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검은 장미는 시들어 없어질 것 입니다.

{르블랑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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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도시에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미 평판이 의심스러운 도시들의 어둠은 얼마나 더 컴컴할까? 평판이 의심스러운 도시라면 역시 녹서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도시를 숭배해 마지 않지만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혐오하기도 하니까... 거대한 도시 녹서스의 지표면 밑에는 벌집 모양으로 뒤얽힌 깊고, 어둡고, 구불구불한 동굴이 존재하며, 이 복잡한 미로 속에는 온갖 종류의 범죄자들이 들어차 있다.

종교 단체나 마녀 협회 같은 비밀 단체, 특히 환술사 르블랑의 '검은 장미단'도 이곳을 자신들의 은거지로 삼았다. 검은 장미단이 뭐하는 단체냐고? 잘 모를 만도 하다. 이제는 잊혀 버린 부도덕한 역사의 잔재. 짧게는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그 옛날 아직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전의 녹서스에서 정치를 관장했던 마법사 집단이었다. 과거의 집권층이었던 이들은 요즘 통용되고 있는 마법과는 다른 음지의 마법을 연마하고자 비밀스러운 모임을 주선하곤 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표면적으로 녹서스의 통치권은 귀족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을 가졌던 것은 검은 장미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무예가들이 제국의 앞날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검은 장미단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은 종종 검은 장미단 단원들이 사회, 정치적 권력에 관심을 잃었을 것이라 추측하곤 한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검은 장미단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르블랑이 전쟁 학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추측이 틀렸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과거 정치권력의 핵심이었던 때처럼 무자비했고, 나이도 전혀 들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은 아주 명확해졌다. 이들, 그림자와 화염 마법의 대가들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새로운 권력 집단 '리그 오브 레전드'의 출현을!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수 없는 이들에겐 세상은 아주 다른 곳일 거야." - 환술사 르블랑

※알고 가기: 리그의 심판에서 르블랑의 본명은 '이베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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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라이엇이 만든 르블랑 스토리 입니다

이 아래부터는 이 스토리를 기반으로 제가

창작한 소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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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블랑.... 르블랑?... 르블랑? 에밀리아 르블랑!"

"아,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시죠 스웨인?"

우아하게 지팡이를 팔에 걸치고 상념에 빠져 서재에 앉아있던 르블랑은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려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깨에 기괴한 까마귀를 얹은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쇠약한 인상의 남성. 제리코 스웨인 이었다.

"몇달 전부터 당신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르블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러자 르블랑은 살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아니에요. 그나저나 제 걱정을 해 주시는 건가요 제리코 스웨인? 당신은 제 걱정보다 군부 장군들을 구워삶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때이기에 더더욱 르블랑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선 안됩니다."

짐짓 장난끼 어린 르블랑의 말에도 스웨인은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감정없는 그의 반응에 르블랑은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멘틱하지 않으시네요~"

"네?"

"난 로멘틱한 남자가 좋던데. 마치... 이 장미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르블랑이 서재 탁자 꽃병에 꽂혀있던 화사한 흑장미를 우아하게 집어들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어이없어하는 스웨인의 반응이 어떻든 르블랑은 다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

..

...

떡, 털그럭. 떡, 털그럭.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언제나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창살을 통해 들어와 속삭이듯 부서져 내리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깬 이베인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싱긋 미소지었다. 아직 잠이 덜깬 듯 기우뚱 거리던 그녀는 퍼뜩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다듬는 등 이리저리 치장한 다음 수건과 물통을 들고 오두막집의 문을 활짝 열었다.

"슈, 오늘도 온거에요? 정말... 이렇게까지 안해줘도 되는데..."

오늘 아침도 역시 그가 와 있었다. 테이슈가 추운 날씨에도 비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장작을 패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이베인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테이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이베인을 바라보았다.

"웬일로 일찍 일어났네? 좀 더 이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저, 저도 가끔은 일찍 일어난다고요."

이베인이 짐짓 뾰루퉁한 표정을 짓자 테이슈는 귀엽다는 듯 미소짓고는 다시 장작을 패는 일에 열중했다.

떡, 털그럭.

이베인은 작은 오두막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여자만 둘이었에 산에서 장작을 구해오기도 힘들었고 그걸 도끼로 패는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물론 못 할 것은 없었으나 테이슈는 언제나 이런건 남자가 해야 하는 일이라며 이베인 모녀를 대신하여 매일같이 이렇게 장작을 해와서는 패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장작을 패면서 테이슈가 입을 열자 이베인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테이슈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로 이베인을 슬쩍 흘겨보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도 아름답네 이베인."

"뭐...뭣? 뭐에요 갑자기 생뚱맞게! 장작 다 팼으면 어서 씻고 오기나 하세요. 어머니가... 이번엔 꼭 아침식사를 드시고 가라고 하셨으니까요."

