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8- <니힐람>




  마침내 권좌를 차지하려는 모두가 티콘드리우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에레다르 군주인 비쥴이 최종적으로 제안을 수락하면서 장소와 날이 정해졌다. 날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지만 저마다 자신의 영역을 장소로 원했기 때문에 장소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결국 장소는 한때 살게라스가 티탄 판테온을 전멸시켰던 행성인 니힐람으로 정해졌다. 니힐람은 뒤틀린 황천의 여러 세계 중 가장 이질적인 곳이었다. 살게라스의 강대한 지옥마력과 티탄 판테온의 비전마력이 격돌했던 니힐람은 생명이 살 수 없는 황량한 세계가 되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두 상반된 마력이 요동쳤다.


  악마들은 준비된 차원문을 통해 니힐람에 도착했다. 결과를 승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각자가 데려올 수 있는 병력의 수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만 차원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티콘드리우스는 아스타르와 함께 투기장의 관중석에 앉아 다른 악마들의 도착을 지켜봤다. 몇몇 악마들은 서로에 대한 강한 증오를 애써 감추면서 말없이 나란히 들어왔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앙숙이 된 마그테리돈과 브루탈루스는 서로를 마주하자 부하들 대신 한판이라도 벌이고 싶은 듯 성을 내며 날뛰었다. 투기장을 지키던 지옥수호병 중 일부가 거구들의 난동을 저지하려고 나섰지만 두 아나이힐란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몇몇 지옥수호병은 둘에게 밀쳐지거나 짓밟혀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다.


  둘을 멈춘 건 에레다르 군주 비쥴이었다. 붉은 피부의 에레다르인 비쥴은 둘의 난동이 재밌는 구경이라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아키몬드의 죽음 이후 스스로 파멸자의 자리를 계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이 오만한 에레다르의 웃음은 앙숙 관계인 아나이힐란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뭘 하는 것이냐, 아나이힐란들아? 너희가 가장 잘하는 것이 싸움이 아니었더냐? 하등한 것들처럼 입으로만 싸울 것이냐?”


  “입 닥쳐라. 버러지야.”


  마그테리돈이 자신의 거대한 글레이브를 땅에 꽂으며 비쥴에게 경고했다. 브루탈루스 역시 방금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했던 마그테리돈의 옆에 서더니 칼날로 대체된 자신의 오른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 너희 구덩이 속의 버러지들은 분수를 모르는 가 보군. 이 몸이 직접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비쥴이 자신의 몸을 거대화하더니 아나이힐란들에게 다가갔다. 세 악마는 당장이라도 싸울 듯이 한자리에 모였다.


  “너 따위 약골이 몸을 키운다고 한들 우리 아나이힐란을 당해낼 줄 아느냐? 와라! 이 브루탈루스가 네놈의 오만함을 꺾어주마. 네놈의 명줄부터 끊어놓고 마그테리돈을 끝장내겠다.”


  브루탈루스의 외침이 울려퍼지자 이를 지켜보던 아스타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옥불꽃으로 변하며 소멸한 그는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거구들 사이로 끼어든 아스타르는 그들보다 훨씬 작았지만 그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기만자의 아드님이 납시셨군. 그간 침묵하시던 거짓 에레다르께서 왜 우리의 일에 끼어든 것이지?”


  비쥴은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아스타르를 비꼬았다. 그는 항상 아스타르를 거짓 에레다르라고 뒤에서 멸시했었다. 아스타르는 그의 말이 실로 가소로웠다. 킬제덴이 있을 당시에는 자신의 앞에서 한 마디도 못했던 자가 이리 당당하게 말하지 않는가?


  “진짜 에레다르가 두 아나이힐란들에게 살해당하는 꼴은 막아주려고 끼어들었는데, 잘못 생각했나 보군.”


  마그테리돈과 브루탈루스는 분노로 일그러진 비쥴의 표정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감히 네 놈 따위가 에레다르를 입에 담다니!”


