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시작을 알린 이오시프 스탈린 전차, IS-3 전차

입력 : 2015.02.11 11:01

우크라이나 노보라드 볼린스키에 전시 중인 IS-3 <출처: By Andrey zt@Wikimedia Commons (CC BY-SA)>
 우크라이나 노보라드 볼린스키에 전시 중인 IS-3 <출처: By Andrey zt@Wikimedia Commons (CC BY-SA)>

1945년 5월 7일, 프랑스의 랭스에 있는 연합군 사령부에서 독일의 항복조인식이 열렸다. 하지만 전쟁 기간 중 엄청난 피해를 당하며 독일을 물리치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소련은 전날 행사에 참석한 독일 대표보다 더 높은 고위직이 찾아와 항복 문서에 사인하라며 독일을 겁박하여 다음날 베를린에서 별도의 항복조인식을 성대하게 실시하였다.


이처럼 유럽에서 제2차 대전의 끝을 상징하는 행사는 새로운 대립과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선전의 장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냉전은 종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장은 나치라는 공적을 쳐부수기 위해 한배에 탔지만 전쟁 이전부터 미국을 위시한 서방은 소련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쩌면 새로운 갈등의 불씨는 이미 내재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말단의 병사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쁨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웃으며 악수를 나눈 양측 수뇌부는 다음을 대비하는데 골몰하였다. 따라서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군사적 충돌까지 염두에 두고 상대에게 어떻게든 나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 싸움은 냉전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모두를 놀라게 만든 전차

이처럼 내가 너보다 더 세다는 자존심 대결이 시작된 최초의 사건이 1945년 9월 7일에 있었다. 패전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전승기념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명목상으로 승리를 자축하는 연합국들의 합동 행사였지만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주도한 축제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번 퍼레이드는 서방측 군사 관계자들이 소련군의 위용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연합군과 소련군은 전쟁 내내 독일군과 따로 싸웠으므로 사실 군사적으로는 낯선 상대였다. 그런데 흥미롭게 열병식을 보던 서방측 참관단은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 행진하는 소련군 제71근위중전차연대 소속의 전차 대열을 보고 경악하였다. 당장 흉내 낼 수조차 없을 만큼 탁월한 신형 전차의 외형에 압도당한 것이었다. 사전에 어떠한 정보도 알려지지 않았던 최신형 전차는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45년 9월 7일 베를린의 전승 행사에 등장한 IS-3. 이를 본 연합군 관계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945년 9월 7일 베를린의 전승 행사에 등장한 IS-3. 이를 본 연합군 관계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현대 소련 전차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IS-3(또는 JS-3) 중(重)전차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떤 전차가 좋은 것인지 모르지만 행사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단지 모습만으로도 상대가 예사롭지 않음을 즉시 알아 보았다. IS (Iosif Stalin)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것인데, 때문에 흔히 소련의 IS 중전차를 스탈린 전차라고 부른다. 당당하게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을 만큼 소련은 자신감이 철철 넘쳐흘렀다.


흔히 제2차 대전 당시의 전차라면 독일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지금도 독일의 국가대표 축구팀을 전차군단이라 표현할 만큼 전사에 독일의 전차와 기갑부대가 남긴 족적은 크다. 특히 북아프리카와 서유럽 전투에서 곤혹을 치르곤 했던 미국과 영국에게 독일 전차는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의 전차 또한 대단하였다. 양으로는 물론 질로도 독일의 전차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브뤼셀 박물관의 IS-3 전차 <출처: By Paul Hermans@Wikimedia Commons (CC BY-SA)>
 브뤼셀 박물관의 IS-3 전차 <출처: By Paul Hermans@Wikimedia Commons (CC BY-SA)>
시대를 선도한 전차

독소전쟁(獨蘇戰爭) 초에 소련은 엄청난 패전을 거듭하며 밀려났지만 사실 무기가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조국을 구한 전차라는 별명이 붙은 T-34 중형(中形)전차뿐만 아니라 독일군에게 충격을 안겨준 KV-1, KV-2 중전차에 이르기까지 성능이 뛰어난 다양한 여러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군 전차나 대전차 화기의 공격을 우습게 튕겨내는 KV 전차에 독일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소전쟁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와중에도 독일에게 많은 충격을 안겨준 KV-1 중전차 <출처: Wikimedia Commons>
 독소전쟁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와중에도 독일에게 많은 충격을 안겨준 KV-1 중전차 <출처: Wikimedia Commons>

결국 예상보다 강한 소련의 전차는 한창 개발 중이던 독일 중전차의 등장을 더욱 촉진시켰다. 1942년에 이르러 티거가 등장하면서 독일은 겨우 질적 격차를 해소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소련은 이미 한걸음 더 앞서 나가고 있었다. 독일의 대응을 충분히 예측하고 KV-1을 능가하는 신형 전차의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던 것이다.


