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밝아옴을 알리는 새 소리가 창밖에서 울려 왔다. 

동틀녘에 눈을 뜬 빅토르는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빈번히 실험실에서 먹고 자다시피 하던 그는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서 다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만끽한 비교적 긴 단잠이었다. 그래도 피곤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기에 다시금 침대의 포근함에 묻혀 조금 더 쉬고 싶은 기분이 잠깐 들었지만, 그는 나약한 마음을 이내 떨쳐 버리고 일어섰다. 발로란의 진보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그에게 있어서 최소한의 휴식 이상의 것은 낭비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맑은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옷가지를 챙겨 입고 가방을 들어올린 그는 다시 학교로 향하는 길을 나섰다. 아침 겸 점심은 대학 식당에서 대충 때우면 되었다. 

대학에서 제공해 준 그의 집은 마법기계공학 다리로부터 한 블록 건너 오블리크 거리의 갓길에 있었다. 유동인구가 엄청나게 많은 번화가인지라 생활을 즐기기에 편하면서 필트오버 대학 건물과도 가까운 위치여서 안성맞춤이었다. 원래 빅토르 자신은 여기 대신에 기숙사 건물의 방을 달라고 했었지만 대학 측에서 대우를 운운하면서 구태여 따로 제공해 준 집이었다. 혁신과 진보를 내세워 발전해 온 도시답게 인재에게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모토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조형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늘어 서 있고 유리 세공 장식들이 반짝거리는 오블리크 거리에 매료될 수도 있었겠지만, 빅토르는 아직 여기보다 에메랄드 빛 안개가 서린 자운의 거리가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아침에 거리 가득한 사람들의 장벽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장점이라면 익숙한 자운 마법기계공학의 탑이 잘 보인다는 점이랄까.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길거리로 나선 빅토르는 인파를 제치며 걸었다. 평소에 밖을 돌아다닌 적도 거의 없다지만, 오늘은 유독 이른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가 감돌며 온 길거리가 분주했다. 가만,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빅토르가 막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들이 저마다 서로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즐거운 진보의 날 되세요!"
"고맙습니다. 행운 가득한 진보의 날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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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트오버 마법공학대학 4
 - 진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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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정말 지치는 출근길이었어."

빅토르는 연구동에 도착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일단 개인 연구실로 향했다. 특수기계소재학과와 산학협력부처 공방 등 몇 군데와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 했다. 

그가 필트오버에 온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지금은 맡은 문제의 해결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사실상 1개의 단위 테스트 그리고 최종 접합 점검과 테스트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외주로 부탁한 몇몇 특수가공 파츠들이 아직 소식이 없어 기다리다 지쳐버린 참이었다. 어제 집에 돌아간 것도 진행이 막혀 버려서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빅토르는 오늘도 작업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연락을 하는 곳마다 오늘 내로 완성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도대체 기한을 얼마나 넘겨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빅토르는 기어코 짜증난 표정으로 마지막 통신을 끊었다. 덕분에 오전 시간을 거의 낭비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어."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시계를 쳐다 보았다. 슬슬 카페테리아에 들릴 시간이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의 즐거움이라면 최근 들어 점심 시간마다 벌어지는 제이스와의 토론이었다. 둘이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는 소문이 이미 다 퍼져 있을 정도로 언성을 (물론 대체로 제이스 쪽에서) 높인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와의 토론이 충분히 유익하고 때때로 영감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따금 특정 주제로 열띤 논쟁 끝에 결착을 낼 수 없을 때는 제이스가 씩씩거리며 돌아갔다가 저녁에 다시 반론 제기를 하기 위해 찾아올 때도 있었다. 

제이스는 자존심은 물론 승부욕도 매우 강했다. 따라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영역에 대한 얘기를 하면 제이스의 집요한 주장에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마법 입자는 진동하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계는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13차원 혹은 22차원으로 구성된다는 황당한 이론 말이다. 