  비쥴은 크게 소리를 내지르더니 지옥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하늘을 날고 있던 아주운이 곧장 내려와 비쥴의 앞을 막아섰다. 아주운 역시 마법으로 몸을 거대하게 만들었는지 두 아나이힐란과 비쥴만큼 거대했다.


  “네놈이 대신 타죽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주마.”


  비쥴의 손에서 일어난 거대한 녹색 불덩어리가 아주운을 향해 곧장 날라갔다. 아주운은 침착하게 자신의 왼손에 들려있던 하메라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메라가 주문을 외우자 암흑 방벽이 나타났다. 비쥴이 시전한 거대한 혼돈의 화살은 곧장 암흑 방벽과 충돌했다. 마치 물에 던진 돌처럼 방벽 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감히 하찮은 것들이 잔재주를 부린단 말인가?”


  비쥴은 크게 격분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파멸자의 다음이라고 항상 자부해왔던 자신이 날린 혼돈의 화살을 아스타르의 부관이 가볍게 막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이를 지켜보던 마그테리돈과 브루탈루스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비쥴, 조심하게나. 내 부관들은 투기장에 참가할 투사들이라네.”


  아스타르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비쥴에게 말했다.


  “투기장에 참가해야 하는 투사들이 투기장에 들어가기 전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겠는가?”


  비쥴은 분노를 삭히더니 아스타르를 위협적으로 노려봤다.


  “좋다, 거짓 에레다르야. 네놈의 투사들을 모조리 내 부하들이 도륙 내주마. 특히 저 드레나이 계집과 네놈은 내 지옥불꽃에서 다시 한번 살아남을 수 있는지 꼭 확인해주지.”


  “자네를 위해서도 꼭 그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아스타르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비쥴은 그의 목소리에서 불길한 서늘함을 느꼈다. 비쥴은 등을 돌리더니 자리를 떠났다. 마그테리돈과 브루탈루스는 아스타르를 한 번씩 내려보더니 김이 샜다는 듯 침을 뱉으며 자신들의 자리로 갔다.

 



  아스타르가 자리로 돌아오자 티콘드리우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을 말릴 필요가 있었나? 어차피 경쟁자들이 아닌가?”


  “승리를 목도 할 놈들을 줄일 이유가 없지.”


  아스타르도 티콘드리우스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티콘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벨리스라가 그녀의 부관들과 입장하는 모습을 보았다. 티콘드리우스의 눈에서는 불꽃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벨리스라는 티콘드리우스와 아스타르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벨리스라는 총 5명의 부관을 데려왔다. 3명의 여성 에레다르와 2명의 남성 에레다르가 그녀의 뒤를 지켰다. 검은 보호구로 무장한 그들은 벨리스라가 아우가리에 소속되었던 시절부터 그녀를 따랐던 추종자들이었다. 아스타르는 그들 전부를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피부가 보랏빛인 에레다르 남성은 모를 수 없었다. 그는 벨리스라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인 카드락스였다.


  카드락스는 지옥화염마법의 대가이면서도 지옥불꽃으로 타오르는 마법검을 이용한 근접전을 즐겼다. 그의 힘과 명성이라면 하메라의 맞수가 될 만했다. 둘이 겨루는 모습은 투기장에 있는 모두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벨리스라는 아스타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투기장에서 승리를 양보해줄 생각이 없다고 통보했다. 아스타르는 호승심이 강한 그녀가 경쟁에서 양보란 미덕을 발휘할 거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의 향후 관계를 생각하면 이번 경쟁에서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하메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되도록 전투 불능 상태로만 제압하되 불가피하면 죽여도 괜찮다고.

 



  투기장 싸움에서 우승하는 세력이 군단을 지배한다. 이에 대해 모든 악마 지도자들이 동의했다. 만약 이를 어기는 세력이 나오면 모두 힘을 합쳐 응징하기로 맹세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처음 투기장 문이 열리면 각 세력의 투사가 1명씩만 입장해 싸워야 했다. 10분이 경과하면 문이 열려서 다른 1명이 입장할 수 있고, 이후 10분이 더 지나면 각 세력의 마지막 투사가 투기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투사들의 목표는 단 하나뿐이었다. 적 세력의 투사들을 모두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거나 죽이는 것이다.


