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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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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이야기) 시작의 마을은 반드시 불태우고 침공할 것이야!!!(장문)아크라시아 업무 표준 절차서
“발탄, 마수군단장이란 직책은 생각보다 섬세해야 한다.” 선대 심연의 군주이자 육체를 잃기 전의 카제로스는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안개 속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등 뒤로는 쿠르잔의 용암이 들끓고, 양옆에는 대악마들의 거대한 유골이 줄지어 있었으며, 천장에서는 봉인된 루페온의 신성한 빛 조각들이 눈처럼 느릿느릿 떨어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크라시아를 멸망시킬 악의 근원 같은 방이었다. 다만 그 방 한가운데에 놓인 낡은 칠판과 분필, 그리고 삐뚤게 걸린 현수막이 모든 위엄을 망치고 있었다. 제183차 군단장 및 간부급 교육 발탄은 저 기이한 현수막을 한참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카제로스님, 저딴 인간 놈들의 교실 같은 연출이 꼭 필요합니까? 당장 대륙을 찢어발기면 될 것을!” 카제로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교육에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심연의 요새에 교육 분위기가 왜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너무 어둡기만 하면 악마들도 지친다. 그리고 아크라시아 침공 수업은 생각보다 지루해. 아크의 비밀도 칠판 없이는 설명이 길어진다.” 발탄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 부활과 죽음을 반복하기 전, 태초의 힘으로 가득 찬 마수라 그런지 뿔은 윤이 났고, 가죽은 찢어진 곳 없이 말끔했으며, 무엇보다 눈빛에 쓸데없는 의욕이 있었다. 카제로스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은 군단장 후보들은 늘 그렇다. 지도를 펼쳐놓고 베른이나 로헨델을 바로 전멸시키자고 하고, 에스더들이 태어나거나 계승되기 전에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며, 군단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효율. 카제로스는 그 단어를 싫어했다. 마계 페트라니아에서 효율을 입에 올리는 놈치고 끝이 좋은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끝이 세계관 기록에 남은 경우조차 드물었다. 카제로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칠판 옆에 낡은 목제 게시판이 솟아올랐다. 게시판에는 기묘한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불타는 루테란의 마을, 삼족오 문양의 옷을 입은 전사, 죽어가는 전대 에스더, 제단에 박힌 엘조윈의 가지, 납치당한 실린의 여왕, 한 명씩 레이드 던전에서 쓰러지는 군단장들, 기믹과 전멸기가 너무 많은 부활의 제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팔을 장황하게 벌린 카제로스의 실루엣.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계승자(플레이어) 각성 및 최종 아크 수집 유도 흐름도 발탄은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유도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그렇다.” “저희가 그 ‘모험가’ 놈들을 유도합니까?” “정확히는 적대적 환경 제공을 통한 자발적 레벨업 및 에스더 무기 성장 유도다.” “그게 유도 아닙니까?” “표현이 중요하다. 