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엔 역시나 리신과 대련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타격거리에서 벗어나기만하면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는 생길거야!'

 리신의 주먹과 발차기는 위협적이었고 그걸 파고들기에는 그녀의 내공은 부족했다. 날렵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공격에 맞설 자신감도 없다. 그러니까 피하는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간이 스파링 시스템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입는 타격은 머리로 느끼는 고통 이상일테니까.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한계점은 언제나 똑같았다.

"윽!"
 타격에 흘려버린 신음소리가 아닌 더이상 피할 곳이 없는 장소로 다다라버리자 내버린 '이런 젠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대의 대처방식을 지금 문제삼지는 않겠소.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상대에게 공격을 가하는것만큼 어리석은것도 없소.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나 해답이 될 수 없소. 소인보다 더욱 강한 사람은 그대가 물러설 곳을 계산하고 돌진할테고, 3일동안 그대는 늘 같은 패턴으로 궁지에 몰렸소."
"그렇지..."
"소인은 그대가 지난날 한시적으로 녹서스의 주민들의 공격으로부터 대처했다는것이 기적이라 생각하지 않소. 그것은 그대 자신도 모르는 잠재능력의 일부요. 제아무리 마법사라고해도 챔피언 정도의 경지에 오른 당신이 보통사람보다 떨어지는 능력치를 갖고있진 않을거요. 피하는 법을 익힘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워내야만 하오. 알겠소?"
"알겠어."

 해당 장소에서 사활을 걸고 뛰어다녔던 자신보다 더욱 평면적인 상황에서 냉철한 분석을 꺼낸 리신의 분석력에 엘리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수련은 여기까지."
"휴..."
"한숨이 너무 깊소 엘리스."
"어?"
"오늘부터 한동안은 마오카이와 같이 그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여러 활동을 할거요. 잠시 후에 경제특구쪽으로 같이 갈테니 그리 아시오."

 엘리스는 말을 더듬었다. 가기 싫다는게 아니다. 어젯밤에 잡아놓은 선약을 잊지않았기 때문에 뭐라 말해야할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레고리와 만난다고 말하면 절대 허락해주지않을거야. 어쩔 수 없잖아 이거.'

 2%정도 부족한 고민을 한다음 그녀는 행동했다.



 

 리신의 수도원 주변에 있는 대나무숲 어딘가. 그레고리는 제시간에 맞게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있다. 취재 대상이 스스로 약속시간을 정했는데 이것만큼 굴러들어온 복도 없다. 물론 엉뚱한 소리를해서 과연 그 사람의 상태가 심각할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들려오는 소문과는 정반대의 인상을 남긴게 접근성을 높인 한 요소로 작용했다.

"시간이 되었는데."
 약속시간을 준수한 그와 달리 제안을 걸어온 주체는 몇 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단 리신이 말한 7개의 감정을 네가 느낄 수 있는지 한번 말해봐라. 어떤 감정들인지는 알고있지?"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증오, 욕망이잖아."
"좋다. 사전적인 의미를 기준으로 말해봐라. 근래 넌 언제 기쁨을 느꼈다고 생각하나?"
"네가 날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때?"

"분노는?"
"음... 가슴속에서 뭔가 타오르듯 끌어오르는, 안좋은 감정이 이에 속하나?"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림자 군도에서 많이 느꼈지. 그렇구나. 생각해보니까 '그것'은 분노란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구나."

 예상 범주를 벗어난 대답에 마오카이의 말이 잠시 끊겼다. '자신의 말을 일방적으로 되받아치고 훈계했을 때'라고 말하길 내심 바랬지만, 엘리스의 대답은 훨씬 더 고독했다. 그는 헛기침을 낸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슬픔은?"
"없어."
"청문회 이후의 자신의 삶에 대해 한번이라도 이 감정을 느껴본적이 없단 말이야?"
"그것은 모두 분노로 표출된것 같아."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청문회 이후로 감정을 잃은 그녀임에도 빈번하게, 확연히 느껴졌다. 분노가 슬픔의 몫마저 삼켜버렸다는 요약이 잘 들어맞는다.

