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오프를 앞둔 마지막 경기, 페이커는 2경기에만 등장하고 3경기에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 경기는 페이커의 첫 번째 교체가 아닙니다. 페이커가 주전 경쟁에서 밀려본 것이 첫 번째도 아닙니다. 페이커의 교체가 '매치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 걸까요.

이 칼럼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 자신이 페이커를 데뷔전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팬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T1을 깊이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글은 김정수 감독이나 코치진에 대한 도 넘은 악플 및 불화설을 쉴드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어째서 이렇게 뿔이 났는가"에 대한 제 나름의 사견일 뿐임을 미리 밝힙니다.

이른바, '감정선'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1. 페이커의 위상

시간을 돌려서 17년 가을로 돌아가 봅시다. IG의 롤드컵 우승도, 삼성의 롤드컵 제패도 일어나지 않았을 시기 말입니다. 전세계 어느 커뮤니티, 심지어 페이커를 그렇게 싫어하던 롤갤에서마저 그 때의 누군가 페이커를 소위 "찐텐"으로 깠다면 비공감 천 개 쯤는 순식간에 처맞고 사라졌습니다. 천 개라는 숫자는 과장한 것이 아닙니다. 진지하게 역체롤이 우지라고 주장하거나, 페이커가 사실 빈집털이였다고 하거나... 그런 논리는, "지구는 사실 평평하다" 따위의 논리와 동급으로 취급받았습니다. 4연솔킬로 낄낄대며 놀리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심으로 까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러다 '즙' 이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페이커는 더 이상 세계 최고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페이커의 위상은 즙 한글자에 가려졌고, 이제는 지나가는 누구던지 1557 1557 하면서 페이커 욕을 하는 게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역대 최고의 미드는 루키에게, 역대 최고의 롤 게이머는 우지(혹은 더 샤이)에게 줘야 한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페이커 본인에게야 별 타격이 없겠습니다만은, 페이커 팬들에게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페이커가 첫 데뷔를 한 것은 13년입니다. 7년 전, 페이커 팬들은 몇 살이었을까요? 누구는 중학생이었을 것이고, 누구는 대학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롤드컵에 나가는 한국 팀을 가슴 졸이면서 응원했을 거라는 데엔 별 의문이 없습니다.
7년 동안 말입니다.
당신이 13년, 혹은 15년의 SKT부터 팬이었다고 가정합시다. 한 아이가 중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하고 수능을 쳐서 대학교에 들어가는 시간동안, 당신은 이 페이커라는 선수를 응원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실제로 세계 최강의 선수였고, 그 흔한 솔랭 인성 논란도 없었고, 기부를 했으면 했지 물의는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소위 페이커 까들의 비판?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즙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1557이라는 역사가 생깁니다. 이제 비판이 하나둘씩 유효타가 되기 시작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페이커가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닐까?" "페이커가 이제는 퇴물이 된 건가?" 아무리 악플러와 싸워봐도 전세는 점점 기울어 갑니다. 1557이 모든 롤챔스 게임 채팅창을 도배하기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났을까요?

그러다 보면, 이제 불안해지는 겁니다.

알다시피 페이커는 더 이상 세체미는 아닙니다. 캐리픽을 쥐어주지 않은지도 꽤 지났고, 르블랑을 잡았던 마지막 경기도 전성기의 페블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죠. 거기다가 악플러들은 기세등등, 날뛰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클로저는 좀 현실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이전의 페이커에게 교체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주전경쟁에서 밀려도 S급 미드였고, 신인에게 기회를 주거나 휴식한다는 이미지가 더 강했으며, 꼬치가 그를 출전시킬거라는 기대감도 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꼬치는 티원에 없고 처음 보는 감독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페이커는 S급 미드가 아닙니다. 이번 신인은 솔랭을 씹어먹은 2군 최고의 유망주고, 팀 안에서 호흡을 길게 맞춘 베테랑들도 없습니다. (거기에 감독은 이미 플레임 로스터 제외라는 초강수도 둔 적이 있습니다.)

페이커 개인 팬에게 있어서 이건 완벽한 악몽입니다.

이번에 교체당하면 다음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
롤드컵 로스터에서 제외당할 수도 있다.
그러면?

페이커는? 내 7년의 영웅은?
그냥 이렇게 사라지는 겁니다. 악플 속에서, 조롱 속에서, 결국은 퇴물이었다는 비판과 1557의 화려한 세례 속에서 욕먹고 끝나는 겁니다. 그런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페이커는 영웅이었고, 팬들에게 있어서 영웅은 쓸쓸히 사라지면 안 됐습니다. 차라리 류 제드마냥 쇼메이커나 루키에게 당해서 "페이커도 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는 평가의 멋있는 움짤을 남기고 사라지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왜 빛날 기회를 안 줬냐, 왜 팀원들이 못한 거냐, 이렇게 날뛰는 거지요. 페이커 팬들에게는 지금 한 경기 한 경기가 무의식적으로 은퇴경기나 마찬가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야 말로 우리들 속의 페이커를 불신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페이커는 이 정도에 지지 않으니까 돌아올 거라고 믿읍시다.
욕이 아니라 응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