테이슈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이베인은 가지고 나온 물통과 수건을 던지듯 그에게 팽개치고는 쿵쾅거리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가까스로 물통과 수건을 받아낸 테이슈는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귀엽다니까... 그건 그렇고, 그분도 슬슬 마음을 열어주시는 건가?"

이베인의 어머니는 테이슈를 싫어했다. 지금은 집에 없었으나 집에 있을 때에 테이슈가 찾아와도 얼굴 한번 보인적이 없었으며 이베인과 테이슈가 멋대로 약혼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크게 분노하여 테이슈를 불태워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었으나 이베인이 필사적으로 막아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통구이가 될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도 테이슈는 최소 이틀의 한번꼴로 아침 일찍 오두막집을 찾아와 이렇게 이베인과 이베인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장작을 패주고 있는 것 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테이슈를 싫어하던 이베인의 어머니가 테이슈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라고 일렀다니 분명 테이슈에게 질렸거나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검은 장미?"

이베인이 대접한 식사를 마치고 오두막집을 나서려던 테이슈는 이베인이 건네는 흑장미를 받아들었다. 너무나도 붉다못해 검은색을 띄는 이 장미는 그윽한 향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의문을 표하는 테이슈에게 이베인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슈에게 드리라고 주신거에요. 그동안 박대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인 것 같아요."

그녀는 테이슈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살짝 묻었다.

"드디어 어머니께서 슈와 저의 관계를 인정해 주실 모양이에요. 너무 기뻐요."

오후가 가까워진 오전이었기에 마을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탁 트인 오두막집 앞에서 다정하게 자신에게 안기는 이베인의 행동에 테이슈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으나 이내 마주 안아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정말 기뻐. 이베인, 정말 사랑해."

"...저도요."

테이슈의 가슴에서 얼굴을 뗀 이베인이 테이슈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테이슈 또한 이베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던 그때 불청객이 나타났다.

"에헴, 저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앗, 아, 그, 저... 안녕하셨습니까?"

"어... 어머니"

헛기침을 하며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둘을 노려보는 중년 여성의 이름은 카린. 이베인의 어머니였다. 중년의 여성이라고는 하나 그 행동에는 기품이 서려있었고 마음속까지 꿰뚫어볼 것만 같은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하였다.

"그,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아, 선물해주신 장미꽃 감사합니다."

테이슈가 잔뜩 긴장하여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들려있던 흑장미를 가리키자 갑자기 카린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세요. 앞으론 제가 당신에게 선물을 줄 일은 없을테니 말이에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갑자기 상냥해진 카린의 분위기에 얼떨떨해진 테이슈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는 이베인에게 살짝 눈짓을 하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이베인 또한 테이슈에게 애틋한 눈인사를 하며 하염없이 테이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카린의 나긋나긋하지만 날카로운 호령이 떨어졌다.

"뭐하는거냐 어서 들어오지 않고?"

"...네 어머니."

이베인은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멀어져가는 테이슈의 뒷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남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고 평소라면 추가로 이베인을 채근하는 말을 했을 카린은 웬일로 조용히 오두막집으로 들어섰다. 그런 카린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카린은 마법사였다. 하지만 다크윌 가문과 같이 녹서스에 정식으로 소속된 마법사는 아니었다. 바로 녹서스의 뒷편에 존재하는 거대한 마법사의 집단. 검은 장미단의 마법사였다. 검은 장미단은 한때 녹서스가 지금의 군부사회가 아닌 귀족사회일 때에 뒤에서 귀족들을 조종하며 실질적으로 녹서스를 통치하던 마법사 집단이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검은 장미단은 건재하게 살아있었다. 아니, 예전보다 더 강한 힘을 구축한 채 녹서스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장미단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녹서스 사회 이곳 저곳에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었다. 카린 또한 그런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마을의 오두막집에서 정체를 숨기고 그저 3류 마법사인척 제작한 마법약을 팔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베인은 어렸을때부터 어머니에 의해 마법사로 길러졌다. 성인이 된 직후에는 자연스럽게 검은 장미단의 일족으로 받아들여졌고 때문에 이베인 또한 어머니인 카린과 함께 검은 장미단의 마법사였다. 하지만 이베인은 마을 목수의 아들 테이슈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그저 어머니에 의해 수동적으로 검은 장미단의 마법사가 되었지만 테이슈와 사랑이라는 감정이 피어나며 평범한 삶을 갈망하게 된 것이었다. 카린의 입장에선 테이슈는 자신의 딸을 망쳐놓은 사람밖에 못 되었고 그렇기에 그렇게 테이슈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런 카린이 갑자기 테이슈에게 호의를 보이며 검은 장미단의 마법사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검은 장미까지 선물하자 이베인은 얼떨떨한 느낌도 받았지만 그간 테이슈가 보인 지극정성에 냉막한 어머니도 마음을 조금 연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밤 이베인은 카린이 들고 온 이례적인 소집령에 카린과 함께 검은 장미단의 본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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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에 희미한 등불에 비쳐, 돌과 회반죽으로 다져진 양쪽 벽이 보였다. 이곳은 지극히 어두운 곳이었다. 어둠과 함께 몰려오는 한기에 이베인은 겉옷의 양 끝을 당겨 검은 장미 모양으로 조각한 오닉스 벨트로 여몄다. 멀리서 간헐적으로 물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항상 그랬듯 오래된 곰팡내가 터널 전체에 가득 차 있었다. 이례적인 전체 소집인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고 이 무리의 한참 뒤편 거의 터널의 시작부분에 서 있던 이베인의 곁으로 행렬 하나가 지나갔다. 그 행렬중에는 어둠에 가려진 형체 하나가 어기적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형체는 저 앞 터널 끝이 넓어져 방처럼 된 어둑한 공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 형체가 지나갈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섰으며 마침내 자리에 도착한 형체는 어두운 로브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르블랑 이시여."

