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져가는 건물 속에서 카사딘은 블루머를 등에 업은채 나왔다. 사람들은 일순간 환호했다. 엘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못한채 서있다가 그동안 자신을 봤던 시선과는 다른 눈짓을 하고있는 에지와 눈이 마주쳤다.

"너... 가족이 죽을위기에 처했는데 왜그렇게 차분한거야?"
 에지의 답은 오늘 그가 보였던 허세끼 충만한 소년의 이미지를 갈아엎었다.

"나에게 있어선 불가항력적인 사건이고 너무나도 무력한 상황이었잖아. 물론 나도 아줌마의 심정을 못느낀건 아냐. 하지만 나는 카사딘은 커녕 아줌마만큼의 힘도 없는 평범한 소년인데 만용이나 영웅심이 발동해봤자 좋은꼴을 못보잖아?"
"물론 그건 그렇지만..."
"의도치 않은 재난이었고 내 부모님의 생사도 확인되지않았지만 걱정이나 두려움, 슬픔은 이 모든 사건이 확정적으로 끝난뒤에도 충분히 표출할 수 있어.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능력적으로 다른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있는 아줌마가 그렇게 무력할줄은 몰랐어. 실망이야, 마녀."


 10월 9일의 복잡했던 하루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있었고, 여러 소문과 정보를 통해 해당 사건의 모든 전말이 밝혀졌다. 그리고, 계절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굵은 빗방울이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에지와 블루머는 남매지간, 그들의 부모님은 자운에서 보기드문 양심적인 회사의 CEO들이었다. 자운에서 그 부모는 자선활동이나 부의 환원을 아끼지않았으며, 시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마침 그 부모가 관리하는 회사가 아이오니아로 사업을 확장하려해서, 합의를 이끌기위해 잠시 머물기위해 방문한 것. 소득수준이 나쁘지않음에도 자신들의 주목을 피하기위해 일부러 저렴한 숙소로 거주지를 잡았다. 블루머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에 같이 동행했고, 에지는 때마침 아이오니아에 엘리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보기위해 같이 따라왔다.

 에지는 나이에비해 너무 조숙한 티를 내려는 여동생의 행동이 못마땅해서 따끔하게 충고를 했으나 블루머 역시 자존심을 굽히지않고 말대답했기에 싸우게 되었고 둘은 근소의 차로 숙소를 뛰쳐나갔다. 그 이후 둘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는 누구나 다 알것이다.

 남매의 부모는 협상일정때문에 오후에 숙소를 떠났고 그 직후에 남매의 싸움이 일어났다. 그 어린여자가 뭘하고다녔는지는 모르지만 밤이 되서야 숙소로 돌아왔는데, 예정시간에 숙소에 있어야할 부모는 계획에 차질이 생겨 귀가가 미뤄진 상태라 부재상태였다. 그걸 모르고 자운에서 이 선량한 부부를 죽이기위해 아이오니아까지 따라온 몇몇 라이벌 기업에 매수된 패거리가 숙소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즉, 숙소에 불이나긴 했어도 타기업의 목표인 부부의 살해는 실패했고 정작 애꿎은 소녀 한명만 희생당했다.

 

 

 리신의 수도원으로 돌아온 엘리스는 아무도 만나지않은채 구석에 박혀있다가, 오늘따라 끄물끄물한 날씨가 끌려 광장 한복판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않아 검은 구름속에서 물방울이 요란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비를 온몸으로 느끼고있었다.

'나의 행동이 15살 소년이 꾸짖을만큼 잘못되었단건가.'

 그녀는 알고있다. 최근의 자신은 너무나도 감정에 치우친채 생활하고있다. 화낼때는 화내고, 겁날 때는 무서워서 발을 빼면서 누구나 상식적으로 해야할 행동들을 거부했다.

'이러려고 감정을 되찾으려했던건가...'

 카사딘이 했던 말이 이제서야 엘리스에게 제대로 와닿았다. 감정을 되찾고있는 그녀에게도 '이성'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엘리스의 경량화된 장갑과 투구, 그리고 전신이 무거워져갔다. 그녀는 이 비가 자신이 표현하지못하는 무언가를 대신해주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눈물을 대신해주는것 같다고.

 슬픔보다는 조금더 무겁고 무기력한 감정, 눈물이 흘러도 이상할게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흘릴 수 없었기에 그 비를 아주 오랫동안 느끼고있었다.

 

 

 물먹은 잡초가 치마에 쓸리는소리가 엘리스의 등뒤에서 났다. 처음에는 누군지 궁금했으나 누군지 알것같아 그녀는 뒤돌아보지않은 채 그대로 서있었다.

"리신이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고하더군."
"혼자있고싶어."
"비가 그렇게 좋나?"
"내 마음을 대신해주는거같아서말이지. 그러니까 저리가줘."

 욕만안했지 분명 소통을 완강히 거부하는 말이었음에도 등뒤에서 멀어져가는듯한 풀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빗방울에 빠져들어가던 그녀의 감정이입이 깨졌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은채 소리를 질렀다.

"왜 안꺼지는거야, 아무도 보고싶지 않다고! 그렇게 가만히 서있는 이유가 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답변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뭐랄까, 나도 이 비가 싫지 않아서 말이지."

 그 말을 들은 엘리스는 뒤를 돌아봤다. 말할것도없이 자신의 등뒤에 있는 사람은 카사딘이었다. 평소에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밝히는 어색하기 짝이없는 공감이 엘리스의 마음을 흔들었다. 흔들리기 좋은 날이었고, 동요하기 쉬운 날씨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비를맞고있는 서로를 쳐다봤다. 걸핏하면 빗물에 가려지는 시야속에 보이는 상대의 존재가 추하지만, 싫지 않았다. 일순간이지만 조금 더 같이 이 비를 맞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란 녀석,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잠시 후, 엘리스는 번개소리에 파묻힌채 쓰러졌다.

<계속>

<글쓴이의 말>

 

공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