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일이 있었소..."

 그의 의지와 목적으로 일으킨 행동들을 다 들은 리신은 조용히 수긍했다.

"미안하다. 감정도 감정나름이지만 수련에 지장이 생길거란 예상은 하지못했다."
"그대의 잘못이라기보단 그녀가 당신의 예상밖의 인물이었다는게 원인에 더 가깝소. 어쨌거나 감정을 느낀 상태에 대해서 더 말해주시겠소?"
"소환사의 정보에 의하면 '정신 기생'으로 감정을 잃었어야할 엘리스가 서서히 감정을 되찾아가고있는 중이다. 나름의 위기를겪은뒤 내가 옆에 있게되었음을 기쁘게 여긴다더군."
 리신은 잠시 긴장을 풀고 여유를 취하는듯한 자세를 펼쳤다.

"하지만, 네게 묻고싶은것이 있다."
"무엇이오."
"감정을 잃은 자가 어떻게 감정을 표현해나갈수 있지? 무감정에 가까운것과 무감정은 1과 0의 차이만큼 절대적인 의의가 있지않나?"

"소인또한 가슴속의 열정과 지시에 따라 행동했던 한 사람이지만, 어느 경지에 이른 상태의 몸이라도 털끝만큼의 감정은 가지고있소. 그 질문은 각자가 믿는 상상에 기반한 답변을 의식한 물음일뿐이오."
"엘리스는 정신 기생에서 벗어난 직후의 무감정상태에서부터 '화'에 대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표출해왔다고한다."

 소신껏 답하면서 대화의 끝을 보려는 리신의 말에 또다른 주제의 꼬리가 잡혔다.

"시기상으로 봤을 때 당시 버림받은 자기의 신한테서 증오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 몇몇 감정의 경우에는 뚜렷히 표출하거나 뿌리가 남겨져있다고 본다. 감정을 뺏어갈 정도의 능력을 지닌 존재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건 실수일까, 계획일까?"

"모르겠소."

 두 챔피언간의 무언가의 의견과 주제이 제시되었으나 그 둘이 서로 맞물리지않게 흘러갔고, 심사숙고를 하면서 말했음에도 리신과 마오카이사이에서 아무런 추측이나 의견도 내세우지 못했다. 아침이라 머리가 활발히 움직이지 못해서 그럴까. 마오카이는 오랫만에 전장에서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리신또한 엘리스가없는 날 하루를 그 이전의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명상. 아침식사 이전에 줄곧 해오던 또다른 일상의 재회였다.


 

 이날 카사딘은 어디서 무얼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7월 30일. 평소보다 더 배고픈 얼굴로 몸을 이끄는 여자가 리신의 수도원으로 기어오듯 찾아왔다.

"오시오. 오늘은 팔굽혀펴기 60회를 하겠소."
"뭐... 라고? 어제 나는 체력이 안되서 쉬었잖아."
"어제 걷는걸 멈췄다면 오늘은 그만큼 뛰어야하는 법. 어물쩡어물쩡넘어가기시작하면 그대의 수련에도 지장이 생기오."
 그녀의 머리속에선 줄창 '안돼안돼 마오카이 젠장할'이 외쳐졌겠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고, 평소보다 2배 이상으로 고생하면서 운동을 했다.


 

 7월 31일. 엘리스의 눈이 자연에 의해 떠졌다. 마오카이나 바람이 아닌, 물이 그녀의 신체 곳곳을 때리면서 자극하고있었다.

"비...?"
 청문회가 있기 며칠전부터 못보던 자연현상이었다. '반갑다'라는 말이 나올법했지만 아직 그녀는 그정도의 감성과 감정이 없었다.

'어쩌지, 이렇게 땅이 질척거리는날 운동하기 불쾌한데... 힐에 흑들이 다 묻는단 말이야. 이 옷, 빨지도...'

 '빨지도.'라고 생각했을 때 엘리스는 자신이 입고있는 옷을 언제빨았는지 세기시작했고, 주변에 자기말고는 다른 생물이 없는 대나무숲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눈치를 봤다.

 

"오늘 수련은 없소. 팔굽혀펴기도, 실내훈련도, 대련도 없소."

