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사리아

 

 어째서 멘드레이크와 마주하는 자가 베사리아가 아닌 잭스인지, 그리고 베사리아는 잭스가 멘드레이크와 대치하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기 위해선 약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잭스가 회랑으로 들어가기 약 10분 전, 회랑으로 통하는 복도 중간.

 

 [그럴 리가 없소.]
 “네?”
 [그러니까 멘드레이크가 자발적으로 학회를 배신한 건 아니다, 이 말이오.]

 

 챔피언들이 협곡에서 무사히(어쨌든 목숨은 붙어 있다고 했으니까) 빠져나온 것도 담당 챔피언과의 연결이 다시 이어진 것도 베사리아에게 있어선 어둠 속의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일이긴 했다. 그게 정말 말 그대로 딱 한 줄기짜리 희망이라서 상황을 좋게 만들 가능성이 너무 작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잭스의 놀라운 발언이 베사리아에게 전해진 지금, 그 한 줄기짜리 희망은 어쩌면 역전의 발판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베사리아의 얼굴은 썩은 감자라도 씹은 것처럼 와지직 구겨졌지만 말이다.

 

 처음 잭스와 연결이 다시 이어졌을 땐 안도와 감사를, 그의 이야기를 듣고 멘드레이크가 이번 사건의 원흉임을 확신했을 때엔 절망을 느꼈던 베사리아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은 절망도 슬픔도 아닌 어이없음과 분노였다. 잭스는 분명히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는 아이 뺨 때리듯 그렇게 단칼에 딱 잘라 부정할 것은 또 뭔가, 사람 무안해지게. 지금 베사리아는 절망 따윈 이미 마음속에서 깨끗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건지 보자’라는 심정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자신감으로 멘드레이크가 자발적으로 학회를 배신한 건 아니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그리 당당하게 말하는 건지 베사리아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가는 말이 그다지 고울 리는 없었다.

 

 “그럼 자발적으로 학회를 배신한게 아니면 멘드레이크가 노망이라도 들었다는 건가요?”
 [차라리 그랬다면 일을 훨씬 수월하게 끝냈겠지. 불행히도 그건 아니고, 멘드레이크는 지금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소. 심신이 완전히 장악당한 채로 충성스런 꼭두각시가 되었다는게 올바른 표현이겠지.]

 

 조종당하고 있다고? 순간 베사리아는 멍청한 기분을 느끼며 몇 초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잠시 뒤 그것은 부글부글 조용히 끓어오르는 분노가 되어 베사리아의 입가를 뒤틀리게 하는 원흉이 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조용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상식으로 보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 말을 정리해보면 멘드레이크가 누군가에게 마법으로 세뇌당해서 이번 사건의 흑막이 되었다, 이건가요?”
 [뭐, 그렇게 봐도 되겠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요.” 베사리아가 잭스의 말허리를 자르며 짜증을 부렸다. “무슨 마법이 만능의 기적인가요? 자기 원하는 대로 타인을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편리한 마법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요. 설령, 정말 만에 하나 그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치더라도 멘드레이크 정도의 소환사가 그런 마법에 걸릴 확률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어요. 저나 그 정도 되는 소환사는 가지고 있는 항마력 자체가 압도적으로 높아요. 당신 말대로 그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할 확률은 정말, 조금도, 겨자씨만큼도 없단 말이에요!”

 

 베사리아는 마구 성을 내며 으르렁거렸다. 화를 낼수록 내상을 입은 몸 안쪽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욱신거려왔지만 그녀는 진통제를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환사이자 마법사였고, 그녀의 ‘상식’ 선에서 보자면 남의 정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마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 수 없었다. 인간의 정신이란 일종의 작은 우주였다. 마법으로 운석을 떨어뜨리거나 외계의 생물을 소환할 수 있는 수준의 소환사나 마법사는 있어도 우주 그 자체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베사리아는 희망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매만졌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정말 그렇다 해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뭘 하겠는가? 그의 말대로 앞으로 길어봐야 30분 내외로 해서 이 전쟁학회가 발로란 대륙에서 사라져 버릴텐데……. 일단 잭스가 폭탄의 위치를 물어본 것으로 봐서 뭔가 그걸 멈추거나 무력화시킬 노림수가 있는 모양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흑막이 멘드레이크로 확정된 이상 폭탄을 막는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베사리아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며 그녀의 마음에 다시금 절망의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잭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 좀 끝까지 들으시오. 멘드레이크가 조종당하는 것은 사실일 터이지만 그건 마법이 아니라 다른 힘 때문에 조종당하고 있는 거요.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의 힘이지. 기억해내기는 싫겠지만.]
 “?”

