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전문가이자 역사연구가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잘로가와 북미 서버 플레이어이자 블로거인 Walter_Sobchak의 전화 인터뷰 내용입니다. 2014년 10월 진행된 인터뷰로 원래는 스포츠 출판사인 Scout.com의 군사 분야 웹사이트에 게재될 예정이었지만 제반 사정으로 인해 실리지 못하고 묻힐 뻔한 것을 인터뷰어의 노력 덕에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원본작성자 KrasnayaZvezda. http://cafe.naver.com/wotat/736079)


Q : 영화 '퓨리'가 역사적 내용 표현을 얼마나 정확하게 했다고 생각하셨나요? 2차대전의 전차전의 모습과 느낌을 잘 표현했나요?

A : 헐리우드에서 표현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는 아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온갖 소소한 데까지 파고들면서 이건 뭐가 잘못됐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치기도 합니다만, 저는 전차 전문가들이 아니라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더 넓은 관점으로 생각했습니다. 잘 만든 영화고 재현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Q : '헐리우드에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무슨 뜻인가요?

A : 이 영화도 흔한 헐리우드식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일부분을 압축해야 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에서 등장하는 교전의 대부분이 실제보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한 장면 안에 전투의 모습을 다 담기 위해서지요. 저도 TV 프로그램의 각본을 써 본 적이 있어서 시간과 영상을 압축해 화면 안에 다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일부 교전은 좀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서 전차가 고립된 상태로 독일군 부대와 맞서 싸우는 부분 같은 경우에는, 순수한 역사적 관점에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극적인 관점, 영화 제작자의 관점에서는 왜 그렇게 묘사해야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어쨌든 저는 이 영화에 호의적입니다. 제작자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 같아요. 특히 미군 부대가 독일 마을로 진입하는 부분이 정말 인상깊었는데 마치 1945년 4월 촬영된 흑백사진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장면 같았습니다. 그 느낌이 잘 전해지도록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 느껴지는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소한 트집을 잡을 부분은 많이 있겠지만 뭐 어떻겠습니까?


Q : 영화 보면서 정말 타자수가 전차에 배속될 수 있는 건지 궁금했는데요. 노르망디 상륙 당시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고 있지만 영화 배경인 1945년 4월에도 그랬나요?

A : 사실 그런 일은 오히려 전쟁 후반, 특히 아르덴느에서의 벌지 전투 이후에 더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노르망디에서는 피해가 크긴 했어도 당시 미군 부대들이 기준 편제보다도 약 20퍼센트 가량 초과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무원 일부를 잃어도 훈련된 다른 승무원으로 교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44년 늦여름 이후로는 병력 손실의 영향이 점점 표출되고 있었고, 당시 부대일지를 보면 전차 승무원으로 전방에 배속된 병력의 훈련 수준에 대해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르덴느 시점(1944년 12월)이 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서 아예 훈련을 받지 못한 인원이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은 사실 꽤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비숙련병이 맡게 되는 가장 흔한 보직 두 가지가 장전수와 전방 기관총수였습니다. 등장인물인 노먼이 배속된 전방 기관총수나 장전수 보직은 조종수나 포수, 전차장에게 필요한 기술적 숙련도가 필요하지 않아 흔히 신병이 맡고는 했습니다. 다른 세 보직은 좀 더 경험을 쌓은 인원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전차에서 옮겨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Q :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으로 실제 티거 전차가 촬영에 동원된 것을 꼽고 있는데요. 이 시기에 전장에 남아있는 티거가 얼마나 되었나요?

A : 전체적인 감을 잡아드리자면, 1945년 4월 독일군의 서부전선 전차 보유량은 90대 정도였습니다. 모든 전차요. 판터고 4호고 티거고 상관없이 모든 전차를 통틀어서 90대였다는 것입니다. 티거는 한 줌에 불과했습니다. 3호 돌격포 등의 돌격포를 포함한 다른 장갑차량은 400대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북해부터 남독일의 바바리아까지 전선 전체를 다 합해야 500대가 채 안 되었다는 소리지요. 그 반면 당시 미군의 전차와 구축전차는 11,000대 가량이었으니 전력차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Q : 미군이 티거와 교전한 사례가 얼마나 있었나요?

