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선생님이다. 그래서인지 게임을 정말 싫어한다.

대기업으로 옮기고 잠시 주말부부로 지낸 적이 있다. 신혼이었고, 떨어져 있는 밤이면 거의 매일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몇 시간씩 붙잡혀 있어야 하는 레이드는 엄두도 못 냈다.

대신 PS5를 사서 어쌔신 크리드 같은 게임을 틈틈이 했다.


회사에서는 새로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아는 게 힘이었다. 잘 알고, 잘 연구하면 인정받았다. 여기는 달랐다. 중소기업 시절엔 신경도 안 쓰던 KPI의 노예가 되어갔다. 나름의 정치도 있었고, 잘 보이는 법도 알아야 했다. 일할 때 티를 내야 할 때와 묵묵히 해야 할 때를 구분해야 했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한다. 나도 조금 영리해졌는지, 어느 순간부터 회사 생활이 편해졌다. 윗분들의 진짜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2024년과 2025년 고과를 연달아 잘 받았고 진급도 했다. 진급에 좋은 고과까지 겹치니 한 해에 연봉이 15% 가까이 올랐다. 월급 140만 원에 감사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반도체 회사는 아니지만, 나름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그래도 가끔, 아니 종종 이직 앱을 열어 내 직무를 검색해 본다. 내 가치가 아직 시장에서 통하는지는 늘 확인하며 살아야 하니까.


그 무렵 취미로 마라톤을 시작했다.

그리고 2024년, 어쩌다 보니 다시 와우를 켰다. 언제 들어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길드에 이름이 걸려 있었다. 길드 레이드가 정말 활발한 곳이었고, 사람들이 하나같이 착했다.

달리기를 하면서 틈틈이 템렙을 올렸다. 길드 레이드에 한번 따라가 볼 각을 재고 있었다.


11월, 부산 다대포에서 열리는 하프 마라톤에 나가게 됐다. 일요일이 대회라 토요일에 내려가 사촌누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그 토요일이 마침 길드 레이드 날이었다. 겨우 템렙을 맞추고 참가 신청을 했다.

딜은 예전처럼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보스 패턴을 몰랐다.

블러드가 걸리고 모두가 딜을 쏟아붓던 순간, 내게 디버프가 걸렸다. 나는 사냥꾼의 습관대로 죽은척하기를 눌렀다. 디버프가 터졌다. 길드원들이 바닥에 누웠다.

"그러시면 안 돼요~"

다들 웃으며 넘겨줬다. 레이드 분위기도 끝까지 즐거웠다. 그 영웅 레이드는 나 같은 초보가 섞여도 템렙으로 밀어붙이면 잡히는 곳이었다.

마지막 보스는 초행 인원을 빼고 가기로 했다. 나는 조용히 빠졌다.


다음 날 아침, 다대포 출발선에 섰다. 이번엔 내 기록이 아니라 사촌형의 페이스메이커로 뛰었다. 형 옆에서 속도를 맞추며 21킬로를 달렸고, 형을 무사히 결승선까지 데려다줬다.


전날 밤 길드원들을 바닥에 눕혔던 사냥꾼이, 다음 날엔 누군가를 끝까지 이끌고 있었다. 

메아리섬에서 오그리마까지 100골마 형이 나와 나란히 달려줬던 것처럼.

그리고 그 레이드를 끝으로, 나는 내부 전쟁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