  이크툰은 자신을 가장 처음으로 내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아스타르는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결정을 내렸다. 처음 입장할 투사는 하메라였다. 아스타르는 공격과 방어에 모두 능한 하메라가 먼저 입장해서 다음 투사가 들어올 때까지 승기를 잡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와 마지막은 각각 아주운과 이크툰으로 정했다. 아스타르는 하메라가 아주운이 입장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확실하게 승리하려면 하메라가 지시를 정확히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투기장의 문이 열렸다. 명상을 하던 하메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만큼 거대한 검을 들었다. 한때 나루의 축복을 받았던 검은 지옥불로 벼려낸 이후 붉은 기운을 내뿜는 마검 빛의 몰락이 되었다.


  하메라는 입장하자마자 다른 문에서 나온 투사들을 살폈다. 그들 대부분은 하메라의 상대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적들도 있었다. 마그테리돈이 내보낸 투사는 오크 검귀였다. 악마의 피를 마셔서 피부가 붉게 물든 오크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검을 휘두르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브루탈루스가 내보낸 고르고스란 아나이힐란은 거대한 덩치가 인상적이었다. 체격은 어지간한 아나이힐란 지도자들처럼 거대했다. 고르고스가 글레이브를 땅에 꽂자 대지가 진동했다. 카드락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카드락스는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처음 순서에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투기장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 시작 신호가 울리길 기다렸다. 관중석 중앙에 있던 에레드루인 고위군주 카자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패권경쟁에 나서지 않고 스스로 중립을 자처했다. 이 때문에 투기장의 진행을 전담할 적임자가 되었다. 카자크는 킬제덴이 하사했던 전쟁 뿔피리를 불었다. 소리가 투기장에 울려 퍼지자 투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메라는 곧장 자신의 근처에 있던 투사에게 달려갔다. 지옥수호병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하메라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휘두른 빛의 몰락이 더 빨랐다. 잘려나간 상반신이 땅에 떨어졌다.


  그녀가 다음 희생자를 찾으려는 순간 불덩어리가 날라왔다. 비쥴이 내보낸 에레다르의 짓이었다. 불덩어리는 하메라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암흑보호막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하메라는 그를 다음 표적으로 정하고 달렸다. 그는 암흑 마법을 재빨리 구사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구원자 시절 사용했던 빛의 방어마법을 암흑마력으로 응용해서 사용할 줄 알았다. 어지간한 마법은 그녀에게 닿을 수조차 없었다.


  비쥴의 투사가 빛의 몰락의 사정권에 들어왔다. 당황한 그는 뒤로 물러나다 미처 자신의 머리 위에 나타난 거대한 발을 보지 못했다. 고르고스는 자신이 밟은 에레다르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지옥마력을 휘감은 글레이브를 땅에 내리치자 녹색 불꽃이 폭발했다. 대지가 크게 진동하면서 불운한 투사들이 여럿 쓰러졌다. 그들 중 일부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시시한 놈들만 가득하군.”


  고르고스는 땅에 침을 뱉었다. 다른 악마들은 이 거대한 악마에게 감히 대적할 생각을 못 했다. 아나이힐란의 피부는 매우 단단하고 질겨서 어지간한 무기로는 상처조차 입히기 힘들었다.


  “그래도 네년은 좀 다르겠지?”


  고르고스는 하메라를 뚫어지게 보더니 땅에 깊게 박힌 글레이브를 들었다. 그녀는 이 오만한 아나이힐란의 도전을 가소롭게 여겼다.