A : 부대 기록을 보면, 그게 전투 후 해당 부대가 작성한 전투일지든 나중에 책으로 나온 것이든 사방이 티거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독일 기록과 미국 기록을 실제로 비교해 봤을 때 노르망디부터 1945년까지 제가 찾아낸 미군과 티거의 교전기록은 단 3번 뿐입니다. 제가 말하는 티거는 영화에 등장하는 티거 I입니다. 특이한 점은 미군이 티거 I보다 티거 II와 더 많이 교전했다는 것인데, 큰 이유로는 1944년 8월 생산이 종료되면서 그해까지 남은 티거 I이 몇 대 없었던 탓이 컸을 겁니다. 노르망디에 배치된 티거 I은 몇 대 없었고 그나마도 거의 전부가 영국군 담당 구역에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티거 I과 자주 만났지요. 또 다른 이유는 미군 전차병들이 모든 것을 티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게 실제 티거였든 판터였든 4호 전차였든 아니면 3호 돌격포같은 돌격포였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한번은 1944년 8월 미군 3기갑사단이 파손되어 열차에 실려가는 티거를 발견하고 대공 반궤도장갑차로 사격해 파괴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한번은 벌지 전투에 투입되어 교전을 벌인 티거 1개 중대가 있고요. 마지막으로 1945년 4월, 그러니까 영화의 배경과 일치하는 시점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있습니다. 고립된 소규모 티거 I 부대가 미군의 신형 M26 퍼싱 부대와 교전을 벌여 티거가 퍼싱 1대를 격파하고 이후 다른 퍼싱에 의해 격파되었지요. 이렇게 해서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미군과 조우하거나 교전을 벌인 티거 I이 보고된 사례는 3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드문 일입니다.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독일 기록과 미국 기록 모두 중간에 허점이 아주 많으니까요. 어쨌든 미군이 2차대전 동안 다수의 티거 I과 조우했다고 하는 세간의 인식은 미군 병사들이 모든 독일 전차를 '타이거'라고 부른 것 때문에 생긴 오해라고 봅니다. 포격의 경우에도 비슷했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독일군의 포격을 받으면 무조건 88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88mm 포였든, 105mm 곡사포였든, 75mm Pak 40 대전차포였든 상관없이 그냥 88이었죠.


Q : 영화 도입부에서 미국 전차들이 독일 전차들에 비해 무장과 장갑 모두 빈약했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병기로서의 셔먼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나요?

