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멈췄다.


  시간을 잃어버린 공간은 제멋대로 흐른다. 어떨 때는 멀쩡하게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멈춰버리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춰버린 곳도 존재한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감히 추측해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생물들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이곳의 시간은 멈춰있었고, 그때부터 공간은 제멋대로 흐르고 있었다고. 


  하염없이 그저 흐르기만을 반복하는 세계. 그 중심에는 한 사내가 서 있다. 시간이 멈춘 세계에 흩뿌려지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출처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빛 속에서 어두운 녹색으로 빛을 발하는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사내의 머리카락은 그의 신장만큼이나 길었다. 아주아주 오랜 시간,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을 묵묵히 지켜만 보았던 듯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앞머리와 옆머리, 뒷머리 할 것 없이 하나같이 길게 늘어져 시간이 멈춘 세계에 뿌리를 내린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인다. 사내의 머리카락이 움직였다. 사실 그의 몸이 움직인 것이지만, 몸을 가린 머리카락 때문에 몸이 움직이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의자가 있었다. 아니, 옥좌라고 칭해야 될 것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이곳에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사내가 휴식을 취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옥좌는 처음부터 사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장소를 창조했던 자가 남긴 부수적인 산물. 사내는 옥좌의 등받이를 쓰다듬었다.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함께해야한다. 사내는 그 사실이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곧 해답을 찾았다.

  웃는 것도 미소를 짓는 것도 까먹었다. 웃으려고 해도 웃을 수가 없다. 심지어 화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사내는 뒤늦게 깨달았다. 감정을 유실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 풍부하던 감정의 태반을 유실하고, 사내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건 한없는 그리움과 냉철한 이성뿐이다. 사내는 옥좌에 앉았다.

  가슴 깊숙이 박힌 그리움의 대상은 언제나 그의 가슴 속에 존재한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보고 싶다. 그러면 이 가슴속에 가득 응어리 진 한이 풀리지 않을까, 언제나 생각해본다. 

  사내는 옥좌 등받이에 정수리를 갖다 붙였다. 시원하다거나 따뜻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이곳은 시간이 멈춰 공간만이 하염없이 흐르는 곳이다. 그러한 감각이 완성되기도 전에 만들어진 신의 안식처. 사내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그의 시선을 붙잡는다. 사내는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리춤에 동여매었던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양족 허리에 하나씩 붙들려있던 칼자루를 잡아당긴다. 칼자루는 아주 예리한 검광을 흩뿌리는 칼날을 같이 잡아 끌었다. 두 자루의 칼이 사내의 손에 쥐어져 모습을 드러낸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날카롭고 예리함을 자랑하는 칼이다. 하지만 두 칼은 하나같이 허리가 잘려있었다. 마치 무척이나 무겁지만, 사내의 칼만큼 날카로운 것이 잘라버린 것 같다. 사내는 칼을 쥔 두 손에 힘을 뺐다. 

  굉장히 넓은 장소가 보인다. 원래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넓고 광대한 곳이었을 그곳에는, 지금 시체가 한가득 모여 산을 이루고 있다. 시체는 하나같이 방금 죽은 것처럼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만든 산의 중심부에 꽂혀있는 물건이 사내의 시선을 붙잡는다. 

  커다란 대검이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칼 한 자루. 저곳에 쌓인 수많은 시체들 중 누군가가 사용했을 무기.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사내는 저 대검의 주인을 기억한다. ‘이름을 함께 나누었던 그’와 견주어도 될 만큼,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로 막강했던 사내였다.

  옥좌를 뒤로하고 사내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옥좌의 뒤편. 서로 교차하며 옥좌의 뒤에 박혀있는 두 개의 칼. 하나는 불에 그을린 숯덩이처럼 새까만 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 하늘에 비추어도 있는 듯 없는 듯 분간하기 어려운 투명한 칼날과 순백색의 칼자루를 갖고 있다. 두 칼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길은 따스하다. 마치 저 두 자루의 칼을 사용하던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기라도 하는 듯. 

  사내가 등을 돌렸다. 그는 천천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밟고 시체들이 쌓여 있는 장소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마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보여주는 광채 같다. 사내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들을 향해 허리가 잘려나간 검을 휘둘렀다. 

  부러진 칼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하지만 ‘문’을 열고 찾아온 자들은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피는 튀지 않는다.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사내는 시체의 산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단칼에 죽이지 못한 자를 향해 다가갔다. 단칼에 죽이지 못한 자는 정말 오랜만이다. 그렇지만 흥미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자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부러진 칼을 들었다. 

  죽지 않은 자는 두려움 보다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다. 사내는 그를 마주보았다. 사내는 죽지 않은 자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칼을 들었다. 칼날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죽지 않은 자가 말했다.

  “너는……, 누구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부러진 칼은 거침없이 찾아온 자를 향해 휘둘러졌다. 여전히 닿지 않았다. 하지만 휘둘러진 궤도에 맞게 정확하게 목이 잘렸다.

  부러진 칼이 칼집으로 되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