 베사리아는 얼굴에 가득 의문을 띄우며 도대체 잭스가 무슨 소리를 하나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강력한 정신 조종 능력? 베사리아는 그 좋은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 내에서 그런 것 따윈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알고 있었다면 진즉에 자신이 써먹었을 터였다. 예를 들면 잭스나 멘드레이크가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사실을 잊어먹게 한다던가…….

 

 “…….”

 

 희망이 다시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이런 시덥잖은 망상까지 할 여유까지 생긴 걸 보니. 그렇다고 온 몸이 욱신거리는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정말 기억나지 않는거요?]
 “미안해요. 기억이 잘…휴우! 잭스, 미안하지만 그냥 빨리 이야길 진행했으면 해요. 당신도 그렇겠지만 지금 저도 몸 상태가 별로 좋질 않거든요.”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두통에 내장을 탈수기로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유린하고 있었지만, 베사리아는 이를 악물고 진통제의 유혹을 뿌리치고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잭스와 수년 간 호흡을 맞춰 온 베사리아는 지금의 흐름으로 잭스가 일발 역전을 노려볼 수 있는 작전을 짜고 있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발역전의 한 수인만큼 엄청난 위험성이 뒤따를 작전이란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분명 그녀의 역할도 비할 데 없이 중요할텐데 이런 상황에서 감각을 무디게 하는 진통제 따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잭스는 뭔가 망설이는 듯 입맛을 다시다가 입을 열었다.

 

 [좋소, 이번 사건의 흑막은 에스트렐(Estrell) 일족의 생존자요. 우리가 저지른 죄업의 결과이자 과거의 망령이지.]

 잭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가 늘 들고 다니는 가로등 한 번 휙 휘두르는 것처럼 별 일 아닌 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그랬기 때문에 베사리아는 그의 목소리가 전하는 정보를 인식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에스트렐 일족. 그 끔찍하기 그지없는 단어는 농밀하게 그녀의 속으로 파고들어, 치명적인 독액처럼 그녀가 절대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옛 일들을 마구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거짓말.”

 

 베사리아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바라는 건 오직 딱 하나, 잭스가 ‘농담이었소’라고 심드렁하게 말해주는 것뿐이었다.

 

 [사실이오. 협곡 안에서 직접 들었소. 조종당하는 르블랑의 입을 통해서 말이지. 일단 확인된 건 나와 대화했던 그 한 명 뿐이지만…어쩌면 더 있을 수도 있소. 생존자가 꼭 한 명만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잭스는 잔인하리만치 처참하게 사실을 고했다. 마치 ‘네 죄에서 시선을 돌리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잭스의 태도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이게 잭스의 무서운 점이었다. 눈앞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으면 있을수록 더더욱 냉철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인과 전투에 미친 살인광이라든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든지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잭스는 그 반대였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행해왔던 모든 죄과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자였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정신력이었고, 끔찍할 정도로 자신을 갉아먹는 행위였다.

 

 “아냐…….”
 […….]

 

 하지만 베사리아는 잭스만큼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욱, 우웨에엑, 콜록, 콜록!”
 […미안하오. 괴롭게 해서.]

 

 잭스가 씁쓸하게 속삭였다. 그는 그 일이 베사리아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미안해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일, 에스트렐 일족에 관한 일이라면 미안한 쪽은 베사리아와 전쟁학회였다. 아니 애초에 미안한 걸로 끝날 문제도 아니었다.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용서를 구걸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용서를 받아줘야 할 대상이 용서를 빌다니, 베사리아는 토악질을 하면서도 자괴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약함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그 때의 일에 대해서. 그것은 전쟁학회의 가장 어두운 어둠이자 절대 세상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치부 중 하나였다. 평화와 질서를 위한다는 명목이 있다면 그 아무리 잔혹한 짓이라 해도 용서되는 때가 있었다. 에스트렐 일족에 관한 일도 그 중 하나였다. 평화라는 ‘올바른’ 목적 하에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그 수단까지 정당화 된, 끔찍하기 그지없었던…….

 

 학살.

