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vp는 제외했습니다)



 * 재미 없는 힐, 정체성 없는 성직자


 대부분의 게임에서 메인 힐은 즉발형이었습니다.

 직접 아군을 선택하거나,

 아군이 위치한 방향으로 회복 기술을 쓰거나,

 비록 범위는 좁지만 전 방위 원형 내 아군에게 사용하거나..


 따라서 힐러는 파티원 상태가 어떤지 늘 신경써야 했습니다.

 체력 상태가 어떤지.. 위험한 상태 이상에 걸렸는지.. 등등.


 그리고 적절하게 대응하여 파티원의 상태를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파티원의 전선 이탈은 물론 심하게는 인던 실패까지도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파티원은 힐러가 무엇을 하는지 염두에 두어야 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파티원의 상태를 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힐러도 파티원을 늘 신경써야했고,

 파티원은 힐러가 무엇을 하는지도 역시 신경써야 했습니다.


 힐이 즉발형이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힐러와 파티원이 서로 상호작용하라는 그런 의미도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파티 플레이가 파티 플레이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탱커가 힐러를 믿기 때문에 탱커는 체력이 고무줄처럼 늘고 줄어도 굳건하게 전방에 서 있을 수 있고,

 딜러가 힐러를 믿기 때문에 딜러는 안심하고 최대한의 딜을 넣으며,

 힐러는 파티원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적의 위협을 무효화했습니다.


 파티원은 힐러를 신뢰해야했고,

 힐러는 파티원의 신뢰에 보답하는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게임에서 메인 힐은 즉발형이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힐러로 플레이했던 분들의 자랑스러운 경험담은 이런 환경에서 나오곤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 그에 적절하게 맞춘 플레이로 넘긴 위기. 

 이럴 때 파티원은 힐러를 칭찬했고, 힐러는 다시 최선을 다했습니다.



 반면에 트오세의 힐은 장판형입니다. 

 매스힐이 있지만, 매스힐은 여러 이유 때문에 주력 회복 수단이 되기 어렵습니다.

 (프리스트 3랭의 매스힐 10렙까지 가야 비로소 주 회복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

 선딜 때문에 회복 명중이 어려운 점, 범위 및 사거리 문제로 인한 어려움 등)


 힐이 장판형이기에 파티원은 힐러를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교전 직후, 힐러는 전장 주변에 힐 장판을 깔아두는 것으로 힐러의 역할은 끝납니다.

 따라서 파티원은 힐러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둘 필요가 없고,

 파티원은 힐 장판이 어디있는지만 알면 되었습니다.

 
 /* 약간 다른 이야깁니다만,

 재미있는 점은 파티원은 매스힐보다 힐 장판을 더 선호합니다.

 힐 장판은 힐러를 신뢰할 필요가 없지만,

 매스힐은 힐러를 믿어야 하거든요.

 그 자리에 계속 있어줄 힐 장판과,

 명중 문제로 힐러를 믿어야 하는 매스 힐.

 어느 것을 믿겠습니까. */


 반면에 힐러도 파티원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단이 극도로 빈약하다보니

 힐 장판을 깔고 나면 파티원이 위기에 처해도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파티원 체력은 줄어가는데,

 힐 장판은 애저녁에 깔아버렸고, 쿨 48초짜리 세이프티까지 쿨 돌고 있으면..

 힐러가 할 수 있는 것은 발구르기 뿐입니다. 발만 동동 굴렀다가 파티원 눕는 것을 감상하면 되지요.

 (뭐 리바가 있긴 한데 그런 건 무시합시다. 이 게임, 힐러하면서 한 두 번쯤은 있었잖아요)
 

 힐 장판 두 번 깔고,

 버프 몇 개 돌리고 나면 힐러의 역할은 끝입니다. 

 채플린이 아니면 평타 딜도 아예 없는 수준이라 뒤에서 팝콘 뜯어도 클리어 타임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지요.

 물론 채플린 평타 딜도 인던에서는 무시되는 딜이긴 합니다.


 따라서 힐러도 파티원에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어집니다.


 
 결국 흥미롭게도 파티원은 힐러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힐 장판을 신뢰하며,

 가장 상호 작용이 높아야 할 힐러 또한 파티원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괴이한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게임은 힐러 설계로는 실격입니다.

 근본적으로 힐 장판이 파티원과 힐러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어서,

 파티원도 힐러도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고레벨 힐러들이 재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 기인합니다.

