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가게 한구석에서 중년의 사내는 천천히 잔을 움켜쥐었다. 잔에 담긴 물을 마실까 말까 고민하던 사내는 잔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물을 마시지 않기로 한 듯하다. 중년의 사내는 자리 잡고 있던 구석진 곳에서 보이는 멀리 있는 작은 창문을 주시했다.
  가게에는 그 흔한 시계 하나 찾아볼 수 없어 시간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창밖을 쳐다보던 사내는 단정하게 자른 갈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약속 시간은 두 시. 태양의 위치로 보건데, 두 시는 넘었군.’
  중년의 사내는 왜 이런 시계 하나 없는 가게에서 만남을 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던 시간이 있어 알 수 있다. 오만하지 않은 기사는 드물다.
  약속 시간을 넘어서도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오기로 예정되어있던 자도 별반 다르지 않은 자가 분명하다. 중년의 사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기사들의 의뢰가 아니더라도 돈을 벌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오만한 자들은 텅 빈 가게를 보며 분노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아쉬울 것 하나 없다. 오히려 그들과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뒤로 밀었던 의자를 탁자에 붙였다. 사내는 천천히 계산대로 향했다.
  음식을 주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낼 돈도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계산대 위에 은편이 든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가게 주인은 사내의 일행이 제법 대규모 인원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정도 돈을 줄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중년의 사내는 주문하지 않았다. 사내는 은편 주머니에서 은편 세 닢을 떨어뜨린 뒤 말없이 등을 돌렸다. 어리둥절해하던 주인은 별말 없이 은편을 주웠다.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 한 잔과 은편 세 닢. 앞으로 며칠 정도는 손님이 없어도 된다. 물론 지금껏 그래왔다. 손님이 없는 건 며칠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주인은 그렇게까지 기뻐하지는 않았다. 중년의 사내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밖으로 나가려던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단순히 태양빛이 눈을 아프게 해서는 아니다.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은색의 플레이트 갑주를 걸친 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서 있던 자가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고 있다. 사내는 병사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스무 명. 많이도 달고 왔군.’
  그러고는 눈앞의 사내에게 시선을 옮겼다. 밝은 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사내다. 생김새로 보아 20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 사내가 걸친 플레이트 갑주의 우측 상단에 걸려있는 법황청의 문장은 그가 기사라는 걸 보여준다. 아마 갓 사관학교를 졸업한 신출내기일 것이다. 그 증거로 사내가 머리 위에 얹어 놓은 사관학교 졸업자들에게 배포하는 검은 베레모의 깃털이 새하얗다.
  중년의 사내는 기사의 눈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중년의 사내가 내려다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내심 고민하던 사내는 기왕 이렇게 된 것 계약은 성사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내가 문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칼브람 용병단장 아이단이라고 합니다.”
  아이단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기사는 듣는 둥 마는 둥 아이단이 비켜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아마 아이단을 비웃는 것이리라. 아이단은 그런 병사들을 무시하며 먼저 들어간 기사의 뒤를 좇았다.
  기사는 누추한 가게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기사가 되어 품격 있는 곳만을 돌아다니던 그에게는 격이 떨어지는 곳이 아닐 수 없었다. 기사가 아이단을 돌아보았다. 아이단은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지요.”
  “됐다. 이런 다 무너져가는 헛간 같은 곳에 앉느니 차라리 오거의 시체를 이부자리 삼아 드러눕는 게 낫겠다. 여긴……, 고블린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하나 없겠구나.”
  가게 주인은 뒤돌아 기사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주인의 모습에 아이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기사는 팔짱을 끼고 아이단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단은 눈앞의 기사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애송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만약 전장에서 정말 오거와 조우해보았다면 그들이 주는 압도적인 공포감을 가장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공포는 오거라는 종족의 이름을 왜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만드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가 전투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는 또 있다. 기사는 고블린이 어둠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다. 전장에 서는 고블린들은 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야전이 그들의 특기이기는 하지만 전사의 자긍심을 가진 자들이기에 그 누구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싸우는 걸 즐긴다. 아이단은 애송이 기사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아이단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는 미리 준비해주었던 계약서를 꺼내 기사에게 보여줬다. 아이단이 꺼낸 계약서를 유심히 지켜보던 기사가 말했다.