사슬전쟁 시절에는 말 한마디로 영혼이 소멸하는 일이 많았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소멸시켰지만.” 카제로스는 분필을 들고 칠판에 큼직하게 썼다. 1. 모험가의 고향(혹은 시작 마을)은 반드시 불태우고 침공할 것. 발탄이 곧장 도끼를 쿵 찍으며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벌써?” “반드시입니까?” “반드시다.” “그냥 루페온의 안광을 받은 계승자가 태어났거나 아크의 전조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비아키스나 서두길을 보내 암살하면 안 됩니까?” 카제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오래, 너무 깊게 쉬어서 등 뒤의 심연의 불꽃이 잠깐 흔들렸다. “그 생각을 네가 처음 한 줄 아느냐?” “아닙니까?” “아니다. 제법 많이 했다. 아주 똑똑한 군단장들이었다. 어떤 자는 예언이 내려오자마자 모험가의 혈통을 찾아 씨를 말렸고, 어떤 자는 아르테미스의 산파들을 전부 매수했으며, 어떤 자는 아예 토토이크를 통째로 짓밟아버렸다.” 발탄의 눈이 조금 빛났다. “효과적이었겠군요.” “그랬겠지.” “그랬겠지?” 카제로스는 칠판을 톡톡 두드렸다. “패치 노취(기록)가 거기서 끊긴다.” 발탄은 입을 다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군단장들은 에스더들에게 죽었습니까?” “모른다.” “전쟁에서 졌습니까?” “모른다.” “그럼 어떻게 된 겁니까?” 카제로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요새 뒤편의 검은 벽에는 오래된 악마 공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중간중간 이름이 비어 있는 자리가 있었다. 글자가 파인 흔적은 남아 있지만, 무슨 이름이었는지는 누구도 읽을 수 없었다. “데이터가 말소되었다.” 카제로스가 말했다. “그게 전부다. 죽었다는 시네마틱도 없고, 패배했다는 퀘스트 스크립트도 없고, 카단이나 실리안이 목을 베었다는 전설도 없다. 어느 날 점검이 끝난 후부터 그 이름이 읽히지 않게 되었고, 다음 군단장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수업을 들었다.” 발탄은 벽의 빈자리를 보았다. “그러니 레온하트든 징검다리 마을이든 불태워라. 다만 전부 죽이지는 마라. 모험가가 굳이 둠벙에 빠진 아크라시아를 구하겠다고 스토리를 밀 만큼의 동기는 남겨둬야 한다. 반쯤 탄 성당, 무너진 풍차, 어린 시절 친구가 남긴 부서진 목검, 어머니의 유품이 든 잿더미. 그런 것들 말이다.” “그건 군사 전술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맞다.” “그런데 왜 합니까?” “의미가 없는데도 시스템적으로 반복되는 일들이 있다. 그런 규칙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카제로스는 칠판 아래에 작게 덧붙였다. 주의: 조력자 전원 살해 금지. 최소 한 명(예: 아만, 실리안 등)은 의미심장한 대사와 함께 빛의 길로 가야 함. 발탄이 눈을 찌푸렸다. “그 나약한 인간들의 감정선까지 관리합니까?” “물론이다. ‘빛의 뜻대로…’는 너무 흔하고, ‘내 안에 어둠이…’는 조금 낡았지만 여전히 효과가 있다. 가장 무난한 건 ‘...세계의 끝에서 아크를 찾으세요’다.” “아크가 어디 있는 줄 알고 그렇게 말합니까?” “실리안이나 아만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놈들은 뭘 하는 직책입니까?” “쓸데없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가 정작 중요한 연출 순간에는 모험가에게 짐을 떠넘기는 직책이다.” 발탄은 이마를 짚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카제로스는 진지했다. 그리고 다음 항목은 더했다. 2. 초반 몬스터는 약하되, 반드시 ‘귀찮을 것’. “모험가가 처음 맞닥뜨리는 적은 독개구리, 붉은부리 새, 좀비, 혹은 하급 고블린 정도가 좋다.” 