 

 뱃속에 들어있던 위액을 모조리 토해내는 걸로 모자라 시뻘건 핏덩이까지 토해내고 나서야 베사리아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후폭풍은 그녀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밀려왔다. 마치 감히 네놈 따위가 진통제를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나 보자는 식으로, 녹슨 쇠갈고리로 내장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걸 견디어 내기 위해 베사리아는 자기가 뱉은 피 섞인 위액 위에 머리를 처박고 잠시 동안 몸을 웅크려야 했다. 위액의 시큼한 냄새와 타오르는 듯한 식도의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잠시 뒤 그녀는 로브 주머니에서 거칠게 진통제 통을 빼내더니 저 멀리 던져버렸다. 통, 통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진통제 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먹을 수 없었다. 먹어선 안 되었다. 상대가 그 에스트렐 일족의 생존자라면, 그녀가 저질렀던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라면 더더욱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그녀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알량한’ 양심의 속죄였다. 그것도 아주 야비한.

 

 [얘기를 계속해도 되겠소, 베사리아?]
 “…미안해요, 잭스. 부디 계속해주세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얘기를 계속 한다는 건, 뭔가 계획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물론이오.]
 “좋아요.”

 

 베사리아는 입가를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지금은 속죄해야 할 때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할 때였다. 이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주범이 정말로 그 에스트렐 일족의 생존자라면 그들 나름의 명분은 있었다. 복수라는 이름의 명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명분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전쟁학회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보여도 물밑으로 들어가면 국가 간의 알력을 조율하는 데에는 아직도 전쟁학회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아무리 전쟁학회의 이면이 추악하고 더러운 범죄로 점철되어 있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결코 깨끗하지 않을지라도…적어도 지금 이 발로란 대륙에는 전쟁학회가 반드시 필요했다. 베사리아는 이를 꾹 악물고 잭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양심이니 속죄니 하는 것은 잠시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둘 때였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하는 걸로 하고, 지금은 닥친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합시다. 그들만의 혈계전승*이 뭔지 기억나시오?]
 “목소리나 악기의 음파 등을 매개로 술식을 짜는 종류의 혈계전승이었죠. 기존 주류 마법과는 그 체계 자체가 아득하게 다른, 일종의 초능력. 그 중에서도 그들의 장기이자 가장 무서운 힘이 ‘세뇌’였죠.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은, 일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심는 능력…….” 베사리아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멘드레이크가 당한 것도 당연해요. 그들의 힘은 항마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의문이 있어요. 그 일족이 멘드레이크를 세뇌했다고 치면 대체 무슨 수로 그런 걸까요? ‘세뇌’에 한해서만큼은 반드시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했는데. 하지만 멘드레이크는 학회에 있을 때 빼고는 개인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정신나간 늙은이란 말이에요. 바깥출입도 몇 년에 한 번밖에 안하는 양반을 대체 어디서 만난건지…….”
 [이번 사건은 단기간 준비한게 아니라 적어도 년 단위에 걸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뒤에 벌어진 일이오. 그 정도 시간을 들였다면 어쩌다 멘드레이크가 바깥으로 나갔을 때를 노렸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겠지. 뭐 그렇다 해도 의문이 생기는 점은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일단 넘어갑시다. 우선 첫 번째로, 베사리아 당신은 회랑으로 가지 말아줬으면 하오.]
 “네? 어째서요?”

 

 베사리아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그를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회랑에 있을 법한 다른 소환사들에게도 기대를 걸긴 힘들었다. 회랑 쪽에서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들 역시 제압당한게 뻔했으니까. 의문을 표하는 베사리아였지만, 잭스의 다음 발언은 그녀에게 의문이 아니라 경악을 안겨주었다.

 

 [회랑 쪽으론 내가 가겠소. 나와 당신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소환사 주문의 효과 역시 유효하다는 뜻이겠지? 협곡 밖이라 무리가 좀 있겠지만 나를 그쪽으로 소환해주시오. 순간이동 주문이면 충분할거요.]
 “무슨 소리에요 대체?” 베사리아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당신 지금 자신의 몸 상태나 알고 있긴 해요? 당신 그 ‘푸른 불꽃’ 썼잖아요, 그것도 꽤 오랜 시간동안! 말 안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잭스?”
 [거 정말 쓸데없는 부분에서 눈치가 빠르군, 베사리아.] 잭스가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간다는거요. ‘푸른 불꽃’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는 당신 역시 잘 알고 있지 않소?]

