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7- <준비>




  아스타르는 부관들 중 셋만 자신의 성소로 불러들였다. 하메라와 아주운, 이크툰이 아스타르의 부름에 응했다. 충직한 파멸의 수호병인 아주운은 오래간만에 자신을 부른 군주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에는 희미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하메라는 아스타르에게 고개만 숙인 채 아주운처럼 침묵을 지켰다. 부관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지옥군주인 이크툰이었다.


  “군주시여. 드디어 전쟁입니까?”


  아스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크툰. 너와 피의 탐식자가 그토록 갈망하는 살육의 순간이 조만간 올 것이다.”


  “제 도끼는 기꺼이 당신께 영광을 바칠 것입니다.”


  아스타르는 이크툰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희 모두 군단의 패배 이후 살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지. 하지만 곧 성전을 재개할 것이다. 너희가 내 명에 따라 임무를 완수한다면 말이지.”


  “제독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운이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타르는 이 그리운 목소리를 못 들은 지도 꽤 되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조만간 우리는 작은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소모적인 내전을 종식하기 위해 각 세력을 대표하는 투사들끼리 한 자리에서 사투를 벌일 것이다. 너희는 나와 나의 동맹인 나스레짐을 대표하는 투사들이 될 것이다.”


  “나스레짐과 손을 잡았단 말입니까?”


  이크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을 믿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아스타르는 이크툰의 격한 반응이 즐거운지 웃었다.


  “나스레짐은 우리와 오랜 세월 협력해온 이들이 아니더냐? 설마 네 군주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제가 불경하게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하소서.”


  이크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아니다, 이크툰. 네가 그들을 불신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우리가 성전을 다시 시작하려면 이 내전부터 종식해야 한다. 티콘드리우스가 이끄는 나스레짐은 이 내전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으니 우린 그들과 손을 잡아야만 한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내게 승리를 안겨다오.”


  “반드시 승리를 선사하겠습니다.”


  이크툰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스타르는 흡족해하며 이크툰의 튼튼한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리고 아주운과 하메라를 한 번씩 보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둘은 고개를 숙인 채 한목소리로 말했다.

 



  아스타르는 치르테와 볼카트도 자신의 성소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할 때는 하메라가 알려준 주문을 사용해서 감시의 눈을 피했다.


  “단둘이 보는 줄 알고 찾아왔는데, 실망이네요.”


  치르테는 자신만 따로 부르지 않은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 아스타르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되었구만. 서큐버스 아가씨.”


  볼카트가 빈정거리자 치르테는 볼카트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하지만 볼카트는 그런 눈길에 무심했다.


  “제독 나리는 왜 날 부른 것이지? 저번에 말한 거라면 몰래 준비해두긴 했는데, 지금 그게 필요한 거야? 그런 거라면 차원망으로 전송이 가능한데.”


  “둠플랜은 지금도 사용할 수 있나?”


  볼카트는 순간 자신이 아스타르의 말을 잘못 들었는지 작은 오른손으로 귀를 파더니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둠플랜이라고 한 건가?”


  아스타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볼카트가 신이 난 듯 웃었다. 볼카트는 항상 둠플랜을 자신의 역작이라고 자부해왔다. 차원문으로 막대한 지옥마력을 방출해서 행성 자체를 파멸시키는 병기였다. 공허의 잠식이 심한 행성을 날려버리는 경우에만 허용되는 병기라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맙소사. 둠플랜으로 부술 행성이라도 생긴 건가?”


  “둠플랜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에게 기밀이다. 그러니 은밀하게 준비해라. 감시의 눈이 우리들 사이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항상 주의하고,”


  아스타르의 주의를 들은 볼카트는 알겠다는 듯 작은 오른손으로 경례를 했다. 다음은 치르테 차례였다.


  “치르테, 나스레짐들의 동향에 대해 보고해라.”


  “볼카트가 보고 있는데요?”


  치르테는 볼카트를 불쾌하다는 듯 쳐다봤다.