곧장 발탄이 물었다. “그런 것들을 왜 보냅니까? 제 마수 군단 드래곤 한 마리면 1레벨 짜리들은 흔적도 안 남습니다!” “그럼 게임 오버가 되잖느냐.” “그게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럼 판이 깨진다고 했지. 초반부터 강하면 모험가가 리셋(탈주)을 한다. 너무 약하면 타격감을 못 느낀다. 그러니 적당히 약하고,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징그러운 놈들이 좋다. 징그러운 벌레류가 이 분야에서는 전통적으로 뛰어나다.” “벌레들이 모험가 육성에 특화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모코코 씨앗 옆에 배치하기 딱 좋다는 뜻이다. 잘 죽고, 숫자가 많고, 그들이 숨은 동굴에는 이상하게 반짝이는 작은 상자가 하나쯤 있다.” “보물상자는 왜 둡니까?” “모험가가 첫 모험가 장비와 회복약을 얻어야 하니까.” “우리 구역에 왜 인간 장비가 있습니까?” “벌레가 주웠겠지.” “어디서요?” “먼저 온 모험가의 시체에서.” “그 모험가는 왜 거기 갔습니까?” “보물상자를 찾으러.” 발탄은 잠시 말문이 막혔고, 카제로스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설명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중요한 건, 초반 몬스터가 너무 전술적으로 움직이면 안 된다. 카운터 패턴은 주되 전조 동작을 아주 크게, 장판은 깔되 안전 구역을 눈에 띄게, 상태 이상을 걸되 주변에 해제 성수가 자라게. 모험가가 ‘와, 대가리가 깨질 뻔했지만 내 컨트롤로 피했다’고 느껴야 한다.” “그건 전투가 아니라 튜토리얼입니다.” “그러니 ‘적대적 환경 제공’이라고 했잖느냐.” 카제로스는 칠판에 다음 항목을 썼다. 3. 아크(Ark)는 찾기 어렵지만, 결국 맵 뷰어(지도)를 보면 찾을 수 있게 둘 것. 발탄은 이번에는 헛웃음을 지었다. “숨긴다면서 찾을 수 있게 둔다고요?” “그렇다.” “차라리 저희가 먼저 찾아서 차원의 틈새나 심해에 던져버리거나 파괴하면 되지 않습니까?” “해봤다.” “누가요?” “내 전전대 군단장급이었던 질병의 권능을 가진 자였다. 아크를 찾아 역병의 용광로에 넣었지. 그런데 아크는 녹았는데 그 안의 '빛의 아크라시아 에너지'는 녹지 않았다. 그 빛이 대장장이의 망치로 옮겨붙었고, 망치는 어부의 낚싯대가 되었고, 낚싯대는 생활 채집가의 도끼가 되었으며, 결국 어느 시골 작살잡이의 손에 들어갔다.” “……그래서요?” “모험가는 항구에서 그 작살잡이를 원정대 선원으로 얻었다.” “…….” “최종 결전(레이드)에서 그 작살잡이가 던진 성스러운 작살에 내 분신이 부위 파괴를 당했다. 컷신으로 보면 아주 보기 안 좋다.” “말도 안 됩니다.” “이 바닥의 스크립트가 원래 그렇다.” 카제로스는 게시판에 붙은 그림 하나를 가리켰다. 거대한 사원 꼭대기에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아크는 봉인된 유적, 거대 거인의 심장, 혹은 ‘누구도 찾지 못했다’면서 이상하게 월드맵에 던전 아이콘이 큼직하게 박힌 곳에 두면 된다. 너무 쉽게 주면 안 되지만, 메인 퀘스트 동선만 따라가면 나오게 해라. 벽화나 기에나의 비석, 혹은 말하는 요정 같은 단서를 적당히 배치해라.” “말하는 요정까지 필요합니까?” “있어야 컷신 분위기가 산다.” “요정이 배신하면요?” “그럼 다음 대륙에선 말하는 정령을 쓰면 된다.” “정령은 배신하지 않습니까?” “그놈들은 스크립트가 단순해서 대사 오류가 적다.” 발탄은 분필을 빼앗아 칠판 한쪽에 크게 적었다. 아크 발견 즉시 기에나의 바다 가장 깊은 해구에 투기. 하지만 카제로스는 그 문장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바다에 던지면 해양 던전이 생겨서 모험가들이 배 업그레이드하고 더 강해져서 찾아온다.” “왜요?” “파밍 동선이 늘어나니까.” “무슨 원리입니까?” “‘콘텐츠 증가’라는 신성한 권능이다.” 발탄은 결국 분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카제로스는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4. 