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다. 지워지려 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피냄새가 나서 바람조차 싫어진다. 귀를 틀어막고 있으면 이제는 뭔지 알 수도 없는 것들이 불쑥 내 가슴을 찢어놓고 사라진다.

 칼이 땅에 질질 끌린다. 작은 방 속 깊이 숨겨둔 보물처럼 아끼던,  어리석었던 믿음과 함께 부러뜨린 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무릎 밑 다리를 바라본다. 칼이 땅에 질질 끌린다.

 비는 송두리째 내려와 마치 오늘만을 기다린 야수 같다. 먹어치울 듯 내려오는 비를 리븐은 전장에 소용돌이치는 날붙이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아이오니아에서도 유명하게 아름다운 들판에 운치있게 어우러진 작은 마을. 입과 입으로 전란의 칼바람이 드디어 전해지기 시작한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에 들어서는 작은 골목길 끄트머리, 한 미친 여자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녀의 주변에서 처음과 달라진 것이라곤 두서없이 놓여진 몇 푼의 동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여자가 광인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고, 다름아닌 녹서스의 실력자 리븐이라는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건너마을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퍼졌을때만큼 놀라움에 들끓었다.

 돌도 날아왔고 빵도 날아왔다. 리븐은 어느것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는 끝내 기절한 그 순간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죽은 듯이 기절하고 일어나보니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아무 것도 없어 휑한 방에 등 밑은 짚단만 놓여 있어 차가웠다. 누워있는 상반신을 일으킬 힘조차 없으나 왠지 놀라 주변을 돌아보면 부러진 녹색 룬검이 보였다. 아니, 이런 저주스러운 것이 있든 없든 내 알 바 아니야. 리븐은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칼을 저 멀리 던져버리려 했으나, 그 기세에 자신도 휩쓸려 한 바퀴 굴렀다.

 몸에 조금도 힘이 남아있지 않다. 배고프고 온몸의 구석마디가 저리다. 녹서스에서는 이런 어린아이 같이 약한 상태를 '자살할 힘'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자살. 아주 매력적인 단어였다. 그러나 그것도 내가 녹서스의 사상에 물들어있기 때문인가.

 불확실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가 옳은지도, 이곳이 어딘지도, 내가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의 어느쪽이 선이며 악인지도.
 리븐은 명상하듯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점점 가슴이 조여왔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피식 소리와 함께 미수로 그쳤다. 리븐은 웃었다.
 미친 건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어쩔 수 없었다. 숨은 참아봐야 죽지 않는다는 잔인한 상식. 고문에 관해서도 전문가인 스스로가 다시 없이 웃겼다.
 칸 하나뿐인 방에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니, 방이 아니라 조금 작은 집이었던 모양이다. 열린 문 너머로 한가로운 낯선 거리가 보였다.

 "뭐가 좋다고 웃고 있나."

 묘령의 여성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어째서일까? 누가 자신을 보고 있다, 그 사실에 리븐은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마치 죄인처럼 퀭한 눈으로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

 "원래 너는 묶여서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는 상태로 가둬져 있어야 하지만, 혹시 투항의사를 가진 것일지도 몰라 이렇게 수도로 이송해 온 것이다."

 아이오니아의 근위대장. 보고로 들은 인상착의와는 딴판으로 그녀는 여자였다. 인상착의는 하늘하늘하고 살구색 옷소매는 신선 같이 늘어져 있다. 그러나 그녀는 만약 리븐이 날뛰면 그자리에서 제압할 수 있을 인선으로 뽑혀 온 것이겠지. 그렇다면 보이는 곳에 놓여진 칼은 일종의 시험일까, 아니면 부러진 기념으로 갖다준 장식품일까.

 그녀 주위에는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듯 4개의 신이한 검날이 마치 신화 속의 용처럼 순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칼날에는 명백한 피비린내와 살육의지가 있었음에도, 어째서인지 상대를 검날이 없는 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또한 난 너에의 이 대우가 실로 마음에 들지 않아.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간..."
 "...관둬."

 리븐은 따뜻하게 말했다. 적어도 자신 기준에서는 그랬다. 칼을 거꾸로 잡은 머리 긴 여자는 알지 못하는 따스함은, 아마 의도와는 반대로 차가울 것이지만, 리븐은 개의치 않았다. 근위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네 개의 칼날은 약간 리븐을 향해 기울었다.

 "무슨 의미지?"
 "...나는, 투항도 응전도 안해. 이제는 지긋지긋해. 다 끝났어, 모두... 힘은...... 허상이었어."

 리븐은 작게 웃었다. 천천히 병상에서 일어나 마치 과일이라도 집듯이 부러진 룬검를 집었다. 무거웠다. 룬검의 무게는 그대로였다. 과연, 그런 것이었나. 이 검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난 이럴 운명이었던 것일까...
 상반신을 일으켜 이렐리아 쪽을 바라보니 이미 그녀 주위를 돌던 칼은 없었다. 그 칼은 리븐의 왼다리를 제외한 목과 나머지 사지에 겨누어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본 적이 있다. 마치 무기점에서 진열해 놓은 듯 갑옷은 멀쩡한데 사지는 사방으로 잘려져 있는 부하의 시체를.

 "그 발언은 '자살'인가?"

 자살, 그 단어가.

 정말로 리븐은 웃겼다. 서로 바라고 바라지 않는 것이 이토록 다를 수가 없었다. 서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이렐리아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갑옷 째로 부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부하의 시체를. 이렐리아의 눈은 리븐을 짓누르는 과거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리븐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보고 이렐리아가 칼날을 거두는 그 순간.

 챙-

 소리없이 행해진 검격은 리븐의 것이었지만, 유려한 검의 음악은 이렐리아의 검에서 났다. 리븐의 검은 이렐리아의 눈앞에서 뭉툭한 소리를 내며 한 개의 칼날 앞에서 막혔다. 이렐리아는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리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븐의 칼이 룬빛으로 빛났다. 외롭게 발광하는 구슬 하나가 깨질 듯이 힘을 방출했다. 수백의 병장도 단숨에 기가 질릴 정도의 묵직함이었다. 이렐리아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번개같이 칼 하나를 마저 가세시켰다. 그것으로 끝. 아직 두 개의 칼날이 남은 채로 검착이 이루어졌다.

 "당최 모르겠군."

 이렐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대로 찔러 죽일 수도 있었다. 이 자는 골골대다 못해 비틀거리면서도 칼을 휘두르고 있다. 대체 무엇을 원하기에. 무엇을 하고싶기에. 무엇이기에.

 "너희들이 말했던, 내가 비웃었던 평화..."

 리븐의 검이 발하는 빛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리븐은 검을 거뒀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마터면 이렐리아는 그대로 내려칠 뻔했다.

 "...이건."

 이렐리아는 등 뒤로 느껴지는 묘한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미 박살이 나버린 목제 벽이 와직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리븐이 방출한 힘이 이렐리아를 통과하여 벽을 허문 것이다.

 "내 나름대로, 그걸 깨닫고 싶을 뿐이야."

 리븐은 등에 칼을 견착하고 조용히 걸어갔다. 이렐리아는 부하를 대동하지 않았지만 검이 맞부딫치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살피러 온 자들은 대부분 장병들이었다. 그러나 리븐의 단호해진 걸음걸이를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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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후 리븐은 이틀 노력해서 받은 동전으로 맛있는거 사먹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