"르블랑을 뵙습니다."

늙은 노파 한명이 르블랑의 이름을 높이자 나머지 모든 검은 장미단의 마법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르블랑을 받들었다. 에밀리아 르블랑(Emilia LeBlanc). 검은 장미단의 수장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는 자의 칭호였다. 그녀의 손에 쥔 기다란 지팡이의 끝 부분에는 세개의 아름답게 컷팅된 수정들이 신비롭게 고정되어 떠 있었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에도 비슷한 수정 장식을 중심으로 세갈래 금빛이 휘어져 뻗어나가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지친 모습이었다. 르블랑 앞에 모인 무리 중 두건을 덮어쓴 늙은 노파 한명이 한발짝 앞으로 나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르블랑 이시여, 우릴 불러모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시기적으로 검은 장미단이 이렇게 대규모로 회합을 하기엔 위험합니다."

르블랑이 고개를 살짝 들자 모두가 그녀의 입에 이목을 집중하였다. 이윽고 르블랑의 입이 열리고 뭔가 대답하려 했으나 갑자기 숨이 턱 막힌 듯 기침을 해대었다.

"... 컥, 쿨럭 쿨럭!"

황급히 피묻은 손수건을 꺼낸 르블랑은 기침이 멎을 때까지 자신의 입을 손수건으로 가렸다. 그러자 모인 무리들이 조금씩 술렁였고 한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킨 르블랑은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기운은 없지만 떨림없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형제자매여. 여러분을 소환한 이유는 내가 늙고 병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난 흙으로 돌아가게 될 거에요."

그러자 잠시 조용해졌던 무리들이 다시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르블랑은 다시금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킨 다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 단체의 수장 자리를 물러날 때가 되었군요. 쿨럭, 쿨럭!! 쿨럭!"

방금 전의 기침보다 훨씬 커다란 기침소리가 터널을 울렸고 손수건에 묻어있던 피의 농도가 짙어졌다.

"여러분 중에 뛰어난 가능성과 지도력을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재능도 출중하지만, 야망과 충성심도 견줄 데가 없는 분이죠."

이렇게 말을 이은 르블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장식된 아름다운 머리핀을 머리카락에서 빼냈다. 그러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환영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기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사라지고 늙고 병든 노파가 자리했다. 그녀는 기존의 부드럽고 매끄럽던 피부가 아닌 건조하고 주름진 손을 들어 말석에 서있던 이베인쪽으로 뻗었다.

"이베인, 이리 나와 명을 받으세요."

오래된 마법사도 아닌 20대밖에 되지 않는 이베인이 호명되자 무리가 또다시 약간 술렁였으나 금방 고요해졌다. 르블랑의 판단과 명령은 지엄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이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르블랑의 판단을 인정하고 물러서며 이베인이 걸어나올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베인은 경악하며 이 사실을 인정 하기 힘들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머니인 카린을 바라보았으나 카린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인 듯 침착한 표정으로 이베인을 재촉하며 속삭였다.

"지금 뭐하는 것이냐, 르블랑께서 하신 명령이다. 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해?"

