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9- <하메라>




  투기장에 있는 모두가 암묵적인 합의라도 한 것처럼 오로지 하메라만 쫓았다. 그들도 지금이 기회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메라는 전략적으로 잘 대응했다. 투사들이 포위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들었다. 마법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투사들은 하메라에게 무력했다. 마법은 암흑 보호막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고르고스는 번번이 빠져나가는 하메라에게 화가 났는지 화풀이로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투사들을 밟아버렸다. 다른 투사들은 고르고스의 위세가 두려운지 그의 앞에 서지 않으려고 했다이는 그녀에게 호재였다. 투사들은 그녀를 쫓으면서도 고르고스 때문에 포위망을 단단히 조이지 못했다.


  하메라는 피가 멎고 서서히 수복되는 걸 느꼈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그녀는 아주운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이 나왔던 문으로 적들을 이끌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이유가 없었다.


  빛의 몰락을 한 번 내리쳤다. 검이 붉게 빛남과 동시에 붉은 기운이 투사들을 덮쳤다. 투사들은 붉은 기운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의 육신은 뜨거운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잿더미가 되어서 흩날렸다. 방금까지 그녀를 맹렬하게 쫓던 투사들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고르고스는 그런 투사들을 글레이브로 쳐냈다.


  “한심한 잡것들이 지금 이 몸을 뒤에 두고 도망치려는 것이냐?”


  그는 글레이브로 하메라를 가리키더니 지옥불을 발사하려고 했다. 그 순간 카자크의 뿔피리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하메라의 뒤에 있던 문이 열렸다. 고르고스의 키만큼 큰 에레드루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르고스가 반응하기 전에 아주운이 그에게 돌진했다. 거구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녹색 불꽃이 타오르는 철퇴는 고르고스의 머리를 강타했다. 고르고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주운은 왼손으로 고르고스의 목을 잡더니 다시 한번 철퇴를 휘둘렀다. 고르고스의 피가 투기장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는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아주운이 다시 한번 철퇴를 내리치자 고르고스는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아주운이 나온 이상 하메라에게 적수는 단 하나 뿐이었다. 카드락스만이 유일한 적수였다. 그녀는 입장한 투사 중 카드락스가 있는지 찾았다.

 



  티콘드리우스는 아주운이 나온 이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아스타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메라와 아주운이 투기장의 투사들을 해치우는 모습은 그에게도 기쁨이었다. 특히 비쥴이 내보낸 또 다른 에레다르가 아주운의 철퇴에 짓뭉개지는 건 짜릿한 광경이었다. 아스타르는 슬며시 비쥴을 봤다. 비쥴은 격하게 분노하며 부하를 질책하고 있었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크툰이 나오기 전에 승기를 굳힐 수 있겠군.”


  티콘드리우스의 말에 아스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락스만 넘어서면 될 것 같네.”


  “카드락스는 분명 강력한 녀석이지만 아주운과 하메라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수준은 아니지 않은가?”


  아스타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하메라에게 카드락스를 홀로 대적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전략과 어긋날지 몰라도 그녀가 원하는 바도 충족시켜줄 생각이었다.


  하메라는 악마가 된 이후로도 완고한 면이 있었다. 강한 적수에게 느끼는 호승심은 빛의 군대에 있던 시절과 마찬가지였다. 아스타르는 부하의 개성을 이해하는 것조차 지휘관의 자세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관이 얼마나 강한 악마인지 모두에게 각인 시킬 필요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하메라에게 카드락스를 홀로 대적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하메라는 카드락스를 홀로 상대할 것이네.”


  “왜 쉽게 이길 수 있는 적을 어렵게 상대하려는 것이지?”


  티콘드리우스가 불평했다. 그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만을 표출했다.


  “티콘드리우스. 때로는 수단이 목적을 뛰어넘기도 한다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지.”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스타르는 송곳니가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흔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틀린 말일 수도 있다네. 싸우고 싶어서 목적을 만드는 이들도 있고, 싸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이들도 있다네. 물론 그대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티콘드리우스는 침묵했다. 아스타르는 이런 침묵이 좋았다. 티콘드리우스가 이해했을 리가 없다. 언제나 목적을 위해 계략을 펴왔던 나스레짐이 아닌가? 나스레짐에게 아스타르의 말은 궤변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궤변인지 아닌지는 곧 밝혀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