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 루이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한 남자. 호화로운 카펫 위에 놓여진 긴 탁자의 끝자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양 옆에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신다. 위고 막심 드 오스카(Hugo Maxime de Ocar). 오스카 영주에게 밀려난 오스카 가문의 첫째 아들이다. 아버지 레옹 오스카 드 오스카(Leon oscar de oscar)의 행동부터가 오스카 데 로랑 레스 오스카(Oscar  de Laurent les Oscar)에게 영지를 물려줄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이었음을 알고 한탄하기를 3년이다. 오스카 가문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후계자로 삼을만한 인재가 태어나면 그 이름에 'Oscar' 넣는 일종의 관습이 있었다. 교황청엔 비밀로 한 채 공작이나 되는 여자를 제 2의 부인으로 삼아 아이를 가지니 그것이 로랑(Laurent)이다.

"위고."

누군가 밖에서부터 다가와 여색을 즐기며 흥을 돋구던 위고에게 말을 걸었다. 크리스티나 미쉘 데 뒤브아(Christina Michel de Dubois)였다. 그의 약혼녀인 그녀는 위고가 오스카 영지의 영주가 되지 못하는 데 한 몫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빼어난 인물과 남을 홀리기에 충분한 성품과 행동으로 위고를 한눈에 반하게끔 한 그녀이다. 마침 그녀 또한 위고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서로가 어울렸고, 후엔 아버지 레옹에게 결혼을 할 것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가 '농노의 난'이 일어난 지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점인지라 위고의 행동을 괘씸하게 여겼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첫째 아들이니 약혼을 치뤄두긴 하였는데 그가 크리스티나를 보면 볼수록 '권력욕'이 크고 '머리'가 총명한지라 오스카 가문에게 천금을 몰아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영화를 앗아갈 수도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위고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고 위고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며 반항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영주는 자신이 위고 다음으로 사랑한 아들인 '로랑'에게 영주의 자리를 주겠다고 임시로 선언하였으나, 갈등이 해소되기도 채 되기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그가 영주가 되는 데에 걸림목이 되기도 한 그녀이지만 위고는 크리스티나를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크리스티나. 내가 로랑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소?"

"하나 없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조용히 위고의 근처에 있던 여자들을 방에서 내보낸 뒤 그 옆에 앉았다. 위고는 위스키를 들이키며 목이 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해드리려고 노렸했어. 그런데 어째서.. 왜!"

"불쌍한 위고. 위고는 잃은 것이 하나 없습니다."

"내 영주의 자리도, 명예도 모든 것을 잃었지 않았소!"

위고가 위스키병을 던져버리며 울부짖듯 말했다. 크리스티나는 그의 머리를 안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의 자리가 무엇이랍니까. 명예는 또 무엇입니까. 대신 절 얻지 않으셨습니까."

"허나 내 부족함을 모두 채워줄 수는 없소."

"아버님께서 절 쫓아내려 하신 이유가 무엇이셨습니까. 절 미워해서가 아니셨지 않습니까. 제가 모든 것은 채워드리리다. 저를 믿으세요."

위고가 크리스티나에게 안긴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

 

남자가 오스카 영지의 앞에서 문지기 두 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어떤 여자에게 물건을 받은 남자였다.

"전 다른 영주님의 명을 받고 온 사람입니다. 비켜주십시오."

문지기 한 명이 그를 막아서고 다른 한명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이봐요. 계속 영주님의 명, 영주님의 명 하시는데. 그 잘나신 영주님이 누구라는겁니까."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 그럼 돈을 내고 들어가시던가. 문세요 문세."

"절 들여보내주실 수 없으시다면 성의 귀족 한분을 모셔와주십시오. 절 알아보실겁니다."

"거 참, 답답한 사람이네. 알겠수. 기다려보쇼."

남자를 막아서던 문지기 한 명이 다른 경비병에게 신호했다. 혀를 차던 문지기가 그 모습을 보고 성으로 달려들어갔다. 문지기는 속으로 '괜히 생고생을 치루게 만드는구만.'하고 남자를 속으로 욕하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를 막던 문지기가 남자에게 말했다.

"뭐하는 사람이오?"

"..."

남자가 대답하지 않는다. 문지기가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사람 되게 고지식하구만. 그래, 무슨 용건으로 온거유?"

"아까 말했듯이 영주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어허, 이 사람 진짜로. 무슨 명이냐 이거지 이사람아."

남자가 메고있던 가방을 벗어 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동양식 두루마리 같은데 펼치지는 않은 채 문지기에게 들이밀었다. 그냥 '물건을 전하는 명'임을 알리려는 듯 보였다.

"거 참, 고 영주님 겁나 너무하시네."

남자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영주님을 모욕하는 것입니까?"

문지기가 그의 반응에 당황했는 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그게 아니라 말이우."

"음?"

"아니, 사실 그렇지 않소. 아랫사람한테 물건 배달 좀 시키겠단 사람이 표식 하나 안넘겨주시나 그래?"

의외로 싸늘한 남자의 분위기에 문지기 이마에 식은땀이 조금 맺혔다. 남자가 말했다.

"당신은 영주에게 완전히 충성하지 않나보군요."

문지기가 남자를 등에 지고 말했다.

"사실 댁같은 경우는 별로 없어."

남자가 문지기에게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나야 원래 영주님한테 충성도 하고 했지. 옛날엔 영주님 만큼이나 멋있고 잘난 사람도 없었어. 우리에게 어찌나 잘해주시던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니까 그래? 아마 댁의 영주님도 우리 영주님보단 못했을꺼야. 흉이라면 흉이지! 암!"

"어땠는데 그러십니까?"

문지기가 등 뒤돌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듣고싶어?"라고 말했다. 남자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문지기는 그 자리에서 앉으며 남자를 땅바닥에 앉혔다.