 

 잭스의 그 말에 베사리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잭스의 ‘푸른 불꽃’은 외부로부터의 모든 ‘이능의 힘’을 태워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조잡한 디스펠 마법 따위의 수준이 아니라 ‘이능의 힘’의 근원이 되는 마력 자체를 태워버리는, 무시무시하고도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불꽃이었다. 에스트렐 일족의 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게 바로 10년 전에 그가 ‘에스트렐 일족 학살’에 관여하게 된 이유였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도 그의 ‘푸른 불꽃’은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발판이긴 했다. 우선 멘드레이크의 마법도 거의 무효화가 될 것이고, 혹시 모를 에스트렐 일족의 세뇌에도 자유로울 터였다. 솔직히 배후가 에스트렐 일족이라면 베사리아가 회랑 쪽으로 가는 선택은 거의 승산이 없었다. 그녀의 현재 몸 상태로 멘드레이크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반 이하의 확률이었다. 심지어 자칫하다간 그녀마저 세뇌당할 확률도 현저하게 높았다. 잭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세뇌’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특정 음파와 마력의 파장만 걸러내는 아주 강력한 마법의 수호물이 필요로 했는데, 지금 베사리아의 몸 상태로 그걸 만들어내기엔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택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불꽃을 한 번만 더 썼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잭스.”

 

 베사리아의 말에 과장은 없었다. 잭스가 오래 전 마지막으로 ‘푸른 불꽃’을 사용했을 때 그는 꼬박 한 달 동안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야 했다. 그런데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 불꽃을 다시 피워낸다고? 그것도 완전히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미친 짓이었다. 지금이야 멀쩡하게 이야기하고 있을지 몰라도 베사리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잭스의 상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에게나 보이는 회광반조에 가깝다는 것을…….

 

 [어차피 내가 이대로 소환실로 향해봤자 불꽃을 써야 하는건 매한가지요. 협곡 안에서 그 녀석이 말했거든, 소환실 쪽에 있는 마력 폭탄을 멈추려면 내 불꽃을 한계까지 집어넣어야 한다고. 하지만 내 몸 상태를 봤을 땐 그건 솔직히 무리요. 차라리 멘드레이크와 싸우는 쪽을 택하는게 훨씬 낫지. 그건 적어도 빨리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소?]
 “아주 철저하게 당신을 고통 속에서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네요. 그랬군요, 그래서 당신이 소환실로…….”
 [뭐, 그쪽 입장에서야 전쟁학회도 밉겠지만 그보다 내가 더 미울테니 말이오. 어찌되었건 그들을 마무리 지은 건 나니까.]
 “…미안해요. 당신에겐 늘 신세만 지네요.”

 

 베사리아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잭스가 불꽃을 쓰지 않고 이 일을 끝낼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 암울한 것은 그걸 쓴다 해도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할 수는 없었다.

 

 “당신을 제 위치로 순간이동 시킬게요. 준비해주세요, 잭스.”

 

 그녀는 결연하게 말하고선 품속을 뒤져 손톱만한 보석 하나를 꺼내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대비해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는, 평상시에 그녀의 마력을 조금씩 옮겨 둔 일종의 배터리였다. 최소 7년분의 마력이 담긴 그 보석 속에선 흉흉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멘드레이크와 마주했을 때 쓰려고 했던 비장의 수단이었으나, 잭스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려면 지금 써야 했다. 그리고 그를 돕기 위해 조금 더 무리하려면, 이걸 깨뜨려 사용하는 것 보다는 좀 더 위험한 사용법을 써야 했다.

 

 베사리아는 잠깐 숨을 들이키더니, 눈을 질끈 감고 보석을 삼켰다.

 

 지지지직

 

 “끄, 아……!”

 

 채 비명이 되지도 못한 신음소리가 베사리아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몸속에서 벼락이 치는 것만 같은 기분이 안그래도 만신창이인 그녀의 내부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보석 속에 있던 순수한 마력이 그녀의 전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터질 듯 메우고 있었다. 어찌나 그 마력량이 방대했던지 결국 피부를 뚫고 마력의 스파크가 튈 정도였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 몸 곳곳에서 피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베사리아는 사력을 다해 참아냈다. 잭스는 이 일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런 그를 놔두고 그녀만 살겠다고 꽁무니를 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놀려 좌표를 산출하고 순간이동 진을 그려냈다.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인 마력은 그를 소환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기에, 빛기둥 속에서 잭스가 나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고맙소.” 잭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리를 시키는군, 미안하오.”

 

 비록 말투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지만 피칠갑이 된 베사리아의 얼굴을 닦아주는 그의 손길은 상냥했다. 무뚝뚝함 뒤에 숨어있는 미안함과 상냥함. 오랜 시간 그와 인연을 맺어온 베사리아는 그걸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오히려 베사리아는 잭스를 걱정했다. 직접 마주하니 그의 상태가 연결로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로브는 거의 넝마 수준으로 갈가리 찢겨 있었고 드러난 부분마다 피딱지가 불에 타서 눌어붙어 있었다. 베사리아는 그런 그를 향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아마 지금 자신의 꼴도 잭스와 별반 다르진 않을 터였다.

