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해서 기껏 생각해놓은대로의 전개가 이어지기는 틀렸다고 생각, 엘리스는 상인에게 더이상의 말을 걸지 않았고 상인 역시 더이상의 발언없이 가던길을 계속가기 시작했다.

'그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까...'

 차선택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려는 그녀였지만 중요한것 하나를 잊고있음을 알아차렸다.

'잠깐만, 설마 지금이...'

 해가 떠있는 위치를 보아하니 지금은 인간이 활동하는 시간대중에서 가장 긴 그림자를 지닌 시기다. 즉, 일몰에 가까워졌다는것이고, 이런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기는 더욱 힘들어질게 뻔하다. 르블랑의 도움을 받아서 녹서스를 빠져나왔을때 이미 지상은 가장 뜨겁게 달궈져있었고 일몰에 가까워질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 녹서스에서 사람들이 나온다고해도 그 사람들과 가까운 시간에 만날 확률도 없다는 사실.

'그럼...'

 '이것외에는 선택의 가 없는거니?'라고 얼굴에 쓴듯한 인상을 풍긴채 엘리스는 멀어져만가는 상인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을 똑바로 바라볼 낯은 없지만 이 상태로라도 물어보는 수밖에 없기에...

 

"나참. 아까 그여자는 대체 뭐야? 옷차림새를 보니 이런 외길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도 아닌것 같고... 그런데 돈도없어. 여행길에 오른 사람인것 같은데 그게 가능은 한가?"

'그러게 말이다...'

 상인은 등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중얼거렸지만 막상 구설수에 오른 사람이 듣고있을줄은 상상도 못할것이다. '돈이 없다고말하자 쓴소리 한번 내뱉었는데 그대로 풀이죽어버리는 여자가 왜 자기를 따라오겠냐'라는 나름의 상식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상인의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기회는 지금...?'

 엘리스는 상인이 뒤를 돌아보아도 발견할수 없는 사각지대에 밀착한채 걸어갔다. 여기서 사각지대란 물론 수레. 해는 지평선너머로 막 사라졌고 길은 휘어지거나 갈림길이 있어도 상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보세요, 지금 돈도없는주제에 나보고 물건을 보여달라는겁니까?''

'으... 아닌가, 조용히 따라가기만 하면 전쟁 학회에 도착할지도 모르잖아.'

 단도직입적으로 상인에게 용건을 말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좌절하는 패턴이 끝없이 반복됐다. 말 하나하나가 자신을 압도시킬 정도로 무게를 주는 사람이고 처음의 실패가 자신도 모르게 각인되어서 두려움을 조장시켰다. 차라리 수레에 몰래 올라타서 조용히 따라가기만 하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약에 이 수레가 전쟁 학회로 가는게 아니라면?'

 위로 올라가면 자운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고 아래로 가면 빌지워터로 갈 확률이 높지만 자운으로 가면 거미교문제로 무력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고 빌지워터로가면 자신의 체력이 장거리이동에 감당하지 못한다.

"저기..."

"음? 윽!"

 상인은 자신에게 거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그 목소리의 근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채 아무말도 못하던 그 여자가 아닌가!

'여기까지 날 따라왔다는건가?'

 그는 이런 여자에게 미행당했다는 선입견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는 사실을 감출수 없었다. 물론 엘리스도 어렴풋이나마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치부했다.

"왜 따라온거요?"
"실례하지만 사실 물어보려는게 물건이 아니라 다른거였는데..."
'쳇, 오늘 많이 팔지도 못했는데 가뜩이나 이런 사람에게 잡히다니. 오늘 운은 지지리도 없군.'

 이미 상인의 마음속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대답이나 해주고 갈길이나 가자.'라고 결론지은지 오래.

"뭔가요."
"오늘이 몇일이죠?"

"에?"

'뭐야, 이사람... 너무 간단해서 대충 대답해줄수가 없잖아!'

"CLE 25년...이란건 아시죠?"
"네."
"7월 8일입니다."
'뭐야, 그럼 녹서스에 딱 이틀만 머물러있었다는거야?'

 엘리스는 그보다도 르블랑이 어떻게 짧은시간에 자신의 몸을 완벽히 치유해줬는지에대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됐죠?"
"잠깐만요, 아직 하나가 더..."

 금방이라도 떠날듯한 말투로 마무리하려하자 엘리스는 상인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으려했다.
"...뭔데요?"
 그러나 도끼눈을 띤채 째려보는 눈빛에 그녀의 마음속은 완벽히 굴복하고야 말았다.

'날짜와 방향만 물어보는건데 왜이렇게 힘든거야!!!!!!!!!!!!!!!!!!!'

