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니, 비처럼 보이는 회색 재였다.
하늘은 오래전에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검은 구조물들이 구름 위를 떠다녔고, 사람들은 그것을 “문영(門影)”이라 불렀다.
처음 외계 함대가 지구 궤도에 나타난 날, 사람들은 저것이 천사의 도시인지, 침략선인지도 몰랐다.
삼 일 뒤, 인류 문명은 끝났다.
열세 살 소년 윤서는 철창 사이로 바깥을 바라봤다.
한때 아파트였던 곳.
지금은 인간 사육장이었다.
거실은 우리처럼 개조됐고, 방마다 인간들이 나뉘어 갇혀 있었다. 외계인들은 인간을 애완동물처럼 길렀다. 말을 잘 들으면 먹이를 줬고, 반항하면 공중에 매달아 전기 자극을 가했다.
아이들은 장난감이었다.
어른들은 노동 도구였다.
그리고 예쁜 여자아이들은… 다른 용도로 쓰였다.
윤서 맞은편 우리에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하린.
하린은 늘 외계인 집에서 돌아왔다. 목에는 금속 목걸이가 채워져 있었고 피부에는 푸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긴 좋아?” 윤서가 어느 날 물었다.
하린은 멍한 얼굴로 웃었다.
“따뜻해. 침대도 있고 음식도 많아.”
“그 새끼들한테 이용당하면서?”
“…여기보단 낫잖아.”
하지만 윤서는 하린의 눈을 봤다.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죽어 있었다.
외계인들은 인간보다 두 배는 컸다.
팔다리는 길고 피부는 반투명했으며, 목 뒤에서 푸른 빛이 흘렀다. 그들은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공명 같은 소리를 냈다.
“크아르… 세르문… 타렉…”
인간들에겐 그냥 기괴한 소음이었지만, 윤서는 달랐다.
그는 그 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따라 했다.
그러자 감시 드론 하나가 순간 멈췄다.
외계인이 놀란 얼굴로 윤서를 봤다.
그날 이후였다.
윤서는 몰래 외계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밤마다 외계인들은 중앙 홀에서 의식을 치렀다.
푸른 액체가 담긴 그릇.
빛나는 금속 가루.
그리고 주문.
윤서는 철창 틈에 귀를 대고 외웠다.
“세르… 아나트… 벨키르…”
어느 날 그는 몰래 쓰레기장에서 재료를 모았다.
검은 가루.
유리 같은 광석.
외계 생물의 피.
그리고 주문을 읊었다.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철제 컵 안에 은빛 액체가 생겨났다.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마셨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뼈가 뒤틀렸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끄아아악!!”
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잠시 뒤—
소년은 철창을 맨손으로 구부리고 있었다.
탈출은 하린이 시작했다.
외계인 감시자 하나가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하린은 갑자기 놈의 목에 쇠조각을 찔러 넣었다.
푸른 피가 터졌다.
“윤서!! 지금이야!”
경보음이 울렸다.
사육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윤서는 맨손으로 철문을 뜯었다.
외계인 하나가 달려들자 그는 본능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벨 타르 케르!”
허공에서 검은 창이 생성됐다.
창은 외계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모두 얼어붙었다.
인간이… 외계 기술을 사용했다.
그들은 지하로 도망쳤다.
지하철 터널 아래, 오래전 군사 시설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검은 코트.
짧은 수염.
날카로운 눈.
마치 젊은 시절 Tom Cruise 같은 분위기의 남자였다.
“살아남은 애들이군.”
그의 이름은 강이현.
과거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현은 거대한 화석 앞에 서 있었다.
그건 뱀의 뼈였다.
아니.
산맥만큼 거대한 존재의 척추였다.
“외계인들은 이걸 ‘세계의 첫 짐승’이라 불렀다.”
“뭔데요, 그게?”
이현이 낮게 말했다.
“죽지 않는 신.”
그는 오래전 외계 유적에서 발견한 금속 구체를 꺼냈다.
그리고 윤서를 바라봤다.
“네가 주문을 읽을 수 있다면… 이걸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윤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계어를 읊었다.
“아르… 세르… 모나켈…”
그 순간.
뼈가 움직였다.
쿠구구구구—
지하 전체가 흔들렸다.
거대한 척추에 푸른 빛이 번졌다.
수백 미터 길이의 뱀 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죽은 눈동자 속에서 빛이 켜졌다.
인간들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외계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존재.
그걸 인간 소년이 되살린 것이다.
윤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쿵.
천장에서 검은 발이 내려왔다.
거대한 외계인이 터널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윤서를 향했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