A : 사실 내년 5월에 출판될 'Armored Champion'이라는 제목의 책을 막 탈고했습니다. 2차대전의 전차전을 넓은 맥락에서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내용이지요. 이 책에서 저는 '전차병의 선택'과 '지휘관의 선택'을 구분지었습니다. '전차병의 선택'은 전차병, 그러니까 승무원 개개인이 원하는 점을 뜻합니다. 승무원들은 무조건 장갑이 최대한 두껍고 주포가 최대한 강력한 최강의 전차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니 티거와 판터, 셔먼을 두고 고르라고 하면 전차병들은 가능한 한 가장 센 전차를 고르겠지요. '지휘관의 선택'은 이와는 크게 다릅니다. 지휘관이 원하는 것은 '전투력'입니다. 그리고 전투력은 최첨단 기술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닌데, 이런 기술들은 으레 여러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2차대전 중 티거의 가격은 약 30만 라이히스마르크 정도였습니다. 한편 3호 돌격포는 7만, 4호 전차는 10만 라이히스마르크쯤 되었지요. 그러니 대체로 티거 한 대 값이면 4호 전차를 3대나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다 티거는 너무 덩치가 커서 신뢰성도 매우 떨어졌습니다. 반면에 3호 돌격포나 4호 전차의 신뢰성 역시 티거보다 한 두 배 정도는 높았고요. 그러니 독일군 고위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대가 신뢰성도 떨어지고 비싸서 몇 대 들여놓기도 어려운 티거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같은 예산으로 3호 돌격포 또는 4호 전차는 더 많이 도입할 수 있기도 했고요. 제 책이 다루게 될 내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셔먼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1945년 4월에 독일에 미군 전차와 돌격포가 11,000대나 있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미국이 극도로 신뢰성이 높으면서도 상대적으로 생산하기 저렴한 전차를 생산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셔먼이 당대 최강의 전차였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갑도 가장 두껍지 않았고 주포도 가장 강력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아주 우수한 전차였습니다. 충분히 많은 수량이 배치되어 지휘관에게 적절한 전투력을 제공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더 강력한 여러 독일 전차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필요한 만큼 생산하기에 너무 비쌌고 신뢰성도 떨어져서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차의 성공을 가르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갈리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Q : 미군 전차병들이 타 병과나 추축군 전차병들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인적 손실을 입었나요? 사람들이 '독일군 전차 한 대를 격파하기 위해 미군 셔먼 다섯 대가 격파되었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A : 아뇨. 그 '독일군 전차 한 대와 미군 전차 다섯 대의 교전비'는 누가 지어낸 건지는 몰라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미군이 아니라 영국군이 운용한 셔먼 때문에 생긴 말 같고, 그나마도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군은 1944년 캉 지구에서 독일군과 교전하면서 다수의 셔먼을 손실한 적이 있지요. 60년대와 70년대의 초기 전차 관련 서적들, 특히 미군 전차에 다룬 서적들의 거의 대부분이 영국인 저자들이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쓰인 전차 관련 서적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다수의 셔먼 관련 자료가 영국측 자료였고요. 그리고 영국군은 노르망디에서 실제로 많은 셔먼을 잃었고요. 이는 전차 자체 문제가 아니라 전술적인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라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영국군의 셔먼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미군 전차전력이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전차들을 만난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상륙 후 첫 달의 전투는 대부분 7군단이 셰르부르로 진격하면서 코탕탱 반도에서 벌인 것들이었는데, 코탕탱 반도의 독일군 기갑전력은 노획한 프랑스제 전차들로 편성된 2개 대대 뿐이라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전차전 자체도 별로 없었고요. 7월이 되면 미군이 보카주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2기갑사단과 3기갑사단이 월말에 대규모 돌파작전인 코브라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보카주 지역도 전차전에는 그리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독일군도 전차전력이 있기는 했습니다. 기갑교도사단과 SS 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였지요. '다스 라이히'는 지형 때문에 전차전 자체를 제대로 벌여보지 못했습니다. 한편 기갑교도사단은 7월 중순 큰 공세작전을 하나 시도하기는 했는데 미군에게 박살이 나고 맙니다. 어쨌든 두 사단 모두 미군 전차들하고는 거의 붙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미군 보병들과 구축전차들을 상대해야 했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요. 그리고 8월에는 돌파작전이 진행되어 미군 전차들은 브르타뉴를 지나 프랑스를 가로질러 파리까지 나는 듯이 달려갔습니다. 간헐적으로 전차간 교전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규모는 매우 적었고요.