 (힐 주는 느낌이 없다고 하지요, 보통)

 
 당장에 저만해도 힐러를 주로 했던 유저였는데 

 파티원이 죽으면 죄책감이 들어서 처음에 르귄에서 돌때 파티원 죽을 때마다 사과했던 제가..

 이 게임하면서 이젠 죄책감 같은 것이 사라졌습니다. 네가 장판을 못 밟은 것. 이렇게 되버렸습니다.

 심지어 책임감도 사라졌고요. 가끔은 힐러를 하고 있는지 정체성 의심도 합니다.

 내 피가 파란 색인 것인지.. 이 게임이 이렇게 만든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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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힐이 왜 이렇게 설계되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힐 장판을 깔고 다른 능동적인 플레이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죠. 


 힐 쿨은 길고, 장판 두 번 깔고 나면 시간이 꽤 많이 남거든요.

 따라서 이 사이에 다른 어떤 플레이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마도 개발자분들은 성직자를 설계하면서,

 유저들이 극보조만 타기보다 여러가지 클래스를 섞은 하이브리드 형태의 빌드를 완성하길 바랬던 것 같고.

 이벤트 돌아가는 걸 봐도 퓨어 보조 계통 유저들은 배려를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게임 특성상 마음대로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다보니까

 일반적인 힐일 경우에 발생하는 플레이의 자유를 해칠 수도 있다고 본 것 같고요.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중간 랭크 단계의 대부분 클래스들은 아군 보호와는 거리가 다소 멉니다.

 힐이 클레릭과 프리스트, 플닥을 빼면 나머지 11개 클래스는 힐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플닥의 힐링팩터도 조건 때문에 일반적인 힐처럼 쓸 수 없어서

 힐이라고 할만한 스킬은 힐과 매스 힐, 이 둘 뿐입니다.


 왜 클레릭의 3~6랭까지 개성이 팍팍 튀는지는

 이런 원칙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보조직군의 프리스트는 수동적인 설계의 극치를 달립니다.

 공격 스킬을 가진 크리비는 자이바스 쓰고 나면 역시 할 것이 없었고,

 딥디는 차라리 조각상을 메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할 정도로 조각상으로 파티 보조가 원활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사두, 팔라, 몽크 등등도 하나씩 아니 둘 이상 문제 투성이입니다.


 그나마 2랭 이후부터 괜찮은 것이 플닥 하나.

 그래서 많은 성직자 플레이어들은 1~6랭을 1, 2랭으로 절반을 채우다가(혹은 전부를)

 7랭에 플닥 찍는 것으로 빌드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중간 랭크의 클래스들이 하나같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거든요.


 단적인 예로 보조 클래스만 모조리 탄 성직자는 보조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버프가 대부분 쓸모 없고, 유용한 것은 생존형 버프인데 그것도 지금은 필요치 않고요..

 세이프티를 제외하면 적극적으로 무언가 뛰어서 보조할 수 있는 수단조차도 없습니다. 

 최소한 프리스트에라도 적극적인 개입 수단을 넣어줬어야 했는데 전혀 없어요. 

 결국 힐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보조 수단을 모조리 빼고 딜링 위주로 채워도 그 역할도 애매모호합니다.

 딜을 극대화할 수단이 아예 존재치 않고, 타수 제한이라는 괴상한 제한까지 걸려있어서

 딜레릭이 나중가서 파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수단이 딜이 아니라 힐과 무적이라는 점은 

 복잡 미묘한 생각까지 들게 하지요.


 딜은 안 되고, 

 탱은 도발 수단이 없으니 안 되고,

 보조도 뚜렷하게 파티를 지원할 수단이 없고.


 결국 현재의 성직자는 힐만 남았습니다. 

 근래의 거듭되는 패치도 왠지 죄다 자르고 힐만 남기는 느낌도 들고요.

 심지어 파티원도 성직자에게 바라는 것이 힐 말고는 없어서

 트갤 같은데서 가끔 봐도 성직자는 힐 장판이나 잘 깔아라 이 수준입니다.

 
 힐 장판을 설계하고 그 의도는 좋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의도를 유저가 활용할 방안을 쥐어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힐 밖에 없네요. 


 개발자님이 보고 계신다면,

 성직자에게도 힐 뿐만 아니라 성직자에 걸맞는 다른 정체성도 배려해주셨으면 합니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