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줬을까?"

 

 나 역시 엘리스에 대한 리그의 심판을 집행한 소환사였지만, 그녀에 대한 핵심정보는 코로나크에게 있는 것 같다. 그 대화 이후 그녀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고 싶었지만, 그리되면 그 녀석이 투자한 일주일의 가치가 퇴색될걸 우려한 나머지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니 엘리스에 대한 정보는 코로나크의 코멘트를 참고하라는 말을 남긴다.

<계속>

 

<글쓴이의 말>

 르블랑이 엘리스를 복돋워주는 장면이 없어져서 아쉽다만, 느슨한 전개에 대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화는 길 이유가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