"즐거움은?"
"내가 한달간 겪은 일중에서 '신난다'라고 말할법한 일들이 있을것 같아? 난 너에게 숨김없이 모든걸 얘기했을텐데."
"사랑."

 유난히 짧은 단어형 질문이었지만 그녀에게 떠올려진 기억 하나는 긴 여운을 남겼다. 가장 마지막으로 신도들을 잡아먹은 날, 유난히 아끼고 잘 대해줬던 한 남자. 살려달라고 애원한 수많은 신도들중에서 유난히 그의 얼굴엔 진실함이 담겨져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걸 사랑이라 치부할 수 있는건가. 모르겠군.'

 머리는 모르지만 가슴은 알고있었던 감정이었음에 '설마'했지만 결정적으로 마오카이가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기간에 속하지 않았다.
"없어."

"너에겐 아직 과분한 감정이지. 증오는, 느껴본적 있나?"

'왜 이 감정에 대해서만 날 평가하는거지?'

 스쳐지나간 평가가 미심쩍었지만 그녀는 빠른 대답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감춰진 진실의 일부를 알게되었을 때 썩은 아귀에게 느꼈을 것 같아. 하지만 느꼈다고하기엔 마음의 여유는 없던거같고 그리고..."

'또있는건가.'

 증오한 기억이나 증오했던 대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부분에서 엘리스의 말은 흐려졌다.

"욕망은 카사딘과 관련되었을 때 느끼는것 같아."
"카사딘?"
 마오카이가 보기에 엘리스는 아직 스스로 '그림자 군도소속을 벗어나는것'에 큰 마음을 두고있지는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자하는 바람도 일종의 욕망으로 여길 수 있는데 그 우선순위 위에 '카사딘'을 언급했다는 결론.

'무슨 일이 있었군.'

 욕망에 대한 감정으로 넘어가는 흐름에 의도적인 말흐리기를 했다는 추측이 들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카사딘을 가설로 대입시키면 어느정도 들어맞는 셈.

"좋아. 난 인간의 감정이 7개라는 생각은 하지않는다만 일단 7개의 감정 중 네가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지. 일단, 좋아하는 음식있나? 좋아하는 행동을 하거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기쁨이란 감정을 느끼는게 일반적인 사실이지."
"음 스테이크 좋아하는데... 저기 레스토랑이 있거든? 근데 넌 못들어갈것 같은데..."
"후... 가서 먹고와라. 마침 저녁시간대니까."


 잠시 후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엘리스를 발견한 마오카이는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느낌이 어때?"
"배부르고, 졸리고, 편안하고..."

"끝인가. 내가 봐왔던 인간들은 보통 원하는 음식을 먹은뒤에 '아! 역시 XXXX! 사진찍어서 별g에다 올려야지!' 이런 반응을 보였는데."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바로 직후에 잠을 자거든. 그래서 기분이 어떤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그럼 말을 하지.'

 기쁨을 느끼게 해주려는 첫번째 계획은 무난히 실패했고 마오카이는 아주 급진적인 방법을 시도하기로했다.

'확실히 그걸 마시면 빨리 피로해져 자긴하지만 그 직전의 상태는 엄청 들뜬 상태겠지. 지금도 가만두면 식곤증으로 곯아떨어진다. 관건은 네가 그 상태일때 기쁨을 느끼는걸 자각시켜주면된다.'

"엘리스."
"응?"
"술...마셔본적 있나?"


 어느 아침과 다를바 없는 날의 6시, 리신의 수도원. 드넓은 잔디밭위에 서서 엘리스를 기다리는 그에게 의외의 존재가 다가왔다.

"이 느낌은... 마오카이?"
"미안하군 리신. 엘리스는 오늘 쉬어야할 것 같다."
<계속>

 

<글쓴이의 말>

 

딱히 새로운 설정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전장에서 많은 활동을 해온 마오카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식생활문화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