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는 철근같이 무거웠고팔을 움직일 때마다 이두박근에 뼈가 떨릴 정도의 통증이 닥쳤다

상처로 스며든 독은 점점 그녀의 팔다리를 옭아매고그녀를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 속으로 잠식시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었다

한쪽 손에는 녹서스 제국에게서 하사받았지만 현재로선 스스로 부숴버린 룬 검을 쥐고

한쪽 손에는 장로의 뒷덜미를 잡고그녀는 어떻게든 전장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거북이걸음으로는 시체더미에게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공기 중에 퍼져있는 독은 하이에나처럼 시체들과 리븐의 주변을 아직까지도 어슬렁거렸다

곧 그녀의 흐려진 초점 앞으로 새까만 깃털 몇 개가 흩날렸다.


명백한 규율 위반 행위로 보이는데제군.”

그는 지팡이를 짚고다리를 절뚝이며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니, 제 3분대장이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겠군." 


까마귀떼가 하늘을 메웠다지독히도 익숙하고 진저리나는 까마귀 소리가 주변을 메웠다인간의 육체야 그곳에 많았지만그 끔찍한 기성을 들을 수 있는 이는 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노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면상을 진녹색 머플러로 절반정도는 가리고 지팡이를 짚었는데그 왜소한 체격에서 전투와 힘이라는 단어들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도통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위용은 어느 사람이든 섬짓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누구든 그것을 감지한다면 섣불리 덤비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어떻게 된 거지분명히 스웨인님은 침공 며칠 전에 사령부의 명령으로 작전에서 제외됐을텐데..’


다만 말이 안되는 것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녀에겐 그러한 의문보다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들이 이미 주변에 널려있었고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들 또한 그러했다시뻘건 적안은 지휘관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듯활활 불타는 것 같았으나이상하게도 얼굴 자체는 지극히 무표정했다

다만 언제나 그의 어깨갑주에 앉아있는 까마귀가 리븐을 험상궂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문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머릿속엔 언젠가 주워들었던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표정은 여전히 얼이 나간 듯 했지만그녀의 사고회로는 나름대로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리븐은 새에게 표정같은 것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실제로 본 적도 처음이었다

허나 그뿐일텐가지금 리븐에게 닥친 상황마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었고

이제부터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일들도 그녀에게 처음이 될 것들이었다여느 인간이 그러듯이난생 처음 겪는 충격적인 일 앞에선 그녀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청히 입을 벌리고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였다.


어찌된 경위인지 내게 설명해주지 않겠나보아하니 경황도 없어보이지만최대한으로 말일세.”


가래낀 목소리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칼을 바득바득 긁는 듯한 기분나쁜 소리를 연상시켰다

리븐은 발에 힘을 주고 걸음을 옮겨보려 했으나마법에라도 속박됐는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괴이한 감촉에 놀란 그녀는 자신의 다리 쪽을 황급히 살펴봤는데새 발톱같은 것이 땅바닥에서 솟아올라 발등부터 무릎을 콱 잡고 있었다생사는 여기서 결정될 것이었다그녀는 떨림을 억제하고 배에 힘을 줘 간신히 말을 시작했다.


죄송하지만지휘관님규율 위반으로 보이는 것은 저 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까마귀떼는 진홍빛 하늘을 노니며 울어댔다


노장은 주변에 산을 이루고 있는 시체를 둘러보고언덕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함성과 비명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렇지하지만 자네 또한 알다싶이흔적과 목격자가 없다면 범죄는 없는 셈이 되는 것일세.”


자네 또한 알다싶이,’. 리븐은 알아챘다

이 교활한 노인은 그녀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아는 것은 물론이고 그와 같은 행위를 당장에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어쩔 수 없이 이럴 때는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입은 바싹바싹 마르고 혀는 굳어 움직이지도 않을 것 같았으나 말해야만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주 잘 알겠습니다상황을 설명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그녀의 행태가 그제서야 흡족했는지 그녀의 다리를 꽉 조르고 있던 발톱의 힘이 느슨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망토의 주인을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사람은 아이오니아 장로로주변에 널린 시체는 이 장로와 연관된 아이오니아 간부들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병사들과 제가 이끌던 3분대 소속 군사들입니다이들이 한꺼번에 당한 이유는..”


노인은 다시 리븐에게서 눈을 돌려 불꽃과 맹독이 서로 엉켜 기괴해보이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생화학 폭격이군.”

리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와 그 장로는 어떻게 살아남았지그리고 왜 즉결처형하지 않고 살려둔 채로 전장에서 퇴각하는 것인지 알고 싶군.”