1943년 소련은 122mm 주포를 장착하여 공격력을 강화하고 경사 장갑을 도입하여 방어력을 높인 IS-2 전차를 개발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IS-2는 주조 공법을 통해 단기간 내 3,800여대가 생산되어 전선에 공급되어 많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전선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워낙 급하게 만든 탓에 문제도 많아 곧바로 개량에 나서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군도 사용하였던 IS-2 중전차를 기반으로 IS-3가 탄생하였다. <출처: By Mike1979 Russia@Wikimedia Commons (CC BY-SA)>
 한국전쟁 당시에 중공군도 사용하였던 IS-2 중전차를 기반으로 IS-3가 탄생하였다. <출처: By Mike1979 Russia@Wikimedia Commons (CC BY-SA)>
1944년 소련은 포탑은 곡선형태로, 전면은 V자 형태로 개량하여 탄환이 접촉하는 면적을 더욱 최소화하고 측면에 공간장갑을 사용하여 대폭 방어력을 강화한 IS-3을 개발하였다. 이후 등장한 전차들이 흔하게 채택한 구조지만 당시에는 구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고도의 기술이었다. 그래서 연합군 관계자들이 IS-3을 보자마자 놀랐던 것이었고 소련의 전차 개발 기술에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시범 행사에 등장한 IS-3 중전차. 곡선형 터렛과 자체 전면의 V자 경사장갑이 인상적이다. <출처: By Adamicz@Wikimedia Commons (CC BY-SA)>
 시범 행사에 등장한 IS-3 중전차. 곡선형 터렛과 자체 전면의 V자 경사장갑이 인상적이다. <출처: By Adamicz@Wikimedia Commons (CC BY-SA)>

예상보다 못한 성능

총 2,311대가 생산된 IS-3은 1945년 봄부터 본격 배치되었지만 독일군과 싸울 기회는 놓쳤다. 8월에 만주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워낙 대외 공개가 극적이다 보니 일부 사료에서는 "굳이 다 이긴 전쟁에 투입하여 장차 대립할 미국에게 신기술을 누출시키지 않고자 실전 투입을 일부러 미루었던 것이다."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IS-3이 가장 위용을 떨친 것은 정작 이 퍼레이드가 마지막이었다. 도도하게 등장한 IS-3은 소련 중전차의 최종 모델이라 할 수 있는 T-10(IS-10)으로 계속 진화하였지만 이후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IS-3은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제국(諸國) 사이에서 발발한 6일 전쟁에 최초로 실전 투입되었지만 전투 결과는 참담했다. 이집트군의 IS-3은 이스라엘군에게 노획 당한 것이 더 많았을 정도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사실 6일 전쟁 승패는 무기의 성능보다 기습의 효과와 작전 구사 능력 그리고 정신력에 의해 판가름 난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IS-3이 실망스런 전과를 보여 주었던 이유는 많은 이들을 떨게 만들었던 외형과 달리 성능은 미흡했기 때문이다. 방어력 강화에는 성공하였지만 사실 화력과 기동력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IS-3의 최종 개량형이라 할 수 있는 T-10. 이를 마지막으로 소련은 중전차 제작을 중단하였다. <출처: By Михаил Мартынов@Wikimedia Commons (CC BY-SA)>
 IS-3의 최종 개량형이라 할 수 있는 T-10. 이를 마지막으로 소련은 중전차 제작을 중단하였다. <출처: By Михаил Мартынов@Wikimedia Commons (CC BY-SA)>

그 시대의 모습

2014년 기준으로 러시아제 최신 전차의 주포가 125mm인 점을 고려한다면 1940년대 기준으로 122mm 주포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D-25T 122mm 전차포는 포구속도가 늦어 생각보다 관통력이 약하였고 장전 속도가 늦어 연사력도 뒤졌다. 따라서 IS-3은 기갑전보다 보병 근접 지원에 적합하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D-25T 122mm 전차포는 포구속도가 늦어 생각보다 관통력이 약하였고 장전 속도가 늦어 연사력도 뒤졌다. 따라서 IS-3은 기갑전보다 보병 근접 지원에 적합하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러나 탄속이 느려 관통력이 독일의 88mm 주포에 비해 그다지 강력하지 못하였고 분리식 탄약을 사용하여 연사속도가 분당 2발 정도로 몹시 느렸다. 게다가 KV-1용 엔진을 그대로 쓴 탓에 최고 속도도 시속 37km에 불과했다. 사실 이 정도의 화력과 속도로는 기갑전을 벌이기 곤란하다. 연합국은 이것까지는 몰랐다. 그래서 멋진 등장과 달리 이런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소련은 얼마 지나지 않아 IS-3을 퇴역시켜 치장물자로 보관하거나 친소 국가에 대량 공여하였다.

더불어 소련의 전차 개발 사상이 중전차와 중형전차를 함께 제식화하여 기갑전력을 구성하였던 방식에서 T-54/55로 대표되는 중형전차 단일화 정책으로 정립되면서 중전차 개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고 그렇게 IS-3는 사라져 갔다.


IS-3은 동서 양측의 치열한 최신 무기 도입 경쟁의 시작을 알린 것만으로도 무기사에 커다란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멋지게 냉전의 시작을 알린 전차지만 모두에게 주었던 충격과 달리 성능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어쩌면 IS-3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처럼 단지 모습만으로 공포를 증폭시켰던 전차였다. 바로 냉전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제원

중량 45.7톤 / 전장 9.85m / 전폭 3.09m / 전고 2.45m / 항속거리 185km / 최대속도 40km/h/ 승무원 4명 / D-25T 122mm 전차포, 12.7mm 기관총 1정, 7.62mm 기관총 1정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