군단장은 반드시 각자의 ‘레이드 던전’에서 한 명씩 따로 상대할 것. 발탄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왜 한 명씩입니까? 저와 비아키스, 쿠크세이튼, 카멘이 한꺼번에 베른 남부에 강림해서 광역 전멸기를 기믹도 없이 난사하면 모험가고 에스더고 전부 죽습니다!” “넷이 한꺼번에 레이드 보스로 나오면 화면 이펙트 때문에 렉이 걸려 튕기거나 밸런스 붕괴로 불만이 폭주한다.” “우리가 왜 인간 놈들의 편의를 봐줘야 합니까?” “판이 깨지면 우리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했지 않느냐. 모험가는 죽을 수 있다. 그러나 '부활 깃털'도 못 쓰고 의욕을 잃을 정도로 불합리하게 죽으면 안 된다.” “죽여도 안 되고, 살려도 안 되고,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적당히 전멸기를 주되, 공략(공략 영상)을 보면 깰 수 있게 '기믹'을 제공해야 한다.” 발탄은 한동안 카제로스를 보았다. “카제로스 님, 지금 스스로 말씀하고도 이게 전쟁인지 던전 이벤트인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매주 수요일 점검 때마다 느낀다. 그래도 적어라.” 카제로스는 분필 끝으로 칠판을 톡톡 두드렸다. “용사를 너무 일찍, 기믹도 없이 죽인 마왕이 있었다.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 마왕성 지하에 갑옷 하나가 남아 있다. 갑옷 바깥쪽에는 흠집 하나 없었지만, 안쪽에는 무언가로 긁어낸 자국이 가득했다. 바깥에서 공격받은 흔적은 없었는데, 안쪽만 완벽하게 무너져 있었다. 데이터가 손상된 것처럼.” “그 마왕의 시신은요?” “없었다. 캐릭터 코드가 통째로 날아갔으니까.” 발탄은 더 묻지 않았다. 페트라니아 지하의 정체불명의 버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 불쾌했다. “또 다른 군단장 후보는 모험가가 초보자일 때 루테란 외곽에서 죽였다. 아주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마을도 안 태웠고, 아크 단서도 지웠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건 훌륭한 판단 아닙니까?” “그랬겠지. 그런데 며칠 뒤, 모험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나타났다.” “다른 것?” “사람 모양이었지만 스킨이 깨져 있었고,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모션이 없었다. 모험가의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이름을 정상적으로 읽을 수 없었다. 얼굴은 흐릿한 텍스처였고, 목소리는 오직 한 문장만 스크립트 오류처럼 반복했다고 한다.” 카제로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정의를 수행합니다 (System_Error_0x00).” 발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뭡니까?” “모른다. 운영진이 급하게 밀어 넣은 대체 AI 시스템인 것 같다.” 카제로스는 칠판에 천천히 적었다. 주의: 모험가를 스토리 초반에 너무 완벽하게 죽이면, 시스템이 보낸 더 기분 나쁜 ‘대체 매크로/AI’가 온다. “그것은 강했습니까?” “강했다. 기믹도 무시하고, 딜찍누(데미지로 찍어 누르기)로 사천왕과 군단장을 밀어버렸지. 그 군단장이 마지막 남긴 로그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제로스는 오래된 메모리를 더듬었다. ‘차라리 정식 유저(모험가)였으면 했다. 최소한 그들은 패턴이라도 봐줬다.’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카제로스는 다시 평소의 피곤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그러니 군단장 보스는 한 명씩 관문을 나눠서 맡아라. 