  “이건 뭐지?”
  “계약서입니다. 읽으신 뒤 서명해주시면…….”
  기사는 아이단이 들고 있던 계약서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계약서를 반으로 찢어버렸다. 아이단은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세월을 살며 겪어온 일들이 그의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다. 아이단은 계약서를 찢어버린 기사를 바라보았다. 구름한 점 없는 마른하늘처럼 청명하지만, 어두운 밤의 숲속처럼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고동색 눈동자가 기사의 푸른 눈을 마주한다. 기사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사관학교 교관이었던 ‘얼음마녀’에게 받았던 느낌과 비슷했다. 기사는 애써 당황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잡은 뒤 말을 이었다.
  “우린 왕국의 기사다. 이까짓 계약서 따위가 없다한들 약조를 지키지 않을 그런 소인배 무리들과 비교하지 마라. 너희 같은 돈으로 목숨을 파는 한량들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체면을 구기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행선지와 해야 할 일을 말씀해주십시오.”
  “너희들이 할 일은 가단하다. ‘콜헨’이라는 마을의 경비를 맡는 거지.”
  “콜헨……?”
  “아는 곳인가? 그럼 더 잘 됐군. 사례는 매달마다 처음 제시했던 만큼 보내줄 것이니, 그렇게 알고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해라. 이건 총사령관님의 지시다.”
  “……알겠습니다.”
  아이단은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고는 기사가 가게를 나가는 걸 기다렸다. 기사는 더 이상 이런 가게에 있지 못하겠다는 투로 혀를 찼다.
  기사가 가게를 나갔다. 도영해 있던 병사들은 기사를 따라 움직였다. 병사들의 움직임은 일사분란하다. 제법 훈련이 잘 된 자들인 듯하다. 전장에 나선다면 애송이 기사보다 훨씬 큰 전력이 될 터이다. 가게의 문이 닫혔다. 아이단은 닫힌 문을 열었다.
  태양빛이 따갑다. 그리고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
  ‘마을의 경비라……. 전쟁터 한복판에 던져진 적은 있어도 이런 일은 처음이군. 무얼 지키려 하느냐, 기사들아.’
  아이단은 쌀쌀한 날씨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이단은 다가오는 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었다. 태양빛이 눈부시다. 손으로 태양빛을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조금 끼어있지만 맑은 날씨다. 아이단은 가게를 나온 뒤 자신의 용병단이 기다리고 있던 공터로 걸어갔다.
  공터에 다다른 아이단은 멀리 보이는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멀리서도 용병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전장을 한두 번 겪어온 신출내기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이단이 고르고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전투의 전문가들이다. 아이단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무리지어 있던 용병들 중 한 명이 다가왔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사내였다. 아이단은 다가오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에게 말했다.
  “목적지는 콜헨이다.”
  “콜헨? 거긴 또 뭐하는 지옥입니까?”
  “평범한 마을이다. 우리의 이번 일은 공격이 아닌 방어다. 마을의 경비를 맡아달라고 했지만, 글쎄. 뭔가 다른 지킬 게 있는 것 같던데, 그건 우리가 알아내야겠지.”
  “경비는 자경대를 시키던가 지들이 하면 되지 왜 우리한테 그런 귀찮은 보모 같은 일을 시킨답니까?”
  사내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러자 아이단은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내는 아이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내답게 군살하나 없고 각이 진 턱을 매만지면 아이단이 말했다.
  “그거야 모르지. 일단 가보자, 솔라……, 아니, 셀브림. 가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겠죠.”