미군이 처음으로 독일군 전차전력과 대규모 전차전을 벌인 곳은 1944년 9월 로렌의 아라쿠르에서였습니다. 미군 4기갑사단이 독일군 기갑여단 몇 개와 맞붙었는데, 그야말로 미군이 압도적으로 깔아뭉개 버렸습니다. 패튼의 3군이 로렌에 있던 독일군 기갑여단들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지요. 4기갑사단은 이 시기쯤 되면 훈련이 잘 되고 풍부한 경험도 축적한 상태였던 반면에, 독일군 기갑여단들은 신품 판터 전차를 대량으로 보유하고는 있었기는 해도 부대 자체가 새로 편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경험 수준이 들쭉날쭉했으며 실제로 전투성과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가 2차대전 중 미 육군이 비교적 좁은 지역에 상당한 수의 전차를 투입해 벌인 전차전들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Q : 그러니까 노르망디 이후에는 44년 12월의 벌지 전투까지 대규모 전차전이 별로 없었다는 말씀이시죠?

A : 노르망디와 9월의 전투들 이후에는 서부전선에 남은 독일군 전차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9월에 벌어진 아헨 회랑에서의 교전 같은 소규모 교전들은 있었지만 벌지 전투까지는 대규모 교전은 없었습니다. 물론 아르덴느에서는 다수의 전차전이 벌어졌지만 이 역시 매우 산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르덴느 이후에는 다시 잦아들었지요. 독일군이 아르덴느에서 전차전력의 대다수를 상실하면서 이후부터는 소규모 전차전만 벌어졌습니다만 이 시기쯤 되면 영국군을 제외하고서도 미군의 수적 우세가 10대 1 이상이 되어 버립니다. 독일이 생산된 전차를 거의 모두 동부전선으로 보내면서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차전력은 거의 증원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Q : 셔먼의 대중적 인식에 대한 화제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셔먼에 얽힌 잘못된 인식의 대표적인 예가 두 가지 있는데요. 하나는 셔먼이 화재에 하도 취약해서 '론슨 라이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전차들이 디젤 엔진을 사용해서 불이 잘 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닐까요.

A : '론슨 라이터' 운운하는 소리는 엉터리입니다. 아시다시피 독일군 전차들도 똑같은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휘발유가 화재의 원인이 된다는 것부터가 유언비어입니다. 독일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이 전차 화재 분석 자료를 읽어보면 주된 원인은 항상 탄약입니다. 2차대전의 전차 화재의 가장 큰 원인이 탄약이었던 이유는 탄약 화재는 끌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엔진의 휘발유 때문에 불이 난 전차는 그 불을 끌 수가 있었습니다. 2차대전 전차들 대부분은 소화기를 탑재하고 있었고 따라서 엔진 구획에 화재가 발생한 경우 너무 심각한 수준만 아니라면 별 문제 없이 끌 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탄약 화재는 일단 났다 하면 끝이었습니다. 전차 포탄 추진제는 산화제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셔먼은 차체 측면에 탄약을 적재했는데, 좁은 공간에 탄약이 가득 들어 있어 문제를 가중시켰지요. 하지만 1944년 늦여름부터 습식 탄약고를 장비한 셔먼이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그 문제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론슨 소리가 잘못되었다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독일의 사례에는 눈길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역시 4호 전차와 판터같은 전차들에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고 특히 판터는 연료도관 누출과 변속기 특성 때문에 불쏘시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렇지만 자료 자체가 많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독일측 자료는 볼 생각을 안 했습니다. 영어로 된 기록이나 회고록은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독일어 자료는 그렇지 못하지요. 그리고 독일어 자료 자체도 적어요. 셔먼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미군이나 영국군 전차병의 회고록은 수십, 수백 건이 있지만 서부전선에서 4호 전차나 판터를 몬 독일군 전차병의 회고록은 거의 없습니다. 동부전선에만 약간 있을 뿐이지요. 만일 있었다면 셔먼 전차병들이 한 것과 똑같은 불평을 읽을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사진자료들을 보면 독일군 전차들이 셔먼과 같은 탄약 유폭을 일으킨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4호 전차의 탄약 방호 수준은 셔먼보다 나을 것이 없었고 말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관점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군과 영국군의 화재 관련 기록은 다수 보유하고 있지만 이와 비교할 만한 독일군 자료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티거에 쏠리는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티거 승무원들의 회고록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티거는 심지어 동부전선에서도 드문 존재였지요. 그 반면에 수가 훨씬 많았던 4호 전차와 판터 승무원들이 회고록의 비율은 적고요.