우리는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적당히 체력을 깎이고, 광폭화 전멸기 한 번 보여준 뒤, 마지막 관문에서 멋지게 쓰러져 그들에게 전설 장비 재료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핵심 업무다.” “그 말은 정말 최악입니다.” “나도 안다. 연출 컷신 스킵 당할 때가 제일 비참하지.” “알면서도 계속합니까?” “발탄.” 카제로스는 발탄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 게임의 코드를 짠 자들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 서비스(루프)를 당해서 모양을 외웠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5. 포탈과 정비 구역(부활의 샘)은 보스 방 직전에 반드시 남겨둘 것. “안 됩니다.” 발탄이 즉시 말했다. “그건 대놓고 우리 목을 따러 오라고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겁니다!” “막으면 모험가들이 낙원이나 던전에서 길을 잃고 커뮤니티에 눕는다(항의한다).” “길을 잃고 접으면 좋은 것 아닙니까?” “아니다. 던전은 복잡하되, 결국 미니맵을 보면 보스 방까지 올 수 있어야 한다. 중간중간 정비소, 이상하게 방치된 배틀 아이템 상자, 오래된 이스터에그 일기장도 넣어두면 좋다.” “정비소는 왜 둡니까?” “전멸하고 다시 도전할 때 물약이랑 조율을 바꿔야 하니까.” “우리 요새 안에 적 전용 대기실을 두자는 말씀이군요.” “정비소 안에서는 우리도 공격 못 하는 무적 판정이 들어간다. 그건 시스템 권능이다.” 발탄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저희는 아크라시아를 침공하는 군단입니까, 테마파크를 짓는 대기업입니까?” “둘 다다. 마왕 노릇을 하다 보면 스토리상 개연성과 게임 허용이 다르다는 걸 배우게 된다.” 카제로스는 마지막에 가까운 항목을 적었다. 6. 중요한 순간(에스더 카운터, 전멸기 직전)에는 연출 컷신과 대사가 길어질 것. “이건 특히 중요하다. 이때 스킵을 못 하게 강제 컷신으로 묶는 것이 진정한 군단장의 위엄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발탄은 자신의 군단장 레이드(마수군단장 발탄)에서 대륙의 모험가들에게 죽었다. 마지막 결전은 정해진 기믹과 절차대로 진행되었다. 발탄은 피투성이가 된 채 지형을 무너뜨리며 유령 발탄 패턴으로 진입했고, 모험가들은 에스더 실리안을 호출해 바훈투르의 신뢰를 쓰며 마지막 카운터를 쳤다. 발탄은 장렬하게 절벽 아래로 떨어지며 “으아아아! 이 마수의 힘이…!”라고 외쳤다. 물론 그 말은 업무 절차서 부록에 있는 정당한 퇴장 대사였다. 그렇게 발탄은 (일시적으로) 죽었고 영혼만 남았다. 선대의 유품 중 《아크라시아 업무 표준 절차서》를 불태우려 했으나, 다음 날 점검이 끝나자 서랍에 다시 들어 있었다. 새롭게 권능을 이어받은 신임 간부는 말했다. “무시해라. 난 내 방식대로 효율적인 전쟁을 하겠다.” 그는 철저하게 움직였다. 에스더들의 후계자를 미리 찾아 암살했고, 아크의 단서가 있는 전 대륙의 도서관을 불태웠으며, 모험가들이 장비를 파밍할 수 없도록 저레벨 구역의 고블린과 몬스터들을 전부 소멸시켰다. 마수와 악마 군단을 쪼개지 않고, 베른과 루테란에 동시에 수백만 마리를 드랍했다. 인간 왕국은 당황했다. 1레벨 신병들은 튜토리얼 존에서 내리치는 카멘의 어둠의 검격을 보았다. 대륙 전역이 일주일 만에 완벽하게 함락되었다. “선대들은 도대체 뭘 한 거지? 이렇게 쉬운 것을.” 신임 마왕은 부서진 아크 조각들을 보며 비웃었다. “전 아크라시아가 항복했습니다. 예언자들도 전부 침묵했습니다.” 참모가 보고했다. “한 명만 빼고요.” “누구?” “‘스크립트가… 망가졌다’고 울부짖는 자가 있습니다.” “좋군.” 그는 그날 밤 처음으로 만족스럽게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아크라시아의 하늘이 갈라졌다. 처음에는 차원의 틈새(카오스 게이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붉은 페트라니아의 하늘이 아니었다. 