오늘 꺼낼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제 불거진 문제로 마법 입자 가속기로 다른 시공간적 차원에 관여할 수 있는지 하는 주제의 연장선이었다. 어젯밤 시간이 많았던 관계로 제시할 거리도 많이 있었다. 카페테리아에 도착하니 아직 분위기는 한산했다. 늘 앉던 자리에 제이스는 없었다. 

"제이스 녀석, 어디로 내뺀 거야."

빅토르는 닭가슴살과 샐러드를 버무린 음식을 맥없이 입 안에 우겨넣으며 투덜거렸다. 접시를 비워갈 때까지 제이스가 얼굴도 비추지 않자 빅토르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논쟁에서 물러설 제이스는 아니었다. 반가운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스탠윅 박사님?"

빅토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부르자 스탠윅 박사는 마주 손을 들어 답례를 해 주었다. 

"빅토르로군. 연구개발 건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네만, 어떤가?"

"아, 그게..."

작업이 중단된 지금 상황의 난처함을 설명하자 스탠윅 박사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그 놈들이 어줍잖은 텃세를 부리려는 모양이구만. 그 쪽에는 내가 얘기를 해 두겠네. 게으름 피우지 못하도록 말이야."

"감사합니다, 박사님. 귀찮은 일로 신세를 지는군요."

"그건 됐네. 별 것도 아니니. 그보다 오늘이 진보의 날이란 건 알고 있는겐가? 몇몇은 이 날을 즐기려고 밖에 나가 있는데 자네도 오늘 같은 날은 좀 쉬면서 축제도 즐기고 거리 구경도 해보고 그러게나. 필트오버에 와서 일년 내내 실험실에만 쳐박혀 있을건가?"

"그다지..." 빅토르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답했다. 

"애초에 자운에서는 진보의 날이란 게 그리 축하할 만한 날도 아니니까요." 

자운에 있을 적에 진보의 날이 되면 조용히 줄지어 거리를 돌던 추모 행렬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보의 날에 일어난 대참사로 인해 죽은 자들을 위한 행사였다. 그는 행렬에 참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지곤 했다. 만약 대비를 할 수 있었더라면, 그 인명들을 구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아땠을까. 또다시 어떤 끔찍한 재해가 닥쳐 온다면 피해를 막기 위해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에서 출발해 더욱 정밀하고 안전한 산업기계시스템을 고안해 냈고 이를 퍼뜨렸다. 하지만 자운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수많은 화학 공장에서는 아직도 자운 표준을 따르지 않고 유독성 물질을 뿜어내는 공정을 계속하고 있고, 공장 지대의 많은 사람들은 항상 유해 물질에 노출되어 있다. 필트오버의 맑은 공기와 달리 자운의 공기는 탁하고 지저분했다. 무분별한 공장 가동과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대기 오염의 밀집이 만들어낸 잿빛 안개는 언제나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빅토르의 다소 우울한 안색을 보고 스탠윅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는 병이 날 걸세. 내가 강력하게 권유하네만, 지금 당장 정문 밖으로 나가서 인코그니아 광장으로 간 뒤에 드넓은 바깥 공기를 좀 마시고 오게나. 새로운 취미로 산책이라도 하고... 자운과는 달리 바깥 공기도 쾌적하니까 말일세."

딱히 축제 분위기를 즐길 마음은 없지만 어차피 오늘 내내 할 일이 없을 예정이었으므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그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침에 뚫고 온 인파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건 미친 짓이라 여겼지만, 애써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어차피 그 녀석도 오지 않을 것 같고..."

스탠윅 교수의 말이 옳다. 걷기라도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빅토르는 한숨을 쉬고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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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인근에는 무리 지어 나온 학생들, 진보의 날 행사를 보기 위해 잘 차려입고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고, 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무너진 시계탑과 마법기계공학 다리가 보였다. 북부 지역엔 필트오버 대학을 제외하면 대개 상류층 가문들이 관리하는 사유 지역들 뿐이라 구경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이 다리를 건너면 화려한 오블리크 거리가 펼쳐지고 여기가 남부 지역의 시작인 것이다. 오블리크 거리는 살짝 경사진 꽤나 긴 거리로, 남쪽으로 향할수록 낮은 지대가 되는 형태였다. 이곳은 각종 상점들과 먹거리를 파는 곳들로 가득해 대표적인 쇼핑 거리였는데, 빅토르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빅토르는 그저 건성으로 둘러 보면서 걸었다. 