Q : 저자로서 셔먼 전차병들을 인터뷰하거나 증언을 채집하신 적이 있나요?

A : 제가 알고 지내던 2차대전 관련 정보원 중 대표적인 사람은 4기갑사단 37전차대대에서 중대장을 했던 지미 리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미는 셔먼 중대장을 지내면서 여러 전투를 겪었고, 그 뒤에도 몇 년 동안 기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전역한 뒤에는 텔레다인 컨티넨털 사의 워싱턴 DC 지역 영업 책임자를 하면서 나와 매년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지미는 일반적인 전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펴내거나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지미는 지식도 굉장히 풍부했고 크레이튼 에이브럼스처럼 제대로 된 사람들과도 아는 사이였으니까요. 2차대전 중에도 중대장을 하고 전쟁 끝나고서도 냉전 기간 동안 전차병과에 계속 몸을 담았던 데다가 전역한 뒤에까지 방위산업체에서 일했으니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상담하기에는 그야말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초기에 쓴 글들은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제가 셔먼에 대해 뭔가 글을 쓰고 나서 한 부 복사를 해 그에게 가져가 '좋아요 지미. 솔직하게 얘기하죠. 이 글을 어떻게 생각하세요?'하고 말하면 지미는 그걸 읽고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들려 주었습니다. 셔먼 관련 글을 쓸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고 그가 저를 도와준 것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Q : 다른 전차병들과는 안 만나셨나요?

A : 운이 좋게도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었지요. 튀니지에서의 전차전 이야기를 쓰면서 거기서 복무한 전차병들 몇 명하고 연락을 했습니다. 제 아버지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4기갑사단에서 셔먼의 포수로 있었는데, 그 분하고 프랑스와 유럽에서의 전차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한번은 자신이 복무하면서 겪었던 가장 끔찍한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영화 '퓨리'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게 셔먼 몇 대가 야간에 작은 마을에 갇히게 되었는데, 독일군 보병들이 달려드는데 그들을 막아줄 아군 보병들이 없었다더군요. 가장 소름이 끼치는 것은 보병들이 전차에 올라타 해치를 열기 위해 총검으로 찔러대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퓨리'에서 나오는 옥의 티 중 하나가 그건데 셔먼의 해치에는 잠금장치가 있어서 밖에서 맘대로 열 수가 없었지요. 어쨌든 그 독일군 보병들은 판처파우스트가 없었기에 말 그대로 전차 해치를 뜯고 승무원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소대 전차 중 하나가 무전으로 '서로 .30구경 기관총으로 쏴 버려'라고 했고, 그 말을 듣고 다들 전방 기관총과 동축기관총으로 옆의 전차들을 마구 쏘아대서 올라탄 보병들을 처치했더랍니다.

그 분은 전차병들이 개인장구류를 전차 밖에 매달고 다녔기 때문에 그 일이 기억에 생생히 남았다고 합니다. 그 전투 후에는 기관총 때문에 가방이고 방수천이고 아무튼 매달아두었던 장구류가 전부 기관총탄에 벌집이 되어서 하나도 남지 않았다더군요. 이렇게 가루가 된 장구류 중에는 패튼의 3군 소속 전차라면 필수적인 장비도 있었습니다. 바로 빗자루죠. 3군 전차들은 모두 빗자루를 달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요. 빗자루는 전차를 쓸어내서 깨끗하게 하는 필수적인 장비였는데, 패튼이 자신이 맘에 들어하는 4기갑사단에 종종 불쑥불쑥 찾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빗자루로 쓸지 않아 지저분한 전차를 보면 전차병들에게 벌금을 물렸고요.


Q : '퓨리'를 본 사람들이라면 역사적인 전차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텐데요. 미국이 전차 역사 보존에 힘쓰고 있나요?