이베인은 복잡한 표정으로 르블랑의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행렬을 지나갈때 무리들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러가지 감정이 한데 뒤엉켜 혼란스러워 하던 이베인은 이윽고 르블랑의 앞에 다다랐다. 르블랑은 자신의 머리에서 벗긴 머리핀을 멍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베인의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에 꽂아주었다. 그리고 지팡이도 마저 손에 쥐어주며 쇠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뭔가 신기한 느낌이 들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이베인의 청초하고 유순한 인상의 외모가 르블랑의 머리핀과 지팡이를 받은 그 순간 고혹적이고 범접하기 힘든 고고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외모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직후 일순간 자신의 머리에 물밀듯 스며드는 수많은 기억의 소용돌이에 깜짝 놀란 이베인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이베인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르블랑 주변에 있던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려고 했으나 르블랑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이베인, 그대에게는 역대 르블랑들이 가지고 있던 환술의 마력과 기억이 전승되었어요. 그리고 그 기억을 받은 이상, 당신은 더이상 르블랑의 직함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가까스로 머리를 울리는 기억의 소용돌이가 완화되자 이베인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르블랑이시여... 저는... 저는... 그런..."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하고 계시는 건가요?"

이베인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싶었으나 이베인을 바라보는 르블랑의 움푹 꺼진 눈에는 강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베인이 그저 떨리는 눈으로 르블랑을 응시하고 있자 표정을 굳힌 르블랑은 고개를 들어 이베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카린에게 눈길을 돌렸다.

"집행자 카린. 제가 르블랑으로서의 마지막 소임으로 부탁한 일은 모두 끝났나요?"

"예. 르블랑이시여. 새로운 르블랑을 추대함에 있어 기존의 이베인을 아는 자들은 걸림돌이 되기에 그들 전부에게 검은 장미의 표식을 남겼습니다. 곧 척살조가 그들을 모두 처리할 것입니다."

르블랑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고 새로운 르블랑이 탄생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이베인은 카린이 한 말의 뜻을 파악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카린을 바라보았다.

"어...어머니 검은 장미의 표식이라뇨? 저를 알던 자들이 척살되다뇨? 그럼 슈에게 장미를 준것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던 카린이었으나 그녀의 표정에 살짝 안타까움 이라는 감정이 묻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이베인을 일으켜 세우며 조용히 말했다.

"말씀을 낮추세요 르블랑이시여. 이제 전 어머니가 아니라 카린입니다. 당신은 저희들의 수장이며 검은 장미단 그 자체이십니다. 더이상 그 외의 과거에 휩쓸려 계시면 안됩니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으아아아.... 내가... 내가 그 장미를... 내가 내 손으로 슈에게..."

"르블랑이시여! 왜그러십니까!"

"르블랑이시여!"

이베인. 아니, 이제 르블랑이 된 그녀는 갑자기 미친듯이 울부짖기 시작했고 그곳에 모여있던 마법사들은 당황하여 끊임없이 르블랑의 이름을 불렀다.

.

..

...

새로운 르블랑을 추대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신임 르블랑의 폭주는 갑작스럽게 몇백년의 기억을 한번에 받아들인 르블랑의 혼란에 의해 그녀의 마력이 날뛰었던 것으로 처리되었고 이는 역대 르블랑의 추대식에서 종종 일어나던 일이었기에 검은 장미단의 마법사들의 기억에서 금방 잊혀졌다.

바스락

르블랑의 손에 들려있던 흑장미는 갑자기 무언가에 생명을 빼앗긴듯 생기를 잃고 시들더니 이내 바스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르블랑? 제 말 듣고 있습니까?"

"아아 죄송해요 제리코. 제가 지금 다른 생각을 하느라 듣질 못했군요. 다시한번 말씀해 주시겠나요?"

스웨인은 낮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서 르블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생기를 잃고 바스러져 떨어진 검은 장미를 집어들었다.

"르블랑. 방금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몇달 전부터 상태가 상당히 불안해 보입니다. 장미를 가지고 로멘틱을 운운하시는 등 성격도 미묘하게 바뀐 것 같고 말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족을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는 검은 장미를 갑자기 바스러뜨리다니... 설마 검은 장미단을 부흥시키고자 하던 생각이 사라진건 아닌..."

진지하게 말을 잇던 스웨인은 르블랑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 말을 멈추었다. 그는 이 고혹적인 미소를 잘 알고 있었다. 스웨인에게 처음 르블랑이 나타나 녹서스의 사령관이 되어보지 않을 테냐고 제안 했을때 지었던 그 미소. 그리고 그 미소가 지금 르블랑의 얼굴에 다시 자리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르블랑 당신이 그럴리가 없지요. 당신의 그 미소를 보니 그때의 그 르블랑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아무렴요. 제가 바뀔리가 있나요? 르블랑은 르블랑일 뿐."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르블랑은 스웨인이 집어든 말라비틀어진 검은 장미를 우아한 손짓으로 자신의 손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제가 전쟁학회에 발을 딛고 제리코 당신이 사령관이 되면 검은 장미단은, 다시 피어날 것 입니다. 하지만... 과거를 척살하는 검은 장미는 언젠가 시들어 없어질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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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의 [리그의 심판/르블랑] 내용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