장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맹독탄들이 하늘로부터 폭격될 때장로는 보호막을 생성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맹독탄들을 가까스로 막았습니다저는 룬 검의 힘을 이용해서 살아남았고요장로는.. 장로는 자운의 최신식 맹독병기도 막는 마법을 사용하는 걸로 봐서녹서스에 포로로 끌고가면 신식 무기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목소리는 떨렸으나 눈빛은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굳은 심지는 눈빛을 통해서 스웨인에게 전달되는 듯 했다

노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곤 지팡이를 들어 부러진 룬 검을 가리켰다.

그 검은 왜 그렇게 됐나설마 그것도 생화학 공격 때문에 그 모양이 된 것인가?”

리븐은 손잡이를 꽉 쥐었다눈빛은 한층 더 사나워졌다.

아닙니다이건..”


정적은 흐르고까마귀는 여전히 울고학살이 낳는 괴성은 멀리서만 존재했다.


여기서 죽으면 끝이다

내게 맡겨진 의무나의 신념도 모두 끝이다리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탈출구를 파기 시작했다.

이건제 부상 때문입니다한쪽 손으로 이 무거운 룬 검을 들고 가기는 무리여서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러뜨리기라도 해서 무게를 감량하고 녹서스에 재정비를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웨인의 찌푸린 눈은 리븐의 눈을 가만히 주시했다

이내 옆에 앉아있는 까마귀를 날려보내곤 혼절상태의 장로에 눈을 돌려 말했다.

죽이게.”


그녀는 뭉툭한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맞은 것만 같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


스웨인은 리븐의 바로 앞으로 걸어와 지팡이로 장로의 흉부를 짓이기며 말했다

장로의 부르터진 엷은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네이 자의 마법같은 수작은 녹서스의 그 어떤 기술과 마법에도 유익함을 제공하지 못할 걸세그러니까 당장 죽이라는 걸세왜이리 심각한 표정인가?”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녹서스에서 지위란 곧 힘을 의미하고보다 강대한 힘에 굴복하는 것은 녹서스인의 법칙이다

그럼에도 리븐은 망설였다

검을 쥔 손은 바르르 떨리고 발톱은 다시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 장로를 죽인다면 아이오니아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무엇보다내가 이 무고한 노인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는다면과연 강간과 약탈을 일삼던 녹서스의 졸개들과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과 짜증이 뇌리를 맴돌아 명령에 복종하라는 그녀의 무의식적 본능을 억제했다.


하지 못하겠는가?”


노장의 주름진 눈꺼풀이 위로 퉁기며 찡그러지는 것을 보자리븐은 의식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다아니의식은 바로잡혔다

다리를 옭아매는 고통은 점차 심해지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독 때문인지아니면 현재의 상황 때문인지 새파래진 입술은 굵다란 발톱이 허벅지를 찔러 피가 새어나올 때 쯤에 와서야 열렸다.


아니요하겠습니다.”


해야만 했다

하는 것이 그녀의 목숨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녹서스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가족들의 안전과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란 명령에 복종하는 것 뿐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역시나 잘 알았다

명령 불복은 곧 핏줄의 멸절이다

녹서스는 반역자의 피를 룬테라 어떤 곳으로든 흘러나가지 못하게 끝까지 추적해 끊어내버린다

어려서부터 봐온 처참한 응징의 현장들은 리븐의 머리에 깊게 각인되어있었다

다리를 옭아매던 발톱은 다시 바닥으로 들어갔다

리븐은 혼절 상태의 장로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곤 두 손으로 검을 고쳐잡았다

룬 검에 묻은 아이오니아 백성들의 피가 손까지 흘러들어와 안팎으로 자신을 마구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애써 양심의 소리를 부정하고 장로를 향해 한발자국씩 걸어갔다


비록 부러진 검이기는 하나 아직 날카로우니 베이면 분명히 피가 나오리라


떨리는 동공은 장로에게 집중됐지만 육체는 살인행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눈 앞이 흐려졌다

틀렸다

신념과 양심이란 인간에게 어찌나 강력한 힘을 선사할 수 있는지 그녀는 그제서야 실질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빛 잃은 눈동자는 무릎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신적으로도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달한지 오래였다

차라리 죽음이 편할 것이다

영원한 무아의 세계로 들어가 무엇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편할지도 모른다

뒤에서 스웨인이 리븐을 향해 따지고 들었으나더 이상 그녀의 귀는 어떠한 소리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듯 했다

노장은 지팡이를 들어 그녀에게 겨냥했다

곧이어 역겨운 초록색의 불꽃이 지팡이 끝부분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콱 죽어버릴까


불꽃은 점점 커져서마침내 그녀와 장로 둘 다 모조리 태워버릴 만큼의 크기를 갖췄다

이내불꽃 때문이었는가리븐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면녹서스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힘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가내가 어릴 때부터 바라왔고 추구했던 진정한 힘난 그것을 위해 살아왔는데내가 여기서 죽어버린다면나는 녹서스의 변질된 추악한 힘에 굴복당하고그 힘은 나의 가족종국에는 세상을 집어삼킬 것이 아닐까그렇다면나는 내가 바라왔던 힘그것을 위해또한나의 과오를 뉘우치고 새로운 힘을 위해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한다.’