A : 전혀요. 상황이 국가적 스캔들 수준으로 심각합니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컬렉션이 두 군데 있었는데, 기갑학교가 있는 포트 녹스의 패튼 컬렉션과 메릴랜드 애버딘 병기시험장의 병기박물관 컬렉션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BRAC(기지 재배치 및 폐쇄)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두 컬렉션을 그냥 내던져 버렸습니다. 원래는 애버딘의 컬렉션을 포트 리로 옮겨 전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옮겨지기는 했지만 육군의 예산이 떨어지면서 제대로 전시되기는 커녕 공터에 방치되어 녹슬고 있습니다. 포트 베닝으로 옮겨진 패튼 컬렉션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못 가는 차고에서 썩고 있고요.

BRAC 이전 상황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애버딘 컬렉션의 상태는 형편없었는데, 그나마 마지막 책임자가 일부 차량들을 복원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기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한편 패튼 박물관에는 차량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자원봉사자 팀이 있어서 쥐꼬리만한 예산만 가지고 주행 가능한 상태 차량도 몇 대 유지하는 등 아주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BRAC이 닥치면서 모두 산산조각났습니다. 미국의 전차 역사의 모든 것이 흩어지고 버려져서 녹이 슬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Q : 개인 컬렉션은 어떤가요?

A : 그쪽은 아주 약간 희망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포르톨라 밸리에는 자크 리틀필드가 소장한 훌륭한 컬렉션이 있었는데, 그가 사망한 후 해체되어 일부는 메사추세츠의 컬링스 재단이 신설하는 박물관으로 보내졌어요. 버지니아의 머내서스에도 앨런 코어스의 개인 컬렉션이 있는데, 머내서스나 콴티코에서 매년 행사도 개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인들이 전차들을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개인 컬렉션밖에 없습니다. 큰 국가 소장 컬렉션 두 개는 민간인 접근 금지 구역에 있고 언제 다시 공개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기이 때문입니다. 군은 예산도 없고 전차 역사 보존에 관심도 없어요.


Q : 세계적으로는 어떤가요?

A : 미국과 전혀 다른 상태지요. 세계 유수의 국가들이 저마다 훌륭한 전차 컬렉션을 갖추고 있습니다. 영국엔 2차대전부터 유지되어 온 유명한 보빙턴의 전차 박물관 컬렉션이 있습니다. 영국이 전차의 등장에 한 획을 그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전차 역사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보빙턴 컬렉션도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주행 가능한 상태의 전차들도 있고, 영국 전차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전차들을 보유하고 있지요. 프랑스는 소뮈르의 기병학교에 멋진 컬렉션이 있고, 매년 카후셀이라는 야외 행사도 개최하는 데다가 보존 상태도 뛰어납니다.  독일은 진스하임에 개인 컬렉션이, 뮌스터에 국가 컬렉션이 있지요. 러시아는 쿠빙카에 대규모 컬렉션을 갖추고 있고 몇몇 개인 컬렉션도 있습니다. 폴란드는 바르샤바 인근에 2개 컬렉션이 있고 체코에도 상태가 좋은 컬렉션이 둘 있습니다. 그러니 유럽에 가는 사람들은 전차를 볼 기회가 많지만 미국에는 볼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Q : 최근 전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생각하시나요?

A : 제 생각에는 제가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대중의 관심이 더 높았던 것 같습니다. 60년대 처음으로 전차 역사에 손을 대었을 때는 불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입문했던 군용 항공기 부문은 항상 양질의 역사적 자료가 풍부했는데, 전차 관련 서적은 70년대까지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년 정도 사이에 미국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전차 관련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어요. 프랑스와 러시아는 자국 전차 역사 연구 자료를 많이 내놓았고, 요즘 러시아인들은 관련 서적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독일은 비교적 적은 편인데 독일 전차 관련 서적은 아주 많지만 대개 미국에서 나온 것들이지요. 독일의 전차 역사 연구에는 아직 약간의 격차가 있는데 거기에는 따로 이유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 외의 국가들에서는 전차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Q : 전차 서적 외에도 전투사에 관한 책도 몇 권 쓰셨는데요. 앞으로 좀 더 내놓을 생각이신가요?

