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간이 없는 5층 높이의 외벽 통로. 놀 워리어들은 리시타를 노리고 - 혹은 티이를 노리고 - 점점 거리

 

를 좁혀왔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2마리. 통로의 넓이는 그럭저럭 양발로 넉넉하게 걸어갈 사이즈는 

 

되지만 전투에는, 더군다나 티이를 안아들고 있는 상태로 녀석들을 상대하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않았

 

다. 거기에 티이를 잠시 내려둘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리시타는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난감했다.

 

 

 

‘뒤로 돌아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하지만 티이를 안고 싸우기도 힘들고……. 어쩐다, 끙…….’

 

 

 

 고민하고 있는 지금도 놀 워리어는 점점 다가온다. 어차피 놈들에게 당하건, 이곳에서 떨어지건 목숨

 

을 잃기는 마찬가지. 거기까지 생각한 리시타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도박을 하기로 했다.

 

 

 

“자, 와라……. 어차피 네놈들이 죽건 내가 죽건 누군가는 죽어야 끝난다고. 와라!!”

 

 

 

 갑자기 전의를 불태우며 외치는 리시타의 기세에 눌렸는지 선두의 놀 워리어는 약간 주춤했다. 하지

 

만 놀 종족 역시 기본적으로 인간과 비슷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금세 자신들의 유리함을 깨닫고 메이스를


치켜들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리시타가 메이스의 사정거리 안에 가까워지자 놀 워리어

 

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메이스를 치켜들 준비를 했다.

 

 

 

퍼억!

 

 

 

 놀 워리어는 아직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반드시 자신들이 유리했다. 그런 상

 

황이었는데, 자신이 치켜들고 있던 투박한 메이스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 저 아래로 낙하하고 있었

 

다.

 

 

 

“자, 네 놈의 무기를 따라가라!!”

 

 

 

 리시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기를 놓친 놀 워리어가 당황한 사이에 달려들어 녀석의 발목을 힘

 

껏 걷어찼다. 중심을 잃은 놀 워리어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추락해버렸다. 난간에 떨어진 건물 잔해

 

를 발로 차 놀 워리어의 손을 맞춘다. 리시타도 짧은 시간동안 과연 이 도박이 성공할지 굉장히 많은 고

 

민을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기 때문에 곧 고민을 접고 실행에 옮겼고, 성공했다. 그동안의 수많은 전투

 

를 헤쳐나간 리시타의 임기응변과 엄청난 운의 합작이었다.

 

 

 남은 한 마리의 놀 워리어가 리시타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놀 워리어가 메이스

 

를 치켜들고 휘두르기 전에 리시타는 티이를 안은 채로 녀석의 가슴팍으로 달려들어 어깨로 세게 들이

 

받았다. 뒤로 쓰러진 놀 워리어를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밀어버려 떨어뜨리는 순간, 리시타 역시 순간적

 

으로 몸의 중심을 잃고 난간 밖으로 몸이 기울었다.

 

 

 

“우와아아앗!!!”

 

 

 

 리시타는 서둘러 왼 손으로 티이의 팔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난간을 가까스로 붙잡아 대롱대롱 매

 

달렸다.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한숨을 쉬었지만, 이 상태에서 어떻게 올라갈지 방법을 모색해

 

야 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는 기껏해야 매달려 있는 것이 최선이었으니

 

까.

 

 

 

‘이거 산 넘어 산이구만…….’

 

 

“음……앗, 꺄앗!!”

 

 

 

 그 때, 떨어지는 것을 붙잡았을 때의 충격 때문인지 티이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 보니 발 밑에 까마

 

득한 광경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짧게 비명을 지르다가, 금방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군, 무녀 아가씨. 그럼, 올라갈 준비 하라고. 올려줄테니까!!”

 

 

“아, 네!”

 

 

 

 리시타는 오른팔에 힘을 끌어올려 간신히 자신의 오른팔 전부를 난간에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난간에 오른팔을 지지한 채로 왼 팔을 어깨까지 올렸고, 다행히 티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난간에 매달렸다. 일단은 살아남긴 했구나, 하고 리시타는 안도했다. 이 짧은 순간에 5년은 더 늙

 

은 기분이었다.

