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졌다. 리시타는 멍하게 반쯤 뜬 눈으로 몇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잠이 덜 깬 것이리라. 


머리를 긁적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급스럽진 않아도 충분히 편안하고 아늑한 침대. 깔끔한 커튼


과 방의 가구들. 리시타는 그 침대 위에서 지금 막 깬 것이다.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어제 몸을 험하게 굴린 탓에 굉장히 피로해져 있었나보다. 실제로, 콜헨으로 돌아온 후의 리시타의 기


억은 없었다. 아마 여행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르니 전사 실격이라며 


거울을 상대로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고, 문 밖으로 나갔다.



“아, 일어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리시타를 반겨준 것은 어제의 그 무녀. 어제와는 달리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평상복마저도 코르


셋이 복부를 조여주는 탓에 지나치게 가슴이 강조되어 있었다. 리시타는 사실 무녀복도 단순히 저 무녀


의 취향이 아닐까 하는, 법황청에서 들었으면 모독죄로 끌려갈 법한 생각을 하며 인사에 응답했다.



“아, 좋은 아침. 침대가 너무 편안해서 정신없이 자버렸군. 그런데 무녀씨는 아침부터 이 곳에 웬일일


까?”


“티이는 이 여관에서 함께 살고 있답니다, 허허.”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느릿한 동작으로 창문을 열어 집 안을 환기시키는 안경을 걸친 노인. 단


정한 복장에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굉장히 포근해보이는 인상을 주는 노인이었다.



“티이?”


“그러고 보니 어제는 정신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전 법황청에서 파견된 무녀, 티이라고 


해요. 그래봐야 특별한 능력도 없지만요. 어제 용병님 덕분에 무사히 종탑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리고 저 쪽은 이 여관의 주인인 에른와스 아저씨에요.”



 에른와스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목례로 인사했다.



“신경쓰지 마.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 오히려…….”


“아, 벤샤르트 일은 신경쓰지 마세요. 제 고집이었으니까요.”


“벤샤르트? 어제의 거미 말인가?”


“네, 그 아이의 이름이에요. 참, 전 이제부터 나가봐야 해요. 제례도 있고, 용병단과 신전에도 가봐야 


하거든요. 어제 일 때문에 마을 분들도 많이 놀라셨을테니, 저라도 힘이 되어 드려야죠. 그래야 이 마을


의 수호신이었던 그 아이도 편히 쉴 수 있을 거에요.”



 리시타는 이 무녀가 정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육체의 강함은 단련에 따라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지만, 마음의 강함은 다르다. 자신도 충분히 힘들텐데 타인을 먼저 생각하며 행동하는 모습은 충분


히 강해보였다.



‘그런 점도 무녀로서의 소양이 있는건가, 훗.’


“맞다. 생각해보니 계속 용병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네요.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리시타. 편하게 리시타라고 불러주면 돼.”


“리시타…, 후후. 좋은 이름이네요. 그럼 나중에 봐요. 참, 리시타. 마렉이 당신을 찾는다고 들었어요.”


“그래? 그럼 가봐야겠군. 있다 보자고, 무녀씨. 아니, 티이.”



 인사로 배웅하는 에른와스에게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 리시타는 용병단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비


가 쏟아질 것 같았던 어제와는 달리 제법 화창하고 기분이 좋은 날씨였다. 일이 없었다면 나들이라도 


가고 싶을 정도. 리시타는 저도 모르게 가벼워진 발걸음을 용병단 쪽으로 옮겼다.


 용병단 앞까지 오자, 리시타는 의문이 들었다.



‘원래 용병단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곳이었나……?’



 문을 열고 들어간 리시타를 반겨준 것은 장식이 달린 플레이트를 입은 사람들과 용병단원들이 대치하


며 만들어내는 긴장감이었다. 그 중 긴장감을 자아내는 주 원인은 건물 안에서도 여전히 헬름을 뒤집어


쓰고 있는 마렉, 그리고 그와 대치하고 있는 베레모를 쓴 금발의 여성이었다. 좀 더 여자다운 옷을 입었


다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겠군 하고 리시타는 생각했다.



“이미 두 번이나 말했다. 이번 사건은 왕국 기사단에서 조사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정작 지원을 요청했을 땐 코웃음치면서 팔짱끼고 구경만 하더니, 괴물을 처치하니 이제야 나타나 조


사권을 요구한단 말입니까? 염치도 없습니까?”



 그야말로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불꽃 튀기는 싸움이었다. 리더로 보이는 여기사와 마렉은 그 후로


도 계속해서 같은 문제를 두고 다투었고, 도저히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리시타는 슬슬 지루해지


기 시작했다. 그 때, 리시타의 등을 콕 찌르는 손가락이 있었다. 돌아보자 그 곳에는 붉은 머리의 용병


단 튜닉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너구나? 어제의 그 신입. 으음…, 너한테 교육을 해주긴 해야 하는데, 여긴 너무 시끄러우니까 장소를 


옮길까?”