A : 개인적으로는 전투사에 관해 집필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오스프리 출판사에는 'Campaign'이라는 시리즈가 있어서 그 출판사에서 꽤 자주 책을 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쪽에서 동부전선 책을 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1944년 여름 붉은 군대가 독일의 중부군집단을 쳐부순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해 썼었지요. 그 뒤에는 유럽 전역의 미군 이야기로 가서 D-데이 책을 쓰고 유럽전구사령부로 넘어갔고요. 최근에는 마켓 가든 작전을 미국 측에서 다룬 책을 출판했습니다. 내년 초에는 1944년 6월 미군이 노르망디의 셰르부르에서 벌인 전투들에 관한 책을 낼 예정입니다. 

현재는 오스프리 출판사의 새로운 시리즈인 'Combat'의 책을 쓰고 있는데, 이 시리즈는 기존의 'Duel'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전차 대 전차 비교 대신 보병 대 보병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의 주제는 1944년 여름과 겨울의 유럽 전선에서의 미군과 독일군 보병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고요. 다음에 낼 전차 관련 서적은 앞에서 말했던 'Armored Champion'이고, '2차대전 중 가장 우수했던 전차는 무엇인가?'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대전 전체를 여러 장으로 나누어 시간대별, 전역별로 어떤 전차가 가장 우수했는지 살펴보는 것이지요.


Q : 사진집도 몇 권 내셨죠?

A : 몇 년 동안 전투사와 전차 역사 서적들을 위해서 수만 장의 역사적 사진들을 수집했습니다. 일부는 책을 쓰기 위해서 모았지만 다른 일부는 모형 제작을 위해서 모으기도 했지요. 모형 제작은 시각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분야라 사진이 많이 필요하고, 제가 책을 출판하는 오스프리같은 출판사들 역시 시각적 측면을 중시합니다. 옛날 대학교 출판사들처럼 사진은 별로 안 넣는 곳들하고는 다르죠. 오스프리는 서적 출판에 있어서는 훨씬 현대적인 곳이라 삽화를 많이 넣는데, 삽화를 그리려면 또 사진이 많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사진이 책에 그냥 실릴 뿐만이 아니라 컬러 삽화나 지도를 넣는 데도 중요하다는 걸 잘 인식하질 못해요. 아마 오스프리 책을 쓸 때는 삽화 참고자료 준비하는 데 글 쓰는 만큼의 시간이 들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쪽에 투자한 노력은 그다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만.