 

 

 

“하아……, 무녀 아가씨. 이 동네는 생활이 원래 이렇게 긴박감 넘치나? 심심할 일은 없겠어.”

 

 

“아, 아니에요! ……아마도요.”

 

 

 

 얼굴을 붉게 물들인 티이를 난간에서 올려주고 리시타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

 

직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거대 거미는 여전히 종탑 위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리시타는 다

 

시 티이를 등 뒤로 보낸 후, 벽 끝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살짝 움직여 살펴보았다. 다행히 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통로 끝에는 종탑 꼭대기로 가는 나무 계단이 보였다.

 

 

 

“가자고, 무녀 아가씨. 수호신인지 뭐시기인지를 만나야지.”

 

 

 

 리시타와 티이는 계단을 올라 드디어 종탑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거대한 흰 거미는 꼭대기에서 난동

 

을 부리다가, 새로운 상대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도약하여 티이와 리시타를 향해 거대한 가시가 돋아있

 

는 앞발을 치켜들었다.

 

 

 

“이 자식이!! ……어?”

 

 

 

 리시타는 듀얼 소드를 교차시켜 거미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거미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티이를 본 거미는 공격을 하지 않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거미의 울음소리는 왠지 모르게 구슬프

 

게 들렸다. 티이는 그런 거미의 앞발을 어루만져주며 아이를 달래듯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 …많이 놀랐지? 이제 안심해도 돼, 아무 일도 없을거야…….”

 

 

 

 티이의 어루만짐에 거대한 거미는 언제 난동을 부렸냐는듯 얌전하게 변했다. 리시타는 그 장면을 보며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저게 무녀의 능력……? 참, 대단하군. 저런 괴물을 아이 다루듯 달래고 있으니.’

 

 

 

 티이는 계속해서 거미를 달래며 말을 걸었다.

 

 

 

“왜 그랬니, 말해봐. 왜 그렇게 놀랐니? …누가 그랬다고? 누가?”

 

 

 

 티이는 잘 듣지 못했다는 듯 거미에게 얼굴을 대며 귀를 기울였다. 순간, 리시타는 거미의 이마 쪽에서

 

붉은 문양이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양은 아까 1층에서 아이단이 발견했던 마족의 징표와 흡사했

 

다. 문양이 빛나는 동시에, 거대 거미는 다시 울부짖으며 앞발을 티이를 향해 휘둘렀다.

 

 

 

“위험해!!”

 

 

 

 리시타는 재빨리 몸을 던져 티이를 잡아챘고, 간발의 차로 거미의 앞발톱은 티이가 서있던 곳을 내리

 

찍었다. 티이를 보호하느라 등부터 떨어졌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리시타는 티이를 옆의 공간으

 

로 밀쳐내고 듀얼 소드를 다잡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거대 거미는 다시 눈앞의 인간들에게 적대감을 발

 

산했다.

 

 

 

“이거 아무래도 대화로 푸는 시간은 끝인 것 같은데? 여기서부턴 내 차례야.”

 

 

 

 리시타는 목에 걸린 호각을 다시 확인했다. 자신이 신호하면 밑에서 발리스타의 지원 사격이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잘못했다간 자신과 티이 역시 발리스타의 화살에 맞을 위험도 있었다. 어떻게든 거대 

 

거미를 사격지점으로 몰아넣을 필요가 있다. 리시타는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거대 거미에게 달려들었

 

다.

 

 

 거미는 큰 앞발톱을 마구 휘둘렀지만, 상태가 불안정한지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아까 티이

 

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시타는 놀 아처의 화살을 피한, 미끄러지는 듯

 

한 움직임으로 거미의 공격을 피해가며 거미의 배를 올려베었다. 껍질이 워낙 단단해 한 번에 푹 하고 

 

베이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늘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공격 수단을 없애기보다는 몸을 둔하게 만들어 몰아넣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에는 몸통을 공략하는 것

 

이 최선이지!’

 

 

 

 리시타는 끈질기게 베었던 곳을 베고, 베고, 또 베었다. 거미는 앞발을 휘두르고 옆으로 몸 전체를 돌

 

려치며, 때로는 그 거대한 송곳니로 리시타를 물어뜯고자 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

 

에 계속해서 난동을 부리느라 소모된 체력, 리시타의 공격에 늘어만 가는 상처 때문에 움직임이 점점 

 

둔해져 이리저리 날렵하게 회피하는 리시타를 맞힐 수 없었다.

