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름달이 지는 밤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천장으로 들어오는 환한 달빛에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보름달이 오늘따라 더욱 환하게 느껴져 남자는 로브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남자는 밝은 달빛 아래에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일하는 도중에 환한 달빛이 저를 비추면 마치 누군가 저의 모습을 지켜보는 오묘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철커덕 철커덕, 무거운 중갑소리가 고요한 밤을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주위에 수십의 병사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남자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너무 요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면, 그동안 죽였다고 생각한 경비들 중 하나가 숨이 붙어있어 도움을 요청했다던가. 아아, 나도 아직 한참 물렀군.

 

자신의 경솔함으로 벌어진 일을 자책하며 남자는 병사들 뒤에 근엄하게 서있는 자신의 목표를 노려보았다. 높은 선반위에 서서 중갑으로 자신을 보호한 체 버러지 보는 눈빛으로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데마시아의 귀족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치려해도 소용없다! 보시다시피 수십의 병사들이 나를 지키고 있고, 출구 역시 수십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지. 너의 패배다! 이름 없는 자객이여.”

 

아무리 세력이 큰 귀족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단기간에 병사들을 집결시킬 순 없을 텐데, 이상하군.”

 

내가 이번에 전쟁학회에서 데마시아 대표로 회의의 참관한다는 소식이 만연한데, 이정도 대비도 해두지 않으면 어찌 영광스런 데마시아의 귀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하하.”

 

, 그런 거였나. 귀족의 말에 남자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지게 된 상황이 아니라는 것,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럼, 즐겨야지.

 

남자는 두어 번 목을 풀고는 병사들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며 그들을 도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노골적인 도발에 함성을 지르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병사들, 모든 것은 남자가 원하는 대로였다. 병사들의 창이 남자의 몸을 꿰뚫는 순간, 남자의 몸에서 터져 나온 수백의 칼날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병사들을 난도질 했다. 갑자기 벌어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황에 귀족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무슨?!”

 

준비를 하기 전에.”

 

목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분명 병사들 창에 난도질 되었어야할 자객이 자신의 뒤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목이 그어지고 선명한 혈흔이 솟구친다. 목표가 된 귀족이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서서히 무너지는 광경을 남자는 즐기고 있었다.

 

최소한 누가 올지는 생각해보고 준비 했어야지.”

 

자신의 볼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내며 남자는 내리는 달빛을 피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2.

 

서리 맺힌 가지들 사이로 주황빛이 물들어온다. 빛을 반사하며 어둠에 물들길 거부하는 눈길위에 멈춰 선체 퀸은 시야를 가린 후드를 살짝 들었다. 산등선이 너머로 가라앉는 노을이 하늘을 서서히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루터기에 몸을 기댄 체 주머니에서 성냥더미를 꺼내들었다. 제법 오래된 성냥더미에서 성냥하나를 빼들어 담뱃불을 붙이려던 퀸은 이내 빠른 손놀림으로 허리춤에 붙들어 놓은 석궁을 빼들어 날카로운 동작으로 한곳을 겨누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임에도 그녀의 행동은 정해진 대로 깔끔했고, 얼굴에는 전혀 당황의 기색 없이 침착했다.

 

석궁의 가늠쇠 너머로 한쪽 머리를 붉게 염색한 젊은 여성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들어 보인다. 화살촉이 저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 여유를 아는 여자, 그녀는 퀸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피오라, 내가 분명히 몰래 다가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몰래 다가오기는, 내가 언제 몰래 다가왔다고 그래? 너야 말로 그렇게 아무 때나 막 무기 겨누는 버릇 좀 고쳐, 너 일전엔 자르반에게도 그랬다며? 그러다 언젠간 큰 사고하나 칠지도 몰라?”

 

신경 쓰지 마 버릇이니까,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퀸의 모습에 피오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앞에서 번뜩이는 화살촉을 보고도 그런 소리해봐라, 라고 반박할까도 해봤지만 눈길에 떨어져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성냥 더미를 주워들며 어떻게는 다시 활용해보려는 퀸의 모습에 이내 체념했다. 어차피 핀잔을 준다하더라도 그녀는 한귀 흘려들을 것이다.

 

피오라, 혹시 남은 성ㄴ….”

 

오 제발 퀸, 내가 너처럼 골초라는 생각은 버려줄래? 그리고 이제 그만 담배 좀 끊어, 너 황실에서 금연령 떨어진지가 언젠데, 지금 이거 걸리면 징계 감이라고?”

 

단호한 피오라의 말에 퀸은 이내 혀를 차며 아쉽다는 듯이 마지막 담배를 다시 허리춤에 챙겨 넣었다.