 

 “기왕 한 김에 조금 더 무리를 해주시오, 베사리아.”
 “네, 좋을 대로 말해보세요. 컨디션은 최악이지만 마력 하나는 넘쳐흐를 정도로 있는 상태거든요.”

 

 베사리아는 이제 될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까짓거 여기서 아무리 더 심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당신은 내가 향하려고 했던 소환실로 가서 마력 폭탄을 막아주시오. 시동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후라면 멈출 수 있지 않겠소?”

 “후! 당신 말이 맞아요. 일단 가동하기 시작한 마법진은 움직이는 기계장치와 다를 바 없으니까요. 해제 열쇠가 되는 당신의 불꽃이 없다 치더라도 아예 통째로 정지시킨다고 치면, 어쩌면…….” 베사리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혼자서 뭔가를 중얼중얼거렸다. “그러려면 그 소환실의 시간을 통째로 동결시켜서 마법진의 움직임 자체를 봉쇄하는 수밖에 없어요.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 마력 폭탄의 내부 카운트야 어떻게 될 것 같지만, 멘드레이크가 눈치 채고 원격 기폭을 시킨다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시선을 돌릴 겸 시간을 벌어주겠소.”
 “기왕이면 제압해주세요. 그게 가장 나은 해결책이니까요.”
 “…노력해보겠소.”
 “아참, 그리고 한 가지 더.”

 

 베사리아는 회랑으로 향하려하는 그를 잠깐 멈춰 세우고서는 주문을 엮어 그에게 마법 하나를 씌워주었다. 잭스의 모습이 마치 물에 비친 형상처럼 크게 한 번 일렁거리더니 곧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잭스만큼이나 만신창이가 된 베사리아가 한 명 더 서있었다.

 “이건……?”

 “환영 마법이에요. 당신 모습으로 가는 것보다 제 모습으로 가는게 시간 벌기나 위치 잡기에 훨씬 용이할 거예요. 멘드레이크는 제가 갈 거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을테니까요. 적어도…당신이 싸울만한 거리를 잡고 불꽃을 일으키는 데까지는 그의 눈을 속일 수 있겠죠.”
 “정말 고맙…소. 큰 도움이 되겠군.”

 

 잭스가 말을 꺼냈다가, 자기 입에서 베사리아의 목소리가 나오자 움찔거렸다. 베사리아도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들으니 영 적응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폭탄이 터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아마 10분 남짓 될 거요. 위치는 알고 있겠지?”
 “모를 리가 있나요. 그것 때문에 한 방 먹었는데.” 베사리아가 배를 슥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마력 폭탄 카운트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멘드레이크가 원격 기폭만 못하도록 막아주세요. 제 쪽에서 완전히 일을 끝내면 연결로 당신에게 알려줄게요.”
 “알겠소. 행운을 비오, 베사리아.”
 “그래요.”

 

 베사리아의 모습을 한 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랑을 향해 달려갔다. 베사리아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낭만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베사리아는 털썩 주저앉더니 조용히 시뻘건 핏덩이를 한 주먹이나 게워냈다. 좌표만으로 실행한 순간이동 마법에 멘드레이크의 이목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환영 마법까지, 마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더라도 체력이 따라주질 않았다. 하지만 베사리아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잭스가 목숨을 걸고 있었다. 이 대륙 전체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상황에서 베사리아가 목숨을 걸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행운을 빌어요, 잭스.”

 

 베사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더 말하면 그의 앞에서 피를 쏟을까봐 하지 못한 한 마디였다. 닿지 못한 한 마디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베사리아는 소환실 좌표를 계산해 순간이동을 감행했다. 곧 그녀의 모습도 희미한 빛기둥과 함께 사라졌고, 그들이 있었던 복도에는 어두운 침묵만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그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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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1. 드디어! 올렸습니다. 이번 편은 좀 깁니다.

2. 잭스 도달 전, 베사리아와 만난 이야기입니다.

3. 클라이막스라 좀 더 세밀하게...다음은 잭스와 멘드레이크 결투씬이 될듯

4. 봐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5. 이게 미묘하게 끝날 듯 안끝날듯 안끝나네요 ㅎㅎ...

6. 재밌으시면 추천과 감상 코멘트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 재미없으시면 뭐...:6

8. 휴, 그래도 이렇게 쓰니 뿌듯하네요. 그럼 다음편에 다시 뵙겠습니다. 솔직히 정신이 좀 없어서 횡설수설하네요 ㅎㅎ;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