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14- <강림>




  일리단의 육신에 살게라스의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일리단의 육신은 마치 살게라스의 힘을 담을 그릇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상당한 양의 힘을 담을 수 있었다. 아마도 굴단이란 오크 흑마법사가 이전에 실패했던 의식이 육신을 변화 시킨 것 같았다.


  살게라스는 강림 의식을 치르는 아스타르에게도 힘을 선물했다. 몸을 타고 흐르는 지옥마력은 아스타르의 정신을 더 명료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힘을 품고 있었던 것인가?' 이제 그가 아버지의 지위 뿐만 아니라 힘도 계승하게 되었다. 이 강대한 힘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스타르. 이제 너를 불타는 군단을 이끌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노라. 불타는 성전은 앞으로 네가 주도할 것이다.”


  “당신의 바람대로 타락의 씨가 싹틀 수 없도록 세상을 모두 불태울 것입니다.”


  아스타르의 답이 흡족했는지 살게라스의 웃음소리가 그의 정신에서 울렸다. 하지만 살게라스와 달리 아스타르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일리단의 육신에 깃든 힘은 상상 이상의 힘이었다. 아스타르 몸에 흐르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느껴졌다. 이 정도 힘이면 한 세상을 파멸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 힘은 아스타르에게 경이의 대상이 아니었다. 살게라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힘이었다.


  아스타르가 풀어주고자 했던 살게라스는 바로 예전의 강대한 살게라스였다. 군단의 주인이 예전의 살게라스라면 아스타르는 한낯 도구에 불과해도 괜찮았다. 살게라스가 쓰고 버리는 검일지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살게라스라면 타락의 씨앗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성전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 정도가 한계인 살게라스의 도구가 되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아스타르는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하메라와 아주운, 카드락스에게 정신으로 명령했다.


  ‘살게라스를 밀어내라.’


  그들은 머뭇거렸다. 그리 오래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아스타르는 헛된 명령을 할 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 모두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옥마력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러자 살게라스는 자신의 정신이 다시 권좌로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살게라스의 노기 섞인 음성이 아스타르의 내면에서 울렸다. 아스타르의 내면에서 살게라스가 아스타르를 노려봤다. 아스타르조차 그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다. 오래전 고향 행성에서 고대신의 군대가 산을 포위했을 때와 같은 두려움이었다. 그때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당신께 받아야만 하는 것들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난 네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전 당신께 받아야만 하는 것들을 충분히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스타르의 말을 듣자 살게라스는 크게 분노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하더니 회유하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서둘러 의식을 계속 진행해라. 그러면 네 반역을 눈 감아 주는 건 물론이고, 네게 더 큰 힘을 선물해주마.”


  “눈은 지금 감으셔도 됩니다. 제가 원하는 건 보상 따위가 아니니까요. 성전을 완수하겠다는 것이 저의 의지입니다. 지금 당신께 받은 힘 만으로도 전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살게라스의 저항은 완강했다. 아스타르는 살게라스에게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열기에 정신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각오한 일이었다. 살게라스는 더 이상 예전의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이끌 군단에 이전보다 약해진 지도자를 다시 모실 생각은 없었다. 이제 군단은 그의 차지였다.


  아스타르는 부하들에게 힘을 보탰다. 살게라스의 정신이 일리단의 육신에 완전히 깃들기 전에 추방하는 의식이었다. 그의 정신만 밀어내면 살게라스는 다시 권좌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아스타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말한 자들이 이제까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살게라스. 당신의 유지에 따라 전 반드시 불타는 성전을 완수할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계승하겠습니다. 이제 영원히 쉬십시오.”


  살게라스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의 정신은 다시 권좌에 다시 귀속되고 말았다. 아스타르와 부하들은 모두 지옥불 사이를 걷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땀을 흘렸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리단의 육신에는 살게라스의 힘만 담겼을 뿐 그의 정신은 남지 않았다.


  아스타르는 일리단의 육신을 손으로 만졌다. 비록 살게라스의 일부에 불과한 힘이지만 전쟁병기로서 가치는 충분했다. 그는 이 힘의 인형을 지배할 주문을 외웠다. 한 세상을 멸할 수 있는 병기가 아스타르의 몫이 되는 순간이었다. 


  악마의 육신에 남겨진 문신이 붉게 빛났다. 악마가 두 눈을 뜨자 눈동자가 붉은 빛을 내면서 타올랐다. 아스타르는 그 붉은 눈동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전쟁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