 그러더니 리시타의 답은 듣지도 않고 손을 잡고서는 용병단 건물 구석의 빈 방으로 끌고 갔다. 한결 조


용한 분위기를 얻은 여자 용병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제 좀 조용하네. 분위기가 많이 안좋지? 실은 마렉이 왕국 기사단을 좀 싫어해. 어…, 좀이 아


니려나?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왕국 기사단이 너무했지. 어제 일 때문에 아


이단 대장님이 부상까지 당했는데 말야!”



 용병 여자는 살짝 흥분한 채로 말했다. 본인도 곧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난 케아라라고 해. 요즘은 신입 교육을 맡고 있지! 어제 나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 후방 발리스타 담당


이었긴 했지만 말야. 그런고로 잘 부탁해, 영웅씨!”



 케아라는 악수를 청했다. 리시타는 영웅이라는 말에 싫지는 않지만 어쨌든 묘한 기분을 받으며 손을 


잡으려고 했다.



“정말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난데없는 제 3자의 목소리에 리시타는 깜짝 놀라며 움찔했다.



‘분명 이 방에 들어올 때는 인기척이 없었는데…?’



 시선을 돌린 리시타의 눈에 아직은 앳되어보이는 얼굴을 가진 소년이 있었다. 아까의 여기사와 비슷


한 옷을 입었지만, 장식이 없는 것을 보니 그다지 높은 직급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리시타의 


시선을 눈치챈 케아라가 그 소년을 소개했다.



“아, 이쪽은 앨리. 왕국 기사단을 따라왔다고 했나?”


“제 이름은 앨리스에요! 그리고 기사단학교 사관 생도장으로 학교를 대표해서 온거에요!”


“따라온 거 맞잖아. 앨리는 애칭이라구.”


“음, 따라온 거 맞네.”



 리시타마저 케아라의 의견에 동조하자 앨리스는 “너무해요….”라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케아라는 


그런 앨리스의 등을 장난스레 팡팡 두드렸다.



“에이, 괜찮아. 기운 내, 기운 내! 자, 리시타. 어제의 영웅도 용병단에선 신입이니 교육을 받아야겠지


~? 우후후….”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 무서운 일이라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케아라를 보


고 리시타는 살짝 불안해졌다.



‘뭐, 뭐지? 교육? 이거, 교육을 빙자한 얼차려인가? 100명 상대로 겨루기 연습이라던가 그런 걸 하는 건


가?’



 표정에 불안함이 잔뜩한 리시타를 보고 케아라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에 손을 짚고 말했


다.



“아하하하~! 어제의 영웅씨도 무서운 건 있나보구나? 하핫, 걱정하지 마. 별 어려운 건 없을테니까. 그


보다 아래 상황이 저래서야 아무래도 정식 교육은 힘들 것 같거든. 그래서말인데…….”



 케아라는 방 한 쪽에 있는 지도를 펼치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표시된 콜헨에서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아보였다.



“여기, 북쪽 폐허에 용병단 훈련장이 있거든. 한 번 둘러보고 오도록 해. 교육은 그걸로 대신할게. 선착


장에서 배를 타고 가면 돼. 다녀올 때 쯤이면 아래도 조용해져 있을거야. 그럼 잘 다녀와, 영웅씨!”


“다녀오세요!”



 손을 흔드는 케아라와 앨리스를 보던 리시타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자꾸 영웅이라 하지 마세요. 리시탑니다, 리시타.”



 선착장에서 배를 탄 리시타는 사공에게 도착지를 말하고 드넓게 펼쳐진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그나흐 


강은 강이라 하기에는 정말 넓어서, 이게 정말 강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군데군데 낚싯배가 


떠있는, 콜헨과 같이 정말 조용하고 평화로운 강이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경치를 잠시 생각 없이 바라


보니 어느 새 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 감사합니다. 뱃삯은 얼마 쯤…….”


“하하, 뱃삯은 필요 없습니다. 용병단 분들은 무료로 태워드리고 있지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고 배를 고정시키는 사공을 향해 리시타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훈련장


으로 향했다. 훈련장 안은 정말 평범했다. 검 휘두르기 연습을 하기 위한 허수아비들이 세워져 있었고, 


투창 연습을 위한 표적도 있었다. 리시타는 그런 것보다 주위 환경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북쪽 폐허라고 했지…….”



 과거 대단한 문명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마치 도시나 신전 등에서나 볼법한 기둥 양식이었다. 지금은 


곳곳이 무너지고 금이 가 있었지만, 아마 과거에는 꽤나 멋진 건물이었을 것 같았다. 리시타는 빈 공간


에서 몸이라도 풀 겸 듀얼 소드를 몇 번 휘두르다가 검을 도로 집어넣고는 배로 돌아갔다.



“지금쯤이면 다툼이 끝나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