리븐은 재빨리 검을 잡았다발톱이 다시 땅에서 돌출되어 그녀의 다리를 움켜쥐려 했다

찰나의 순간

헝클어진 백발 사이로 눈이 번뜩였고강철같이 단단한 다리는 리븐의 몸을 반동시켜 발톱을 가까스로 피했다

그녀는 스웨인의 앞으로 치어들어가 검을 한번 휘둘러 지팡이의 궤도를 하늘로 비껴나가게 하여 불꽃을 날려보내고

다시 한번 휘둘러 스웨인의 하복부를 크게 벴다

스웨인은 배로부터 쏟아져나오는 피를 멈추려는 듯 옷을 꾸겨잡고 지팡이를 땅에 짚으려 했으나

리븐은 틈을 놓치지 않고 지팡이를 발로 차 무게 중심을 잃게 한 뒤 

검을 위부터 아래로 내질러 머리부터 심장까지 단숨에 베어버렸다

진홍색 피가 공중으로 화려하게 솟구쳐 휘날렸다스웨인은 짧게 신음하다가 쓰러졌다


리븐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허나 무언가 찝찝했다

그가 항상 옆에 끼고 다니던 기괴한 까마귀는 어딨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그놈도 알아차린 듯곧 눈 6개 달린 까마귀가 스웨인의 시체로 푸득푸득 날아왔다

그리곤 흉부의 갈라진 상처 사이를 마구 쪼아 그 틈을 벌렸는데,

어찌나 심각하게 파먹었는지 심장이 터져버렸고 그것이 그대로 보였다

또 까마귀는 흉부 사이로 억지로 비집고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파고들어갔다

리븐은 자신이 무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몇 번 비벼보기도 했으나환술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거므스름한 안개같은 것이 눈 앞에 서리다가또 주변을 가득 메우고는

스웨인의 몸뚱아리가 누군가가 붙잡아 공중으로 끌어올리는 것처럼 들려져서는 멀쩡하게 눈을 뜨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계속 울어대던 까마귀 떼는 스웨인의 육체로 한꺼번에 날아와 역시 흉부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요란하게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피를 사방에 튀기며 흉부로 들어가자

등에서 흉측하고 지저분하게 생긴 새까만 날개 한 쌍이 뼈를 아작내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이 날개는 스웨인의 몸을 가렸고곧 수 초 후에 그녀의 앞에는 인간의 모습같은 것은 온데 간데 없었다

다만 도저히 이 세상의 생물체라고 볼 수 없을 거대하고 괴이한 까마귀 한 마리가 눈 앞에 있었을 뿐이었다


구역질 나는 부리가 쩍 벌어져 침을 튀기며 기성을 내질렀다


리븐의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으나 눈동자만은 굳게 괴물과 마주섰다

검을 고쳐잡고있는 힘을 다해 기합을 넣었다덕분에 몸의 떨림은 차츰 가라앉았고

룬 검이 그에 화답하듯 찬란한 초록빛을 사방에 비췄다


승산이 없는 싸움처럼 보였으나어찌된 것인지 리븐의 마음 속엔 왠지 모를 용기가 샘솟는 것만 같았다

검을 쥔 양 손엔 룬 검의 마력이 스며들었고그것은 리븐을 한층 더 고양해줬다

곧 괴물이 된 스웨인은 인간의 손과 융합된 듯한 새발을 앞으로 내질렀고

피 섞인 초록색을 띈 흉측한 불꽃은 가시줄기같이 발톱 끝에서부터 피어오르다가 서로를 옭아매는 듯 빠르게 리븐을 덮쳤다그녀는 옆으로 미끄러지듯 굴러 불꽃을 피했으나착지 지점 바로 아래엔 이미 마법진이 펼쳐져있었고십여 개의 발톱이 마법진에서부터 순식간에 튀어나와 리븐의 몸을 움켜쥐었다

살을 뚫고 뼈를 부러뜨리는 고통에 리븐의 입술에선 처절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리븐은 발톱에 의해 찔린 그대로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


스웨인의 길게 돌출된 벌어진 새부리 안에서 낙뢰 맞아 산산조각 난 나무밑둥같은 혓바닥이 낼름거리며 수십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음성이 어렴풋이 리븐의 귀에 맴돌았다그 소리는 몹시 커서 온 뇌를 잠식해나갈 것만 같다가도또 너무 작아서 이것이 과연 자신이 실제로 듣고 있는 음성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유도하는 기이한 소리였다.


살고 싶나반군.”