 몸속에 있는 또다른 자신이 소리지르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쪽은..."

 아주 ~ 느리게. 지렁이가 기어가는게 더 빠르다고 생각할 정도의 속도로.

"어느... 쪽으로..."
 상인은 답답하다는듯이 엘리스를 바라봤고 더이상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기어들어가서 듣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자...

"아 전쟁 학회요, 전쟁 학회! 그렇게 어깨에 힘 쫙빼서 어느 순간에 다 말합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반자동인지 자동인지 헷갈릴만큼 그녀의 사죄하는 목소리는 즉각적으로 나왔다.

'어, 그렇다면 르블랑은 하루만에 녹서스의 서쪽으로 날 데리고 이동했다는건가?'

"됐죠?"
'그리고 이 사람의 방향도 전쟁 학회라면...'

"어이!"
"네?"
"질문 다 끝났어요?"
"아, 아뇨! 아까 전쟁 학회로 간다고 하셨는데..."

"그랬는데요?"
"제가 그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제 뒤에 따라오던것처럼 오세요."
"딱봐도 거긴 멀잖아요..."

"그거야 제 알바는 아니죠. 돈도없는 당신이 뭘로 거기까지 갈겁니까? 그냥 녹서스로 돌아가시죠. 무일푼 숙녀님."

'아.'

 '무일푼 숙녀'라고 적혀있는 화살표가 엘리스의 정곡을 찔렀다.

'으아아아아아! 돈없으면 사람도 아닌거냐!'

 그녀는 스킬을 못쓰기때문에 상인을 죽이지 못하는게 한이라고 말할 정도의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어, 돈...'

"그럼 후불로 제가 전쟁 학회에서 돈을 드릴테니 거기까지 태워다주실래요?"
"말도안돼, 물건사고파는데에도 즉각적으로 돈이 오가는데 서비스업을 후불로 장사하는게 어딨어요?"

"거기에 제 통장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불러주시는대로 빼드릴게요."

"흥! 그걸 믿고 제가 들어줄줄 알았습니까? 보이지 않는걸 어떻게 믿어요! 돈도없어, 몸뚱하니 하나밖에 없는 당신에게 내 노동값을 충족시킬만한 돈이 어디있어!"

 상인은 엘리스의 첫인상을 되게 안좋게 평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상인의 그 말에 크게 분노한채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순간,

"몰락한 가문주제에 감히 우리에게 대들어?"
 엘리스의 눈앞은 또다시 흐려지고 어디선가 또다른 자극들이 덮쳐왔다.

"당장 이곳에서 꺼지시지!"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는 언제적인지 모르는 자신이 서있었고, 그 잔혹한 장면을 지켜보기만하고있었다.

"으아아아앙!"
"잠깐만요, 여기 애도있는데 이런 과격한 반응은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애한테 몹쓸 상황을 보여줘?"

 거구의 사나이가 중년의 남성을 세게 후려치자 남성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어른이라고 보이기 힘들 정도로 맥없이 쓰러졌다. 이 모든걸 지켜보는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는 커져갔다.

"미안하다 내딸아. 미안해..."
 울음이 극에 달해서 그런걸까. 소녀의 눈에 들어오는 시야는 가늘어졌다. 그런 소녀의 앞에서 성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네가 강해져야한단다. 힘이 센 사람이 되어야하고, 돈도 많이벌어야하고, 많은 사람들이 널 우러러볼..."

'왜 이런...'

 또다시 엘리스는 누군가의 비참한 과거를 보고있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대충 알고있겠지만.

쾅-

"못 믿겠다면 힘으로 빼앗겠습니다. 이 수레에 여러 물건들이 들어있다고했죠? 이동수단도 분명히 있을터..."
 엘리스가 목격한 것은 비참한 장면이었다. 약자는 하염없이 당할수밖에 없고, 그 편에 서서 이 모든걸 지켜보는 사람이 주먹을 쥐게끔 하는 장면을...

 지금 엘리스가 수레를 향해서 내지른 주먹은 그 감상에 젖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
 상인은 여태껏 쫄아왔다가 잠시 멍해지더니 태도가 돌변한 여자를 보고 놀랐다.

'뭐야 이여자. 분위기가... 그동안의 모습은 포장한 모습일 뿐이었나?'

 무엇보다 그녀에게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분노가 그를 향해 타오르고있는것같아 상인은 기겁해가고 있었다.

'확실히 두렵긴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말하니까 뭔가 거짓말은 아닌것같기도 하고...'

 수동적으로, 협박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부정적인 요인이 작동하긴 했지만 상인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좋습니다. 수레에 타시죠."
<계속>

<글쓴이의 말>

 

공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