"그래그래. 어차피 이 넓은 영지 사이에 있는 성이야. 아마 우리같은 천것들이 부른다고 했으면 10분은 더 걸리겠지. 내 특별히 말 해드리리다."

"감사합니다."

문지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짜내어 옛날 생각을 하듯 말했다.

"옛날엔 말이야. 진짜 신화 속에도 안나올 성인이셨지. 우리 같은 천것들 사는 곳에도 자주 방문하셔서 식사도 하시고.. 다른 사치스러운 영주들하고는 정말 달랐어."

"음.."

"내가 지금까지 한 '옛날' 영주라고 하는 분은 전부 다 레옹 영주님 덕택이었지. 얼마나 우리랑 가깝게 지내셨으면 내가 그 분 성함까지 외우고 있을까!"

"그렇다면 영주님이 바뀌시면서 바꼈다는 뜻인가요?"

"그래그래. 지금은 뭐 원래 영주가 되셨을 법한 첫째 아들분이랑.."

"첫째 아들 분이랑?"

문지기가 남자의 얼굴 옆으로 다가가 주위를 살핀 뒤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글쎄, 지금 영주님은 전 영주님이 교황 몰래 두신 두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이라나봐. 언제부턴가 하녀로 지내왔는데 몇달 전 쯤엔가 목이 날아갔다는군."

문지기가 말을 마친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이어 말했다.

"어쨌든간에 그분들하고 그분들을 따르는 양반들이 달라가지고 서로 세력좀 넓혀보자고 난리인가봐. 나같은 천것이 뭘 할 수 있겠느냐만은 난 첫째 아드님 편인디 말여."

"그런 것이었군요."

말이 끝났을 때였다. 문지기의 등쪽에서 말굽소리 들려왔다. 귀족이 왔단 얘기였다.

"이봐, 문지기. 누가 오신것이냐."

문지기가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저, 저기 앉아있는 청년입니다. 이 곳 귀족 한 분이라도 보.."

"다 들었다. 문지기는 입 다물고 있거라."

"예, 옙. 알겠습니다. 예.."

남자와 대화하던 문지기가 귀족 말 옆에 가 몸을 움크렸다. 귀족이 교양있는 폼으로 말에서 내려 문지기를 살포시 즈려밟고 내려왔다. 귀족 쪽에서는 매우 차분하고 안정적인 모습이 보였지만 문지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귀족이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딘 후에도 문지기는 조용히 가만히 있다가 귀족이 구두의 힐 부분을 땅바닥에 툭툭 치며 구두를 똑바로 신자 그 때서야 조용히 일어났다. 귀족이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누구십니까?"

문지기의 불쌍한 모습을 지켜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절 모르시겠습니까?"

귀족은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영 모르겠다는 듯이 왼손으로 오른 팔꿈치를 받친 채 오른손으로 턱을 괴던 귀족이 잠시 후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족은 남자의 왼편으로 가 오른손으로 그의 등을 약하게 밀며 왼손으로 영지 입구를 가리켰다.

"자, 자. 천것들이 경을 몰라뵌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은 알아서 교육할테니.."

남자가 귀족의 손을 무시한 채 문지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문지기는 오스카 성의 귀족에게도 '경'소리를 들으며 대접받는 남자를 보며 '난 이제 죽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남자가 자신에게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미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문지기에게 빨리 손을 잡으라는 듯 손을 흔들어보였고 문지기는 조용히 양손으로 그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손을 흔들었다.

"경께서는 이 문지기분들에게 아무 교육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자가 왼손으로 문지기의 손을 밀어내며 뒤를 돌아서서 말했다.

"다만 부탁드릴 것이 있다면 두 가지겠지요. 하나는 저를 빨리 안으로 들여보내주셨으면 하는 것. 또 하나는 앞으로 말을 타거나 말에서 내리실 때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그러시길."

문지기의 눈에 잔잔하게 눈물이 고였다. 자신을 위로하거나 자신을 짖밟던 귀족을 혼낸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문지기는 당연히 통쾌함이나 서글픔에 눈에 눈물을 맺히게 한 것도 아니었다. 감동을 받아서 눈물이 맺힌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옛 오스카 영주의 모습이 남자의 뒷모습에서 아른거려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이었다.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아닌 모두가 존경하던 따르던 그의 모습. '천 것'이라 불리우는 농노도, 영지의 일꾼들도 모두 다 총애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감히 자신의 주종이라 여기게끔 한 그 영주의 모습. 심지어 제대로 들어본 적도 뵌 적도 업적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위대했을 것이라 여겨졌던 플랑크 왕국의 왕보다 더 위대해 보이던 그 영주의 모습이 보인 것이었다.

귀족은 남자의 말에 당황했다는 듯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남자는 귀족에게 웃어보이며 영지의 안쪽으로 나있는 길로 걸어갔다. 아까 귀족을 데리러 갔었던 문지기는 다시 말을 이끌고 둘의 뒤를 따랐다. 귀족과 남자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고, 남자는 깜빡하고 하지 않은 부탁이 있다며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부탁이 있다고 했다. 귀족과 남자가 멈추어섰다. 뒤따라오던 문지기도 말과 함께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 곳에 유명한 기사님이 있는걸로 아는데.. 저와 대화하던 문지기 분을 기사님의 아래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만."

"음. 제 관할이 아니군요. 기사님과 영주님께 여쭈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의 뒤에 있는 문지기분은 아직 문을 지키고 계신 문지기분의 아랫사람으로 갔으면 하는 소망도 있고요. 하하."

"그러십니까. 하하."

귀족이 씁쓸하게 입고리를 올리며 웃었다. 남자가 웃으며 귀족에게 말했다.

"마저 가십시다. 영지가 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