고통에 질끈 감은 눈은 그녀의 불타는 의지에 의해 조금씩 눈꺼풀을 들기 시작했다.

뼈를 뚫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에 더 이상의 떨림은 없었다오히려 그 소리에선 의연함과 그녀 특유의 강한 절개가 스스로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아니요스웨인 장군살고 싶어 살 것이 아니라녹서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살 겁니다.”


괴물의 발톱이 리븐의 머리를 붙잡았다그는 부리를 들이대며 굴복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 듯이 말했다.


죽을 때가 되니 본심이 나오는군대체 네깟 놈이 어떻게 녹서스를 무너뜨린다는 거냐?”


리븐은 발톱에 찔리지 않은 팔에 조금씩 힘을 줬다감각은 살아있고 움직일 수도 있다아직 검을 쥘 수는 있으리라

룬 검의 힘이 그녀의 불굴의 의지에 부응하기 시작했고그녀는 검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검은 녹서스가 자신에게 하사한 검이자자신의 죄였고또한 그들의 죄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그녀의 죄를 잘라내고 말끔하게 도륙해낼 참회와 투신의 도구였다아니앞으로도 분명히 이 검은 그녀에게 그러한 도구로서 그녀와 같이 동행해나갈 것이다.


내가 무너뜨릴 것이 아닙니다당신들은당신들의 죄에 의해 무너질 겁니다그리고 당신들은 내 눈 앞에서당신들이 왜곡시킨 힘의 본질 앞에 무릎꿇을 겁니다장군!”


괴물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그는 리븐의 머리를 움켜쥔 발톱에 힘을 풀고조소하며 말했다.


그럴싸한 계획이군하지만 안타깝게도너는 무릎 꿇은 우릴 직접 볼 수는 없을 거다.”


곧 그의 주둥아리 안에서 육안까마귀가 튀어나와 그녀에게 날라들어 눈알을 쪼아먹으려 했다.

그녀는 검을 꽉 쥐었다


초록빛 섬광이 순간 번쩍하더니 다시금 그녀의 형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녀를 구속하던 새까만 발톱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땅에서 일어나더니곧 빛에 당황해있다가 서둘러 그녀를 향해 불꽃을 발사하려는 스웨인에게 다시금 거대해진 본형태의 룬 검을 한바퀴 돌며 크게 허공을 돌려베었다

동시에 룬 검에서 가공할 정도의 마력이 담긴 세 줄기의 검기가 바람을 타며 스웨인의 심장에 적중했다

까마귀는 괴성을 내지르고는 그대로 고꾸라져 바닥에 부리를 쳐박았다


까마귀떼가 스웨인에게서 한두마리씩 날아가기 시작하더니 검은 깃털이 모두 사라진 곳에 남아있는 건 노인 뿐이었다

곧 리븐은 다가가서 확인사살을 하려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노인은 노인이었지만 자신이 원하던 모습의 노인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 놓인 싸늘한 주검의 정체는 그녀가 최후로 지키려 했던 아이오니아 장로였다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그녀의 뇌는 작동을 중지한 것만 같았다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서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스웨인이 말짱한 본래의 모습으로서 그녀에게 말했다.


환술이란 역시 유용하군.”


리븐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대체 언제부터!”


분명 표정은 없었으나 어쩐지 그는 웃는 것만 같았다몹시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그는 전선을 향해 절뚝절뚝 걸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너보다 다섯 수는 앞서있다.”


스웨인이 종적을 감추기 직전그는 그녀에게 소리쳐 말했다.


부디 녹서스를 무너뜨리길 빈다제군어서 도망치게전쟁에서 실종이란 곧 사망이니까어쩌면 새출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리븐은 그가 그러한 말을 하는 영문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녀를 살려두고또 희망까지 부여해줬는가

허나 어차피 리븐에겐 도망치는 것 외의 살 방도는 없었다그녀는 강간당하고 약탈 당한 무고한 여성과 아이들의 싸늘한 주검 더미들과 목이 날라가버리고 여기 저기 심하게 훼손되서 형체를 알아볼 수 조차 없는 장로의 호위병들 사이에서

매캐한 화학약품과 피비린내가 얽혀 구역질나는 악취를 맡으며

새빨갛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떨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비록 여기서 도망쳐 살아남는 것이 스웨인의 장기말로 전락해버리는 신세라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과오와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고

또한 자신이 자라며 믿고 바래왔던 진정한 힘을 추구할 길이었다


하늘은 새빨갰다

하지만 태양은 언젠가 뜨리라

맹독가스는 선선한 바람들에 의해 저 멀리 내쫓겨 흩어지리라

엎지른 물을 다시 잔에 담을 수는 없지만

흘린 피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더 이상 엎지르진 않으리라

더 이상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진 않으리라


부러진 검은 다시 붙이면 될 것이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동자엔 순수하고 강렬한 빛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