하늘 한가운데에 거대한 검은 스크린 같은 금이 생겼고, 그 너머로 거대한 '마우스 커서'와 '눈동자'가 보였다. 대륙 전체가 그 모니터 화면 안에 비친 작은 장난감 같았다. 하늘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위엄도 신성함도 없는, 귀찮음이 반쯤 섞인 목소리. “어? 잠깐만. 이거 왜 이래? 스토리 진행이 안 되는데?” “마왕 쪽 보스가 하이딩 존이랑 초반 NPC를 다 밀어버렸는데요? 기믹 스크립트 다 깨졌어.” “와, 이번 시즌 보스 AI 왜 이래? 최적화 빌드로 유저들 접속도 못 하게 막았네.” “성검이랑 아크를 분해해서 제작 재료로 날린 건 좀 웃겼다.” “웃기긴 한데, 이거 다음 주까지 수정 안 하면 유저들 환불 요청 들어와요. 밸런스 완전 나갔잖아.” 신임 마왕은 검을 뽑아 하늘을 겨누었다. “나는 순리를 깨뜨렸다! 너희가 말하는 루페온의 운명을 이겼단 말이다!” “아니요.” 눈 너머의 목소리가 난처하게 말했다. “서버 진행을 망치셨습니다.” 마왕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륙을 정복하고 아크를 없앴는데, 저 너머의 존재들은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정된 패치나 시나리오가 어긋나 곤란해진 개발자와 운영진처럼 말했다. 그는 선대 카제로스의 말을 떠올렸다. ‘모험가를 너무 일찍 죽이면 더 기분 나쁜 것이 온다.’ “너희가… 우리 세계 바깥의 신이냐?” “아, 몰입을 해치려던 건 아니고요. 이번 마왕 캐릭터 해석이 꽤 유니크하긴 했어요. ‘악역의 합리적 전략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거잖아요. 솔직히 커뮤니티에 기획서 올렸으면 흥했을 텐데.” “그렇다면 이대로 스토리를 이어가라! 내가 승리한 세계로!” “음, ‘마왕 승리 이후의 디스토피아 레지스탕스 대륙’ 콘텐츠? 차기 확장팩 콘셉트로는 괜찮겠네요.” “좋네. 그럼 이번 마왕은 전설 속 하이-보스로 동상 하나 세워주고……” “잠깐! 그럼 나는? 이 세계의 아크라시아는 어떻게 되는 거냐!” 하늘 너머가 차갑고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 그건 다음 시즌 패치 때 적용할 거고요. 지금은 라이브 서버라 롤백(Back)해야 합니다. 유저들 접속해야죠.” 그때 왕좌 옆 바닥에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아크라시아 업무 표준 절차서》 책의 첫 장에는 선대 카제로스의 필체로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해했느냐?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악당은 없다.』 “자, 스토리가 완전히 꼬였으니…… 빽섭(Rollback) 진행할게요.” 하늘의 눈이 깜빡였다. 세상이 접히기 시작했다. 불타던 베른 성이 그림처럼 흐려졌고, 점령지들이 데이터 조각이 되어 날아갔다. 왕좌도, 마왕의 승리 기록도 하나씩 색을 잃고 초기화되었다. 마왕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레온하트 성당의 작은 광장에서 한 모험가(플레이어)가 캐릭터 생성을 마치고 첫 발을 내디뎠다. 하늘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아크라시아의 별들이 빛나고 있었고, 저 멀리 페트라니아의 요새에서는 늙은 카제로스가 다시 부활할 군단장들의 교육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젊고 의욕 넘치는 군단장 발탄은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 눈빛으로 칠판 앞에 서 있었다. 카제로스는 분필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시스템이 지정한 첫 번째 코드를 칠판에 적었다. 1. 모험가의 시작 마을은 반드시 불태우고 침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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