"어? 웬일이야? 이런 빗줄기정도면 그냥 맞으면서 할만하잖아?"
"사람은 언제나 미래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하오. 엘리스. 가랑비에 옷 젖는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이 정도의 빗줄기라도 밖에서 있을 시간을 생각하면 오랜시간동안 비를맞아서 몸살이 날수도 있소. 가는빗줄기가 멈췄으면 좋겠지만, 더 굵어질 가능성을 생각하면 이런 때에는 쉬는것도 하나의 방법이오."
"일기예보를 보면 이럴 필요가 없잖아 리신."
"그 말을 하기전에 하나 명심해둬야할게있다, 엘리스. 아이오니아는 시대적으로도, 그리고 자의적으로도 고도의 문명화를 거부하며 살아간다는걸. 이곳의 국민들은 내일의 날씨에대해 정확한 예측없이 살아가지."

 언제부터인지는몰라도 엘리스의 오른쪽에 서있던 마오카이가 리신의 의견에 보충을 해줬다. 말소리의 방향때문에 잠시 놀라긴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리신이 물었다.

"오늘은 뭘 할것이오 엘리스? 경제특구에 가서 다양한 활동을 해볼 생각이오? 참고로 소인은 본래 이런 날씨에는 제자들을 수련시키지 않소."
"아니야. 오늘은 비도오고그래서 네 수도원에서 지내려고하는데, 괜찮아?"
"좋소."
"아, 혹시 비를 막아줄 도구... 우산같은거 있어? 지금 입고있는 옷을 좀 빨아야될 것 같거든. 비오는 날이긴하지만 이렇게 쉬는날도 드물테니까."

"마음대로 하시오. 아, 어제 마오카이와 같이 당신의 감정에 대해서 여러 얘기를 해서그런데, 소인의 의견을 들어줄수 있겠소?"
"응? 뭔데?" 

 리신의 의견은 이러했다. 감정을 느끼면서 되찾는방식이 무의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가장 무난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어떤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생각을 하거나 접해야만하는게 전제요. 즉, 그대가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게 어떻냐는 것이다. 당시에는 찰나의 순간이라 어물쩡 넘어갔던 사건들도 모두 기록한뒤에 생각해보면 어떠한 감상이 떠오를것이고 그것을 자기가 알고있는 감정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하잔것. 물론 작문의 바탕에는 독서가 있어야하니 리신의 수도원에 있는 책들을 열람하는데 허용해주는 혜택까지 주어졌다.

 파격적인 도움과 원조를 엘리스는 마다할 수 없었고 결국 그녀는 리신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 필기도구는 저번에 그레고리와 만났을 때 구매했으니까 따로 준비할 무언가는 없었고.


 

 그녀가 아이오니아의 언어를 모른다는 사실은 얼마안되서 깨달았지만... '무지가 극에 다다르면 호의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고 카사딘이 지나가듯 말하면서 비꼬았다.


 

 7월 31일의 날씨는 전날보다 짗궂었다. 회색빛 하늘과 구름에 햇빛은 가려졌고 눅눅한 공기가 코를 찌르고 땅바닥은 질척해졌다. 어제의 날씨와 비교해보면 누가봐도 이날이 활동에 더 악조건적이었다. 엘리스의 까치발과 앞꿈치힐이 모두 땅바닥 밑으로 파묻힐정도였으니 '오늘 수련도 쉬어야겠소'를 기대했으나...

"수련을 시작하겠소 엘리스. 일어나시오."
 리신의 행동은 그녀의 예상을 뒤집었다.

"하루의 시작부터 이렇게 무거운 비가오긴하지만 이정도에 대비못할 처지는 아니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언제 멈출지도 모르잖아?"
 비교적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리신이 사실을 알려주기 전까지는.

"이미 최고조를 찍은 비가 하루종일 계속될정도로 아이오니아가 홍수가 잦은 나라는 아니오. 그리고 보시오. 내리는 빗줄기가 굵은것에반해 바람은 없소. 폭풍이나 태풍의 위험도 없는편이오. 그럼. 소인이 설치하는 기구 아래에서 수련을 시작하겠소."

 저 말은 틀림없이 '소인의 제자들도 이 공간 밑에서 수련할 계획이오'라는 말을 은연중에 숨긴 대사였다. 팔굽혀펴기 60회를 하지않는걸 다행으로여기면서 엘리스는 이날의 수련을 시작했다.

<계속>

 

<글쓴이의 말>

유난히 대화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흠... 어떻게든 개선해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