 

 

 리시타 역시 완전히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앞서 놀들을 상대했던 것들도 있지만, 정신을 잃은 티이

 

를 안아들고 탑을 올랐으며 결정적으로 난간에서 매달려 있을 때 체력 소모가 극에 달한 것이다. 겉으

 

로는 아직 여유인 마냥 거미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지만, 잠시라도 멈췄다간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움

 

직일 수조차 없을거라고 리시타는 확신했다. 리시타는 남은 힘을 짜내 거대 거미의 측면으로 달려들었

 

다.

 

 

 

“우오오오아아아아아!!!”

 

 

 

 거미는 거의 그로기 상태. 리시타는 재빨리 측면으로 달려들어 자신이 냈던 상처에 깊숙이 두 자루의 

 

칼을 꽂아 넣었다. 거미는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앞발로 리시타를 강타했고, 리시타는 사정없이 내

 

팽개쳐졌다. 하지만 워낙 공격력이 떨어져있던 탓에 타박상과 약간의 상처를 제외하면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리시타를 튕겨낸 거대 거미는 그 자리에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댔다. 지금이 바로 기회다, 리

 

시타는 목의 호각을 입에 물고 힘차게 불었다.

 

 

삐이이이익----!!!

 

 

 순간, 종탑 아래에서 여러 발의 발리스타가 날아왔고, 세 네 발 가량이 거대 거미의 몸을 꿰뚫었다. 리

 

시타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음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그 참상을 지켜본 티이는 그럴 수가 없었

 

다.

 

 

 

“안돼에에에에!!!!”

 

 

 

 티이는 거미가 발리스타에 명중되는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고, 거대 거미는 마지막 힘을 짜내 종탑 

 

위로 기어 올라가려 했으나 그 순간 거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종탑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거미

 

는 그대로 뒤집어진 채로 추락했고, 그 거미의 위로 거대한 종이 떨어지고 있었다. 리시타는 일어나 고

 

개를 돌린 채로 티이의 몸을 돌려 눈을 가렸고, 종은 정확히 거미의 배를 납작하게 터뜨리며 울려퍼졌

 

다. 거미는 고통스러워하며 발악했지만 생명이 점점 다해가는지 움직임이 점점 멈추고 있었다.

 

 

 

“제발…, 아프지? 조금만 참아…, 내가 꺼내줄게…….”

 

 

 

 티이는 거미에게 달려가 거대한 종을 밀어내려 했지만, 집채만한 거미와 맞먹는 크기의 종이다. 성인 

 

남성 열댓명은 있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을만한 크기. 가녀린 무녀 한 명이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

 

다.

 

 

 

“제발……!!”

 

 

 

 티이는 계속해서 밀어냈지만, 종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렇게 몇 번을 밀어내다가 힘이 다한 듯 종을 주

 

먹으로 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거미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티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

 

는 자신의 무력함에 눈물을 흘렸다. 티이는 거미에게 다가가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미안해, 정말…미안해…….”

 

 

 

 티이는 거미를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고, 곧 거미의 움직임은 완전히 정지했다. 

 

리시타는 그런 티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거미를 죽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티이가 목숨을 걸고 거미를 살리려 한 것은 아마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리시타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입에 발린 말 따위로 티이를 위

 

로할 수 없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리시타는 거미를 보내주는 티이를 그저 묵묵하게 지켜볼 뿐이었

 

다.

 

 

 

 그 시각, 용병단의 시야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종탑을 지켜보는 그림자가 있었다. 흰 로브를 뒤집어썼

 

지만 로브는 그의 뱀과도 같이 생긴 얼굴을 가리지 못했으며, 로브의 끝자락 밑으로 마찬가지로 뱀과 

 

같은 꼬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뱀의 몸을 가지고 직립 보행을 하는 종족, 아마도 그는 리자드맨

 

(Lizardman) 종족일 것이다. 로브 속에서는 그의 노란 안광이 번쩍였고, 손에는 해골 장식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종탑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는 거미의 생명이 다하는 것을 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