Q : 셔먼 전차에 대해 유명한 책 중 하나가 벨튼 쿠퍼가 쓴 'Death Traps'인데요. 3사단 병참장교가 쓴 이 책이 전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상당히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죠. 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끔찍한 책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사람들이 그것만 보고 판단하려고 하면 끔찍한 자료 출처가 되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다른 자료도 많이 가져다가 같이 읽으면 크게 상관은 없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 책만 읽고는 2차대전 당시의 미국 전차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양 생각한다는 겁니다. 우선 이 책의 문제는 대필 작가가 개입했다는 겁니다. 쿠퍼만 쓴 게 아니에요. 그 사람과 대필 작가가 쓴 내용을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쿠퍼와 이야기해 본 적이 몇 번 있어서 아는데, 이 책이 나올 때쯤에는 쿠퍼가 상당히 나이를 먹어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지게 되니까 본인이 말한 것이 아닌 내용이 책에 많이 들어갔어요. 그래서 이 책이 2차대전의 미국 전차들을 다룬 가장 유명한 책이라고 하더라도 별로 믿을 만한 자료는 아닌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나는 쿠퍼에 대해 나쁘게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책은 2차대전의 전차전을 썩 잘 묘사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요. 전차병과 장교가 아니라 병참장교가 썼기 때문에 당시 전차전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좀 왜곡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쿠퍼는 전쟁 끝나고 나서 더 연구를 한 것도 아니고, 전쟁 당시에도 그냥 병참병과의 젊은 중위였습니다. 책에서도 패튼이나 미 육군이 의도하고 있던 바를 다 이해한 것처럼 썼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젊은 중위가 알 만한 게 뭐가 있는지는 잘 아시겠죠. 쿠퍼는 격파되거나 파손된 전차들을 보면서 암울한 현실을 보았겠지만, 그는 전차병과가 아니라 병참병과에서 일하면서 전차 수리 관련 일만 했습니다. 그러니 실제 전차를 조종한 전차병들과는 시각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지요. 저는 지금까지 많은 전차병들과 이야기를 해 봤고 수천 장의 전차대대 전투일지와 기갑사단 전차일지를 읽어 봤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시의 전체적 상황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젊은 중위가 혼자 생각한 것과는 아주 달랐어요. 쿠퍼의 회고록은 재미있기는 합니다. 처음 나왔을 때는 아주 흥미롭기도 했고, 저도 쿠퍼와 몇 번 대화도 해 봤지요. 그러나 미국의 전차 운용에 대해 알기에는 책의 관점이 너무 제한적입니다.


Q : 2차대전 전차 관련 서적 중에서는 독일 전차들을 다룬 것이 가장 인기가 좋은데요. 독일 전차들과 독일 기갑전력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건가요?

A : 전차 자체에 대해서는 꽤 자세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토머스 옌츠가 독일 전차 개발사를 아주 훌륭하게 기술했지요. 그렇지만 운용 측면에서는 대중의 인상에 비해 실제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독일 쪽 입장에서 쓰여진 책은 많지만 질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티거와 관련된 책들은 대부분 일방적으로 독일 입장에서만 쓰여 있고요. 그런 티거 관련 기록들, 그러니까 '어, 이러저러한 티거 연대가 그러저러한 소련 전차부대를 때려잡고 차량 57대를 격파했어'같은 기록들의 많은 오류들을 지적하고 있는 꽤 훌륭한 러시아 웹사이트들이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러시아쪽 부대 기록을 살펴보고는 그런 일들이 아예 없었거나 엄청나게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니 이런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균형잡힌 연구가 필요합니다. 독일 측의 운용 측면을 좀 더 주의깊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펜 앤 소드 출판사에서 이번에 출간된 로버트 포칙의 동부전선 전차전 책처럼 좀 더 좋은 서적들이 출판되기 시작하고 있기는 합니다. 1941년과 1942년을 다루는 첫 책이 나오면서 어긋난 균형을 바로잡기 시작했지요. 로버트는 퇴역 미 육군 장교로 역사학 박사 학위도 있는 데다가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모두 구사하기 때문에 좀 더 편중되지 않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나도 'Armored Champion'을 쓰기 위해서 그다지 연구되지 않은 분야인 독일 전차들의 신뢰성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했습니다. 판터의 신뢰성은 어땠는가, 티거의 신뢰성은 어땠는가 따위의 것들 말입니다. 그 덕에 국립기록보관소에서 여러 자료를 찾았는데 모두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판터는 1943년 쿠르스크부터 시작해서 그해 끝날 때까지 처참한 수준의 신뢰성을 보였다가 1944년에 좀 나아졌습니다. 이렇게 전차들의 가용비율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 사단의 작전능력을 보는 시각이 좀 달라지게 되지요. 그 내용을 새 책에 쓰려고 하고 있고 로버트도 같은 주제를 다룰 겁니다. 2차대전의 전차전에 대해 다룬 책은 많이 있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부분이 많고 우리가 연구해야 할 내용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