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은 그칠 줄을 몰랐다. 물은 이제 통이 부족해서 저장하지 못할 정도이며, 식량은 밖에서 서서히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있는다면 곰팡이가 낄 것이다. 날씨가 습하니까 평소보다도 분명 곰팡이가 금방 생길 것이다.

"이제 뭘 하면 되지?"

누군가의 한마디가 침울하게 한다. 사실 그랬다.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폭풍이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다. 가장 활발한 행동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창고의 천장도 뚫었다. 신기하게도 아무도 피해자가 없다는 사실이라도 자랑이라면 자랑이랄까.

"폭풍이 언제까지 올지 모르겠군."

아무도 모른다. 폭풍이 조금이라도 잠잠해진다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도 바람은 을씨년스러울 따름이다. 곰곰히 모여앉아 생각해본다. 이것 말고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선장."

누군가의 말이 선장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말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집중되는 것. 그만큼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선장밖에 없다. 물론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겠지만. 그래도 모든 계획이 선장의 머리에서 나오는 만큼, 이번에도 선장의 그럴 듯한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아."

선장은 대답대신 깊게 들이마신 숨을 내쉬었다. 인생에 대한 달관일까. 우리는 더욱 긴장된 얼굴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해서 좋은 대책이 나올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줄창 하늘에 대고 기도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좋아. 그렇다면 우선 쓸데없는 짐들을 버려. 폭풍이 끝났을때 최대한 빨리 나아갈 수 있도록. 정말 소중한 것만 남기고 폭풍이 끝나기 전까지. 알았어?"

소중한 것. 가족에 관련된 것들. 또 뭐가 있을까. 이 일지. 또?

"그럼 해산."

선장의 말에 분주해진다. 그나마 새로이 생긴 일. 마치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사람들처럼 급히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애초에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겼을 뿐이다. 덕분에 버릴 것이라고는 입었던 옷가지. 이런 것들은 속도에 별반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할 것이다. 옷은 너무 가볍다. 그렇다면 지금 버려야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금 집합하게 된 우리. 선장이 다시금 우리를 불렀다. 선장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말한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소리였는지. 선장은 쓴 웃음을 짓더니 말을 꺼냈다.

"지금 죽은 인원들의 짐을 전부 버려.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유품으로 생각할 수 없는 자질구레한 것들은 버려. 그리고 이미 측량사는 죽었어. 우리 중에서 측량에 대해 아는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어. 그저 우리가 어떻게 여기로 왔고, 어느 방향으로만 가면 되는지 알면 되니까 다른 것들은 전부 버려. 책상, 의자 그외 잡다한 모든 것을 버리면 되."

어떻게 보면 잔인한 말이었다. 죽고 싶어서 죽은 것도 아닌데 죽어서도 버려지는 것이다. 황야와도 같은 이 바다에, 망자와의 모든 것을 표류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우리는 더이상 죽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뭔가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꼭 절망이 찾아와서는 죽음을 속삭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빌어먹을 '그 자식' 때문에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다. 어둠의 저편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이 잔인한 사건을 빌미로 우리는 공포를 마주하고도 당당함을 잃지 않을 것이다.

모든 짐이 버려진다. 바다에는 종이들이 떠있고, 부숴진 책상이 떠있고, 망자들의 원성이 떠있다. 그 모든 것들을 딛고 일어서, 우리는 다시금 도약할 힘을 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