 

발러는?”

 

풀어줬어.”

 

풀어줘? 니가? 발러를?”

 

글쎄.”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허공을 보며 설렁설렁 대답하는 퀸의 모습에 피오라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언제나 각이 잡혀있는 보통 데마시아 군인들에 비해 퀸은 언제나 자유분방했으며 무례했다. 몇몇 특수임무들을 제외하면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으며 담당 상사가 아닌 이상 그녀가 존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전에 황궁에 연회가 있을 때 저의 시중을 들라던 귀족의 급소에 발길질을 가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로써 그 이후로 퀸이 황궁 내에서 여러모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피오라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런 골초에 성격파탄자가 국민들에겐 데마시아의 날개라 불리며 영웅으로 칭송받는다니, 라며 피오라가 한탄하고 있을 찰나, 바람을 가르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 너머에 작은 점이 비상했다. 성인의 머리통만한 매였다. 피오라의 시선을 따라 퀸도 하늘 위를 유유히 부유하고 있는 매를 바라보았다.

 

왔네.”

 

정찰 보냈으면 정찰 보냈다 말하면 되지 그게 뭐가 어렵다고.”

 

마지막으로 사냥감이 있나 없나 살피려던 것뿐이야.”

 

뭐야, 사냥? 그럼 고작 사냥을 하기 위해 바보같이 이 겨울에 설산을 오를 생각을 했단 말이야? 애초부터 이런 설산에 사냥감이 있을 리가 없잖아?”

 

피오라,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쓰면 지는 거야. 아니면 벌써 노처녀 히스테리가 찾아온 건가?”

 

노처녀라니 누가 노처녀라는 거야! 이를 악물고 으르렁 거리는 피오라를 뒤로 한 체 퀸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퀸의 머리위로 커다란 매가 천천히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다. 퀸이 허공으로 오른손을 뻗자 그녀의 머리 위를 맴돌던 매가 이내 활강하며 오른팔에 자연스레 안착한다. 마치 자석과도 같이 자연스럽게 퀸의 팔에 안착하는 발러를 보며 피오라는 마음속으로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미 몇 번이나 봤었던 장면이었지만 언제 봐도 신기한 장면이었다.

 

데마시아산 매는 본래 낯을 많이 가려 사람들을 피하고 심할 경우엔 공격까지 하는 부류이다. 게다가 최근엔 그 종의 수가 급감하여 거의 멸종위기라 알려져 있는 새인지라 발러와 같이 야생에서 태어난 새라면 사람에 대한 경계가 매우 강해야 정상일 탠데. 퀸의 손에 안착한 발러라는 매는 전혀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람마다 차별 점은 있지만.

 

몇 번이나 보는 거지만. 여러모로 신기하네.”

 

?”

 

아냐, 아무것도.”

 

피오라의 말에 퀸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팔에 들린 발러가 퀸의 손가락에 맞춰 어리광을 떠는 것을 보며 피오라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얼마 전에 잠깐 스킨십을 시도해봤을 땐 분명 엄청 난폭하게 굴어서 두세 차례 물린 후에야 결국 자리를 피할 수밖엔 없었는데. 역시 주인이라 그런가.

 

무슨 일이야?”

 

?”

 

여기까지 찾아온 이. .”

 

한심하다는 퀸의 눈빛에 피오라는 짧은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전환했다.

 

크흠! 상부에서 명령이 있었어. 어제 밤, 남부에서 간부들 중 하나가 살해당했거든. 물론 암살자는 놓쳤고, 지금으로썬 암살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야. 유일한 정보는 지금 암살자의 경로로 추정하건데 이곳을 지나갈 거란 확률이 높다는 것뿐이지.”

 

그러니 그 신원도 모르고, 위치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암살자의 체포를 나한테 맡겨라?”

 

물론, 반드시 완수할 필요는 없어. 사실상 이미 상부에선 암살자의 체포를 포기한 상태야, 목표를 깔끔하게 제거하는 것에서 자신의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우는 것부터가 상당한 실력자로 추정되거든. 시간은 시간대로 많이 흐른 것도 있고. 다만 이대로 당하기만 하면 아무런 수확이 없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인거지.”

 

, 상관없겠지. 다 됐고, 어디까지 허용돼?”

 

어디까지라니?”

 

석궁을 치켜들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퀸의 물음에 피오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 의문은 복잡할 것도 없었다. 퀸이 바라는 대답은 지나치게 간결했다.

 

죽여도 돼?”

 

  

 

 

  

.

  

 

  

망상력 터져서 쓴 글입니다. 뒷부분이 더 이어질지는 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