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정규태 (1890.11.12 ~ 1921.01.23) 순국

정규태는 무안군 출신으로 3.1 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뒤인 1919년 3월 19일. 같은 무안군 출신 동지들 10여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한다.

태극기와 경고문을 만든 이들은 바로 다음날인 1919년 3월 20일 새벽. 친일파의 반성·자숙과 민중들의 궐기를 촉구"라는 제목의 경고문들을 무안읍내에 붙이고 수십명의 시위군중들을 이끌고 무안군 외읍면 남산에 오른다. 이들은 이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경축하는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경. 공립보통학교 앞으로 장소를 옮긴 이들은 일본경찰의 시위방해를 받으면서도 조국독립 경축의 의의를 설명했다. 한시간여 후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일본 경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헌병과 함께 출동한다.

목포에서 무안군수와 목포경찰서장이 급히 이곳으로 달려와서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는 밤 10시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일본 경찰들의 탄압으로 인하여 시위는 해산되었다.

이 날 만세시위로 인하여 중심인물 24명을 포함한 총 57명이 체포된다.

정규태는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뤘으며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1년 1월 23일에 순국한다.


1992년. 독립운동가 정규태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