  “치르테가 볼카트 자네를 나스레짐으로 여기는 모양이군.”


  아스타르가 너스레를 떨자 볼카트는 기계로 된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치르테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좋아요. 지난번에 저한테 나스레짐 뒷조사를 부탁하셨죠. 나스레짐들은 잠입에 능통한 족속들이죠.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침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쉽게 간과하더군요. 덕분에 저는 비교적 손쉽게 침투할 수 있었어요. 놈들의 하수인으로 모습을 바꾸면서 은밀하게 아네테론에게 접근했어요. 그동안 티콘드리우스 옆에서 아네테론을 볼 수 없어 의아했는데, 놈이 어둠땅에서 일을 꾸미고 있더군요. 처음엔 별다른 사실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녀석이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네테론은 여러 나스레짐들과 함께 그자에게 충성을 바치더군요. 어둠땅의 레이벤드라스였던가? 그곳의...”


  “레벤드레스의 대영주가 아니더냐?”


  아스타르가 묻자 치르테는 화들짝 놀랐다.


  “맞아요. 그 이름이었어요. 레벤드레스. 설마 저도 감시하고 있나요?”


  그녀의 야릇한 시선이 아스타르에게 향했다. 그는 답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아네테론과 나스레짐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계속해라.”


  “대영주라는 자의 지시에 따라 어둠땅의 여러 세력에 침투하고 있더군요. 특히 레벤드레스의 벤티르라는 종족으로 변신해서요. 아마 어둠땅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데, 저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다만 확실한 건 아네테론이 주기적으로 티콘드리우스와 연락을 취하면서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둘이 연락하는 걸 보기 전에는 아네테론이 티콘드리우스를 배신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둘은 한패였어요.”


  “그거 별로 좋은 소식 같지 않은데.”


  볼카트가 불쑥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치르테가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치르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았다.


  “녀석들이 군단을 차지하면 고스란히 지 주인한테 가져다 바치는 거 아냐? 제독 나리. 녀석들과 손잡는 건 재고하는게...”


  “무엄한 놈이 감히 아스타르님께 주제넘은 소리를!”


  “그만.”


  치르테가 버럭 소리치자 아스타르가 말했다.


  “군단을 놈들의 주인에게 넘겨주는 일은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놈들을 속이기 위해 손을 잡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지시한 바를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

 


 

  부관들이 물러간 이후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에게 연락했다. 티콘드리우스의 환영이 아스타르와 마주했다.


  “티콘드리우스. 다른 세력들에게 새로운 경쟁 방법을 제안했는가?”


  티콘드리우스는 아스타르의 물음에 미소를 지었다.


  “몇 놈은 탐탁지 않은 기색이더군. 그러나 조만간 다 받아들일 것이네. 우리의 승리를 위한 준비는 잘 되었는가?”


  “물론이네. 하메라와 아주운, 이크툰이 투사로 나설 것이네. 이들의 힘이 그대가 원하던 안전장치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아스타르가 미소를 지으며 묻자 티콘드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하메라와 아주운, 이크툰 모두 군단에서 뛰어난 투사로 정평이 난 자들이지. 이들이 나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적들이 모두 긴장하겠군.”


  “그대의 반응을 보니 나도 안심이 되는군. 나스레짐들도 일을 잘 하고 있는가?”


  아스타르의 물음에 티콘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승리의 수단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역시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지. 비록 벨리스라가 누굴 내세울지 알 수 없지만 나머지는 거의 파악이 되었네. 우리에게 특별히 위협이 될만한 녀석들도 은밀하게 배제했고. 조만간 우리 쪽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네.”


  “벨리스라는 여전히 철두철미한 모양이군.”


  티콘드리우스는 벨리스라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 내전에서 승리하면 그녀의 가죽을 꼭 산 채로 벗겨낼 것이네.”


  “그거 기대되는군. 오만한 악마가 최후의 순간에 어떤 모습을 보일지 흥미롭네.”


  아스타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티콘드리우스도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