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브릴은 홀로 침대위에 엎드려 있었다.

방 안은 해가 져 어둑어둑해진지 오래였지만, 

아브릴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게 식은 방 한구석의 벽난로 불씨만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또 떨어졌다.

오직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번이 벌써 세번째다.

시험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완벽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작년에도, 그 전 년에도 아브릴의 시험은 언제나 완벽 그 자체였다.

발걸음은 얼음위를 미끄러지듯 경쾌하고 빠르게 내달렸고 양 어깨는 날개가 돋친듯 가벼웠다.

검을 쥔 손은 마치 모리안 여신이 이끌어주듯, 날카롭고 힘있게 뻗어나갔다.

땀에 젖어 흩날리는 금발에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험장의 그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음을 아브릴 자신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아브릴의 입단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단장은 아브릴의 시험장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브릴의 검끝에서 멀리 떨어져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브릴은 단장이,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누구보다도 아브릴의 검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봐 왔던 아버지였다.

아브릴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것이 바로 단장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왕실 대장장이에게 손수 부탁해 아브릴의 검을 벼려 주었고, 그녀의 몸이 커감에 따라 새 갑옷을 맞추어 주었다.

어린 아브릴이 어머니처럼 훌륭한 여전사가 될꺼라 말할때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그리고 밤이면 침대에 누워 기사단의 옛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선대 왕을 도와 이멘 마하를 세운 막쿨 가의 오랜 전승들을 이야기 할때면 아버지의 눈은 자부심으로 가득 들어차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는 변하였다.




"넌 아직 어려."

단장은 고기를 썰어 입가로 가져가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려는 딸을 무시하며 식사에 집중한다.

하지만 아브릴은 멈출 생각이 없다.

부릅 뜬 눈은 결코 쉽사리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오렉도, 카이르브레도 작년에 합격했어요.

심지어 둘은 저보다 한참 실력이 떨어진다구요."

"여자가 기사단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넌 기사단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있어.

검술만으로 해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피오나 에이린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게 아냐."

"어머니는요?"

아브릴의 말에 나이프를 놀리던 단장의 손이 떨렸다.

작고 반짝이는 식기보다는 창과 방패가 어울리는 크고 두꺼운 손.

손 곳곳에 남은 크고 작은 흉터 자국들이 여태 숫하게 헤쳐왔을 전장의 수를 가늠하게 해준다.

단장은 고개를 들어 딸을 바라본다.

깊게 파인 회색 눈동자가 떨린다.

"네 엄마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지 않았느냐."

"왜죠? 어머니는 되고 왜 저는 안된다는거죠?"

"네 엄마는 특별했다."

"전 엄마의 딸이에요!"

기사단장은 애원하는 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차마 견딜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딸의 파란 눈동자는 죽은 제 어미의 것을 빼다 박은 듯 했다.

닮은게 어디 눈동자 뿐이랴.

눈부신 금발, 작지만 단단히 칼 손잡이를 쥔 손,

마치 춤을 추듯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까지.

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아내를 생각나게 했다.

딸의 모습에서 아내를 읽을때 마다 단장은 괴로웠다.

특히나 그 발놀림.

그건 따로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아내를 똑같이 따라하는 모습은 단장을 질리게 만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름답게 흩날리는 금발을 좇고 있자면 마치 아내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자랑스러운 피오나 에이린의 일원답게 누구보다도 용맹했고, 정의로웠으며 뛰어난 여전사였다.

그리고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었다.

단장은 잊고 있었다.

짧은 평화에 심취해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잊고 있었다.

피오나 에이린이라는 이름에는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아내가 죽은지 일주일 후, 단장은 딸의 검을 부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