  셀브림은 속해있던 무리로 돌아갔다. 아이단의 지시를 무리의 용병들에게 전파한 셀브림은 다시 아이단에게 되돌아왔다. 아이단은 외투에 달려 있던 후드를 눌러썼다. 셀브림도 외투에 달려 있던 후드를 쓰며 말했다.
  “현재 인원은 102명입니다.”
  “일곱 명 부족하군. 내가 짐작하는 친구들이 맞나?”
  "예리하십니다.“
  “긴급 소집령에도 모이지 않은 걸 보면 안 봐도 뻔하지. 난 자네도 안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걔들이랑은 달리 일이 없어서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셀브림을 보며 아이단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그 친구들부터 모아야겠군.”
  “안 옵니다.”
  “없다고 해서 이번 일을 수행하지 못한 건 없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네요. 그럼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아이단은 셀브림이 콜헨까지의 길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퍽 놀랐다. 아이단의 반응을 지켜보던 셀브림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셀브림이 말했다.
  “거기가 마렉 고향이랍니다.”
  “아…….”
  아이단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셀브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이단의 곁을 떠났다. 아이단은 셀브림의 뒷모습을 보며 추억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이단은 셀브림이 언급한 마렉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졌던 아이였고, 어른이 된 지금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멋진 청년이 되었다. 어릴 때 꿈이었던 기사가 되는 대신 아이단의 용병단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를 처음 만난 건 십여 년 전, 얼음 딸기주로 유명한 작은 마을, 콜헨에서였다. 아이단은 그때 보았던 네 명의 어린 아이들을 떠올렸다.
  어딘지 아귀가 들어맞는 기분이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은 여신을 숭배하는 무녀가 되었고, 또 다른 한 명은 거친 삶을 사는 용병이,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듬직했던 한 소년은 지금 왕국 기사단의 총사령관이 되어 있다. 그리고 무녀가 된 아이와 총사령관이 된 아이의 관계는 네 명 중 특별했다. 아이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무녀의 호위라고 했으면 간단했을 것을……. 서툰 것은 여전하구나, 카단.’
  아이단은 용병들이 머물던 나무 그루터기 옆에 걸터앉았다. 그는 품속에서 일곱 장의 종이를 꺼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을 통제불능의 부하들을 불러들일 수도 있는 편지다.
  워낙 제멋대로의 인간들이라 긴급 소집령에도 응하지 않는다. 단장의 친필로 쓴 편지가 아니면 답장도 안 해줄 위인들이다.
  일곱 장의 편지. 하나 같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지는 같다. 아이단은 편지를 편지봉투에 집어넣고 용병들이 사용하던 모닥불로 다가갔다. 편지를 봉할 인주를 녹여 편지에 흘리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낀 인장으로 누른다. 인주는 빠른 속도로 굳는다. 귀찮은 작업을 손수 마친 아이단은 편지를 그루터기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콜헨으로 출발 준비를 마친 병사 한 명을 불렀다.
  “아실. 이 편지들을 나 대신 부쳐줄 수 있겠나?”
  아실은 그루터기 위해 놓여진 편지를 한번 훑어본 다음 아이단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십니까?”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갈 생각이네. 집결지에는 늦지 않게 도착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러죠. 어려운 일도 아니고.”
  아실은 셀브림을 불렀다. 셀브림은 아실을 슬쩍 돌아보더니 곧 말 한 필을 풀어주었다. 셀브림은 말의 볼기짝을 살짝 때렸다. 말은 아실과 아이단을 향해 달려갔다. 아실은 빠르게 다가온 말의 목에 팔을 두름과 동시에 뛰어올라 안장에 자리를 잡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뛰어난 승마 기술로 말에 올라타 고삐를 쥔 아실은 편지를 품속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먼저 출발해라, 셀브림.”
  “어.”
  “그럼 간다. 이랴!”
  간다는 한 마디와 함께 아실은 정말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이단은 아실이 떠나자마자 셀브림에게 지휘권을 양도한 뒤 콜헨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