  다른 투사들과 달리 그녀는 빛의 군대에 있던 시절에 아나이힐란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다. 아나이힐란은 강인한 악마지만 머리와 목은 취약했다. 그가 글레이브로 땅을 내리치면 곧장 녀석의 팔에 올라탄 후 머리를 향해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바람을 가르며 무언가가 뛰어왔다. 그녀는 재빨리 오른편으로 빛의 몰락을 휘둘렀다. 두 검이 부딪치면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마그테리돈이 내보낸 오크 검귀였다. 검귀는 검을 다시 휘둘렀다. 악마의 피를 마시고 한껏 광폭해진 그는 그녀의 목을 정확히 노렸다. 하메라는 검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았다. 그러나 그녀를 노린 공격은 더 있었다.


  거대한 글레이브가 그녀와 검귀를 향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서 피했지만 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먼지 속에서 검귀의 검이 날라왔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4명의 검귀가 하메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메라는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짧게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몸에서 붉은 화염이 흘러나왔다. 불꽃이 주위를 불태우자 검귀의 분신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염에 휩싸인 검귀 본체만 남았다.


  그는 몸이 타오르고 있는데도 검과 함께 빙빙 돌면서 태풍처럼 하메라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검귀들이 칼날폭풍이란 궁극의 비기를 사용하는 순간 검과 하나가 된다고 들었다. 검과 하나가 된 검귀는 어떤 정신 공격으로도 저지할 수 없었다. 오로지 죽음만이 검귀를 잠재울 수 있었다.


  하메라가 빛의 몰락을 꽉 잡자 더 붉게 빛났다. 그녀는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검귀의 몸은 반으로 갈라졌다. 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빛의 몰락이 내뿜는 붉은 기운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하지만 대가도 있었다. 몸이 두 동강 나는 순간에도 검귀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칼날은 하메라의 견갑을 가르며 파고들었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 나왔지만 치명상은 면했다.


  “하찮은 오크 녀석이 잔재주를 부리길래 기대를 했건만 역시 필멸자는 별수 없군.”


  고르고스는 하메라를 내려보면서 웃었다. 그녀는 견갑에 박힌 검을 뽑았다. 그녀는 고르고스의 묵직한 공격을 피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 대단한 명성이 있길래 기대했건만 쥐새끼처럼 도망만 잘 다니는군. 그런다고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고르고스는 계속 도발했다. 이런 도발에 말려들 이유가 없었다. 시간만 번다면 하메라의 상처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러려면 다른 투사들도 피해야만 했다. 상처 입은 강자를 처치할 기회를 놓칠 정도로 그들 모두가 어리석지 않으니까.

 



  나스레짐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티콘드리우스의 감정은 얼굴에 그대로 쓰여있었다. 그는 하메라가 상처를 입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표정이 점점 굳었다.


  “하메라가 상처를 입은 것 같군.”


  티콘드리우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의 감정이 자신을 속이려는 기만인지 진심인지 내심 궁금했다. 저 표정이 기만이라면 속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아스타르는 그동안 티콘드리우스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했었다. 군단이 계속 내전으로 약화되길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군단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 싶은 걸까? 티콘드리우스의 표정과 목소리가 기만이 아니라면 그는 군단을 장악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아마도 군단을 고스란히 자신이 섬기는 주인에게 넘기려는 속셈일 것이다.


  “큰 부상은 아니네.”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에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부상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큰 변수는 아니었다. 그는 하메라의 판단력을 높이 평가했다. 저 상황에서 고르고스를 무리하게 처치하려는 것보다 시간을 버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부상은 순식간에 지옥마력으로 회복될 것이다. 그녀의 진정한 강점은 뛰어난 방어능력이 아니라 경이로운 회복력이 아니던가? 이 사실을 모르는 악마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겠지만 곧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저 부상을 지니고 곧 들어올 강자들을 상대할 수 있겠나? 부하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웃음이 나오는가?”


  잔을 받은 티콘드리우스는 아스타르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는 속이 타는지 잔을 쭉 들이켰다.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가 당혹감을 느끼는 모습이 꽤 볼만 했다.


  “우리에게 여전히 아주운과 이크툰이란 패가 남아있네. 단순히 내 부관이라서 자신하는 것이 아니란 건 그대도 알지 않는가?”


  티콘드리우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나스레짐 특유의 여유로움을 조금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