인코그니아 광장에 다다르니 탁 트인 공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철로 된 격자 세공을 한 거대한 지구의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주변에는 진보의 날을 맞이해 마법공학을 상징하는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감상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세련되고 멋지게 차려 입고 있었다. 몇몇은 마법 공학 증강체를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빅토르가 보기에 대부분 멋내기용 장난감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광장과 거리를 잇는 통로 변두리에는 더러 바닥에 물건들을 늘어놓고 파는 행상인들이 보였다. 개중엔 꽤 낡았거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마법기계공학 부품들도 있었다. 그나마 구경거리를 찾았다고 생각한 빅토르가 행상인 쪽으로 다가가려는데 별안간 한 청년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몸을 부딪히고는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빅토르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부딪힌 곳도 아프지만 바닥을 짚은 팔이 얼얼하게 저려 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커다란 그림자가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어...?"

그림자는 키 큰 여자의 형상이었는데 기이하게도 팔과 손 부분만 엄청나게 커다란 형태였다.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억센 손아귀 힘이 빅토르의 멱살을 쥐고 땅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빅토르는 어안이 벙벙한 채 상대를 쳐다 보았다. 

그림자의 주인은 특이한 분홍색 머리를 한 여자였는데 더욱 특이한 것은 얼굴의 글자 문신이나 옷차림이 아니라 그녀가 끼고 있는 한 쌍의 엄청나게 큰 마법공학 건틀릿이었다. 아마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리는 괴력은 그 건틀릿 때문일 것이다. 공중에 매달린 빅토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며 여자가 입을 열었다. 

"잡았다 요놈! 이 바이한테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빅토르는 바이의 표정을 보며 뭔가가 매우 잘못된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 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것 좀 놓고 얘기하면 안될까요?"
"얘기? 일단 한 대 맞고 서에 가서 하는 게 어때."
"...필트오버가 무법도시인 줄은 몰랐는데."

빅토르의 반응에 바이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난 보안관이라고. 혼쭐나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걸? 성격 같아선 이미 한 대 쳤겠지만 컵케익이 성질 좀 죽이래서 한 번 참는 거야. 내 말 알겠지, 자운인 좀도둑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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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스는 모처럼의 데이트 기회를 놓치게 될 판이었다. 진보의 날을 맞아 바깥에 나와 단둘이 시간을 좀 보내면서, 가능하면 그럴싸한 이유로 선물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같은 날에도 그저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자신의 임무로 돌아가 어떤 시민을 안심시키고 있는 케이틀린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정말 잡을 수 있는 겁니까, 케이틀린 보안관님?"

케이틀린 보안관은 총대를 매만지며 주변을 확인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곧 바이가 범인을 확보할 겁니다."

"여어- 컵케익! 범인 잡았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광장 한 쪽에서 걸어오는 바이였다. 옆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동행 중인 불편한 표정의 남자가 있었다. 제이스가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외쳤다. "빅토르?!"

빅토르는 뜻밖에 만난 제이스를 보며 안도와 당혹감을 동시에 경험했다. 

"이봐, 제이스..."

"아는 사이야?" 케이틀린이 범인(?)과 제이스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빅토르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난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이러면... 윽!"

바이가 수갑을 채운 손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그를 제지했다. 

"어이, 변명은 됐어. 네가 떨어뜨린 물건이 우리 고객의 잃어버린 물건이랑 정확히 일치한다고."

케이틀린은 일단 바이가 건네는 작은 공예품을 받아 확인해 본 뒤, 옆의 시민에게 넘겼다. 

"어때요. 이 물건이 확실한가요?"

분실물을 받아든 노인은 꼼꼼히 살펴 보더니 망설이며 답했다. 

"그게, 보안관님. 맞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